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강 2019년 신년2강(학 1:1-15)
페이지 정보

본문
2019년 신년 제 2 강
말씀 | 학개 1:1-15
요절 | 학개 1:8
성전을 건축하라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2019년 새해 첫 예배를 드리게 되어 감사를 드립니다. 학생들과 함께 새벽 기도를 하면서 마음을 모으고 새롭게 하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새해를 바라보면서 하나 되기에 힘쓰라는 예수님의 기도를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서로 사랑하고 하나 되기를 힘쓰는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성전을 건축하라’는 말씀은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해를 시작하면서 이 말씀으로 방향을 잡는데 도움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Ⅰ. 산에 올라가라(1-11)
바사의 다리오 왕 제이년 여섯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했습니다. 학개는 그 말씀을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전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내 백성’이 아닌 ‘이 백성’이라고 부릅니다. 미운 사람에게 ‘이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거리감을 표현합니다. “때가, 여호와의 집을 세울 때가 오지 않았다”는 백성들의 말 때문입니다.
그들의 말이 경우에 합당할까요?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바사 고레스 왕을 통해 그들이 바벨론에서 귀환할 때 주신 방향입니다(스 1:1-4). 그들이 먼저 성전을 건축할 생각을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시작하십니다. 예루살렘에 돌아온 자들은 포로 후기 공동체 즉 바벨론에서 태어난 2,3세대들입니다. 부모 세대는 대부분 죽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하지 못하고 이론으로만 배웠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부모의 나라로 돌아왔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입니다. 부모가 가졌던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의 정체성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대부분 선진국 바벨론에 머물렀지만 그들은 안정된 삶의 터전을 버리고 모험을 떠난 것입니다. 그들은 남은 자입니다. 그들은 성전만 지으면 주변 나라들이 예루살렘을 우러러보고 조공을 바치러 몰려들 것이며 그 때가 되면 예루살렘이 세계 가운데 우뚝 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사 2:2-4, 미 4:1-5). 그들은 오자마자 제단을 만들어 제사를 드리고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성전 짓는 일에 전력하였습니다. 그들 모두는 ‘성전 건축 우선주의’를 택했습니다. 성전 지대가 놓일 때는 감격하여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모든 것이 술술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사마리아를 비롯한 주변 나라의 시기와 협박이 거세졌습니다. 성전 건축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던 페르시아 고레스 왕이 전쟁터에서 죽고 맙니다. 반대자들로부터 왕이 뇌물을 먹고 공권력을 발휘하여 성전 건축 역사를 중단시킵니다. 왕의 명령이니 그들은 성전건축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설상가상 바벨론에서 가져 온 돈은 바닥나고 경제적인 어려움은 가중되었습니다. 성전 건축도 좋지만 일단 살아남아야했습니다. 이 기회에 그들은 지치고 피곤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의 열정은 서서히 식었습니다. 틈나는 대로 쉬면서 삶의 여유를 즐겼습니다. 그렇게 15년이 흘렀습니다. 일명 ‘잃어버린 15년’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깨우치십니까? 4절을 보십시오.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판벽한 집’이란 백향목 판자나 아로새긴 판자로 벽을 두르고 지붕을 덮은 집을 가리킵니다. 고급 인테리어를 한 매우 화려한 집입니다. 아마 그들은 성전을 지으려고 가져온 레바논 백향목을 자기들의 집을 꾸미는데 사용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으니까 자연스럽게 자기 일에 마음을 돌린 것입니다. ‘황폐하다’는 것은 파괴되어 쓸모없이 버려진 건축물의 상태를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그들의 집과 달리 하나님의 성전은 벽도 없습니다. 지붕도 없습니다. 빗물이 그대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짐승들이 휘젓고 돌아다닙니다. 바람이 흉흉하게 몰아칩니다. 성전은 을씨년스럽게 버려져 모두에게 잊힌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속마음에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책망하십니다.
