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강 2010년 신년2강(갈 5:16-26) 성령을 따라 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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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신년말씀 제 2 강
말씀 갈라디아서 5:16-26
요절 갈라디아서 5:16
성령을 따라 행하라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쓴 최초의 서신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제 1차 전도 여행 때 혹독한 핍박을 견디며 복음을 전파함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떠난 후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가만히 들어와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없고 율법을 행하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에 갈라디아 성도들은 큰 혼란을 겪으며 율법주의로 빠져들었습니다. 죄와 율법에 종노릇하는 옛 삶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이에 바울은 이들에게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굳게 붙잡도록 편지를 써서 권면했습니다. 1-4장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말하고 5-6장은 실천편입니다. 5:1-15절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된 자이지만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서로 종노릇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생각해 볼 16-25절은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 안에서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육체의 소욕을 이기고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 믿음과 성령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성령님은 다른 보혜사로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는 제자들 안에 거하시면서 예수님이 행하셨던 일들을 행하십니다. 보혜사는 보호하고 은혜를 주시고 가르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신비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에 있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함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하나요, 다른 하나는 성령의 은사를 주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성숙하게 하고 건강하게 하고 열매를 맺도록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이 시간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말씀이 무엇이고, 왜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하고, 어떻게 성령을 따라 행할 수 있는지 배우고자 합니다.
첫째,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은 무엇인가?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육체’는 우리의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타락한 본성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투쟁에 있어서 두 투사는 ‘육체’와 ‘성령’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는데 우리의 몸은 아직 구속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까지 이 몸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따라서 신자의 삶이 달라집니다. 타락한 본성을 잘 다스리는 사람은 생명의 충만함을 누리고 열매가 풍성하게 됩니다. 그러나 악한 본성을 다스리지 못하면 신앙생활이 매우 괴롭습니다. 불신자보다 더 괴롭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거듭나게 하십니다. 거듭나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본성을 주시고 그 다음에는 우리 속에 들어와 내주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 하시게 되면서 이 육체와 성령은 사사건건 대립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도덕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된 다음에는 더욱 치열한 영적 싸움이 있게 됩니다. 한 목자님의 고백대로 예수님을 믿고 진리 안에서 자유를 얻기를 원했는데 더욱 치열한 갈등과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보다 더 추하고 더러운 죄의 모습을 발견하고 절망하게 되었습니다. 썩은 호박을 찔러보면 여기저기서 썩은 물이 나오는 것처럼 썩은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육체와 성령은 상존하며 그 둘 사이의 갈등은 치열하고 쉴 틈이 없습니다. 우리는 도저히 화합할 수 없는 숙적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성령 안에 거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내 안에 악한 욕망이 전혀 없는 것으로가 아니라 그것들과 싸우고 있는지 아닌지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 치열한 영적 갈등을 겪는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성령의 역사하심이 강력하게 그 안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행하는 법을 깨닫게 되면 우리의 죄는 확실히 그리고 현저하게 극복됩니다. 바울은 권면합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행하라”는 말씀은 “걸어가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살다’ ‘처신하다’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말씀은 성령께서 제시하는 길을 따라 또는 그 원리를 좇아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심 때에 성령님의 새로운 실재를 경험했기 때문에 이제 그 실재 속에서 우리의 삶을 계속 살아가야만 합니다. 즉 성령과 동행하라는 것입니다. 성령과 보조를 맞추라는 것입니다. 2인 삼각 경기와 같이 성령과 보조를 맞추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나아가고자 하는데 내가 보조를 맞추지 못하면 넘어지고 맙니다. 성령께서 가만히 계신데 내가 나가고자 하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뜻을 분별하고 그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죄의 소욕을 이기는 길은 시작부터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죄의 소욕이 버들눈처럼 올라오는 것을 문질러 막을 수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말씀은 성령과 조화를 이루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수동적으로 받을 뿐만 아니라 능동적으로 성령의 역사하심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억지로 행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자발적으로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성령을 따라 행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성령과 육체의 일은 서로 대적함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는 육체의 지배를 받느냐, 성령의 지배를 받느냐,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느냐, 육체의 소욕을 따라서 사느냐 하는 문제가 있을 뿐입니다.