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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09년 약5강(5:1-20)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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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2,300회 작성일 09-08-30 13:43

본문

2009년 야고보서 제5강                                                                167
말씀: 야고보서 5:1-20
요절: 야고보서 5:8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알린 엘시노이 할머니(75), 린더 베크먼(70) 두 할머니가 최근 필라델피아 한 공원에서 복음 전도를 하다 체포돼 ‘혐오범죄’로 몰렸습니다. 최고형을 언도 받으면 47년 징역형에 처해질 수도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왜 형오죄에 해당이 됩니까? 근본적으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과 진리를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우리의 소속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미국 233년 역사상 가장 악법이라고 소문난 “혐오범죄 방지법”이 지난 2009년 7월 23일 목요일 야밤중에 전격적으로 처리되었습니다. 미국은 현재 상하 양원 모두 민주당이 장악하고 있어서 이 법안이 통과되는데 어렵지 않았습니다. 야밤중, 미국 국민들이 모두 곤하게 잠든 틈을 타서 전격적으로 처리된 이 법안으로 인하여 앞으로 선교사들이 받을 고난과 위협은 명약관화합니다. 이 법안은 대통령의 서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일단 서명을 받아 이 법이 효력을 발생하면 성경을 가르치는 성경 선생이나 선교사들은 앞으로 동성연애에 관련된 로마서 1:27절이나 레위기 18:22절은 언급할 수 없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이 법으로 인하여 미국 국민의 도덕과 윤리는 땅에 떨어지게 되었고, 이단과 비성경적 사회악은 더욱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동성애자들이나 성전환자, 타종교 신봉자들은 우대를 받는 반면 기독교의 진리를 전하는 사람에게는 적지 않은 걸림돌이 될 전망입니다. 무서운 현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을 아껴야 합니다. 때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는 말세를 사는 신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세에 부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1-6), 고난에 대해서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7-11), 기도 생활은 어떠해야 하는지(12-20)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면서 더욱 행동하는 믿음 생활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선한 사업에 부유한 사람이 되십시오(1-6) :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1).” 말세에 부한 자들은 고생을 하게 될 것입니다. 고생이 심해서 울고 통곡할 것입니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4). 자기만을 위해서 물질을 사용하고(5), 물질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습니다. 부자들은 재물이 주는 쾌락을 누리는데 미래에도 계속해서 그런 생활을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돈이란 돌고 도는 것입니다. 그들은 부를 다 잃게 되고 그로 인해서 더 큰 고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최후 심판 날에 돈이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재물의 유용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욥을 부자로 살도록 축복하셨습니다. 구약에서는 물질을 축복으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신약은 부에 대해서 구약 성경과 비교해 볼  때 좀 더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도 부에 대한 욕심, 부를 의지하는것, 부를 섬기는 것을 경고하는 것이지 물질 자체를 죄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물질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중성적인 수단입니다. 재물은 주님께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라고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물질의 근본 주인은 하나님이시요 인간은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본문의 부자들은 밭에서 일한 자들의 품삯을 당일에 주어야 마땅했습니다(신24:14,15). 그러나 그들은 여러 가지 핑계를 대고 품삯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습니다. 그들은 모은 재물을 가지고 남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사치하고 방종하였습니다. 그들은 살륙의 날, 곧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그들의 마음을 살찌게 하였습니다. 마치 돼지가 도살할 때를 위하여 많이 먹고 살 찌듯이 말입니다. 마음을 날씬하게 하는 것은 검소하고 절제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부자들은 재판관들을 매수하여 가난한 의인들을 정죄하고 죽였습니다. 그 가난한 자들은 아무 힘도 없어 저항하지도 못하고 정죄함을 받았습니다. 저자 야고보는 이와 같이 정당한 방법이 아닌 악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고 가난한 자를 압제하며 사치와 연락을 일삼는 자들에게 울고 통곡하라고 경고합니다.