이제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그들은 자신의 행위를 살펴야 합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그들은 과거 노예로 살았을 때 하나님께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려고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지금은 생존을 위해 바쁘게 수고하는 일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을 뒤로 미루고 자기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왕을 더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은 돈을 하나님보다 앞세웠습니다. 그들은 과거를 돌아보며 현재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니 좋은 집에서 사는 그들의 실상이 어떠합니까? 그들은 많이 뿌렸어도 수확은 적었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았으며, 마셔도 성이 차지 않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벌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입니다(6). 그들은 자기를 위해서 애를 썼는데 실상은 초라합니다. 그들은 그런 자신의 행위를 살펴야 합니다(7). 현실의 원인을 바르게 진단해야 바르게 치료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무슨 방향을 주십니까? 8절을 읽겠습니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그들은 왕의 명령을 어김으로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성전건축을 중단시켰던 왕은 죽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선지자 학개를 통해서 성전을 건축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 왕의 명령이 아니라 친히 성전 건축을 명하심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이 자유로운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산으로 올라가라, 나무를 가져오라, 성전을 건축하라.” 이 세 가지 명령은 학개서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우리 앞에 보이는 저 산에 올라가서 아무 나무라도 가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을 세우라는 말씀입니다. 산은 백성들 앞에 늘 있는 산입니다. 나무는 그 산에 널려 있는 나무입니다. 솔로몬 성전은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해 레바논 산맥에서 백향목과 잣나무를 벌목하고 운송해 와서 지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성전을 짓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더 이상 백향목도 금은보화도 아닙니다. 황폐하게 버려진 하나님의 집에 대한 애통하는 마음, 그리고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산에 달려가 나무를 해오는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마음입니다. 그들이 성전을 건축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거하시게 해야 합니다.
성전은 어떤 곳입니까? 성전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거룩한 곳이요, 구속의 위대한 계획을 계시하는 장소요, 인간과 교통하시면서 경배를 받으시는 처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만나려고 임재하시는 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성전은 예배의 중심지이며 삶의 중심지입니다. 하나님은 그 성전을 다시 짓기를 원하십니다. 지붕이 없는 집은 사람이 거주할 수 없습니다. 지붕이 없는 성전에는 하나님이 거주할 수 없습니다.
왜 성전을 건축해야 합니까? 8b절을 보십시오.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광을 얻으시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짓는 일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 분의 통치를 받겠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성전을 지음으로써 그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만나고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그들이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기를 원하십니다. 지금까지 그들은 성전 짓는 일이 힘들다며 삶의 우선순위를 자기에게 두었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의 정체성과 사명을 잃어버렸습니다. 사명인이 아닌 생활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다시 삶의 우선순위를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성전을 건축하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첫째,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즉 인격 성전을 짓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황금 사원 자리에 제 4성전을 지어야 한다는 말을 가끔씩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은 맞는 말이 아닙니다. 건물 성전은 이미 무너지고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라고 하시면서 자신이 삼일 만에 일으키겠다고 한 것은 이제부터 건물 성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성전이며, 그의 몸에 붙은 성도가 성전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건물 성전 시대는 막을 내렸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성전인 인격 성전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 분을 믿으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고전 3:16). 오늘 우리는 그 인격 성전을 지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사람으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격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나는 것, 즉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 성전을 건축하는 것입니다(고전 3:16, 고후 6:16).
더 나아가 예수님을 증언하는 일이 인격 성전을 짓는 일입니다. 학개서의 성전은 오늘날 교회의 예표입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을 증언함으로써 그 성전이 확장됩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둘째,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삶의 중심이 자기 자신에게 맞춰져 있습니다. 교회도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성이 약화되고 나 중심의 개인주의가 강해지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역사에 헌신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캠퍼스 사명보다는 개인 취미생활, 자녀 양육, 넓고 편안한 집, 노후 준비 등 다른 것에 더 마음을 쏟고 싶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인생의 목표는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세상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언하고 그 영광을 드러내도록 부름 받은 민족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예수님은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세우라고 하십니다. 내 삶의 중심, 내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으로 재편하도록 권고하십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내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성전을 짓지 않은 그들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9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적게 거둔 것은 하나님이 불어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집은 버렸으나 그들 각자는 자기 집에 빨랐기 때문입니다. “자기 집에 빨랐음이니라”는 말은 ‘자기 집의 일에 분주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황폐하게 된 것은 자기 일에만 힘써서 하나님의 집이 황폐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집이 황폐하면 아무리 자기 일에 힘써도 황폐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일에만 힘쓰면 잘 먹고 잘 살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복은 하나님께서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무엇이 먼저고 무엇이 그 다음인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그들이 경작하던 산, 들. 밭, 농장, 가축 등 온갖 것에 가뭄을 내리신 것입니다.
