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강 2015년 신년1강(고후4:1-18) 질그릇에 담긴 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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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신년 제 1 강
말씀 | 고린도후서 4:1-18
요절 | 고린도후서 4:7
질그릇에 담긴 보배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복된 새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014년은 말 그대로 정말 다사다난한 한해였습니다. 세상 뿐만 아니라 복음역사에 있어서도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낙심하기 쉬운 때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가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 본문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복음의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통해 복음의 빛 되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깊이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여기서 “그러므로”는 3장의 내용을 받는 것으로 “주의 영으로 내가 영광스러운 사도가 되었으므로”하는 뜻입니다. 또한 “이 직분”은 새 언약의 일꾼의 직분, 곧 복음 사역을 가리킵니다. 사실 바울은 새 언약의 일꾼이라는 직분을 맡을 자격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바울에게 긍휼을 베푸셔서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긍휼하심을 생각할 때마다 바울은 낙심하지 않고 그 직분을 충성스럽게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말씀을 혼잡하게 함으로 사람들을 속이는 거짓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복음사역자들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말씀을 희석시키는 시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은 오직 진리를 분명히 나타냅니다. 복음 외에 다른 것을 섞지 않고 단순하면서도 선명하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드러냅니다. 바울은 이 점에 있어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해서 스스로를 추천할 정도로 분명하였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복음이 전파될 때, 사단이 불신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복음을 받지 못하게 합니다. 사단이 그들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입니다. 이는 복음에 관한 주목할 만한 설명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형상”은 “원형”을 그대로 그린 초상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처럼 우리에게 계시해 주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통해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되고 이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볼 때, 사단의 세력에서 자유함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단은 불신자들이 부나 명예나 권력과 같은 세상 영광만을 보도록 미혹하는 것입니다. 세상적 가치관으로 볼 때 복음은 어리석고 약한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요 지혜입니다. (고전 1:24)
바울은 5절에서 복음의 일꾼이 세상을 향해 무엇을 전파하는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바울은 자신을 전파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심을 전파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주 되신다”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다”는 뜻입니다. 복음의 일꾼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전파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신 구주이십니다. 우리가 경배하고 섬겨야 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주 되심이 선포될 때 인간의 마음을 혼미케 하는 세상 신이 쫓겨납니다. 마음에서 불신이 떠나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임합니다. 어두운 마음에 생명의 빛이 임합니다.
바울은 또한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되었다고 전파했습니다. 바울은 과거 자기를 높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 오직 예수님을 높였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위해 성도들의 종이 되었습니다. 양들의 유익과 행복과 성장을 위해 자신을 낮추고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양들의 종 된 것을 기쁨으로 전파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렇게 전파할 수 있었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하나님은 창조시에 어두운데서 “빛이 있으라!” 명하셨습니다. 그러자 어두움의 권세를 정복하는 찬란한 빛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창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졌지만 두 번째 창조는 범죄한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해 그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의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다시 살아나신 이 예수님을 통해 창세로부터 계시된 하나님의 복음과 지식을 깨닫게 됩니다. 이 예수님만이 복음의 광채이시며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길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마음으로 복음의 빛을 받아 어두운 세상을 향해, 캠퍼스를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담대히 전파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신자들이 어떻게 자신을 평가하고 자신의 모습을 무엇을 기준으로 가다듬어야 되는지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말씀 그대로 우리는 질그릇인데 그 안에 보배를 가지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될지라도 질그릇을 고려청자로 바꾸어주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도요 천지를 지으신 능력의 하나님의 일꾼이라면 그 일꾼이 먼저 영광스러운 모습을 가져야 설득력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잘 되어야 하나님도 영광을 받으시지 않겠는가? 우리가 잘못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고 예수님을 믿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겠는가?’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이 복음의 빛을 질그릇에 가졌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은 우리를 질그릇인 채로 놓아두시고 그 안에 보배를 소유케 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며 우리를 그의 종으로 쓰시는 것이 아무런 불편도 없고, 하시고자 하는 일에 전혀 손해를 보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방법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과 일하시는데 더 큰 효용이 있다고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결정적 증거를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7~10절에서 자신의 체험을 가지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우리 생각에는 그릇 자체도 보석이나 금으로 변한다면 훨씬 더 영광을 받으실 것 같은데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시지 않고 우리를 질그릇 그대로 두시고 그 안에 보배를 넣어 주십니다. 