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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09년 계11강(13:1-14:20) 믿음을 지키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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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2,113회 작성일 09-11-08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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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요한계시록 제 11 강
말씀 요한계시록 13:1 - 14:20
요절 요한계시록 14:12

믿음을 지키는 자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과거에 우리 어머니들은 남편을 위해서 자식을 위해서 평생을 참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엄마들이 더 이상 참지 않습니다. 엄마들이 ‘뿔’이 났습니다. 사회적인 분위기는 “더 이상 참지 말라”고 합니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게 되면 그 특징 중 하나는 조급한 것입니다. 배신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합니다. 하지만 믿음의 세계에서는 참지 않고 ‘뿔’만 내면 열매가 없습니다. 참으면 하나님께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습니다. 고난을 받을 때는 참아야 합니다. 인내할 때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믿음을 지켜야 구원을 얻게 됩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어떻게 참아야 하는지 가르쳐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핍박과 비방을 참으십시오(13:1-10) :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왔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었습니다.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었습니다. 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습니다. 이 짐승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라고 말하면서 경배했습니다. 이 짐승은 당시 교회와 적대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로마 제국을 말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로마 황제, 특히 네로(AD 37-69) 혹은 도미티안(AD 81-96)을 지칭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도미티안 황제 통치 때에 유배를 당했습니다. 장차 전 세계를 통치할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입니다. 여기에 나온 적그리스도의 배후에는 사탄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권세를 그에게 준 것을 볼 때 알 수 있습니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모방했습니다. 적그리스도는 과장된 말 즉 교만한 말을 하고 신성 모독을 하고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았습니다. 이 기간은 예수님의 승천부터 재림 사이라고 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적그리스도는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합니다.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그는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할 것입니다. 적그리스도는 하나님과 교회를 비방합니다. 교회의 허물들을 들추어내어 떠벌립니다. 신자로 사는 것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무슬림 국가에서 선교 사역을 하는 선교사의 자녀들이 학교에 가면 왕따를 시켜서 정신이상자로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인터넷에서 안티기독교 사이트가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들고 의심하게 만들어서 더 이상 믿음의 길을 가지 못하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사탄은 초대 교회 성도들의 성만찬을 잘못 이해하여 피를 마시는 사람들이라 하고, 형제 자매라 부른다고 근친혼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비방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반기독교적인 문화와 사상, 철학과 예술 등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회를 끊임없이 비방합니다. 방송과 매체들에서 악감과 좋지 않은 사명감을 가지고 교회를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됩니다. 성도들은 어떤 기간 동안 일시적으로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손해를 보고 사로잡히고 죽임을 당하고 겁탈도 당합니다. 적그리스도는 정치적 권력뿐만 아니라 문화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론을 등에 업고 공격합니다. 이로 인해서 사람들은 진리보다는 적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에게 경배하게 됩니다. 참으로 무서운 세상입니다.

  우리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무신론을, 나치의 세력 속에서 히틀러를, 일제 시대에 천황 숭배를 강요당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사상적으로 시련을 당하게 됩니다.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어야 합니다.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입니다.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습니다. 적그리스도의 등장으로 교회는 고난을 겪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에게는 인내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고난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은 참는 것입니다. 참으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왕이시오 그리스도이심을 믿을 때 세상의 핍박을 이길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참는다는 말입니다. 아픔을 참고 시련을 참고 고난을 참아야 합니다. 참음이 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성도들이 사로잡혀 가고 칼에 죽어갑니다. 이론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상징적인 것도 아닙니다. 실제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믿음으로 참고 견디지 않으면 배교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의 길을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참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내가 수고하고 기대한 것만큼 성취가 되지 않을 때 포기하고 싶습니다. 기대만큼 제자 양성의 열매가 맺히지 않을 때 포기하고 싶습니다. 변화를 기대했는데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을 때 포기하고 싶습니다. 물질적인 희생을 해야 할 때, 교회 생활을 하지만 친구가 없고 말이 통하는 사람이 없을 때 사명이고 믿음이고 다 포기하고 싶습니다. 양들이 떠나가는 것을 보는 목자는 마음이 아픕니다. 힘을 잃어버립니다. 때로는 서로 오해가 생겨서 마음이 불편하기도 합니다. 이런 오해를 이기는 길은 평소 하던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진정성이 의심을 받으면 괴롭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평소 하던 대로 하면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진심을 아십니다. 거짓은 잠시 사람을 속일 수 있으나 진실은 영원히 빛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피고 순간 순간 믿음으로 참아야 합니다. 참는 자가 최후 승리를 얻고 복을 받습니다.

