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강 2013년 신년 2강(겔2:1-3:11) 이 두루마리를 네 창자에 채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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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신년 제 2 강
말씀 | 에스겔 2:1-3:11
요절 | 에스겔 3:3
이 두루마리를 네 창자에 채우라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에스겔은 “하나님이 강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 이름처럼 그를 강하게 하심으로 매우 어려운 시대, 어려운 메시지를 포로들에게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주전 597년 바벨론의 2차 침공 때 여호야긴 왕과 함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다가 5년 후 주전 592년 그가 그발 강 가에서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30세의 나이에 선지자로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22년간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그가 말씀을 증거해야 했던 대상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동족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영적인 상황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우리가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서 위로를 받고 이 시대에 복음 전도자로서의 직분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 배우고자 합니다.
1장에서 에스겔은 네 생물의 형상과 수레와 무지개의 형상을 보았는데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어려운 시대를 섬길 수 있도록 영광스러운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를 보고 그가 엎드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고 하시며 그 영이 그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하나님을 배반한 자에게 보내십니다. 그들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가시와 찔레는 사람을 찌르는 것입니다. 전갈은 한번 쏘이면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습니다. 뻔뻔하고 패역한 족속에게 나아가 말씀을 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말로 상처를 받습니다. 얼굴을 대하기가 무서울 정도로 반발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 그들이 하루만에 이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배은망덕과 교만은 오랫동안 진행되었습니다. 그들이 물질의 풍요 속에서 행복을 찾고자 했을 때 우상 숭배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바알을 함께 숭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바벨론에 멸망하게 된 것입니다. 돈 중심으로 살고자하는 사람들은 돈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돈을 많이 벌게 해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우상으로 섬기다가 하나님을 버리고 멸망하게 됩니다. 저는 오늘날 초중고생들의 58%가 가장 중요한 가치를 돈으로 생각한다는 통계를 보면서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이런 흐름을 우리가 바꾸지 못하면 이 나라의 영적인 장래는 암울하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흐름을 바꾸는 길은 우리 아이들부터 성경적인 가치관을 심는 일에 전심전력하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현실적인 것들을 더 사랑합니다. 또 이 시대는 아이들을 하나나 둘을 낳다보니 자기중심적인 사람으로 키우고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은 하나님도 다른 사람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은 자기에게 유익하면 선이고 손해가 되면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리가 없습니다. 자기중심적이 될 때 하나님의 원수로 행하게 됩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왔지만 회개하기보다는 자신들이 바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에스겔은 ‘귀환은 절대 불가능하다, 예루살렘은 곧 망한다’고 전했던 것입니다. 이런 회개와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니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포로생활하기도 어려운데 어디 와서 재앙을 메시지를 전하느냐, 어디 와서 아픈 상처에 소금을 뿌리느냐’고 분노할 것입니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도 끝까지 자기를 의지하고 죄를 남김없이 즐기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불신과 반발심과 쓴 뿌리로 가득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들을 축복하지 않으셔서 이렇게 되었다고 악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동족들에게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까? 5b절은 말씀합니다. “그들 가운데 선지자가 있음을 알지니라.” 공동 번역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래 반항하는 일밖에 모르는 족속이라 듣지 않겠지만 듣든지 안 듣든지 내 말을 전하는 자가 저희 가운데 있다는 것만은 알게 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 이스라엘 중에 선지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하십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듣느냐 듣지 않느냐 하는 결과보다, 선지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먼 훗날 선지자가 한 말이 성취될 때 그들 가운데 선지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하게 하고자 하십니다. 선지자가 있었음에도 자신들의 완악함 때문에 멸망당한 것을 깨닫게 하고자 하십니다.