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성령께서 죄보다 더 강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살고자 믿음으로 순종을 하면 육체의 소욕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십니다. 성령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신 구속 사역을 우리의 삶에서 작용되게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하고 믿을 때에 죄를 깨닫게 하고, 거듭나고,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할 때에 마음에 빛을 비추어 주시고, 복음을 증거 할 수 있도록 영혼에 대한 사랑과 담력을 얻게 하고, 고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할 수 있게 하고, 실패와 좌절 가운데서 능력을 얻어 다시 도전하게 하고,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불 일 듯이 불어 일으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나게 되면 성령 하나님과 내가 연결됩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죄를 이기고 열매 맺을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성령님과 우리의 관계는 레일 위를 달리는 열차로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기관차에 해당이 되고 우리는 열차에 해당이 됩니다. 우리는 열차로서 기관차에 해당되는 성령 하나님께 연결되어 그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야 속도를 빠르게도 하고 느리게도 하고 때로는 서기도 하면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성령과 우리의 관계는 파이프라인으로 그릴 수도 있습니다. 처음 거듭나서 은혜가 충만할 때는 그 파이프가 깨끗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성령님과 우리를 연결하는 파이프에 녹이 슬고 불순물들이 달라붙게 됩니다. 율법주의와 형식주의, 세속주의라는 불순물입니다. 그것이 계속 진행되면 관이 막히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이 관이 막혀서 수양회 때 회개하고 뚫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관을 주일에 한 번 정도 청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생명을 유지할 정도로 졸졸 생명수가 흐르는 작은 구멍만이 뚫려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죄의 소욕을 이기고 성령의 열매를 맺기 까지 양분이 전달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회개하고 날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적극적으로 성령을 좇는 생활을 하면 더 이상 율법에 매이지 않게 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합리적인 이성을 사용하시고 양심을 일깨우십니다. 때로는 직관을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성령 충만한 주의 종을 통해서 오기도 하고, 사건을 통해서 가르쳐 주시기도 합니다. 길이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 인정할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서 주로 기록된 말씀을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기 욕심에 집착할 때는 영적으로 둔감해지게 됩니다. 어떤 분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마음의 깊은 평화를 누립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한 변치 않는 확신이 생깁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요,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들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사도 바울은 “육체의 일들”과 “성령의 열매”를 복수 명사와 단수 명사로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동시적으로 나타납니다. 성령의 열매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사랑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에 대해서 논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르느냐 육체를 따르느냐는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자라고 있는가 또는 그 열매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열매는 하루아침에 맺혀지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필요하고 과정이 있습니다. 꽃망울이 생기고, 꽃이 피고, 구슬 알 만한 어린 열매가 생기고,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 드디어 완연하게 열매가 맺힙니다. 그리스도인의 성품도 하루아침에 영글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께서 맺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다만 성령 안에 거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4-5).” 갈 4:5절에 보면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과 충만하심을 받으면 자연스럽게 성령의 열매를 맺히게 됩니다. 성령의 능력이 지속적으로 그리고 강력하게 우리에게 역사할 때 우리는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사랑이란 모든 덕목의 기초이며, 기독교 신앙과 윤리의 뿌리입니다. 이 사랑은 아가페적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령을 따라서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의 폭이 깊고 넓어집니다. 성령을 따라서 사는 사람이 있으면 감옥이라도 변화됩니다. 범브란트 목사는 루마니아가 공산화되면서 구속되어 지옥 같은 감옥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 죽음의 감옥에서 살아 나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범브란트는 죽음의 감옥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자신도 중환자이면서 다른 환자에게 빵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어느 날 죄수 가운데 한 사람에게 설탕 한 덩어리가 들어왔습니다. 감옥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눈빛이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설탕 주인은 그걸 먹어 치우지 않고 자신보다 더 아픈 사람을 위해 아껴 두자고 했습니다. 설탕 주인은 끝내 설탕을 먹지 않고 다른 환자를 위해 아껴 두고 죽었습니다. 그 후로도 설탕은 오래도록 감옥을 돌고 또 돌았습니다. 지옥 같은 상황에서 죽어가면서도 그들은 ‘나보다 더 약한 환자를 위하여’ 설탕을 사양하는 사랑의 힘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참했던 감방이 범브란트 목사 한 사람으로 인해서 천국이 된 것입니다.