  그러면 힘들어 죽겠는데 어떻게 참을 수 있습니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참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앞에 있는 즐거움을 생각하시고 비방과 모욕과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내 대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현재의 고난을 참을 수 있습니다. 또한 고난의 의미를 찾을 때 참을 수 있습니다. 현재 내가 겪는 고난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의미가 있는 일을 위해서는 참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게 하십니다. 이 땅에 붙은 소망을 떨어내게 하십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참된 소망입니다. 이 소망을 굳게 붙잡을 때 능히 참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고난은 잠시이지만 영광은 영원할 것입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일입니다(벧전2:20).

둘째, 경제적인 어려움을 견디십시오(11-18) : 또 보니 이제는 땅에서 다른 짐승이 올라왔습니다. 그 짐승은 어린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을 했습니다. 그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사는 자들을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했습니다. 이 짐승은 거짓 선지자와 같이 적그리스도를 경배하도록 인도했습니다. 그는 큰 이적을 행하였습니다.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였습니다. 우상에게 생기가 들어가고 또 말을 한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사람들은 이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면 죽임을 당하니 어쩔 수 없이 우상숭배를 해야 했습니다.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할 것입니다.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입니다.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보십시오.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입니다(18). 

  둘째 짐승은 당시 로마의 황제숭배를 주도하는 역할을 하는 이교의 제사장 직분과 관련이 있습니다. 둘째 짐승은 황제숭배를 종교적 차원에서 선도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오늘날도 기독교 외에 다른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한 통속입니다. 이 세상은 다원주의 사회인데 종교통합의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적인 통합은 경제적인 통합으로 시작될 것입니다.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한다는 말을 주목해 보십시오. 적그리스도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경제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생활의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 이름의 수는 짐승의 이름을 숫자로 나타낸 것입니다. 이런 방법을 ‘게마트리아’(gematria)라고 부릅니다. 헬라어나 히브리어의 알파벳은 각기 숫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이름에 포함된 알파벳에 해당되는 모든 숫자를 더한 결과를 이름 대신 사용합니다. 짐승의 숫자는 666인데, 이 숫자는 ‘네로황제’를 히브리어로 번역하면 그 철자의 숫자를 합한 것과 같습니다. 666이란 수는 사람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하나님의 수는 7이고 사람의 수는 6입니다. 666은 6을 세 번 반복한 것으로 인간 혹은 인본주의적인 삼위일체를 가리킵니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을 모방한 가짜 삼위일체를 가리킵니다.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 김일성과 김정일과 주체사상 등이 그런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가짜 삼위일체는 창조주 하나님을 퇴위시키고 피조물을 즉위시키며 인간 속에 하나님의 형상 대신 짐승의 형상을 대치시키는 마귀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연합한 존재들입니다. 남북한 이 통일되면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북한 사람들이 김일성을 하나님과 같이 김정일을 예수님과 같이 주체사상을 성령님과 같이 마음 깊이 박혀 있는 믿음을 어떻게 하나님 중심으로 바꿀 것인가 하는데 있습니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주체사상으로 교육이 되어 감성도 그렇게 반응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앞으로 생체 칩을 이마와 오른손에 주입하면 마음대로 사람의 뇌까지도 한 사람에 의해서 조종이 되는 시대가 올 수 있습니다. 과학의 발전으로 지폐에서 크레디트 카드를 쓰고 생체 칩을 몸에 주입하여 쓰는 날이 오고 있습니다. 그런 실험들은 이미 끝이 났다고 합니다. 이런 표를 몸에 이식하여 경제생활을 하도록 한다면 매우 편리할 것입니다. 모든 정보를 그 칩 속에 넣어서 관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경제적인 활동을 주관하여 사람들을 통제할 것입니다. 비잔틴 제국 하에서 기독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을 하면 세금을 감면해 주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현재 터어키 지역은 이슬람 국가가 되었습니다. 북한에서는 배급제를 하기 때문에 북한의 사상 교육에 동참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가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적그리스도가 세계를 지배한다면 성도들이 당할 고난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시대를 대비해서 절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욕심대로 사는 사람들은 그런 시대를 이기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단순한 삶, 절제된 삶, 검소한 삶을 살 때 고난의 때를 잘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국제금융제재를 받으면서 내실을 다지고 거품을 빼내었을 때 작년에 시작된 어려움을 잘 극복해 내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 다가올 어려움을 대비하여 최소한의 경비로 생활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어려운 때에 건축 역사에 헌신하는 목자님들의 형편을 주님이 알고 계십니다. 주님의 위로와 공급하심이 목자님들과 함께 하기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향락의 유혹을 참아내야 합니다(14:8-12) :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했습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에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8).” 여기서 큰 성 바벨론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한 제국을 상징합니다. 구체적으로 로마를 가리켰습니다. 바벨론과 로마는 세계를 제패했던 제국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뼈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는 성전 파괴의 장본인들입니다. 바벨론과 로마가 왜 무너졌습니까? 자기의 음행으로 빚은 진노의 포도주를 모든 민족에게 마시게 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나라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로마 제국이 주도적으로 이끌어 갔습니다. 자신만 타락한 것이 아니라 그 타락을 다른 나라에까지 전염시켰습니다. 여기서 음행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창조주로서 경배하지 않는 일입니다. 대신에 황제를 숭배하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영적인 음행은 윤리적인 음행으로 발전됩니다. 로마의 멸망은 사회학적으로는 부정과 부패와 윤리의 타락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측면에서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질만능, 쾌락추구에 목을 매는 이 시대는 멸망을 향해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9-11절을 보십시오.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짐승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불 심판을 받게 됩니다. 불 심판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계속됩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쉼이 없는 심판을 받습니다. 우리는 지옥의 존재와 그 고통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땅에서의 고난을 이기고 예수님을 믿고 살 수 있습니다. 심판이 없다면 구원도 없는 것입니다. 심판을 믿지 않는 사람은 구원도 믿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신데 그렇게 지독한 심판을 하실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동시에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우리가 지옥 형벌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하고 구원을 사모해야겠습니다.

