요한계시록 09년 계12강(15:1-16:21) 자기 옷을 지키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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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요한 계시록 제 12 강
말씀 요한계시록 15:1 - 16:21
요절 요한계시록 16:15
자기 옷을 지키는 자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오늘 공부할 말씀은 대접 심판 시리즈입니다. 대접 심판은 마지막 재앙입니다. 이 재앙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끝나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 이상의 심판은 없을 것입니다. 만일 있다면 그것은 최후의 심판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대접 심판은 사탄과 적그리스도에게 집중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사탄의 권세를 무력화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심판 가운데서 신자들에게 권면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것은 신자들이 자기 옷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진노로 불탈 때에 곁에 있어서 휩쓸려 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면 마지막 대접 재앙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15장은 일곱 대접 심판의 서론에 해당이 됩니다. 사도 요한이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성도들은 적그리스도의 정치적 압력을 상징하는 ‘짐승’과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종교적 압력인 ‘그의 우상’, 그리고 경제적 압력을 상징하는 ‘그의 이름의 수’를 이겼습니다(2).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승리자들에게 거문고를 주십니다. 성도들은 승리의 노래를 부릅니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또 이 일 후에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 띠를 띠고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들에게 주니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습니다. 또 그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고 말씀했습니다. 대접에 있는 것을 쏟으면 남김없이 쏟아집니다. 대접에 담긴 것은 병에 담긴 것처럼 졸졸 부어지지 않고 다시 철회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부어집니다. 하나님의 진노도 이와 같이 무섭게 쏟아집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크기 때문에 심판이 진행되는 동안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습니다. 그러면 일곱 대접 재앙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첫째, 악하고 독한 종기 재앙. 첫째 천사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났습니다. 세계에 치료하기 어려운 피부병이 유행하고 그로 인해서 고통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공해로 인해서 오존층이 파괴됨으로 인해 호주 쪽에서는 피부암 발생이 3배나 많아졌다고 합니다. 자외선 때문에 50-60대에서나 주로 생기던 백내장이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빈번하게 발생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시력을 약화시키면 맹인이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악하고 독한 종기로 인해서 사람들의 피부가 썩어들어갑니다. 화려하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종기와 헌데로 인한 병은 치명적입니다.
둘째, 바다가 죽은 자의 피 같이 됨. “둘째 천사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 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3).” 바다는 푸르릅니다. 그러나 죽은 자의 피는 검붉습니다. 바다는 생명의 보고인데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습니다. 그 처참한 광경이란 눈뜨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서해 태안 앞바다에 원유가 유출되어 물고기들이 다 죽고 어부들은 생업을 잃어버려서 고생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생명의 바다가 죽음의 바다가 되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피바다’가 되는 날이 오면 인류는 끝장입니다.
셋째, 강과 물 근원이 피가 됨. 셋째 천사가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었습니다. 물은 생명의 원천입니다. 우리의 몸도 70%가 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마셔야 할 물이 피로 변해버리면 목마름으로 고통하다 죽게 됩니다. 물을 차지한 천사 즉 물을 관리하는 천사가 말합니다.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그들이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그들에게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5-6).” 또 요한이 들으니 제단이 말합니다.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7).” 하나님은 사탄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죽이고 피를 흘린 자들의 죄에 대해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로우십니다. 성도들을 괴롭히면 하나님께로부터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기도 합니다. 또 제단은 성전의 가장 핵심 부분인데 희생의 피를 뿌리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죄 없는 피를 흘린 그곳에서 악인들의 불의와 죄에 대한 심판이 정당하다고 소리를 지릅니다.