Ⅱ.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12-15)
그들은 학개의 메시지를 듣고 어떻게 반응합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모든 백성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들었으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보내셨음이라 백성이 다 여호와를 경외하매” 첫 문장은 원래 “그리고 그들이 들었다”입니다. 들었다는 말은 단순히 듣는 행위가 아니라 수용하다, 순종하다는 의미입니다. 정치 지도자와 종교 지도자, 그리고 남은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듣습니다. 그들은 학개 선지자를 하나님의 종으로 영접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중심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남은 자들입니다. 지도자와 남은 자들이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했습니다.
그들이 순종해야 할 말씀이 무엇일까요? 13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여호와의 사자 학개가 여호와의 위임을 받아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고 돕고 보호하고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임마누엘은 축복 중에 가장 큰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전부를 얻은 것입니다.
그들이 말씀에 순종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 모든 백성의 마음이 감동합니다. 감동했다는 말씀은 개정한글판은 흥분시켰다는 뜻입니다. NIV 영어 성경은 “stirred up”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감동된 그들은 드디어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전 공사를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지 23일 후에 성전 재건을 시작합니다. 가장 바쁜 추수기였는데도 성전공사에 도전합니다. 환경이나 조건보다도 마음입니다. 마음이 감동하면 아무리 바쁜 일도, 아무리 힘든 일도 이길 수 있습니다.
마음의 감동이 어디서 일어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아무리 힘든 일을 만나도 그 어떤 방해를 받아도 힘차게 도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이 있으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너무나 즐겁고 그 분을 위한 헌신과 희생이 결코 짐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임을, 나를 감동시키면 새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부흥의 때나 현재 흉년의 때에도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면 식어진 가슴에 불이 붙습니다. 파도처럼 감동이 밀려옵니다. 서로를 뜨겁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새해에 캠퍼스 제자양성과 세계선교를 섬길 수 있습니까? “때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아직도 해야 합니까?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산으로 올라가라. 나무를 가져오라. 성전을 건축하라.” 이 말씀으로 먼저 우리 마음이 뜨겁게 감동하여 삶의 균형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을 좀 더 앞세우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와 사역 가운데 함께 하시며 그 영광을 나타내시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학개 1:1-15
요절 | 학개 1:8
성전을 건축하라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2019년 새해 첫 예배를 드리게 되어 감사를 드립니다. 학생들과 함께 새벽 기도를 하면서 마음을 모으고 새롭게 하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새해를 바라보면서 하나 되기에 힘쓰라는 예수님의 기도를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서로 사랑하고 하나 되기를 힘쓰는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성전을 건축하라’는 말씀은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해를 시작하면서 이 말씀으로 방향을 잡는데 도움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Ⅰ. 산에 올라가라(1-11)
바사의 다리오 왕 제이년 여섯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했습니다. 학개는 그 말씀을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전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내 백성’이 아닌 ‘이 백성’이라고 부릅니다. 미운 사람에게 ‘이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거리감을 표현합니다. “때가, 여호와의 집을 세울 때가 오지 않았다”는 백성들의 말 때문입니다.