희락은 개그 콘서트에서 느끼는 상대적이며 일시적이며 또 쾌락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에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거룩하며 참된 기쁨입니다. 성령과 동행할 때 환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화평은 하나님과 화목한데서 오는 마음의 평강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트러블 메이커가 아니라 피스 메이커가 됩니다. 오래 참음이란 우리를 억압하거나 핍박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참는 것입니다. 특히 목자는 오래 참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의 특징 중에 가장 먼저 오래 참음을 들고 있습니다. 목자가 양을 잘 섬기다가 참지 못하고 혈기를 부려서 양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인간관계가 잘 유지되려면 무엇보다 오래 참아야 합니다. 자비는 관용, 너그러운 마음을, 양선이란 이웃에게 선을 베푸는 마음입니다. 충성이란 그리스도인 개인의 신실함을 의미합니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입니다. 충성스러운 사람에게 복음을 맡기라고 했고 충성스러운 사람이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온유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겸손하고 부드러운 심성을 의미하며, 모세는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절제란 육체의 소욕을 이겨낼 줄 아는 자질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은 수양이나 인간적인 노력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좇는 생활을 할 때 우리의 인격에 맺혀지는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예수님의 인격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서 살 때 이 같은 열매를 금지할 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순종하는 가운데 이런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왜 성령을 따라서 행해야 하는가? 16절에서, 우리가 성령을 따라서 행하지 않으면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살게 됩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서 살아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육체의 욕심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일은 무엇입니까? 19-21절을 보십시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성령을 따라 살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성령을 따라서 살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열다섯 가지 죄는 다음의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가 성적인 타락입니다. 음행은 간음, 혼외정사를 포함해서 모든 불법적 성 관계를 의미합니다. 더러운 것이란 성적인 불결함으로서 여기에는 상상력, 인터넷 음란 사이트를 즐기는 관음증을 포함합니다. 호색이란 더러운 욕망을 탐닉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상태, 노골적으로 방탕한 생활을 말합니다. 인간의 타락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이런 성적인 타락입니다. 둘째가 우상 숭배입니다. 우상 숭배와 술수에서 술수란 마술, 미신들을 의미합니다. 술수란 마귀의 속이는 것, 마귀의 능력을 이용해서 점을 쳐주고 돈을 버는 것도 해당이 됩니다. 셋째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죄악입니다. 원수 맺는 것은 마음에 원한을 품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의 상처를 죽을 때까지 기억하면서 복수의 날을 갈고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원수를 맺으면 자기도 괴롭지만 상대방도 가까이 다가갈 수 없습니다. 분쟁이란 언쟁이나 다툼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싸우는 정욕이라고도 부릅니다. 소리치고 욕하면서 싸우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열등감이 깊이 깔려 있습니다. 열등감이 어떤 계기로 건드려질 때 분노가 외부로 폭발하면 분쟁이 되고 내부로 폭발하면 우울증이 됩니다. 못난 자기를 한 없이 자학하다가 자신의 존재감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시기는 남이 잘 되는 것을 못 봐주는 것입니다. 항상 자기가 최고가 되어야 하고 자기가 복을 받아야 하는데 남이 잘 되는 것을 보면 경쟁심으로 인해서 시기하고 투기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가 귀하다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분냄이란 혈기를 부리는 것으로서 내면의 분노를 밖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당 짓는 것이란 자기 이익을 위해 부당한 방법을 사용하고 모략이나 음모를 일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자기 야망이라고도 합니다. 교회의 분열 뒤에는 진리보다는 인간적인 야망이 원인이 된 경우가 많습니다. 이단이란 종교적인 의미보다는 사회적인 의미로서 특정한 견해들로 뭉쳐진 집단을 말합니다. 넷째가, 술취함과 방탕과 또 그와 같은 것들로서 게으름, 안일, 무절제에서 오는 죄들입니다. 게으름이란 해야만 할 일을 하지 않거나 뒤로 미루는 것입니다. 바쁘게 살지만 해야만 할 일을 하지 않는 것도 영적인 게으름입니다. 생각을 하지 않는 것도 게으름입니다. 게으름은 죄의 온상입니다. 이런 일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한 두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일삼는 사람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위에 나타난 육체의 일들에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셋째, 어떻게 성령을 따라서 살 수 있는가? 24,25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할찌니” 이 말씀은 성령을 따라 사는 방법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음’은 수동태가 아니라 능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즉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음은 우리를 대해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연합함으로서 우리가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믿고 여길 때 더 쉽게 육체의 소욕을 부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의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직도 팔팔하게 살아 있다고 여기면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6:11절에서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강조합니다. 여기라는 말은 사실이 그러하니 그렇게 믿으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늘 성령을 따라 행할 수 있습니까? 내 마음이 늘 하나님을 즐거워할 때 가능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안에 거할 때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나를 사랑하시고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 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살 때 성령께서 나를 다스려 주십니다. 갈 2:20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는 누구이십니까? 그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바울이 성령을 따라서 사는 것은 그를 사랑하사 그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과 성령을 따라서 산다는 것은 일맥상통하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인격적인 것입니다. 바울은 날마다 예수님을 의뢰했습니다. 그는 날마다 예수님의 돌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죄와 두려움과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웠습니다. 우리가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사는 것이 성령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25절을 다시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살다”는 말은 상태를 의미하고, “행하다(생활하다)”는 말은 동작을 의미합니다. 신자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성령님으로 활동해야 합니다.