넷째,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움. 8,9절을 보십시오. “넷째 천사가 그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또 회개하지 아니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더라.” 태양열이 뜨거워져서 사람들이 그 열로 태움을 입을 정도라면 태양계에 큰 변화가 와야 합니다. 우리가 여름에 바닷가에 가서 해수욕을 하고 나면 태양빛에 몸을 그슬리게 됩니다. 그 후에 느끼는 따가움이란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태양열로 인한 심판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이 심판은 전 지구적인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양을 움직이셔서 인류를 심판하십니다. 태양이 뜨거워지면 그냥 불에 타 죽는 일밖에는 할 일이 없습니다. 에어콘도 이 심판 앞에서는 무용지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합니다. 그들은 갈 때까지 갑니다. ‘막가파’가 따로 없습니다. 여기서 볼 때 하나님의 심판의 목적이 회개에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회개할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목적은 그들을 벌하는데 있습니다. 이를 볼 때 회개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아픔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병이 중하게 되면 통증을 느끼지 못합니다.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러나 이들은 돌이킬 기회가 지나가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마음이 부드러울 때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지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지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데도 돌이킬 수 없습니다. 마음이 더욱 완악하게 되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비방하게 됩니다. 우리가 몸을 쓰지 않으면 점차 근육과 뼈가 굳어버리는 것처럼 회개도 그러합니다. 매일 매일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추어보고 회개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모든 것을 상대화시켜 버립니다. 결국 양심이 화인 맞은 사람과 같이 되어 버립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께서 얼마나 고통스러우실까를 생각하지도 못하고 마음으로 느끼지도 못하게 됩니다. 이런 영혼은 저주를 받은 상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9절 말씀을 볼 때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천국에서 잔치를 베푸십니다. 죄인이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킨다는 것은 본인과 공동체 그리고 하나님께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들의 회개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마음이 시원합니다. 관계가 회복됩니다. 회개할 때 구원의 감격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함으로 구원에 이르고 영적인 변화를 체험해야겠습니다.
다섯째, 짐승의 왕좌에 쏟아지는 심판. 10,11절을 보십시오. “또 다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짐승의 왕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아픈 것과 종기로 말미암아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첫째부터 넷째 대접 심판은 인, 나팔 심판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연계에 부어졌습니다. 그러나 다섯째 대접 심판은 짐승의 왕좌에 쏟아졌습니다. 이것은 대접 심판 시리즈만이 가지고 있는 심판의 강도를 드러내 줍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바로 악의 세력의 심장부를 강타하여 그 나라가 어두워지는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지금까지 일곱 심판의 경우가 모두 그러했지만 짐승의 보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더욱 종말적 특징을 갖습니다. 심판의 핵심 대상인 짐승을 향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시행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아픈 것과 종기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했습니다. 짐승의 표를 받고 짐승을 경배하는 자들의 패괴한 모습입니다. 회개하지 않는다는 말이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죄를 뉘우치지 않는 사람들은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사람들의 장래는 밝습니다. 고통을 통해서 성숙해 지고 하나님과 가까워진다면 축복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볼 때 다 그렇지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통을 받을수록 더 망가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차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짐승을 경배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고난을 받을수록 겸손해지고 성숙해집니다. 고난을 하나님의 훈련으로 받아들이고 인격이 성숙해 집니다. 히브리서 4:6절에 보면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징계를 통하여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기를 기도합니다.
여섯째, 유브라데 강이 말라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됨. 여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었습니다. 또 요한이 보니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왕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고 했습니다(13-14). 나팔 심판에서는 마병대가 전쟁을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니라 사탄 자신에게 속한 자들을 괴롭히기 위해서 동원됩니다. 그러나 여섯 번째 대접에서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군대와 최후의 일전을 위해 유브라데 강을 건넙니다. 17절을 보면 세 영이 히브리어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은다고 했습니다. 본문을 보면 이것이 3차 세계대전이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적인 전쟁입니다. 이 영적 전쟁은 사탄이 온 힘을 기울여 치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계 대전을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과의 영적 전쟁을 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영적 전쟁을 대비해야 합니까?
15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 경고는 그리스도의 갑작스런 오심과 그것에 대비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고합니다. 이렇게 유사한 경고가 3:17절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선포된 바 있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3:17).” 라오디게아 교회는 종말적 영적 전투에서 패배할 수 있는 위기를 맞고 있는 교회입니다.