그들의 말이 경우에 합당할까요?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바사 고레스 왕을 통해 그들이 바벨론에서 귀환할 때 주신 방향입니다(스 1:1-4). 그들이 먼저 성전을 건축할 생각을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시작하십니다. 예루살렘에 돌아온 자들은 포로 후기 공동체 즉 바벨론에서 태어난 2,3세대들입니다. 부모 세대는 대부분 죽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하지 못하고 이론으로만 배웠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부모의 나라로 돌아왔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입니다. 부모가 가졌던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의 정체성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대부분 선진국 바벨론에 머물렀지만 그들은 안정된 삶의 터전을 버리고 모험을 떠난 것입니다. 그들은 남은 자입니다. 그들은 성전만 지으면 주변 나라들이 예루살렘을 우러러보고 조공을 바치러 몰려들 것이며 그 때가 되면 예루살렘이 세계 가운데 우뚝 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사 2:2-4, 미 4:1-5). 그들은 오자마자 제단을 만들어 제사를 드리고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성전 짓는 일에 전력하였습니다. 그들 모두는 ‘성전 건축 우선주의’를 택했습니다. 성전 지대가 놓일 때는 감격하여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모든 것이 술술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사마리아를 비롯한 주변 나라의 시기와 협박이 거세졌습니다. 성전 건축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던 페르시아 고레스 왕이 전쟁터에서 죽고 맙니다. 반대자들로부터 왕이 뇌물을 먹고 공권력을 발휘하여 성전 건축 역사를 중단시킵니다. 왕의 명령이니 그들은 성전건축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설상가상 바벨론에서 가져 온 돈은 바닥나고 경제적인 어려움은 가중되었습니다. 성전 건축도 좋지만 일단 살아남아야했습니다. 이 기회에 그들은 지치고 피곤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의 열정은 서서히 식었습니다. 틈나는 대로 쉬면서 삶의 여유를 즐겼습니다. 그렇게 15년이 흘렀습니다. 일명 ‘잃어버린 15년’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깨우치십니까? 4절을 보십시오.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판벽한 집’이란 백향목 판자나 아로새긴 판자로 벽을 두르고 지붕을 덮은 집을 가리킵니다. 고급 인테리어를 한 매우 화려한 집입니다. 아마 그들은 성전을 지으려고 가져온 레바논 백향목을 자기들의 집을 꾸미는데 사용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으니까 자연스럽게 자기 일에 마음을 돌린 것입니다. ‘황폐하다’는 것은 파괴되어 쓸모없이 버려진 건축물의 상태를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그들의 집과 달리 하나님의 성전은 벽도 없습니다. 지붕도 없습니다. 빗물이 그대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짐승들이 휘젓고 돌아다닙니다. 바람이 흉흉하게 몰아칩니다. 성전은 을씨년스럽게 버려져 모두에게 잊힌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속마음에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책망하십니다.
이제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그들은 자신의 행위를 살펴야 합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그들은 과거 노예로 살았을 때 하나님께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려고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지금은 생존을 위해 바쁘게 수고하는 일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을 뒤로 미루고 자기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왕을 더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은 돈을 하나님보다 앞세웠습니다. 그들은 과거를 돌아보며 현재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니 좋은 집에서 사는 그들의 실상이 어떠합니까? 그들은 많이 뿌렸어도 수확은 적었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았으며, 마셔도 성이 차지 않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벌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입니다(6). 그들은 자기를 위해서 애를 썼는데 실상은 초라합니다. 그들은 그런 자신의 행위를 살펴야 합니다(7). 현실의 원인을 바르게 진단해야 바르게 치료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무슨 방향을 주십니까? 8절을 읽겠습니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그들은 왕의 명령을 어김으로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성전건축을 중단시켰던 왕은 죽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선지자 학개를 통해서 성전을 건축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 왕의 명령이 아니라 친히 성전 건축을 명하심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이 자유로운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산으로 올라가라, 나무를 가져오라, 성전을 건축하라.” 이 세 가지 명령은 학개서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우리 앞에 보이는 저 산에 올라가서 아무 나무라도 가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을 세우라는 말씀입니다. 산은 백성들 앞에 늘 있는 산입니다. 나무는 그 산에 널려 있는 나무입니다. 솔로몬 성전은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해 레바논 산맥에서 백향목과 잣나무를 벌목하고 운송해 와서 지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성전을 짓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더 이상 백향목도 금은보화도 아닙니다. 황폐하게 버려진 하나님의 집에 대한 애통하는 마음, 그리고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산에 달려가 나무를 해오는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마음입니다. 그들이 성전을 건축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거하시게 해야 합니다.
성전은 어떤 곳입니까? 성전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거룩한 곳이요, 구속의 위대한 계획을 계시하는 장소요, 인간과 교통하시면서 경배를 받으시는 처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만나려고 임재하시는 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성전은 예배의 중심지이며 삶의 중심지입니다. 하나님은 그 성전을 다시 짓기를 원하십니다. 지붕이 없는 집은 사람이 거주할 수 없습니다. 지붕이 없는 성전에는 하나님이 거주할 수 없습니다.