그럼 여기서 ‘선지자가 있음을 알게 한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이는 그들 중에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선포되고 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세상 사람들에게 회개와 구원을 위해 줄기차게 일하고 계심을 알리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시대 캠퍼스에 선지자가 있음을 알리는 사명을 맡았습니다. 저는 한 학생과 2년 전에 일대일을 꾸준히 하고 예배도 참석했던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가 군 제대를 하고 학교에서 계속 만나서 말씀 공부에 초대를 하였습니다. 그는 그 전에도 그러했지만 지금도 4학년으로서 취직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 두려움이 그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는 말씀을 공부하는 시간을 내는 것이 어렵다고 했습니다. 많은 학생들을 만났지만 대부분 장래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런 두려움이 하나님에 대한 불신, 대적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복음에 대해서 무관심한 시대, 전도자를 무섭게 째려보고 찌르고 전갈처럼 쏘는 시대, 우리가 캠퍼스의 전도자로 살기 위해서 어떤 자세가 필요할까요? 그것은 바로 나의 기대를 넘어 하나님의 기대를 따라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노력한 만큼 열매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선지자가 있음을 알리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복음을 100명에게 전했는데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어도 복음을 전하고자 애쓴 수고 자체가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말씀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충성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요 가장 위대한 종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보내기 전에 먼저 무엇을 명하십니까? 8절을 보십시오.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라고 권면하십니다. 말씀을 전하는 종이 먼저 말씀을 받고 신뢰해야 합니다. 또 패역한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다보면 목자들도 마음에 상처를 받고 완악하게 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힘든 사람들을 섬기다가 지쳐서 마음이 황폐하게 되기도 합니다. 변화되지 않는 사람을 보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에 대한 회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또한 자신이 한 일이 헛되다고 생각하여 무기력에 빠지고 허무한 생각에 시달립니다. 이렇게 몇 년 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열매가 없을 때 새해가 되어도 의욕과 희망을 잃어버리고 새학기가 되어 양들을 만나는 것이 두렵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목자가 먼저 말씀을 먹고 마음의 상처들이 치료되고 힘을 내야 합니다. 믿음의 선진들을 보면 당대에 열매를 맺지 못했지만 그가 죽은 후에 놀라운 열매를 맺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나 이사야도 그러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후반부에 보면 믿음으로 살았지만 이 세상에서는 열매를 보지 못하고 고생만 한 사람들이 많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과에 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 역사는 경영학적으로 보면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자기 백성과 같이 패역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어야 힘을 얻습니다. 매주 주일 말씀, 일용할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는 가운데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말씀이 내 영혼의 양식이 되기까지 먹어야 합니다. 그가 먹어야 할 말씀에는 어떤 내용들이 들어 있었습니까? 9,10절을 보십시오.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이스라엘 백성이 패망할 것이라는 말씀, 그들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 그들이 당하게 될 슬픔과 고통의 말씀들은 결코 듣기 좋은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재미있는 말, 은혜로운 말, 축복의 말씀을 듣기는 좋아하지만 쓴 소리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은 그들의 현재 상태를 바꾸라는 것이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면 놀라운 축복이 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시지만 근본적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들에게 재앙이 아니라 소망을 주고자 하십니다. 쓴 한 약이 먹기에 힘들지만 몸에 좋은 것처럼, 운동이 힘들지만 몸에 좋은 것처럼, 썩은 장기를 도려내는 수술하는 것이 힘들지만 사람을 살리는 것처럼 우리는 회개의 메시지, 심판의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그 말씀은 결국 그들에게 소망을 주려는 것입니다.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씀들은 인간의 가장 깊은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씀은 인간의 가장 깊은 마음의 상태를 표현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충격을 줍니다. 삶의 변화를 이끌어냅니다. 우리가 시편을 읽어보면 시인의 슬픔과 고통, 분노를 볼 수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그의 마음과 공감을 느끼고 치료를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고통,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조롱과 모욕, 사람들과 하나님께 버림받으심, 그의 탄식과 기도를 묵상하면 놀라운 위로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인생에서 고난을 많이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활력을 주기도 합니다. 우리가 동역자들의 소감을 들으면서 치료를 경험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3장 1-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이르십니다.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두루마리는 폭이 약 25Cm, 길이가 8m에 달합니다. 이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지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두루마리를 먹고자 입을 벌렸습니다. 그가 입을 벌리니 하나님은 두루마리를 그에게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하나님의 말씀을 배에 넣으며 창자에 채우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배는 위장을 가리키고, 창자는 사람의 가장 깊은 속을 말합니다. 