  우리가 말세에 돈을 사랑하도록 하는 분위기 가운데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며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돈이 인간의 참된 가치나 일차적인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재물을 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물질로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어야합니다(딤전6:18). 신자들은 자기를 위해서는 검소한 삶을 살고, 하나님과 이웃에게 대하여 부요한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앙드레 비엘리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재물이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쓰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다.” 재물이 제대로 사용되지 않고 오랫동안 방치되어 쓸모없게 되면 그들이 심판을 받는 증거가 됩니다. 그들이 불의하게 쌓은 재물은 실상 심판의 지옥 불을 모아서 쌓아 둔 셈이 됩니다. 그 불은 그들을 불살라 버릴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가 얼마 남지 않은 말세에 자기들을 심판할 증거가 되는 불의한 재물을 쌓았던 것입니다. 물질을 최우선적인 가치로 두고 모으는 사람은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을 가지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합니다. 

  둘째, 고난에 대한 바른 자세(7-11) :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게 됩니다. 우리 신자들이 무슨 큰 잘못을 저질러서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스웨덴의 아케 그린목사는 동성애에 관해 언급된 로마서 1장 본문을 그냥 읽다가 징역형을 앞두고 있습니다. 캐나다의 마크 하딩 목사는 지역 고등학교가 회교도 학생들에게 코란을 나눠주며 교과시간에 기도를 허용하기 시작할 때 이를 반대했지만 2002년 10월 17일 대법원 항소심에서 패소, 6개월 전 통과된 ‘고의적 혐오범죄’에 적용되어 2년 집행 유예형에 340시간 ‘지역 봉사형’을 살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만 60명, 이란 10명 등등 선교사들이 강제 추방되는 사례는 갈수록 늘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외교통상부는 ‘테러위험이 상존하고 현지법에 따라 선교가 금지되어 있는 위험지역’에 대한 선교팀 파견을 중단 및 취소하도록 교계에 요청했습니다. 현지법에 따라 선교가 금지되어 있는 지역은 대부분의 모슬렘권 뿐만 아니라 불교권, 힌두권에도 해당이 됩니다. 오일머니를 벌어들여야 하는 경제통상부의 요청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런 일들은 앞으로 더욱 표면화될 것입니다. 경제적인 이득과 안전 등으로 인한 갈등이 더욱 노골화될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복음 전도가 쉽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아야 합니다.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는 것 같이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약속은 신약에서 300번 이상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는 아직 성취되지 않고 남아 있는 예언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예수님의 재림은 더욱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징조로 세상에 고통이 더욱 많아집니다. 요즈음 신종 인풀루엔자로 인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퍼지고 있습니다. 이상 기후, 지진, 전쟁 소식, 기근, 유가의 폭등, 강력 범죄 등 이런 현상들은 갈수록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를 살다보니 믿음을 지키면서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같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는 생각들이 편만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이 심해지고 자주 생기는 것은 해산의 고통과 같이 예수님의 재림이 아주 가깝다는 증거입니다. 이때 우리는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보고 참는 것 같이 참아야 합니다. 농부는 추수 때를 기다린다고 하여 아무 일도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름 땡볕에서 열심히 잡초를 뽑고 농약을 쳐 줍니다. 거름을 주고 물을 대 줍니다. 재림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하는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몇 날 몇 시에 주님이 오신다고 이것저것 다 팔고, 하던 일 다 멈추고 재림의 때에 들림 받을 것만 기대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그러한 자세로 재림을 기다리면 안 됩니다. 복음 전하는 일, 기도하는 일, 세상에서 자기 본분을 성실하게 감당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야고보가 종말론적인 관점으로 이 책을 마무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마지막 때가 되었음을 알고 더욱 열심히 믿음을 실천하는 성실한 주의 일군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재림의 때에 고통이 많기 때문에 마음을 굳건하게 해야 합니다. 즉 마음을 강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강하게 할 수 있습니까? 골로새서 2:6,7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깊이 그리고 견고히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이 깊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고 믿음이 자라고 강해져야 합니다. 나무의 뿌리가 깊이 박힐수록 강풍에 잘 견딜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께 깊이 뿌리를 박을수록 환난을 잘 견딜 수 있습니다. 고난은 우리를 키우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거목은 강풍과 불을 견디면서 자라납니다. 고난의 불바람이 불어닥칠 때 우리는 마음을 굳건하게 먹고 견뎌야 합니다. 고난 앞에서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누구나 다 흔들립니다. 그러나 믿음의 뿌리가 뽑히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그 말씀을 붙잡음으로 더욱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원망은 부정적인 비판을 말합니다. 참다 못하여 자기가 처한 어려움의 이유를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서로 원망하지 말아야합니까? 이는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심판주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나의 잘못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데, 남에게 탓을 돌리면 범죄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남의 탓으로 내가 어려움을 당하면 곧 오실 심판주가 다 아시며 공의로운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남을 원망하기보다 하나님의 주권에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저자는 고난의 때를 잘 견딘 선지자들과 욥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욥은 의인이요 자녀도 많은 부자였으나 하루 아침에 재산과 자녀를 다 잃고 몸은 악창이 들었습니다. 아내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망하고서도 자기의 온전함을 지키느냐며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친구들로부터도 네 죄로 인해서 이런 벌을 받는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이 고난을 참고 견뎠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을 귀로 듣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눈으로 뵙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게 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또한 재산과 자녀도 처음보다 더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받을 때에 하나님은 절대 선하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십니다.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데에는 선한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살기 때문에 우리는 때로 세상과 거슬리고,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새벽 기도하는 고난, 물질적인 어려움, 죄와 싸우는 투쟁, 제자 양성에 따르는 고난 등등이 있습니다. 이런 것 없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습니까? 이는 사실 우리를 하나님의 참된 사람으로 빚어갑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에 축복의 청신호임을 알고, 인내와 감사함으로 잘 극복하여 큰 은혜와 축복을 받는 신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말세에는 핍박도 많아지고 사탄의 시험이 많습니다. 이때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 옳은 것을 아니라 하고 아닌 것을 옳다 하는 것은 다 죄악이요 위선인 것입니다(마5:37).