도둑은 사람들이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그때 와서 훔쳐갑니다. 주님도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바로 그 순간에 오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깨어서 자기 옷을 지켜야 합니다. 옷은 뭐죠? 옷은 추위와 더위를 막아주고, 몸을 보호하는 기능을 합니다. 옷은 성별, 종교, 신분에 따라 구분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정체성을 상징합니다. 예전에는 옷이 귀했습니다. 가난한 시절에는 옷을 훔쳐가는 도둑들이 많았습니다. 여기서 ‘옷을 지킨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신분과 정체성을 지킨다는 말입니다. 사탄이 하나님과 교회를 공격하는 목적은 그 정체성을 뺏고자 함입니다. 사탄은 틈만 나면 교회를 공격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신분을 훔쳐가려고 합니다. 사탄을 섬기며 세상 사람처럼 살게 만듭니다. 신자로서 자기 신분을 잃어버리고 형식적인 선데이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자로 머물 것이 아니라 제자로, 그리스도의 군사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 성장에 네 단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일단계는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단계입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거듭나서 신자로서 알아야 할 기초적인 성경 공부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창세기, 요한복음, 로마서 등을 공부하고 신앙생활에 필요한 교육을 받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그리스도와 친밀함을 유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목자로 훈련을 받고 삶의 변화를 추구합니다. 네 번째 단계는 그리스도 중심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신앙 인격의 변화를 위해서 강제적인 훈련을 받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릅니다. 제자로서 재생산의 능력을 갖춘 평신도 지도자로 성장합니다. 이들은 부모의 심정으로 영혼들을 바라보고 섬깁니다.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라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 읽기와 새벽기도, 일용할 양식을 습관적으로 감당하는 가운데 자립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제자는 교리 교육을 통한 신앙의 뼈대가 구축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제자의 길을 가야 합니다. 제자는 신앙과 삶의 일치를 추구합니다. 제자는 교회에 대한 이해와 교회 속에서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고 헌신합니다. 제자는 교회를 섬기기 위해 필요한 구체적인 역량을 키우고 갖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나는 누구인가?” 생각해 보고 정체성을 분명히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905년 10월11일, 전북 김제 금산리 대지주 조덕삼의 사랑채에서 기독교 학습 세례 교인 3명이 탄생했습니다. 지주인 조덕삼과 그의 마부(馬夫)인 이자익이 함께 있었습니다. 양반 조덕삼은 천민 이자익이 천자문을 읽고 있는 것을 보고 천민이라도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가운데 함께 신앙생활을 하며 교회를 섬겼습니다. 교회에서 장로 장립 투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부 이자익이 선출되고 지주 조덕삼은 탈락했습니다. 교회가 술렁거렸습니다. 그때 조덕삼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일성을 토합니다. “세상에서는 양반이고 쌍놈일지 몰라도 교회에서는 이자익이 장로이고 난 평신도이다. 그러므로 난 장로를 섬기겠다.” 그 후 조덕삼은 이자익이 평양에서 신학 공부를 하도록 지원했습니다. 이자익이 목사가 되자 이번에는 다시 금산교회로 청빙하여 지극 정성으로 섬겼습니다. 그분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신분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말씀으로 자신을 보고 상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눈이 있으면 어떤 유혹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백성이요 캠퍼스 목자로서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세상에서 심판 받을 영혼들에게 말씀을 전하여 그 심판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돕는 일도 할 수 있습니다. 사명인으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양들을 희생적으로 섬기는 것은 말세에 우리 자신을 지키는 지름길입니다.
일곱째, 대접을 공중에 쏟음. 일곱째 천사가 그 대접을 공중에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이르되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공중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엡2:2절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사탄을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렇다면 공중이란 바로 사탄이 장악하고 있는 영역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중에 대접을 쏟았다는 것은 사탄에 대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다섯 번째 대접을 ‘짐승의 보좌’를 향해 쏟음으로써 사탄을 향한 직접적인 심판의 포문을 열었습니다. 이제는 사탄의 권세를 나타내는 공중을 향해 대접을 쏟음으로써 사탄의 권세를 무력화시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심판 시리즈가 목표하고 있는 가장 최종적인 단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끝났다. 완성 되었다”는 뜻으로서 하나님의 최종적이고 완전한 심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때 번개와 음성들과 우렛소리가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얼마나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온 이래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고 했습니다. 이로 인해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데 없게 되었습니다. 바벨론은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더니(14:8, 14:10) 이제는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잔을 마시게 됩니다. 바벨론은 로마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로마를 성도들을 핍박하는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로마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사탄의 수단이요 악의 총체이기 때문에 심판을 받습니다. 로마와 같은 수단은 역사적 정황에 따라서 바뀔 수 있습니다. 앞으로 그 나라가 미국이 될지, 유럽 연합이 될지, 중국이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바벨론의 멸망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의 궁극적인 멸망을 의미합니다. 결국 심판의 최종적인 목적은 사탄을 좇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탄 자신입니다. 또 무게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사람들이 그 우박의 재앙 때문에 하나님을 비방했습니다. 한 달란트는 60Kg인데 그런 우박을 맞고 살아남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재앙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대가임을 계속해서 강조합니다.