두루마리를 위장에 집어넣고, 또 창자에 까지 채우라는 뜻은 말씀을 깊이 소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음식이 위장에 들어가면 위액에 의해서 녹고, 창자에까지 내려가서 흡수되어 자기 몸의 살과 피로 만드는 과정을 말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눈으로 보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머리로만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배와 창자에까지 내려가서 완전히 내 몸의 살과 피가 되기까지 소화해야 합니다. 이렇게 소화된 말씀은 진정 자기 것이 됩니다. 자기 몸에 흡수된 말씀은 그의 가치관과 인생관이 됩니다. 그 사람의 인격이 되고 삶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소화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면 그 말씀이 내 삶에 필요한 지혜와 힘과 생명을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창자에 채우라는 말씀은 배부르게 먹을 뿐만 아니라 충분히 저장하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말씀 사역을 하려면 충분히 연구하고 저장한 것이 있어야 딸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깊이 있는 말씀 묵상을 통해서 성경 저자의 깊은 뜻을 알고 또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감동력으로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새해 말씀이 나의 말과 행동과 습관과 인격이 되기까지 소화하여 전하는 능력있는 말씀의 종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었을 때 그 말씀이 꿀 같이 달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는 심판과 경고의 내용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구원을 위한 섭리임을 깨달았기에 꿀처럼 달게 느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소화하면 심판의 말씀조차 달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딱딱한 음식도 잘 씹으며 달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도 딱딱해 보이지만 깊이 소화해보면 하나님의 공의가 있고 연단의 손길이 있고 그 후에 저희를 구원하시려는 사랑이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 말씀들이 꿀처럼 달게 느껴집니다. 시편 119:103절에서 시인은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라고 노래합니다. 에스겔서 후반부에 가면 회복의 메시지가 나옵니다. 마른 뼈들이 일어나서 여호와의 군대가 됩니다.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와서 강물을 살리고 대양을 살립니다. 그 좌우에는 생명나무에서 열매가 맺히고 그 잎사귀들은 치료약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때로는 회개를 촉구하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소화하면 이와 같이 꿀처럼 달고 유익하게 됩니다.
에스겔이 말씀을 전해야 할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그의 말을 듣고자 아니할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아니함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을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그가 그들의 말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방인들에게 가서 말씀을 전했다면 그들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언어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죽었다가 지옥이나 천국에 갔다 온 사람의 말도 듣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패역하고 뻔뻔한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면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또 어떤 은혜를 주십니까? 8,9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그들의 얼굴을 마주보도록 네 얼굴을 굳게 하였고 그들의 이마를 마주보도록 네 이마를 굳게 하였으되 네 이마를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 같이 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반역하는 족속이라도 두려워하지 말며 그들의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의 이마를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과 같이 하셔서 반역하는 족속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십니다. 강퍅한 그들의 얼굴을 마주 대하도록 굳게 하십니다. 한마디로 얼굴에 철판을 깔아 주십니다. 그들과 부딪혀도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전도자가 약해서 무너지지 않도록 해 주십니다. 전도자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강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강해져야 합니다. 마음이 강하지 않으면 회개의 메시지를 전할 수 없습니다. 자의식에 시달리면 담대하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종들에게 영적 무장을 시켜 주십니다. 패역한 자들의 패역함을 견뎌낼 수 있을 만큼 단단한 심령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이 일에도 연단을 받아야 합니다. 마음이 순하고 여리기만 해서는 죄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교만을 파괴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심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강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홍대 캠퍼스에 UBF 목자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우리의 복음 전도를 통해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이 캠퍼스에 전해지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에스겔 2:1-3:11
요절 | 에스겔 3:3
이 두루마리를 네 창자에 채우라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에스겔은 “하나님이 강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 이름처럼 그를 강하게 하심으로 매우 어려운 시대, 어려운 메시지를 포로들에게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주전 597년 바벨론의 2차 침공 때 여호야긴 왕과 함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다가 5년 후 주전 592년 그가 그발 강 가에서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30세의 나이에 선지자로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22년간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그가 말씀을 증거해야 했던 대상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동족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영적인 상황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우리가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서 위로를 받고 이 시대에 복음 전도자로서의 직분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 배우고자 합니다.