반면에 육체의 일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헛된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대인 관계가 파탄으로 치닫는 근본 원인은 자기 영광을 구하는 허영 때문입니다. 이러할 때 십중 팔구 서로 싸움을 걸거나 아니면 서로 질투하게 마련입니다(26). 바울이 26절에서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라고 말하는 배경이 무엇입니까? 율법주의자들은 성령님만 믿고 살면 육의 세력을 이길 수 없고 구체적인 삶의 규범이나 기준이 없어진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령님께서는 육의 세력보다 강하시기 때문에 죄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성령을 따라서 사는 사람은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함으로 율법을 이루게 됩니다. 성령을 따라서 사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성령을 따라서 사는 가운데 성령의 열매를 맺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열매인 사랑이 충만하여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일에서 자라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서 사는 가운데 이 세상의 유혹을 이기고 영적인 진보를 이루기를 바랍니다. 올 해 부터는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의 약속을 믿음으로 삽시다. 그것이 성령을 따라서 행하는 삶입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고 제자 양성의 열매도 풍성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갈라디아서 5:16-26
요절 갈라디아서 5:16
성령을 따라 행하라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쓴 최초의 서신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제 1차 전도 여행 때 혹독한 핍박을 견디며 복음을 전파함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떠난 후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가만히 들어와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없고 율법을 행하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에 갈라디아 성도들은 큰 혼란을 겪으며 율법주의로 빠져들었습니다. 죄와 율법에 종노릇하는 옛 삶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이에 바울은 이들에게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굳게 붙잡도록 편지를 써서 권면했습니다. 1-4장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말하고 5-6장은 실천편입니다. 5:1-15절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된 자이지만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서로 종노릇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생각해 볼 16-25절은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 안에서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육체의 소욕을 이기고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 믿음과 성령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성령님은 다른 보혜사로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는 제자들 안에 거하시면서 예수님이 행하셨던 일들을 행하십니다. 보혜사는 보호하고 은혜를 주시고 가르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신비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에 있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함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하나요, 다른 하나는 성령의 은사를 주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성숙하게 하고 건강하게 하고 열매를 맺도록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이 시간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말씀이 무엇이고, 왜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하고, 어떻게 성령을 따라 행할 수 있는지 배우고자 합니다.