최후 심판은 반드시 있습니다. 이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 외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말세를 사는 성도로서,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굳게 지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의 옷을 입고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요한계시록 15:1 - 16:21
요절 요한계시록 16:15
자기 옷을 지키는 자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오늘 공부할 말씀은 대접 심판 시리즈입니다. 대접 심판은 마지막 재앙입니다. 이 재앙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끝나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 이상의 심판은 없을 것입니다. 만일 있다면 그것은 최후의 심판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대접 심판은 사탄과 적그리스도에게 집중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사탄의 권세를 무력화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심판 가운데서 신자들에게 권면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것은 신자들이 자기 옷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진노로 불탈 때에 곁에 있어서 휩쓸려 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면 마지막 대접 재앙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15장은 일곱 대접 심판의 서론에 해당이 됩니다. 사도 요한이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성도들은 적그리스도의 정치적 압력을 상징하는 ‘짐승’과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종교적 압력인 ‘그의 우상’, 그리고 경제적 압력을 상징하는 ‘그의 이름의 수’를 이겼습니다(2).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승리자들에게 거문고를 주십니다. 성도들은 승리의 노래를 부릅니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또 이 일 후에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 띠를 띠고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들에게 주니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습니다. 또 그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고 말씀했습니다. 대접에 있는 것을 쏟으면 남김없이 쏟아집니다. 대접에 담긴 것은 병에 담긴 것처럼 졸졸 부어지지 않고 다시 철회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부어집니다. 하나님의 진노도 이와 같이 무섭게 쏟아집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크기 때문에 심판이 진행되는 동안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습니다. 그러면 일곱 대접 재앙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첫째, 악하고 독한 종기 재앙. 첫째 천사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났습니다. 세계에 치료하기 어려운 피부병이 유행하고 그로 인해서 고통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공해로 인해서 오존층이 파괴됨으로 인해 호주 쪽에서는 피부암 발생이 3배나 많아졌다고 합니다. 자외선 때문에 50-60대에서나 주로 생기던 백내장이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빈번하게 발생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시력을 약화시키면 맹인이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악하고 독한 종기로 인해서 사람들의 피부가 썩어들어갑니다. 화려하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종기와 헌데로 인한 병은 치명적입니다.
둘째, 바다가 죽은 자의 피 같이 됨. “둘째 천사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 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3).” 바다는 푸르릅니다. 그러나 죽은 자의 피는 검붉습니다. 바다는 생명의 보고인데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습니다. 그 처참한 광경이란 눈뜨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서해 태안 앞바다에 원유가 유출되어 물고기들이 다 죽고 어부들은 생업을 잃어버려서 고생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생명의 바다가 죽음의 바다가 되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피바다’가 되는 날이 오면 인류는 끝장입니다.
셋째, 강과 물 근원이 피가 됨. 셋째 천사가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었습니다. 물은 생명의 원천입니다. 우리의 몸도 70%가 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마셔야 할 물이 피로 변해버리면 목마름으로 고통하다 죽게 됩니다. 물을 차지한 천사 즉 물을 관리하는 천사가 말합니다.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그들이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그들에게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5-6).” 또 요한이 들으니 제단이 말합니다.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7).” 하나님은 사탄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죽이고 피를 흘린 자들의 죄에 대해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로우십니다. 성도들을 괴롭히면 하나님께로부터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기도 합니다. 또 제단은 성전의 가장 핵심 부분인데 희생의 피를 뿌리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죄 없는 피를 흘린 그곳에서 악인들의 불의와 죄에 대한 심판이 정당하다고 소리를 지릅니다.
