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21년 성탄2강(마2:1-12) 경배 받으실 왕 예수님
페이지 정보

본문
2021년 성탄 제 2 강
말씀 | 마태복음 2:1-12
요절 | 마태복음 2:11
경배 받으실 왕 예수님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오늘은 동방 박사들의 경배 이야기입니다. 박사들은 온 세상을 구원할 경배 받으실 왕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방인인데 유대인의 왕을 찾아 왔습니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찾아왔고 그를 경배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들에게 유대인의 왕은 어떤 분이었을까요? 예수님은 어떤 점에서 모든 사람들의 경배를 받기에 합당한 왕이실까요? 우리도 경배 받으실 왕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헤롯 왕 때에 예수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셨습니다. 헤롯 왕은 폭군이었고 독재자였습니다. 에돔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에 의해서 왕으로 임명 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성전을 재건하고, 원형 경기장과 도적들을 퇴치하였습니다. 그러나 말년에는 정적에 대한 공포로 극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아내 마리암네와 ‘알렉산더'(Alexander)와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 등 최소한 2명의 아들들과 처남들을 죽였습니다. 예수님 탄생 소식을 들은 후에는 2살 이하의 아이들을 수없이 죽였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의 시대 상황은 이렇게 어두웠습니다.
이런 때에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기 위해서 왔노라고 말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페르시아에서 제사를 드리는 성직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귀족계급이었고, 철학, 과학, 역사, 의학, 기하학, 천문학 등 모든 학문을 통달한 최고의 지성인들이었습니다. 학문 중에서도 가장 수준 높은 학문은 천문학 곧 점성술이었습니다. 동양에서도 천자문을 뗀 후에는 소학을 배우고 사서삼경을 공부했는데, 제일 마지막에 공부하는 것이 주역이라고 부르는 역경입니다. 역경은 음양의 이치와 하늘의 별자리를 통해서 하늘의 뜻을 살피는 학문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사람의 노력이나 뜻으로 되지 않습니다. 농부가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하늘에서 비를 내려주지 않으면 결실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천석지기는 사람의 노력으로 되지만 만석지기는 하늘이 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들이 하늘의 뜻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어느 시대에나 세상의 이치를 공부한 후에는 하늘의 뜻을 살피는 공부를 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하늘의 별자리의 움직임을 통해서 하늘의 뜻을 살피고 시대를 분별했습니다.
우리도 나이를 먹고 신앙이 성숙해 갈수록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이루는 일에 힘을 쓰게 됩니다. 왜냐하면 남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고,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 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뜻은 고작 7,80년이지만 하나님의 뜻은 영원합니다. 우리가 내가 죽으면 사라질 자기실현을 이루고자 애를 쓰기보다 영원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사는 것이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이집트와 그리스를 비롯한 주변 국가들의 책들을 수집해서 연구했습니다. 당시 페르시아 지역에는 바벨론 포로 이후 흩어진 유대인들이 많았습니다. 박사들은 그들을 통해서 성경을 구입해서 읽고 연구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잘 알았습니다. 민수기 24장 17절은 동방에서 온 발람 선지자가 예언한 내용입니다. “한 별이 야곱에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서 나올 것이라.” 이 예언은 유대인들을 통해서 동방에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할 즈음에는 사람들이 곧 메시아가 탄생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메시아 탄생을 기다렸습니다. 동방박사들도 메시아 탄생을 고대하면서 하늘의 별들을 관찰했습니다(민24:17). 특히 그들은 세상의 권력자들 밑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입니다. 세상 권력자들의 한계를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인생들을 다스려 줄 참된 왕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매일 하늘을 쳐다보면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발견하여 진리대로 사는 것을 인생의 참 기쁨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수단으로 삼지 않고 목적으로 삼았던 구도자들입니다. 그러다가 찬란하게 빛나는 메시아의 별이 나타난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도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30)”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것은 비밀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공개된 것이었습니다.
이방의 박사들이 동방의 왕이 아니고 유대인의 왕인데 경배(敬拜)하려 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경배란 예배와 같은 의미입니다. 최상의 가치를 가지신 분으로 인정하고 공손하게 절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메시아로서 경배 받으실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민족과 국경을 초월해서 예배해야 할 분이십니다. 그 분은 성육신하셨지만 하나님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경배한 첫 번째 사람들로서 동방박사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메시아일 뿐만 아니라 세계 만민의 구세주이기 때문입니다.