첫째,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은 무엇인가?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육체’는 우리의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타락한 본성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투쟁에 있어서 두 투사는 ‘육체’와 ‘성령’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는데 우리의 몸은 아직 구속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까지 이 몸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따라서 신자의 삶이 달라집니다. 타락한 본성을 잘 다스리는 사람은 생명의 충만함을 누리고 열매가 풍성하게 됩니다. 그러나 악한 본성을 다스리지 못하면 신앙생활이 매우 괴롭습니다. 불신자보다 더 괴롭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거듭나게 하십니다. 거듭나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본성을 주시고 그 다음에는 우리 속에 들어와 내주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 하시게 되면서 이 육체와 성령은 사사건건 대립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도덕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된 다음에는 더욱 치열한 영적 싸움이 있게 됩니다. 한 목자님의 고백대로 예수님을 믿고 진리 안에서 자유를 얻기를 원했는데 더욱 치열한 갈등과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보다 더 추하고 더러운 죄의 모습을 발견하고 절망하게 되었습니다. 썩은 호박을 찔러보면 여기저기서 썩은 물이 나오는 것처럼 썩은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육체와 성령은 상존하며 그 둘 사이의 갈등은 치열하고 쉴 틈이 없습니다. 우리는 도저히 화합할 수 없는 숙적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성령 안에 거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내 안에 악한 욕망이 전혀 없는 것으로가 아니라 그것들과 싸우고 있는지 아닌지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 치열한 영적 갈등을 겪는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성령의 역사하심이 강력하게 그 안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행하는 법을 깨닫게 되면 우리의 죄는 확실히 그리고 현저하게 극복됩니다. 바울은 권면합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행하라”는 말씀은 “걸어가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살다’ ‘처신하다’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말씀은 성령께서 제시하는 길을 따라 또는 그 원리를 좇아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심 때에 성령님의 새로운 실재를 경험했기 때문에 이제 그 실재 속에서 우리의 삶을 계속 살아가야만 합니다. 즉 성령과 동행하라는 것입니다. 성령과 보조를 맞추라는 것입니다. 2인 삼각 경기와 같이 성령과 보조를 맞추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나아가고자 하는데 내가 보조를 맞추지 못하면 넘어지고 맙니다. 성령께서 가만히 계신데 내가 나가고자 하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뜻을 분별하고 그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죄의 소욕을 이기는 길은 시작부터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죄의 소욕이 버들눈처럼 올라오는 것을 문질러 막을 수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말씀은 성령과 조화를 이루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수동적으로 받을 뿐만 아니라 능동적으로 성령의 역사하심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억지로 행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자발적으로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성령을 따라 행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성령과 육체의 일은 서로 대적함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는 육체의 지배를 받느냐, 성령의 지배를 받느냐,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느냐, 육체의 소욕을 따라서 사느냐 하는 문제가 있을 뿐입니다.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성령께서 죄보다 더 강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살고자 믿음으로 순종을 하면 육체의 소욕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십니다. 성령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신 구속 사역을 우리의 삶에서 작용되게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하고 믿을 때에 죄를 깨닫게 하고, 거듭나고,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할 때에 마음에 빛을 비추어 주시고, 복음을 증거 할 수 있도록 영혼에 대한 사랑과 담력을 얻게 하고, 고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할 수 있게 하고, 실패와 좌절 가운데서 능력을 얻어 다시 도전하게 하고,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불 일 듯이 불어 일으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나게 되면 성령 하나님과 내가 연결됩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죄를 이기고 열매 맺을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성령님과 우리의 관계는 레일 위를 달리는 열차로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기관차에 해당이 되고 우리는 열차에 해당이 됩니다. 우리는 열차로서 기관차에 해당되는 성령 하나님께 연결되어 그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야 속도를 빠르게도 하고 느리게도 하고 때로는 서기도 하면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성령과 우리의 관계는 파이프라인으로 그릴 수도 있습니다. 처음 거듭나서 은혜가 충만할 때는 그 파이프가 깨끗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성령님과 우리를 연결하는 파이프에 녹이 슬고 불순물들이 달라붙게 됩니다. 율법주의와 형식주의, 세속주의라는 불순물입니다. 그것이 계속 진행되면 관이 막히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이 관이 막혀서 수양회 때 회개하고 뚫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관을 주일에 한 번 정도 청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생명을 유지할 정도로 졸졸 생명수가 흐르는 작은 구멍만이 뚫려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죄의 소욕을 이기고 성령의 열매를 맺기 까지 양분이 전달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회개하고 날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적극적으로 성령을 좇는 생활을 하면 더 이상 율법에 매이지 않게 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합리적인 이성을 사용하시고 양심을 일깨우십니다. 