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강 2013년 신년 1강(스7:1-28) 에스라의 결심
페이지 정보

본문
2013년 신년 1 강
말씀 | 에스라 7:1-28
요절 | 에스라 7:10
에스라의 결심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2013년 새 해가 시작되는 주입니다.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 동행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새 해를 위해서 준비하고 기도 제목을 잡으며 결심을 합니다. 우리가 어떤 결심을 하느냐에 따라서 2013년 한 해 우리의 삶은 이전과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이 시간 에스라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결심을 했는지 배우고 우리도 새 해에 대한 방향을 잡고 결심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에스라는 ‘여호와가 도우심’이라는 뜻입니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본래 한 책이었는데 66권으로 편집하면서 나누어졌습니다. 에스라서는 1-6장은 성전 건축에 대해서, 7-10장은 에스라의 결심과 영적 재건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에 의한 성전 재건이 있은 후 57-58년이 지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우 세속화되었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방백들이 이방여인들과 결혼을 하고 자녀들은 국어인 히브리어도 구사할 줄 모르게 되었습니다. 사회의 지도층들이 이방인들과 섞여서 신앙을 잃어버리고 혼합되는 일은 영적으로 볼 때 심각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멸망을 당한 이유가 우상숭배와 불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와서 성전을 건축하였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은 비어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 배경 가운데서 에스라가 등장합니다.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1-5절에 그의 족보가 나옵니다. 그의 오대 조상은 사독이고, 십사대 조상은 비느하스입니다. 비느하스는 발람이 발락에게 모압 딸들과의 부정한 연합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유혹하는 법을 가르쳐 주던 바알브올의 날에 그 창으로 여호와의 진노를 돌이키게 한 장본인입니다. 하나님은 비느하스에게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주셨습니다. 에스라는 이 서약의 증인이었습니다. 대제사장 아론은 그의 16대 조상이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이더니” 에스라는 하나님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였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에스라는 서기관이요 학자로서 이 하나님의 말씀을 필사하고 연구하고 가르치는 성경선생이었습니다. 에스라가 모세의 율법에 익숙했다는 것은 그가 모세의 율법에 능숙했다, 능통했다,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전문가들은 자기 분야에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려면 평균 하루 세 시간씩 10년 즉 만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고 합니다. 세계 정상에 선 골프 선수 신지애는 하루에 골프 공 7000타를 치면서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에스라가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성경선생이 되기 위해서 그는 5살 때부터 성경을 읽고 암송하고 어디를 가든지 말씀을 가까이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에 익숙해 있습니까? 우리는 성경 선생으로서 성경에 익숙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늘 가까이에 두고 읽고 들으며 연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6b절을 보면 에스라는 또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에스라는 바벨론에서 태어났고 거기서 자랐습니다. 그는 바벨론 문화 속에서 자랐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할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또 하나님을 경외했으며 매사에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었습니다. 그 증거는 바사 왕 아닥사스다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왕에게 신임을 받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7,8절을 보십시오. 아닥사스다 왕 제7년 곧 주전 458년에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에 에스라도 예루살렘에 올라왔습니다. 그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에 오는 길은 강도와 도적 떼들이 우글거리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보다 하나님을 더 의지하였습니다. 8장에는 에스라와 함께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이 나오고 21-23절은 그들이 금식하며 하나님께 간구한 기록입니다. 그들은 아하와로 흐르는 강에 모여 삼일 동안 인원을 점검했는데 레위인이 하나도 없는 것을 발견하고 가시뱌 지방으로 사람을 보내어 성전에서 일할 레위인과 느디님 사람들을 데려오게 합니다. 노래하는 사람들도 레위인들입니다. 음악은 예배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는 예배 팀을 철저하게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그들을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안전한 여행을 위하여 하나님께 금식하며 간구하였고 그의 응낙하심을 입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가까이 하는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구하는 자에게 풍성하게 주십니다. 에스라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손의 도움을 체험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에스라는 첫째 달 초 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다섯째 달 초하루에 즉 4개월 만에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9절을 히브리어 성경 순서대로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0절은 에스라가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10절 맨 앞에 ‘왜냐하면’을 뜻하는 ‘키’라는 히브리어 접속사가 나옵니다. 그리하여 영어 번역본들은 10절을 ‘왜냐하면’을 뜻하는 ‘For’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10절은 9절에 대한 이유입니다. 즉 10절은 에스라가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은 이유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에스라가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은 이유는 그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고 그것을 이스라엘에서 가르치고자 결심했었기 때문입니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고 그것을 이스라엘에서 가르치고자 결심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올라가고자 했었던 것이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런 그를 크게 기뻐하시고 도우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에스라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11-26절은 아닥사스다 왕이 에스라에게 내린 조서의 초본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아닥사스다 왕을 통해 에스라를 어떻게 도우셨는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성경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가르치기로 결심하는 것을 매우 크게 기뻐하시고 그런 사람을 반드시 도우십니다. 에스라는 세 가지를 결심했습니다.