넷째,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움. 8,9절을 보십시오. “넷째 천사가 그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또 회개하지 아니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더라.” 태양열이 뜨거워져서 사람들이 그 열로 태움을 입을 정도라면 태양계에 큰 변화가 와야 합니다. 우리가 여름에 바닷가에 가서 해수욕을 하고 나면 태양빛에 몸을 그슬리게 됩니다. 그 후에 느끼는 따가움이란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태양열로 인한 심판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이 심판은 전 지구적인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양을 움직이셔서 인류를 심판하십니다. 태양이 뜨거워지면 그냥 불에 타 죽는 일밖에는 할 일이 없습니다. 에어콘도 이 심판 앞에서는 무용지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합니다. 그들은 갈 때까지 갑니다. ‘막가파’가 따로 없습니다. 여기서 볼 때 하나님의 심판의 목적이 회개에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회개할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목적은 그들을 벌하는데 있습니다. 이를 볼 때 회개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아픔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병이 중하게 되면 통증을 느끼지 못합니다.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러나 이들은 돌이킬 기회가 지나가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마음이 부드러울 때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지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지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데도 돌이킬 수 없습니다. 마음이 더욱 완악하게 되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비방하게 됩니다. 우리가 몸을 쓰지 않으면 점차 근육과 뼈가 굳어버리는 것처럼 회개도 그러합니다. 매일 매일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추어보고 회개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모든 것을 상대화시켜 버립니다. 결국 양심이 화인 맞은 사람과 같이 되어 버립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께서 얼마나 고통스러우실까를 생각하지도 못하고 마음으로 느끼지도 못하게 됩니다. 이런 영혼은 저주를 받은 상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9절 말씀을 볼 때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천국에서 잔치를 베푸십니다. 죄인이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킨다는 것은 본인과 공동체 그리고 하나님께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들의 회개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마음이 시원합니다. 관계가 회복됩니다. 회개할 때 구원의 감격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함으로 구원에 이르고 영적인 변화를 체험해야겠습니다.
다섯째, 짐승의 왕좌에 쏟아지는 심판. 10,11절을 보십시오. “또 다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짐승의 왕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아픈 것과 종기로 말미암아 하늘의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첫째부터 넷째 대접 심판은 인, 나팔 심판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연계에 부어졌습니다. 그러나 다섯째 대접 심판은 짐승의 왕좌에 쏟아졌습니다. 이것은 대접 심판 시리즈만이 가지고 있는 심판의 강도를 드러내 줍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바로 악의 세력의 심장부를 강타하여 그 나라가 어두워지는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지금까지 일곱 심판의 경우가 모두 그러했지만 짐승의 보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더욱 종말적 특징을 갖습니다. 심판의 핵심 대상인 짐승을 향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시행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아픈 것과 종기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비방하고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했습니다. 짐승의 표를 받고 짐승을 경배하는 자들의 패괴한 모습입니다. 회개하지 않는다는 말이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죄를 뉘우치지 않는 사람들은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사람들의 장래는 밝습니다. 고통을 통해서 성숙해 지고 하나님과 가까워진다면 축복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볼 때 다 그렇지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통을 받을수록 더 망가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차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짐승을 경배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고난을 받을수록 겸손해지고 성숙해집니다. 고난을 하나님의 훈련으로 받아들이고 인격이 성숙해 집니다. 히브리서 4:6절에 보면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징계를 통하여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기를 기도합니다.
여섯째, 유브라데 강이 말라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됨. 여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었습니다. 또 요한이 보니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그들은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왕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고 했습니다(13-14). 나팔 심판에서는 마병대가 전쟁을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니라 사탄 자신에게 속한 자들을 괴롭히기 위해서 동원됩니다. 그러나 여섯 번째 대접에서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군대와 최후의 일전을 위해 유브라데 강을 건넙니다. 17절을 보면 세 영이 히브리어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은다고 했습니다. 본문을 보면 이것이 3차 세계대전이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적인 전쟁입니다. 이 영적 전쟁은 사탄이 온 힘을 기울여 치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계 대전을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과의 영적 전쟁을 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영적 전쟁을 대비해야 합니까?
15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 경고는 그리스도의 갑작스런 오심과 그것에 대비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고합니다. 이렇게 유사한 경고가 3:17절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선포된 바 있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3:17).” 라오디게아 교회는 종말적 영적 전투에서 패배할 수 있는 위기를 맞고 있는 교회입니다.