1장에서 에스겔은 네 생물의 형상과 수레와 무지개의 형상을 보았는데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어려운 시대를 섬길 수 있도록 영광스러운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를 보고 그가 엎드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고 하시며 그 영이 그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하나님을 배반한 자에게 보내십니다. 그들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가시와 찔레는 사람을 찌르는 것입니다. 전갈은 한번 쏘이면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습니다. 뻔뻔하고 패역한 족속에게 나아가 말씀을 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말로 상처를 받습니다. 얼굴을 대하기가 무서울 정도로 반발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 그들이 하루만에 이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배은망덕과 교만은 오랫동안 진행되었습니다. 그들이 물질의 풍요 속에서 행복을 찾고자 했을 때 우상 숭배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바알을 함께 숭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바벨론에 멸망하게 된 것입니다. 돈 중심으로 살고자하는 사람들은 돈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돈을 많이 벌게 해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우상으로 섬기다가 하나님을 버리고 멸망하게 됩니다. 저는 오늘날 초중고생들의 58%가 가장 중요한 가치를 돈으로 생각한다는 통계를 보면서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이런 흐름을 우리가 바꾸지 못하면 이 나라의 영적인 장래는 암울하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흐름을 바꾸는 길은 우리 아이들부터 성경적인 가치관을 심는 일에 전심전력하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현실적인 것들을 더 사랑합니다. 또 이 시대는 아이들을 하나나 둘을 낳다보니 자기중심적인 사람으로 키우고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은 하나님도 다른 사람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은 자기에게 유익하면 선이고 손해가 되면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리가 없습니다. 자기중심적이 될 때 하나님의 원수로 행하게 됩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왔지만 회개하기보다는 자신들이 바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에스겔은 ‘귀환은 절대 불가능하다, 예루살렘은 곧 망한다’고 전했던 것입니다. 이런 회개와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니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포로생활하기도 어려운데 어디 와서 재앙을 메시지를 전하느냐, 어디 와서 아픈 상처에 소금을 뿌리느냐’고 분노할 것입니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도 끝까지 자기를 의지하고 죄를 남김없이 즐기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불신과 반발심과 쓴 뿌리로 가득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들을 축복하지 않으셔서 이렇게 되었다고 악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동족들에게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까? 5b절은 말씀합니다. “그들 가운데 선지자가 있음을 알지니라.” 공동 번역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래 반항하는 일밖에 모르는 족속이라 듣지 않겠지만 듣든지 안 듣든지 내 말을 전하는 자가 저희 가운데 있다는 것만은 알게 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 이스라엘 중에 선지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하십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듣느냐 듣지 않느냐 하는 결과보다, 선지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먼 훗날 선지자가 한 말이 성취될 때 그들 가운데 선지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하게 하고자 하십니다. 선지자가 있었음에도 자신들의 완악함 때문에 멸망당한 것을 깨닫게 하고자 하십니다.