  셋째, 기도의 능력(13-20) : 13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고난’ 은 한 개인이 당하는 어려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죄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신자가 믿음으로 사는 데 따르는 어려움을 말합니다. 신자들이 믿음으로 살다 고난을 당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남을 원망을 할 것이 아닙니다. 헛된 맹세를 하여 자기 결백을 주장할 것도 아닙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 인내하며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해야 합니다(빌4:12,13). 기도는 신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힘들 때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너무 어려우면 기도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탄식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기도하는 사람을 성령께서도 도우십니다. 힘들다고 기도하지 않으면 누가 도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새벽을 깨워서 기도해야 합니다. 늦은 밤에도 기도해야 합니다. 신자들이 고난당할 때 기도하기보다 불평하기 쉬운 것처럼 즐거워할 때는 방종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즐거워하는 자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찬송을 드려야 함을 권면합니다. 찬송은 곡조붙인 기도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되 믿음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병든 자는 실제적으로 육신의 병이 든 자를 말합니다.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입니다. 곧 교회의 지도자들을 청하여 기도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장로들은 심방을 가서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질병에 걸린 자에게 기름을 바르는 것은 당시의 관습이요 의술적인 행위였습니다. 여기서 기름을 바르는 것은 실제적으로 의학적 효과가 있는 행위였습니다. 이것이 말씀하는 바는, 병자들을 섬길 때 기도와 함께 의학적인 치료를 겸하여 섬겨야 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름을 바르는 것도 ‘주의 이름’으로 바르는 것이니, 근본적으로 의술이든, 기도든, 치료는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알고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아사 왕은 발에 병이 걸렸을 때 하나님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사에게만 구하여 죽고 말았습니다. 병자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믿음의 기도를 드려야 병든 자를 구원하는 곧 낫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실 것을 믿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가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게 됩니다. 모든 병의 원인이 물론 죄에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일부 죄가 병의 원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에 하나님은 믿음의 기도를 받으시고 그 병을 일으킨 죄를 사하시고, 그 병에서 낫게 하십니다. 병에서 낫든 낫지 않던 중요한 사실은 사죄의 권한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병자들을 위해 기도하되 모든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낫게 하는 힘이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야고보는 무엇을 권합니까? 1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16절에서 중요한 말은 ‘서로’ 라는 단어인데 두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소위 일방적으로만 죄를 고백하는 고해 성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 죄를 고백하고 사죄를 위해 서로 기도해주는 만인제사장설의 근거가 됩니다. 제사장으로서 상호간 고백을 듣고, 상호간 치유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인’ 은 일차적으로 교회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덧입고 거듭난 자들은 근본적으로 의인입니다. 그러한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크므로 서로의 치유를 위하여 기도할 때 역사하는 힘이 크다는 것입니다. 16절 하반절을 17,18 절과 연결하여 보면 ‘의인’ 의 이차적인 의미는 신자들 중에서도 탁월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거룩한 사람, 믿음의 사람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큽니다.