첫째, 에스라는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여기서 ‘연구하는 것’은 어떤 사물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애씀이나 몸부림치는 것을 가리킵니다. 에스라는 이미 여호와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여호와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라도 말씀을 연구하지 않으면 현재 나와 공동체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격적으로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지식으로 머물고 현재 나에게 빛과 생명과 은혜와 능력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성경을 공부할 때 인도자의 하는 말을 받아 적기만 합니다. 다른 사람이 푸는 것이나 은혜 받은 말씀을 놓치지 않고 공유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면 안 됩니다. 말씀은 내가 헤아리는 만큼 헤아림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감추어진 보화를 캐어내는 광부와 같이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탐구해야 합니다. 성경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고자 본문을 여러 번 읽고 관찰하고, 해석하고, 묵상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어두운 내 마음에 진리의 샛별이 떠오르기까지 기다려야 합니다(벧후 1:19). 이런 연구 과정을 통해서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이 꿀 송이처럼 달다, 생수와 같이 시원하다, 밥을 먹은 것 같이 배부르다는 만족감, 시원함, 풍성함, 자유함, ‘아하’ 소리치는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에스라는 여호와의 율법을 준행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준행한다는 것은 연구한 것을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것,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말씀을 연구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연구한 말씀을 준행하기 전에 소감을 쓰고 한 가지 결단을 합니다. 소감은 한마디가 나오기까지 써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연구한 말씀에 순종해야,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확신있게 가르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적 권위도 생기고 영향력도 있게 됩니다. 죠지 뮬러는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그러한가 실험정신을 가지고 순종했습니다. 그는 불신의 시대에 말씀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체험하고 간증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습니다. 말씀을 깨달으면 말씀대로 살고 싶어집니다. 하지 말라고 해도 그 말씀에 순종하고 싶어집니다. 우리가 연구하여 깨달은 말씀에 순종할 때 더 깊은 은혜의 세계를 체험하게 됩니다. 말씀대로 실천하는 과정을 통해서 나의 사고방식과 행동, 습관, 인격, 삶이 변화가 됩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는 말씀을 배우기는 좋아하지만 순종하기는 어려워합니다. 만약 이런 일이 계속된다면 머리만 커지고 손과 발은 말라빠진 가분수 같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나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면 정죄를 당하기 때문에 말씀을 멀리하고 아는 체 만하는 고약한 냄새나는 신자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7:24).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전에 연구한 말씀을 우리가 먼저 믿고 순종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셋째, 에스라는 여호와의 율법을 가르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하여 더 깊은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그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지 않고는 못배기게 됩니다. 어찌 이 좋은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부모님들에게, 친족들에게, 친구들에게, 자녀들에게, 이웃들에게 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가르침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전파됩니다. 가르침을 통해서 제자를 양성할 수 있습니다. 시대 문제를 깊이 고민하고 갈 길을 발견했다면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롬10:14,15)”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생명보다 귀하게 여겼습니다(행20:24).