우리의 가치는 이 보배를 가진 것에 있습니다. 그러면 이 보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6절 말씀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있는 여러분과 저는 이 보배를 질그릇 안에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보배를 어떻게 하고 싶어 합니까? 이 보배가 하나님이 나를 편들고 있고, 나를 다른 사람과 구별하고 있다는 표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 사람보다 내가 더 낫고 저 사람보다 내가 더 특별취급 받는 어떤 표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내 자식이 안 믿는 자식보다 더 공부를 잘해야 되고, 신자가 하는 일은 불신자가 하는 일보다 더 잘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질그릇인 채로 놔두시고 그 안에 보배를 주셨습니다. 그 보배는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아는 빛, 생명, 진리이지 우리가 남과 다르다는 표가 아닙니다. 예레미야 9장에 좋은 지적이 하나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9:23,24)
오늘날 기독교 신앙은 현실세계의 요구와 이상하게 손을 잡아버린 부분이 많습니다. 복 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린 신앙일 때는 그나마 봐줄 수 있지만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로 들어서면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병이 낫기 위함도 아니요 남보다 잘 살기 위함도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이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당연한 논리적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만드셨고 나를 사랑하셨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외면하고 하나님이 없다하며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하겠습니까? 이것은 인간의 도리요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 앞에 그 사랑을 입은 자로서의 마땅한 상식적 반응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아는 것, 이것이 우리의 복이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비켜가서 세상에서 대접받는 것으로 우리의 욕심을 채우는 일에 신앙이 동원되는 것, 이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어떤 종교를 갖는 것은 자기가 원하는 소원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붙잡는 것이 인간의 종교적 본능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것을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심히 크신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과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것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 주시는 분이시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하여 우리에게 의와 거룩을 요구하시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우리가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복입니다. 우리가 소원을 정해놓고 하나님께 그것을 해달라고 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이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것은 ‘성경,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 지식을 따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성경이 요구하는 신앙의 성격과 내용을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욕심에 눈이 멀어서 바울이 유대인들을 꼬집은 식으로 얘기를 하자면 수건이 그 마음을 덮어서 우리 귀에 듣기에 좋은 말만 들리게 합니다. 이렇게 되면 참된 진리, 복음의 빛을 놓쳐버리고 맙니다. 방향과 목적과 내용이 없는 열심과 능력이 되고 맙니다.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여러분이 탄 차가 브레이커와 핸들이 없고 액셀레이터만 있는 차와 같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처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방향을 잃고 브레이커가 고장 난 빨리 달리는 차. 탄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 모두가 다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오직 내 안에 빛으로 오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깊이 알아가는 것에 우리 신앙의 목표를 두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있는 그 보배로 인해 세상에, 캠퍼스에 빛을 비추는 인생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또 하나의 재미있는 답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질그릇은 은이나 금으로 바꾸어주지 않고 질그릇인 채로 그 안에 보배를 넣는 방법을 쓰신다고 말씀합니까? 7절을 다시 다 함께 읽어보시겠습니다.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않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고 우리의 능력으로 될 수 없었듯이 우리 힘으로 누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야 됩니다. 그 은혜 베푸시는 일에 우리를 쓰셔야 됩니다. 우리는 나가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중개인으로 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불쌍한 영혼을 만나며 길 잃은 양이 하나님 앞에 인도 되도록 합니다. 우리는 앞에서 나팔을 부는 자요 그를 하나님께로 가라고 가르치는 안내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 난 뭐야?’ 이렇게 물으실 수 있습니다. ‘뭐긴 뭐에요!’ 우리를 통해 그 분이 하나님을 알게 되었으면 우리의 소임을 다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왜요? 하나님 외에는 생명과 구원을 나누어 줄 자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당연히 동역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떠나서라도 평생을 살면서 배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심히 연약하고 부패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조연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가장 대표적이고 모범답안이 디모데전서 1장에 나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딤전1:12-17) 바울은 내가 남보다 뛰어나서 사도라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내가 남들보다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고 구원해주셨다고 고백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에게 가장 귀한 직분까지 주셔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가에 대한 증거로 삼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보통 생각하기를 사도 바울은 준비된 사람이요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저 다메섹 도상에 직접 오셔서 만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사람들은 이웃 사람이 전도하거나 최소한 목사님이 하는 얘기 정도에 항복했는데 이 웬수는 예수님이 직접 오셔서야 항복할 만큼 완악했다는 표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를 용서하고 구원한 정도가 아니라 가장 훌륭한 사람에게만 주어야 마땅한 사도의 직분을 가장 못난 자에게 