때로는 직관을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성령 충만한 주의 종을 통해서 오기도 하고, 사건을 통해서 가르쳐 주시기도 합니다. 길이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 인정할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서 주로 기록된 말씀을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기 욕심에 집착할 때는 영적으로 둔감해지게 됩니다. 어떤 분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마음의 깊은 평화를 누립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한 변치 않는 확신이 생깁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요,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들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사도 바울은 “육체의 일들”과 “성령의 열매”를 복수 명사와 단수 명사로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동시적으로 나타납니다. 성령의 열매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사랑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에 대해서 논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르느냐 육체를 따르느냐는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자라고 있는가 또는 그 열매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열매는 하루아침에 맺혀지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필요하고 과정이 있습니다. 꽃망울이 생기고, 꽃이 피고, 구슬 알 만한 어린 열매가 생기고,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 드디어 완연하게 열매가 맺힙니다. 그리스도인의 성품도 하루아침에 영글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께서 맺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다만 성령 안에 거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4-5).” 갈 4:5절에 보면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과 충만하심을 받으면 자연스럽게 성령의 열매를 맺히게 됩니다. 성령의 능력이 지속적으로 그리고 강력하게 우리에게 역사할 때 우리는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사랑이란 모든 덕목의 기초이며, 기독교 신앙과 윤리의 뿌리입니다. 이 사랑은 아가페적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령을 따라서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의 폭이 깊고 넓어집니다. 성령을 따라서 사는 사람이 있으면 감옥이라도 변화됩니다. 범브란트 목사는 루마니아가 공산화되면서 구속되어 지옥 같은 감옥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 죽음의 감옥에서 살아 나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범브란트는 죽음의 감옥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자신도 중환자이면서 다른 환자에게 빵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어느 날 죄수 가운데 한 사람에게 설탕 한 덩어리가 들어왔습니다. 감옥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눈빛이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설탕 주인은 그걸 먹어 치우지 않고 자신보다 더 아픈 사람을 위해 아껴 두자고 했습니다. 설탕 주인은 끝내 설탕을 먹지 않고 다른 환자를 위해 아껴 두고 죽었습니다. 그 후로도 설탕은 오래도록 감옥을 돌고 또 돌았습니다. 지옥 같은 상황에서 죽어가면서도 그들은 ‘나보다 더 약한 환자를 위하여’ 설탕을 사양하는 사랑의 힘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참했던 감방이 범브란트 목사 한 사람으로 인해서 천국이 된 것입니다.
희락은 개그 콘서트에서 느끼는 상대적이며 일시적이며 또 쾌락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에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거룩하며 참된 기쁨입니다. 성령과 동행할 때 환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화평은 하나님과 화목한데서 오는 마음의 평강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트러블 메이커가 아니라 피스 메이커가 됩니다. 오래 참음이란 우리를 억압하거나 핍박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참는 것입니다. 특히 목자는 오래 참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의 특징 중에 가장 먼저 오래 참음을 들고 있습니다. 목자가 양을 잘 섬기다가 참지 못하고 혈기를 부려서 양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인간관계가 잘 유지되려면 무엇보다 오래 참아야 합니다. 자비는 관용, 너그러운 마음을, 양선이란 이웃에게 선을 베푸는 마음입니다. 충성이란 그리스도인 개인의 신실함을 의미합니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입니다. 충성스러운 사람에게 복음을 맡기라고 했고 충성스러운 사람이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온유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겸손하고 부드러운 심성을 의미하며, 모세는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절제란 육체의 소욕을 이겨낼 줄 아는 자질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은 수양이나 인간적인 노력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좇는 생활을 할 때 우리의 인격에 맺혀지는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예수님의 인격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서 살 때 이 같은 열매를 금지할 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순종하는 가운데 이런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왜 성령을 따라서 행해야 하는가? 16절에서, 우리가 성령을 따라서 행하지 않으면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살게 됩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서 살아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육체의 욕심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일은 무엇입니까? 19-21절을 보십시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성령을 따라 살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성령을 따라서 살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열다섯 가지 죄는 다음의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가 성적인 타락입니다. 음행은 간음, 혼외정사를 포함해서 모든 불법적 성 관계를 의미합니다. 더러운 것이란 성적인 불결함으로서 여기에는 상상력, 인터넷 음란 사이트를 즐기는 관음증을 포함합니다. 