도둑은 사람들이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그때 와서 훔쳐갑니다. 주님도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바로 그 순간에 오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깨어서 자기 옷을 지켜야 합니다. 옷은 뭐죠? 옷은 추위와 더위를 막아주고, 몸을 보호하는 기능을 합니다. 옷은 성별, 종교, 신분에 따라 구분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정체성을 상징합니다. 예전에는 옷이 귀했습니다. 가난한 시절에는 옷을 훔쳐가는 도둑들이 많았습니다. 여기서 ‘옷을 지킨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신분과 정체성을 지킨다는 말입니다. 사탄이 하나님과 교회를 공격하는 목적은 그 정체성을 뺏고자 함입니다. 사탄은 틈만 나면 교회를 공격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신분을 훔쳐가려고 합니다. 사탄을 섬기며 세상 사람처럼 살게 만듭니다. 신자로서 자기 신분을 잃어버리고 형식적인 선데이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자로 머물 것이 아니라 제자로, 그리스도의 군사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 성장에 네 단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일단계는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단계입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거듭나서 신자로서 알아야 할 기초적인 성경 공부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창세기, 요한복음, 로마서 등을 공부하고 신앙생활에 필요한 교육을 받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그리스도와 친밀함을 유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목자로 훈련을 받고 삶의 변화를 추구합니다. 네 번째 단계는 그리스도 중심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신앙 인격의 변화를 위해서 강제적인 훈련을 받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릅니다. 제자로서 재생산의 능력을 갖춘 평신도 지도자로 성장합니다. 이들은 부모의 심정으로 영혼들을 바라보고 섬깁니다.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라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 읽기와 새벽기도, 일용할 양식을 습관적으로 감당하는 가운데 자립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제자는 교리 교육을 통한 신앙의 뼈대가 구축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제자의 길을 가야 합니다. 제자는 신앙과 삶의 일치를 추구합니다. 제자는 교회에 대한 이해와 교회 속에서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고 헌신합니다. 제자는 교회를 섬기기 위해 필요한 구체적인 역량을 키우고 갖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나는 누구인가?” 생각해 보고 정체성을 분명히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905년 10월11일, 전북 김제 금산리 대지주 조덕삼의 사랑채에서 기독교 학습 세례 교인 3명이 탄생했습니다. 지주인 조덕삼과 그의 마부(馬夫)인 이자익이 함께 있었습니다. 양반 조덕삼은 천민 이자익이 천자문을 읽고 있는 것을 보고 천민이라도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가운데 함께 신앙생활을 하며 교회를 섬겼습니다. 교회에서 장로 장립 투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부 이자익이 선출되고 지주 조덕삼은 탈락했습니다. 교회가 술렁거렸습니다. 그때 조덕삼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일성을 토합니다. “세상에서는 양반이고 쌍놈일지 몰라도 교회에서는 이자익이 장로이고 난 평신도이다. 그러므로 난 장로를 섬기겠다.” 그 후 조덕삼은 이자익이 평양에서 신학 공부를 하도록 지원했습니다. 이자익이 목사가 되자 이번에는 다시 금산교회로 청빙하여 지극 정성으로 섬겼습니다. 그분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신분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말씀으로 자신을 보고 상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눈이 있으면 어떤 유혹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백성이요 캠퍼스 목자로서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세상에서 심판 받을 영혼들에게 말씀을 전하여 그 심판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돕는 일도 할 수 있습니다. 사명인으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양들을 희생적으로 섬기는 것은 말세에 우리 자신을 지키는 지름길입니다.
일곱째, 대접을 공중에 쏟음. 일곱째 천사가 그 대접을 공중에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이르되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공중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엡2:2절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사탄을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렇다면 공중이란 바로 사탄이 장악하고 있는 영역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중에 대접을 쏟았다는 것은 사탄에 대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다섯 번째 대접을 ‘짐승의 보좌’를 향해 쏟음으로써 사탄을 향한 직접적인 심판의 포문을 열었습니다. 이제는 사탄의 권세를 나타내는 공중을 향해 대접을 쏟음으로써 사탄의 권세를 무력화시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심판 시리즈가 목표하고 있는 가장 최종적인 단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끝났다. 완성 되었다”는 뜻으로서 하나님의 최종적이고 완전한 심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때 번개와 음성들과 우렛소리가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얼마나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온 이래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고 했습니다. 이로 인해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데 없게 되었습니다. 바벨론은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더니(14:8, 14:10) 이제는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잔을 마시게 됩니다. 바벨론은 로마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로마를 성도들을 핍박하는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로마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사탄의 수단이요 악의 총체이기 때문에 심판을 받습니다. 로마와 같은 수단은 역사적 정황에 따라서 바뀔 수 있습니다. 앞으로 그 나라가 미국이 될지, 유럽 연합이 될지, 중국이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바벨론의 멸망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의 궁극적인 멸망을 의미합니다. 결국 심판의 최종적인 목적은 사탄을 좇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탄 자신입니다. 또 무게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사람들이 그 우박의 재앙 때문에 하나님을 비방했습니다. 한 달란트는 60Kg인데 그런 우박을 맞고 살아남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재앙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대가임을 계속해서 강조합니다.
최후 심판은 반드시 있습니다. 이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 외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말세를 사는 성도로서,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굳게 지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의 옷을 입고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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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회 다운로드 | DATE : 2009-11-22 11:4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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