그럼 여기서 ‘선지자가 있음을 알게 한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이는 그들 중에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선포되고 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세상 사람들에게 회개와 구원을 위해 줄기차게 일하고 계심을 알리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시대 캠퍼스에 선지자가 있음을 알리는 사명을 맡았습니다. 저는 한 학생과 2년 전에 일대일을 꾸준히 하고 예배도 참석했던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가 군 제대를 하고 학교에서 계속 만나서 말씀 공부에 초대를 하였습니다. 그는 그 전에도 그러했지만 지금도 4학년으로서 취직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 두려움이 그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는 말씀을 공부하는 시간을 내는 것이 어렵다고 했습니다. 많은 학생들을 만났지만 대부분 장래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런 두려움이 하나님에 대한 불신, 대적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복음에 대해서 무관심한 시대, 전도자를 무섭게 째려보고 찌르고 전갈처럼 쏘는 시대, 우리가 캠퍼스의 전도자로 살기 위해서 어떤 자세가 필요할까요? 그것은 바로 나의 기대를 넘어 하나님의 기대를 따라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노력한 만큼 열매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선지자가 있음을 알리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복음을 100명에게 전했는데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어도 복음을 전하고자 애쓴 수고 자체가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말씀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충성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요 가장 위대한 종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보내기 전에 먼저 무엇을 명하십니까? 8절을 보십시오.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라고 권면하십니다. 말씀을 전하는 종이 먼저 말씀을 받고 신뢰해야 합니다. 또 패역한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다보면 목자들도 마음에 상처를 받고 완악하게 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힘든 사람들을 섬기다가 지쳐서 마음이 황폐하게 되기도 합니다. 변화되지 않는 사람을 보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에 대한 회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또한 자신이 한 일이 헛되다고 생각하여 무기력에 빠지고 허무한 생각에 시달립니다. 이렇게 몇 년 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열매가 없을 때 새해가 되어도 의욕과 희망을 잃어버리고 새학기가 되어 양들을 만나는 것이 두렵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목자가 먼저 말씀을 먹고 마음의 상처들이 치료되고 힘을 내야 합니다. 믿음의 선진들을 보면 당대에 열매를 맺지 못했지만 그가 죽은 후에 놀라운 열매를 맺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나 이사야도 그러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후반부에 보면 믿음으로 살았지만 이 세상에서는 열매를 보지 못하고 고생만 한 사람들이 많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과에 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 역사는 경영학적으로 보면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자기 백성과 같이 패역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어야 힘을 얻습니다. 매주 주일 말씀, 일용할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는 가운데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말씀이 내 영혼의 양식이 되기까지 먹어야 합니다. 그가 먹어야 할 말씀에는 어떤 내용들이 들어 있었습니까? 9,10절을 보십시오.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이스라엘 백성이 패망할 것이라는 말씀, 그들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 그들이 당하게 될 슬픔과 고통의 말씀들은 결코 듣기 좋은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재미있는 말, 은혜로운 말, 축복의 말씀을 듣기는 좋아하지만 쓴 소리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은 그들의 현재 상태를 바꾸라는 것이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면 놀라운 축복이 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시지만 근본적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들에게 재앙이 아니라 소망을 주고자 하십니다. 쓴 한 약이 먹기에 힘들지만 몸에 좋은 것처럼, 운동이 힘들지만 몸에 좋은 것처럼, 썩은 장기를 도려내는 수술하는 것이 힘들지만 사람을 살리는 것처럼 우리는 회개의 메시지, 심판의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그 말씀은 결국 그들에게 소망을 주려는 것입니다.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씀들은 인간의 가장 깊은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씀은 인간의 가장 깊은 마음의 상태를 표현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충격을 줍니다. 삶의 변화를 이끌어냅니다. 우리가 시편을 읽어보면 시인의 슬픔과 고통, 분노를 볼 수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그의 마음과 공감을 느끼고 치료를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고통,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조롱과 모욕, 사람들과 하나님께 버림받으심, 그의 탄식과 기도를 묵상하면 놀라운 위로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인생에서 고난을 많이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활력을 주기도 합니다. 우리가 동역자들의 소감을 들으면서 치료를 경험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3장 1-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이르십니다.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두루마리는 폭이 약 25Cm, 길이가 8m에 달합니다. 