호색이란 더러운 욕망을 탐닉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상태, 노골적으로 방탕한 생활을 말합니다. 인간의 타락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이런 성적인 타락입니다. 둘째가 우상 숭배입니다. 우상 숭배와 술수에서 술수란 마술, 미신들을 의미합니다. 술수란 마귀의 속이는 것, 마귀의 능력을 이용해서 점을 쳐주고 돈을 버는 것도 해당이 됩니다. 셋째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죄악입니다. 원수 맺는 것은 마음에 원한을 품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의 상처를 죽을 때까지 기억하면서 복수의 날을 갈고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원수를 맺으면 자기도 괴롭지만 상대방도 가까이 다가갈 수 없습니다. 분쟁이란 언쟁이나 다툼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싸우는 정욕이라고도 부릅니다. 소리치고 욕하면서 싸우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열등감이 깊이 깔려 있습니다. 열등감이 어떤 계기로 건드려질 때 분노가 외부로 폭발하면 분쟁이 되고 내부로 폭발하면 우울증이 됩니다. 못난 자기를 한 없이 자학하다가 자신의 존재감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시기는 남이 잘 되는 것을 못 봐주는 것입니다. 항상 자기가 최고가 되어야 하고 자기가 복을 받아야 하는데 남이 잘 되는 것을 보면 경쟁심으로 인해서 시기하고 투기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가 귀하다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분냄이란 혈기를 부리는 것으로서 내면의 분노를 밖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당 짓는 것이란 자기 이익을 위해 부당한 방법을 사용하고 모략이나 음모를 일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자기 야망이라고도 합니다. 교회의 분열 뒤에는 진리보다는 인간적인 야망이 원인이 된 경우가 많습니다. 이단이란 종교적인 의미보다는 사회적인 의미로서 특정한 견해들로 뭉쳐진 집단을 말합니다. 넷째가, 술취함과 방탕과 또 그와 같은 것들로서 게으름, 안일, 무절제에서 오는 죄들입니다. 게으름이란 해야만 할 일을 하지 않거나 뒤로 미루는 것입니다. 바쁘게 살지만 해야만 할 일을 하지 않는 것도 영적인 게으름입니다. 생각을 하지 않는 것도 게으름입니다. 게으름은 죄의 온상입니다. 이런 일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한 두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일삼는 사람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위에 나타난 육체의 일들에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셋째, 어떻게 성령을 따라서 살 수 있는가? 24,25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할찌니” 이 말씀은 성령을 따라 사는 방법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음’은 수동태가 아니라 능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즉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음은 우리를 대해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연합함으로서 우리가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믿고 여길 때 더 쉽게 육체의 소욕을 부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의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직도 팔팔하게 살아 있다고 여기면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6:11절에서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강조합니다. 여기라는 말은 사실이 그러하니 그렇게 믿으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늘 성령을 따라 행할 수 있습니까? 내 마음이 늘 하나님을 즐거워할 때 가능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안에 거할 때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나를 사랑하시고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 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살 때 성령께서 나를 다스려 주십니다. 갈 2:20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는 누구이십니까? 그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바울이 성령을 따라서 사는 것은 그를 사랑하사 그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과 성령을 따라서 산다는 것은 일맥상통하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인격적인 것입니다. 바울은 날마다 예수님을 의뢰했습니다. 그는 날마다 예수님의 돌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죄와 두려움과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웠습니다. 우리가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사는 것이 성령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25절을 다시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살다”는 말은 상태를 의미하고, “행하다(생활하다)”는 말은 동작을 의미합니다. 신자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성령님으로 활동해야 합니다.
반면에 육체의 일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헛된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대인 관계가 파탄으로 치닫는 근본 원인은 자기 영광을 구하는 허영 때문입니다. 이러할 때 십중 팔구 서로 싸움을 걸거나 아니면 서로 질투하게 마련입니다(26). 바울이 26절에서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라고 말하는 배경이 무엇입니까? 율법주의자들은 성령님만 믿고 살면 육의 세력을 이길 수 없고 구체적인 삶의 규범이나 기준이 없어진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령님께서는 육의 세력보다 강하시기 때문에 죄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성령을 따라서 사는 사람은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함으로 율법을 이루게 됩니다. 성령을 따라서 사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성령을 따라서 사는 가운데 성령의 열매를 맺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열매인 사랑이 충만하여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일에서 자라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서 사는 가운데 이 세상의 유혹을 이기고 영적인 진보를 이루기를 바랍니다. 올 해 부터는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의 약속을 믿음으로 삽시다. 그것이 성령을 따라서 행하는 삶입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고 제자 양성의 열매도 풍성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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