주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모든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17절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에 가면 사도 바울의 자랑이 나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말은 자신이 어떤 죄인인가를 부끄러움 없이 꺼내놓는 최고의 겸비한 자리에 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진 죄를 자기의 죽음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비천한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이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사도 바울이 자랑한다고 표현한 것은 그 겸비함, 그 비천함, 그 낮아짐이 그로 하여금 영원한 구원의 길에 들어서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가 자신을 증명하는 자랑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빛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그 의로우심과 베푸신 은총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게 된 우리 인생의 복된 것을 아는 자랑입니다.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일에 쓰임 받은 인생의 보람을 찾은 자랑입니다. 우리의 인생과 신앙이 바로 이 성경이 약속하고 성경이 요구한 이 자리로 돌아와 실제 삶 속에서 그 무수히 허락되어 있는,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차고 넘쳐서 눌러도 흘러 넘어가는, 내 잔이 넘치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모든 것으로 채워진 인생을 우리 각자가 경험할 수 있길 바랍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새로워 지는 것보다 더 기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을 따를 때 우리의 내면이 날로 새로워지게 됩니다. 더욱이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으로” 우리는 낙심하지 아니합니다.(17) 바울은 우리의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과 우리의 “경하고 일시적인 환난”을 비교합니다. 우리의 현재의 환난은 영원하고 지극히 큰 영광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18)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일시적이요, 다 사라지고 맙니다. 성경에 약속한 하나님의 나라만이 영원히 지속할 실재 세계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미래에 비하면 우리의 현세의 삶은 찰나와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바울과 같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기쁨으로 현재의 고난을 감당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따르는 길을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음을 배웠습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의 기쁨과 만족과 성화의 근원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의 근본목적을 복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것에 두고 내 마음에 항상 복음의 빛이 비취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배로운 복음의 직분을 맡기신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알고, 나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는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길을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을 믿고 그 능력으로 강하고 담대하게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고린도후서 4:1-18
요절 | 고린도후서 4:7
질그릇에 담긴 보배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복된 새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014년은 말 그대로 정말 다사다난한 한해였습니다. 세상 뿐만 아니라 복음역사에 있어서도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낙심하기 쉬운 때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가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 본문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복음의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통해 복음의 빛 되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깊이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여기서 “그러므로”는 3장의 내용을 받는 것으로 “주의 영으로 내가 영광스러운 사도가 되었으므로”하는 뜻입니다. 또한 “이 직분”은 새 언약의 일꾼의 직분, 곧 복음 사역을 가리킵니다. 사실 바울은 새 언약의 일꾼이라는 직분을 맡을 자격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바울에게 긍휼을 베푸셔서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긍휼하심을 생각할 때마다 바울은 낙심하지 않고 그 직분을 충성스럽게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말씀을 혼잡하게 함으로 사람들을 속이는 거짓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복음사역자들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말씀을 희석시키는 시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은 오직 진리를 분명히 나타냅니다. 복음 외에 다른 것을 섞지 않고 단순하면서도 선명하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드러냅니다. 바울은 이 점에 있어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해서 스스로를 추천할 정도로 분명하였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복음이 전파될 때, 사단이 불신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복음을 받지 못하게 합니다. 사단이 그들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입니다. 이는 복음에 관한 주목할 만한 설명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형상”은 “원형”을 그대로 그린 초상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처럼 우리에게 계시해 주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통해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되고 이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볼 때, 사단의 세력에서 자유함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단은 불신자들이 부나 명예나 권력과 같은 세상 영광만을 보도록 미혹하는 것입니다. 세상적 가치관으로 볼 때 복음은 어리석고 약한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요 지혜입니다. (고전 1:24)
바울은 5절에서 복음의 일꾼이 세상을 향해 무엇을 전파하는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바울은 자신을 전파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심을 전파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주 되신다”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다”는 뜻입니다. 복음의 일꾼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전파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신 구주이십니다. 우리가 경배하고 섬겨야 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주 되심이 선포될 때 인간의 마음을 혼미케 하는 세상 신이 쫓겨납니다. 마음에서 불신이 떠나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임합니다. 어두운 마음에 생명의 빛이 임합니다.