  저자는 기도에 대해서 엘리야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입니다. 그도 연약하고 두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런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했습니다. 다시 그가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습니다(17,18). 이와 같이 우리와 똑 같은 성정의 사람 엘리야가 자연 현상까지 변동시킨 초자연적인 일을 함으로 기도의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그는 갈멜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 쪽을 바라보라. 그가 올라가 바라보고 말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하고 말했습니다. 엘리야는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고 했습니다.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반복해서 기도했습니다. 기도가 응답될 때까지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인이요 믿음의 사람인 엘리야가 하늘에 상달될 때까지 마음이 통하는 기도를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도는 노동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기도제목을 가지고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를 받으시고 역사하십니다. 엘리야는 이런 기도를 통해서 하늘에서 불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떠나서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기는 백성들을 하나님께 돌이키기를 원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그는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권면했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그가 이렇게 강하게 말했지만 백성들은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이런 백성들을 위해서 갈멜산 꼭대기에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불러다 놓고 하늘에서 불을 내리는 신이 참 신이라는 기도의 대결을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을 돌이키기 위해서 힘을 썼습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당시에는 유대교와 신비주의에 미혹된 자들이 많았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어디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납니까? 돈의 유혹, 육신의 쾌락, 쉽고 편안한 삶의 방식에 미혹이 됩니다. 인본주의에 미혹이 됩니다. 지성인들은 진화론에 미혹되기도 합니다. 지가 성취에 미혹되고 이상적인 남자나 이상적인 여자에 미혹되어 진리의 길을 떠나기도 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맛보고 떠난 사람들을 돌이키는 것은 불신자를 전도하여 하나님께 돌이키는 것보다 네 배는 더 어렵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복음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구원의 길에서 떠나 방황하는 형제자매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들을 사랑하여 하나님께 다시 돌아와 믿음으로 살도록 권면해야 합니다. 그들을 돌이키면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고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입니다. 이런 일은 엘리야와 같은 믿음의 기도, 간절한 기도를 해야 가능합니다.

  우리가 새 센터에 이런 엘리야와 같은 기도의 사람들로 채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센터 건축도 기도로 지어야 합니다. 가을 학기를 준비하기 위해서 우리가 특별 새벽 기도를 한 주간 동안 하였습니다. 앞으로 믿음의 기도, 의인의 기도,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세 명의 일대일 양들을 얻고 제자 양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세를 사는 우리가 당하는 여러 모양의 어려움들을 끝까지 참고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며 제자를 세우는 일에 헌신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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