왜 성전을 건축해야 합니까? 8b절을 보십시오.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광을 얻으시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짓는 일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 분의 통치를 받겠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성전을 지음으로써 그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만나고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그들이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기를 원하십니다. 지금까지 그들은 성전 짓는 일이 힘들다며 삶의 우선순위를 자기에게 두었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의 정체성과 사명을 잃어버렸습니다. 사명인이 아닌 생활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다시 삶의 우선순위를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성전을 건축하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첫째,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즉 인격 성전을 짓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황금 사원 자리에 제 4성전을 지어야 한다는 말을 가끔씩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은 맞는 말이 아닙니다. 건물 성전은 이미 무너지고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라고 하시면서 자신이 삼일 만에 일으키겠다고 한 것은 이제부터 건물 성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성전이며, 그의 몸에 붙은 성도가 성전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건물 성전 시대는 막을 내렸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성전인 인격 성전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 분을 믿으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고전 3:16). 오늘 우리는 그 인격 성전을 지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사람으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격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나는 것, 즉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 성전을 건축하는 것입니다(고전 3:16, 고후 6:16).
더 나아가 예수님을 증언하는 일이 인격 성전을 짓는 일입니다. 학개서의 성전은 오늘날 교회의 예표입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을 증언함으로써 그 성전이 확장됩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둘째,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삶의 중심이 자기 자신에게 맞춰져 있습니다. 교회도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성이 약화되고 나 중심의 개인주의가 강해지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역사에 헌신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캠퍼스 사명보다는 개인 취미생활, 자녀 양육, 넓고 편안한 집, 노후 준비 등 다른 것에 더 마음을 쏟고 싶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인생의 목표는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세상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언하고 그 영광을 드러내도록 부름 받은 민족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예수님은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세우라고 하십니다. 내 삶의 중심, 내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으로 재편하도록 권고하십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내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성전을 짓지 않은 그들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9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적게 거둔 것은 하나님이 불어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집은 버렸으나 그들 각자는 자기 집에 빨랐기 때문입니다. “자기 집에 빨랐음이니라”는 말은 ‘자기 집의 일에 분주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황폐하게 된 것은 자기 일에만 힘써서 하나님의 집이 황폐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집이 황폐하면 아무리 자기 일에 힘써도 황폐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일에만 힘쓰면 잘 먹고 잘 살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복은 하나님께서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무엇이 먼저고 무엇이 그 다음인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그들이 경작하던 산, 들. 밭, 농장, 가축 등 온갖 것에 가뭄을 내리신 것입니다.
Ⅱ.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12-15)
그들은 학개의 메시지를 듣고 어떻게 반응합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모든 백성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들었으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보내셨음이라 백성이 다 여호와를 경외하매” 첫 문장은 원래 “그리고 그들이 들었다”입니다. 들었다는 말은 단순히 듣는 행위가 아니라 수용하다, 순종하다는 의미입니다. 정치 지도자와 종교 지도자, 그리고 남은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의 목소리와 선지자 학개의 말을 듣습니다. 그들은 학개 선지자를 하나님의 종으로 영접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중심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남은 자들입니다. 지도자와 남은 자들이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했습니다.
그들이 순종해야 할 말씀이 무엇일까요? 13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여호와의 사자 학개가 여호와의 위임을 받아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고 돕고 보호하고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임마누엘은 축복 중에 가장 큰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전부를 얻은 것입니다.
그들이 말씀에 순종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 모든 백성의 마음이 감동합니다. 감동했다는 말씀은 개정한글판은 흥분시켰다는 뜻입니다. NIV 영어 성경은 “stirred up”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감동된 그들은 드디어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전 공사를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지 23일 후에 성전 재건을 시작합니다. 가장 바쁜 추수기였는데도 성전공사에 도전합니다. 환경이나 조건보다도 마음입니다. 마음이 감동하면 아무리 바쁜 일도, 아무리 힘든 일도 이길 수 있습니다.
마음의 감동이 어디서 일어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아무리 힘든 일을 만나도 그 어떤 방해를 받아도 힘차게 도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이 있으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너무나 즐겁고 그 분을 위한 헌신과 희생이 결코 짐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임을, 나를 감동시키면 새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부흥의 때나 현재 흉년의 때에도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면 식어진 가슴에 불이 붙습니다. 파도처럼 감동이 밀려옵니다. 서로를 뜨겁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새해에 캠퍼스 제자양성과 세계선교를 섬길 수 있습니까? “때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아직도 해야 합니까?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산으로 올라가라. 나무를 가져오라. 성전을 건축하라.” 이 말씀으로 먼저 우리 마음이 뜨겁게 감동하여 삶의 균형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을 좀 더 앞세우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와 사역 가운데 함께 하시며 그 영광을 나타내시기를 기도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