바울은 또한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되었다고 전파했습니다. 바울은 과거 자기를 높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 오직 예수님을 높였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위해 성도들의 종이 되었습니다. 양들의 유익과 행복과 성장을 위해 자신을 낮추고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양들의 종 된 것을 기쁨으로 전파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렇게 전파할 수 있었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하나님은 창조시에 어두운데서 “빛이 있으라!” 명하셨습니다. 그러자 어두움의 권세를 정복하는 찬란한 빛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창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졌지만 두 번째 창조는 범죄한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해 그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의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다시 살아나신 이 예수님을 통해 창세로부터 계시된 하나님의 복음과 지식을 깨닫게 됩니다. 이 예수님만이 복음의 광채이시며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길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마음으로 복음의 빛을 받아 어두운 세상을 향해, 캠퍼스를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담대히 전파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신자들이 어떻게 자신을 평가하고 자신의 모습을 무엇을 기준으로 가다듬어야 되는지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말씀 그대로 우리는 질그릇인데 그 안에 보배를 가지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될지라도 질그릇을 고려청자로 바꾸어주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도요 천지를 지으신 능력의 하나님의 일꾼이라면 그 일꾼이 먼저 영광스러운 모습을 가져야 설득력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잘 되어야 하나님도 영광을 받으시지 않겠는가? 우리가 잘못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고 예수님을 믿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겠는가?’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이 복음의 빛을 질그릇에 가졌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은 우리를 질그릇인 채로 놓아두시고 그 안에 보배를 소유케 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며 우리를 그의 종으로 쓰시는 것이 아무런 불편도 없고, 하시고자 하는 일에 전혀 손해를 보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방법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과 일하시는데 더 큰 효용이 있다고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결정적 증거를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7~10절에서 자신의 체험을 가지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우리 생각에는 그릇 자체도 보석이나 금으로 변한다면 훨씬 더 영광을 받으실 것 같은데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시지 않고 우리를 질그릇 그대로 두시고 그 안에 보배를 넣어 주십니다. 우리의 가치는 이 보배를 가진 것에 있습니다. 그러면 이 보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6절 말씀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있는 여러분과 저는 이 보배를 질그릇 안에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보배를 어떻게 하고 싶어 합니까? 이 보배가 하나님이 나를 편들고 있고, 나를 다른 사람과 구별하고 있다는 표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 사람보다 내가 더 낫고 저 사람보다 내가 더 특별취급 받는 어떤 표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내 자식이 안 믿는 자식보다 더 공부를 잘해야 되고, 신자가 하는 일은 불신자가 하는 일보다 더 잘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질그릇인 채로 놔두시고 그 안에 보배를 주셨습니다. 그 보배는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아는 빛, 생명, 진리이지 우리가 남과 다르다는 표가 아닙니다. 예레미야 9장에 좋은 지적이 하나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9:23,24)
오늘날 기독교 신앙은 현실세계의 요구와 이상하게 손을 잡아버린 부분이 많습니다. 복 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린 신앙일 때는 그나마 봐줄 수 있지만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로 들어서면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병이 낫기 위함도 아니요 남보다 잘 살기 위함도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이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당연한 논리적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만드셨고 나를 사랑하셨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외면하고 하나님이 없다하며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하겠습니까? 이것은 인간의 도리요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 앞에 그 사랑을 입은 자로서의 마땅한 상식적 반응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아는 것, 이것이 우리의 복이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비켜가서 세상에서 대접받는 것으로 우리의 욕심을 채우는 일에 신앙이 동원되는 것, 이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어떤 종교를 갖는 것은 자기가 원하는 소원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붙잡는 것이 인간의 종교적 본능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것을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심히 크신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과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것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 주시는 분이시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하여 우리에게 의와 거룩을 요구하시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우리가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복입니다. 우리가 소원을 정해놓고 하나님께 그것을 해달라고 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이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것은 ‘성경,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 지식을 따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성경이 요구하는 신앙의 성격과 내용을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욕심에 눈이 멀어서 바울이 유대인들을 꼬집은 식으로 얘기를 하자면 수건이 그 마음을 덮어서 우리 귀에 듣기에 좋은 말만 들리게 합니다. 이렇게 되면 참된 진리, 복음의 빛을 놓쳐버리고 맙니다. 방향과 목적과 내용이 없는 열심과 능력이 되고 맙니다.