에스라는 그 시대를 볼 때 영적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9,10장을 보면 에스라는 이방인들과 혼인함으로 혼합주의에 빠진 백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았습니다. 저녁 제사 드릴 때에 그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채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하나님께 회개를 드립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의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9:6).” 그 후에 스가냐의 동역을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고 회개할 것을 촉구합니다. 10:10,11절을 보십시오. 제사장 에스라가 일어나 그들에게 말합니다. “너희가 범죄하여 이방 여자를 아내로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으니 이제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여 그 지방 사람들과 이방여인을 끊어버리라.” 이에 모든 회중이 큰 소리로 대답합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10:12).” 느 8:3,8,9절을 보면 에스라는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깨닫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 때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하고 가르쳤을 때 백성들 가운데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말씀을 연구하는 것과 준행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 서로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성경선생이 말씀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요즈음 같이 자기 생각이 강하고 자기유익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말씀을 가르칠 학생을 얻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나가서 성경을 가르쳐줄 학생을 얻어야 합니다. 또한 집 안에 있는 양들인 자녀들에게도 열심히 가르쳐야 합니다.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한다고 반발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경선생으로서 직무유기입니다. 우리가 연구하고 준행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사람들 가운데 회개와 순종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면 에스라는 왜 여호와의 율법을 준행하며 그것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고자 결심했었을까요? 왜냐하면 에스라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말씀 연구, 준행하여 가르치지 않았을 때 본이 되어야 할 방백들과 고관과 제사장들이 오히려 이방인과 혼인하는 혼합주의의 죄에 더욱 빠졌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계속 방치하면 이스라엘은 다시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에스라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치기 위해서 말씀을 연구, 준행, 가르치기로 결심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건물만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죽은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지 않는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우리는 홍대 재학생 구원 역사가 몇 년 동안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십니다(롬4:17). 우리는 이 하나님을 믿고 말씀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고, 또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한다는 것을 확신합니까? 예, 우리는 확신합니다. 우리가 구원 받고 바르고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기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분합니까? 아니면 말씀 외에 기적이나 신비한 무엇인가 더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분합니다. 정말 그렇다면 우리도 에스라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가르치기로 결심합시다. 결심을 한다는 것은 마음을 터뜨리는 것입니다. 즉 제방이 무너져서 물이 넘쳐흐름 같이 쏟아 붓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하고 가르치는 일에 온 마음을 쏟아 붓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11-26절은 아닥사스다 왕이 에스라에게 내린 조서의 초본인데 여기에는 아닥사스다 왕이 에스라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왔는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13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을 아닥사스다 왕이 허락하는 내용이고, 14-20절은 왕과 자문관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은금과 바벨론 온 도에서 얻은 은금과 및 백성과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드릴 예물을 가져다가 하나님께 제사드리는데 사용하고, 나머지 은금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하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릇과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궁중 창고에서 가져다가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21-23절은 아닥사스다 왕이 유브라데 강 건너편 모든 창고지기에게 에스라가 구하는 모든 것을 신속히 협조하라는 내용입니다. 24-26절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는 면세 혜택을 주고 에스라에게는 사형 집행권, 법관 임명권, 귀양이나 재산 몰수권을 주었습니다. 교회는 말씀 선포와 성례전과 함께 치리를 시행함으로 거룩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에스라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결론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여 순종하고 가르치는 일에 헌신하고자 결심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에스라 7:1-28
요절 | 에스라 7:10
에스라의 결심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2013년 새 해가 시작되는 주입니다.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 동행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새 해를 위해서 준비하고 기도 제목을 잡으며 결심을 합니다. 우리가 어떤 결심을 하느냐에 따라서 2013년 한 해 우리의 삶은 이전과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이 시간 에스라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결심을 했는지 배우고 우리도 새 해에 대한 방향을 잡고 결심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에스라는 ‘여호와가 도우심’이라는 뜻입니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본래 한 책이었는데 66권으로 편집하면서 나누어졌습니다. 에스라서는 1-6장은 성전 건축에 대해서, 7-10장은 에스라의 결심과 영적 재건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에 의한 성전 재건이 있은 후 57-58년이 지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우 세속화되었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방백들이 이방여인들과 결혼을 하고 자녀들은 국어인 히브리어도 구사할 줄 모르게 되었습니다. 사회의 지도층들이 이방인들과 섞여서 신앙을 잃어버리고 혼합되는 일은 영적으로 볼 때 심각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멸망을 당한 이유가 우상숭배와 불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와서 성전을 건축하였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은 비어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 배경 가운데서 에스라가 등장합니다.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1-5절에 그의 족보가 나옵니다. 그의 오대 조상은 사독이고, 십사대 조상은 비느하스입니다. 비느하스는 발람이 발락에게 모압 딸들과의 부정한 연합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유혹하는 법을 가르쳐 주던 바알브올의 날에 그 창으로 여호와의 진노를 돌이키게 한 장본인입니다. 하나님은 비느하스에게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주셨습니다. 에스라는 이 서약의 증인이었습니다. 대제사장 아론은 그의 16대 조상이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이더니” 에스라는 하나님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였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에스라는 서기관이요 학자로서 이 하나님의 말씀을 필사하고 연구하고 가르치는 성경선생이었습니다. 에스라가 모세의 율법에 익숙했다는 것은 그가 모세의 율법에 능숙했다, 능통했다,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전문가들은 자기 분야에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한 가지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려면 평균 하루 세 시간씩 10년 즉 만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고 합니다. 