  12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는 때에 환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인내는 막연하게 참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실제 삶에서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가치관과 인생관이 하나님의 말씀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시오 왕이심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말은 곧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왕으로 믿고 사는 삶입니다. 말씀 없이 믿음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믿음 없이 말씀대로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려면 반드시 인내가 필요합니다. 왜 인내가 필요할까요? 바벨론의 세력이 도전하기 때문입니다. 음행과 술취함과 같은 향락이 우리에게 믿음을 포기하도록 유혹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유혹을 이기고 믿음을 지킨 자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은 무엇입니까? 13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믿음을 지킨 자들에게는 영원한 쉼이 따르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고 그 곳에서 하나님과 어린 양을 찬양합니다. 그들은 새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새 노래는 이 땅에서 구원을 받은 십사만 사천 명 외에는 아무도 부를 수가 없습니다(2-3). 유행가는 아무나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는 아무나 부르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구원을 받고 그 사랑을 맛본 사람만이 마음으로부터 부를 수 있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그들은 어린 양의 사랑과 신실함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순종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합니다. 자기 부인과 순종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뜻과 그 말씀에 순종합니다.

  반대로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인내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따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름 위에 앉으시고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을 쓰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낫을 휘둘러 땅의 곡식을 거두셨습니다. 구름 위에 앉으신 주님이 낫을 휘둘러 땅의 곡식을 거두셨습니다.

  또 다른 천사는 역시 예리한 낫을 가졌는데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예리한 낫을 가진 자를 향하여 외쳤습니다. “네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 굴레에까지 닿았고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습니다. 포도의 추수는 심판의 행위를 나타냅니다. 그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지 320Km까지 피가 흐릅니다. 이는 심판의 강도가 강력함을 보여줍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성 안에 있는 사람들과 대조를 이룹니다. 주님이 허락하신 구원을 만홀히 여김으로써 심판의 장소인 성 밖에서 이런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인내함으로 영원한 쉼에 참여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고 믿음을 지키는 가운데 환난의 때를 견뎌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루 이틀 반짝하고 말 것이 아닙니다. 꾸준하게 포기하지 않고 달려야 영예를 얻을 수 있습니다. 느렸다가 빨랐다가는 할 수 있지만 달리다가 멈추었다가 달릴 수는 없습니다. 힘들 때 말씀 공부를 그만두고, 모임에 참석하지 않는 일들은 지혜롭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은혜의 수단이 말씀이고 기도이고 예배입니다. 우리가 모이기를 힘쓰는 가운데 서로를 위로하고 환난의 때를 잘 견디기를 기도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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