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여러분이 탄 차가 브레이커와 핸들이 없고 액셀레이터만 있는 차와 같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처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방향을 잃고 브레이커가 고장 난 빨리 달리는 차. 탄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 모두가 다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오직 내 안에 빛으로 오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깊이 알아가는 것에 우리 신앙의 목표를 두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있는 그 보배로 인해 세상에, 캠퍼스에 빛을 비추는 인생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또 하나의 재미있는 답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질그릇은 은이나 금으로 바꾸어주지 않고 질그릇인 채로 그 안에 보배를 넣는 방법을 쓰신다고 말씀합니까? 7절을 다시 다 함께 읽어보시겠습니다.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않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고 우리의 능력으로 될 수 없었듯이 우리 힘으로 누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야 됩니다. 그 은혜 베푸시는 일에 우리를 쓰셔야 됩니다. 우리는 나가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중개인으로 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불쌍한 영혼을 만나며 길 잃은 양이 하나님 앞에 인도 되도록 합니다. 우리는 앞에서 나팔을 부는 자요 그를 하나님께로 가라고 가르치는 안내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 난 뭐야?’ 이렇게 물으실 수 있습니다. ‘뭐긴 뭐에요!’ 우리를 통해 그 분이 하나님을 알게 되었으면 우리의 소임을 다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왜요? 하나님 외에는 생명과 구원을 나누어 줄 자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당연히 동역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떠나서라도 평생을 살면서 배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심히 연약하고 부패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조연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가장 대표적이고 모범답안이 디모데전서 1장에 나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딤전1:12-17) 바울은 내가 남보다 뛰어나서 사도라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내가 남들보다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고 구원해주셨다고 고백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에게 가장 귀한 직분까지 주셔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가에 대한 증거로 삼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보통 생각하기를 사도 바울은 준비된 사람이요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저 다메섹 도상에 직접 오셔서 만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사람들은 이웃 사람이 전도하거나 최소한 목사님이 하는 얘기 정도에 항복했는데 이 웬수는 예수님이 직접 오셔서야 항복할 만큼 완악했다는 표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를 용서하고 구원한 정도가 아니라 가장 훌륭한 사람에게만 주어야 마땅한 사도의 직분을 가장 못난 자에게 주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모든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17절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에 가면 사도 바울의 자랑이 나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말은 자신이 어떤 죄인인가를 부끄러움 없이 꺼내놓는 최고의 겸비한 자리에 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진 죄를 자기의 죽음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비천한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이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사도 바울이 자랑한다고 표현한 것은 그 겸비함, 그 비천함, 그 낮아짐이 그로 하여금 영원한 구원의 길에 들어서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가 자신을 증명하는 자랑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빛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그 의로우심과 베푸신 은총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게 된 우리 인생의 복된 것을 아는 자랑입니다.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일에 쓰임 받은 인생의 보람을 찾은 자랑입니다. 우리의 인생과 신앙이 바로 이 성경이 약속하고 성경이 요구한 이 자리로 돌아와 실제 삶 속에서 그 무수히 허락되어 있는,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차고 넘쳐서 눌러도 흘러 넘어가는, 내 잔이 넘치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모든 것으로 채워진 인생을 우리 각자가 경험할 수 있길 바랍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새로워 지는 것보다 더 기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을 따를 때 우리의 내면이 날로 새로워지게 됩니다. 더욱이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으로” 우리는 낙심하지 아니합니다.(17) 바울은 우리의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과 우리의 “경하고 일시적인 환난”을 비교합니다. 우리의 현재의 환난은 영원하고 지극히 큰 영광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18)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일시적이요, 다 사라지고 맙니다. 성경에 약속한 하나님의 나라만이 영원히 지속할 실재 세계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미래에 비하면 우리의 현세의 삶은 찰나와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바울과 같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기쁨으로 현재의 고난을 감당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따르는 길을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음을 배웠습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의 기쁨과 만족과 성화의 근원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의 근본목적을 복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것에 두고 내 마음에 항상 복음의 빛이 비취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배로운 복음의 직분을 맡기신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알고, 나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는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길을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을 믿고 그 능력으로 강하고 담대하게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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