세계 정상에 선 골프 선수 신지애는 하루에 골프 공 7000타를 치면서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에스라가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성경선생이 되기 위해서 그는 5살 때부터 성경을 읽고 암송하고 어디를 가든지 말씀을 가까이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에 익숙해 있습니까? 우리는 성경 선생으로서 성경에 익숙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늘 가까이에 두고 읽고 들으며 연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6b절을 보면 에스라는 또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에스라는 바벨론에서 태어났고 거기서 자랐습니다. 그는 바벨론 문화 속에서 자랐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할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또 하나님을 경외했으며 매사에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었습니다. 그 증거는 바사 왕 아닥사스다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왕에게 신임을 받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7,8절을 보십시오. 아닥사스다 왕 제7년 곧 주전 458년에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에 에스라도 예루살렘에 올라왔습니다. 그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에 오는 길은 강도와 도적 떼들이 우글거리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보다 하나님을 더 의지하였습니다. 8장에는 에스라와 함께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이 나오고 21-23절은 그들이 금식하며 하나님께 간구한 기록입니다. 그들은 아하와로 흐르는 강에 모여 삼일 동안 인원을 점검했는데 레위인이 하나도 없는 것을 발견하고 가시뱌 지방으로 사람을 보내어 성전에서 일할 레위인과 느디님 사람들을 데려오게 합니다. 노래하는 사람들도 레위인들입니다. 음악은 예배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는 예배 팀을 철저하게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그들을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안전한 여행을 위하여 하나님께 금식하며 간구하였고 그의 응낙하심을 입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가까이 하는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구하는 자에게 풍성하게 주십니다. 에스라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손의 도움을 체험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에스라는 첫째 달 초 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다섯째 달 초하루에 즉 4개월 만에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9절을 히브리어 성경 순서대로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0절은 에스라가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10절 맨 앞에 ‘왜냐하면’을 뜻하는 ‘키’라는 히브리어 접속사가 나옵니다. 그리하여 영어 번역본들은 10절을 ‘왜냐하면’을 뜻하는 ‘For’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10절은 9절에 대한 이유입니다. 즉 10절은 에스라가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은 이유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에스라가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은 이유는 그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고 그것을 이스라엘에서 가르치고자 결심했었기 때문입니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고 그것을 이스라엘에서 가르치고자 결심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올라가고자 했었던 것이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런 그를 크게 기뻐하시고 도우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에스라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11-26절은 아닥사스다 왕이 에스라에게 내린 조서의 초본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아닥사스다 왕을 통해 에스라를 어떻게 도우셨는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성경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가르치기로 결심하는 것을 매우 크게 기뻐하시고 그런 사람을 반드시 도우십니다. 에스라는 세 가지를 결심했습니다.
첫째, 에스라는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여기서 ‘연구하는 것’은 어떤 사물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애씀이나 몸부림치는 것을 가리킵니다. 에스라는 이미 여호와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여호와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라도 말씀을 연구하지 않으면 현재 나와 공동체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격적으로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지식으로 머물고 현재 나에게 빛과 생명과 은혜와 능력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성경을 공부할 때 인도자의 하는 말을 받아 적기만 합니다. 다른 사람이 푸는 것이나 은혜 받은 말씀을 놓치지 않고 공유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면 안 됩니다. 말씀은 내가 헤아리는 만큼 헤아림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감추어진 보화를 캐어내는 광부와 같이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탐구해야 합니다. 성경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고자 본문을 여러 번 읽고 관찰하고, 해석하고, 묵상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어두운 내 마음에 진리의 샛별이 떠오르기까지 기다려야 합니다(벧후 1:19). 이런 연구 과정을 통해서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이 꿀 송이처럼 달다, 생수와 같이 시원하다, 밥을 먹은 것 같이 배부르다는 만족감, 시원함, 풍성함, 자유함, ‘아하’ 소리치는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에스라는 여호와의 율법을 준행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준행한다는 것은 연구한 것을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것,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말씀을 연구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연구한 말씀을 준행하기 전에 소감을 쓰고 한 가지 결단을 합니다. 소감은 한마디가 나오기까지 써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연구한 말씀에 순종해야,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확신있게 가르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적 권위도 생기고 영향력도 있게 됩니다. 죠지 뮬러는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그러한가 실험정신을 가지고 순종했습니다. 그는 불신의 시대에 말씀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체험하고 간증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습니다. 말씀을 깨달으면 말씀대로 살고 싶어집니다. 하지 말라고 해도 그 말씀에 순종하고 싶어집니다. 우리가 연구하여 깨달은 말씀에 순종할 때 더 깊은 은혜의 세계를 체험하게 됩니다. 말씀대로 실천하는 과정을 통해서 나의 사고방식과 행동, 습관, 인격, 삶이 변화가 됩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는 말씀을 배우기는 좋아하지만 순종하기는 어려워합니다. 만약 이런 일이 계속된다면 머리만 커지고 손과 발은 말라빠진 가분수 같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나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면 정죄를 당하기 때문에 말씀을 멀리하고 아는 체 만하는 고약한 냄새나는 신자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7:24).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전에 연구한 말씀을 우리가 먼저 믿고 순종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셋째, 에스라는 여호와의 율법을 가르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하여 더 깊은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그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지 않고는 못배기게 됩니다. 어찌 이 좋은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부모님들에게, 친족들에게, 친구들에게, 자녀들에게, 이웃들에게 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가르침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전파됩니다. 가르침을 통해서 제자를 양성할 수 있습니다. 시대 문제를 깊이 고민하고 갈 길을 발견했다면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롬10:14,15)”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생명보다 귀하게 여겼습니다(행20:24).