이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지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두루마리를 먹고자 입을 벌렸습니다. 그가 입을 벌리니 하나님은 두루마리를 그에게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하나님의 말씀을 배에 넣으며 창자에 채우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배는 위장을 가리키고, 창자는 사람의 가장 깊은 속을 말합니다. 두루마리를 위장에 집어넣고, 또 창자에 까지 채우라는 뜻은 말씀을 깊이 소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음식이 위장에 들어가면 위액에 의해서 녹고, 창자에까지 내려가서 흡수되어 자기 몸의 살과 피로 만드는 과정을 말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눈으로 보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머리로만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배와 창자에까지 내려가서 완전히 내 몸의 살과 피가 되기까지 소화해야 합니다. 이렇게 소화된 말씀은 진정 자기 것이 됩니다. 자기 몸에 흡수된 말씀은 그의 가치관과 인생관이 됩니다. 그 사람의 인격이 되고 삶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소화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면 그 말씀이 내 삶에 필요한 지혜와 힘과 생명을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창자에 채우라는 말씀은 배부르게 먹을 뿐만 아니라 충분히 저장하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말씀 사역을 하려면 충분히 연구하고 저장한 것이 있어야 딸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깊이 있는 말씀 묵상을 통해서 성경 저자의 깊은 뜻을 알고 또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감동력으로 전하기를 기도합니다. 새해 말씀이 나의 말과 행동과 습관과 인격이 되기까지 소화하여 전하는 능력있는 말씀의 종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었을 때 그 말씀이 꿀 같이 달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는 심판과 경고의 내용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구원을 위한 섭리임을 깨달았기에 꿀처럼 달게 느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소화하면 심판의 말씀조차 달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딱딱한 음식도 잘 씹으며 달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도 딱딱해 보이지만 깊이 소화해보면 하나님의 공의가 있고 연단의 손길이 있고 그 후에 저희를 구원하시려는 사랑이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 말씀들이 꿀처럼 달게 느껴집니다. 시편 119:103절에서 시인은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라고 노래합니다. 에스겔서 후반부에 가면 회복의 메시지가 나옵니다. 마른 뼈들이 일어나서 여호와의 군대가 됩니다.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와서 강물을 살리고 대양을 살립니다. 그 좌우에는 생명나무에서 열매가 맺히고 그 잎사귀들은 치료약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때로는 회개를 촉구하고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소화하면 이와 같이 꿀처럼 달고 유익하게 됩니다.
에스겔이 말씀을 전해야 할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그의 말을 듣고자 아니할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아니함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을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그가 그들의 말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방인들에게 가서 말씀을 전했다면 그들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언어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죽었다가 지옥이나 천국에 갔다 온 사람의 말도 듣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패역하고 뻔뻔한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면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또 어떤 은혜를 주십니까? 8,9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그들의 얼굴을 마주보도록 네 얼굴을 굳게 하였고 그들의 이마를 마주보도록 네 이마를 굳게 하였으되 네 이마를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 같이 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반역하는 족속이라도 두려워하지 말며 그들의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의 이마를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과 같이 하셔서 반역하는 족속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십니다. 강퍅한 그들의 얼굴을 마주 대하도록 굳게 하십니다. 한마디로 얼굴에 철판을 깔아 주십니다. 그들과 부딪혀도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전도자가 약해서 무너지지 않도록 해 주십니다. 전도자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강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강해져야 합니다. 마음이 강하지 않으면 회개의 메시지를 전할 수 없습니다. 자의식에 시달리면 담대하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종들에게 영적 무장을 시켜 주십니다. 패역한 자들의 패역함을 견뎌낼 수 있을 만큼 단단한 심령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이 일에도 연단을 받아야 합니다. 마음이 순하고 여리기만 해서는 죄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교만을 파괴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심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강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홍대 캠퍼스에 UBF 목자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우리의 복음 전도를 통해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이 캠퍼스에 전해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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