에스라는 그 시대를 볼 때 영적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9,10장을 보면 에스라는 이방인들과 혼인함으로 혼합주의에 빠진 백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았습니다. 저녁 제사 드릴 때에 그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채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하나님께 회개를 드립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의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9:6).” 그 후에 스가냐의 동역을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고 회개할 것을 촉구합니다. 10:10,11절을 보십시오. 제사장 에스라가 일어나 그들에게 말합니다. “너희가 범죄하여 이방 여자를 아내로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으니 이제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여 그 지방 사람들과 이방여인을 끊어버리라.” 이에 모든 회중이 큰 소리로 대답합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10:12).” 느 8:3,8,9절을 보면 에스라는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깨닫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 때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하고 가르쳤을 때 백성들 가운데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말씀을 연구하는 것과 준행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 서로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성경선생이 말씀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요즈음 같이 자기 생각이 강하고 자기유익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말씀을 가르칠 학생을 얻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나가서 성경을 가르쳐줄 학생을 얻어야 합니다. 또한 집 안에 있는 양들인 자녀들에게도 열심히 가르쳐야 합니다.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한다고 반발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경선생으로서 직무유기입니다. 우리가 연구하고 준행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사람들 가운데 회개와 순종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면 에스라는 왜 여호와의 율법을 준행하며 그것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고자 결심했었을까요? 왜냐하면 에스라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말씀 연구, 준행하여 가르치지 않았을 때 본이 되어야 할 방백들과 고관과 제사장들이 오히려 이방인과 혼인하는 혼합주의의 죄에 더욱 빠졌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계속 방치하면 이스라엘은 다시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에스라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치기 위해서 말씀을 연구, 준행, 가르치기로 결심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건물만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죽은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지 않는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우리는 홍대 재학생 구원 역사가 몇 년 동안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십니다(롬4:17). 우리는 이 하나님을 믿고 말씀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고, 또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한다는 것을 확신합니까? 예, 우리는 확신합니다. 우리가 구원 받고 바르고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기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분합니까? 아니면 말씀 외에 기적이나 신비한 무엇인가 더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분합니다. 정말 그렇다면 우리도 에스라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가르치기로 결심합시다. 결심을 한다는 것은 마음을 터뜨리는 것입니다. 즉 제방이 무너져서 물이 넘쳐흐름 같이 쏟아 붓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하고 가르치는 일에 온 마음을 쏟아 붓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11-26절은 아닥사스다 왕이 에스라에게 내린 조서의 초본인데 여기에는 아닥사스다 왕이 에스라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왔는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13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을 아닥사스다 왕이 허락하는 내용이고, 14-20절은 왕과 자문관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은금과 바벨론 온 도에서 얻은 은금과 및 백성과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드릴 예물을 가져다가 하나님께 제사드리는데 사용하고, 나머지 은금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하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릇과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궁중 창고에서 가져다가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21-23절은 아닥사스다 왕이 유브라데 강 건너편 모든 창고지기에게 에스라가 구하는 모든 것을 신속히 협조하라는 내용입니다. 24-26절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는 면세 혜택을 주고 에스라에게는 사형 집행권, 법관 임명권, 귀양이나 재산 몰수권을 주었습니다. 교회는 말씀 선포와 성례전과 함께 치리를 시행함으로 거룩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에스라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결론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여 순종하고 가르치는 일에 헌신하고자 결심하기를 기도합니다.
첨부파일
-
data/message1/576a6e1c94294be9cc29cde7e7eee0be.hwp (0byte)
16회 다운로드 | DATE : 2012-12-30 13:11:3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