몽골에서 사역했던 이용규 선교사가 쓴 ⌜내려놓음⌟이란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예배 시간에 ‘벌러르’라는 자매가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몇 달 전에 기도로 듣지 못하던 귀가 열린 자매였습니다. 예배가 시작되기 몇 시간 전에 소를 잃어버려서 소를 찾으러 다니다가 예배 시간이 임박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소를 버려두고 들판을 가로질러서 뛰어온 것입니다. 벌러르 자매는 초신자였지만 소를 버려두고 올만큼 예배를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예배드리는 것을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겼습니다. 이용규 선교사는 하나님께 벌러르 자매가 소가 아닌 예배를 택한 그 믿음의 결단을 부끄럽게 하지 말아달라고, 다시 소를 찾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예배가 마치자마자 밖에서 소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잃어버렸던 소가 벌러르 자매를 따라서 교회에 온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예배드리는 자를 축복해 주시고 만나 주십니다. 잠언 8:17 “나를 간절히 찾는 자들이 나를 만날 것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동방 박사들의 소식을 들은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소동했습니다. 왕은 즉시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었습니다. 그들은 인공지능기(AI)와 같이 대답했습니다.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은 왕궁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헤롯 왕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그들은 헤롯이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는 입발린 말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향했습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8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해발 600m가 넘는 높은 산마루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곳은 지금 팔레스타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공격을 받아서 건물들은 파괴되고 살기가 매우 힘든 지역입니다. 그곳에 예수님이 탄생하셨던 장소가 있는데 바위가 파진 굴과 같습니다. 베들레헴은 다윗 왕의 고향으로서 어릴 적 그는 이곳에서 양을 치면서 자랐습니다(삼상16:1; 17:2). 더욱이 중요한 사실은 메시아가 이곳에서 탄생하실 것이라고 미가 선지자가 예언한 것입니다. 미가서 5장 2절을 보면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저자 마태가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는 말씀을 미5:4절을 더해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는 말씀으로 바꾸었습니다. 왕이시지만 목자처럼 다스린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마태복음에서 강조하는 예수님은 목자 같은 긍휼로 다스리는 왕이십니다. 왕과 목자는 상반되는 존재입니다. 왕은 권력을 가지고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 지시하고 부려먹습니다. 반면에 목자는 양들을 돌보고 자녀와 같이 섬기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왕이시지만 목자처럼 다스리십니다. 그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양들의 생명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십니다. 양들이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도록 인도하십니다.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 때에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을 할 때에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던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동방 박사들을 그 별이 인도하게 했습니다. 별을 보며 인생을 탐구한 박사들에게 별은 아주 친근한 존재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금은 말씀과 성령으로 인도하십니다. 특히 주일 메시지나 일용할 양식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인도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 때 성령님의 조명을 통해 느껴지는 것과 지성의 판단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경험하게 됩니다. 내가 받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 안에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박사들은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을 때의 특징이 기쁨입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었을 때에 기쁨이 충만해서 물동이를 두고 마을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자기가 만난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세리 삭개오도 예수님이 자기의 이름을 불러 주시며 함께 집에 오셔서 식사를 할 때에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는 주님을 만난 기쁨으로 인해 자기의 소유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안드레와 요한은 하루 밤을 예수님과 함께 지내고 나서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기뻐하며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박사들은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였습니다. 왕께 경배할 때는 빈 손으로 올 수 없습니다. 그들은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경배라는 것은 자신의 마음과 성품과 모든 것을 다 드리는 것입니다. 그들이 엎드려 아기께 경배했다는 것은 순종하고 복종하고 헌신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님을 나의 왕이요 나의 구주로 믿고 마음 첫 자리에 모시고 진심과 애정을 쏟았습니다. 예수님은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신명기 6:4,5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우리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면 우리에게는 무엇이 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이런 명령을 내리실 수가 있을까요? 세상에 누가 우리에게 이런 명령과 요구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이런 명령을 내리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먼저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서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선한 목자로서 나를 돌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나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하게 사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잘 아십니다. 우상은 섬기면 섬길수록 내가 피폐해집니다. 남는 것은 허무함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서 사랑할 때 생명의 풍성함을 맛보고 참된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인간이란 존재가 그렇게 지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생수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팠는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입니다(렘 2:13). 하나님은 그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귀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가 먼저 나를 사랑하셨기에 그런 사랑을 요구하실 수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나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롬12:1,2). 이것을 헌신이라고 합니다. 왕께 바치는 것을 진상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천 쌀, 안성 유기, 파주 참 게장, 밀양 대추, 나주 배 등이 있었습니다. 가장 귀중한 것을 왕에게 바쳤습니다. 이처럼 동방박사들도 가장 귀한 황금, 유황, 몰약을 아기 예수님께 예물로 드렸습니다. 황금은 왕에게 드리는 선물입니다(시72:15). 황금은 변치 않는 충성을 상징합니다. 유향은 어떤 나무들의 껍질에서 얻은 번지르르하고 향기가 나는 수지(樹脂-진)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었습니다(사60:6). 유향은 순결을 상징합니다. 제사장이 백성들을 대신하여 성소에 들어가서 사용했습니다.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 유향을 드린 것입니다. 몰약은 값비싼 향료와 향수로서(시45:8), 역시 나무에서 얻었으며 시신의 방부처리에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몰약은 죽을 사람에게 드리는 예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인류의 구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나타냅니다.
이와 같이 박사들은 예물을 드리고 경배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예배의 본질입니다. 우리도 예배를 드릴 때 준비된 마음과 함께 헌금을 드립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물입니다. 박사들은 순수하게 예수님을 만나고 보배합을 드려서 예배했기 때문에 기쁨이 더욱 컸습니다. 순수한 영혼의 기쁨을 소유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목적이 자기 욕심이나 세속적인 것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경배하고자 할 때 기쁨이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자신의 현실문제 해결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병 고침을 받기 위해서 온 것도 아닙니다. 다른 무엇을 구하기 위해 나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경배하면 손해 본다고 생각하고 경배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한 경배를 드릴 때 기쁨이 넘치고 감사가 넘치고 생명력이 충만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참된 안식을 누립니다.
이번 성탄절에 우리는 나이지리아 야바텍 센터 구입과 선교사님들을 위한 구제를 위해서 성탄 보배합을 드리고자 합니다. 야바텍 센터는 이디모데 안나 선교사님들이 윤안드레 선교사님 가정과 함께 개척하고 사역을 한 곳입니다. 이 센터는 개울 옆에 있어서 비가 올 때마다 침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국가에서 안전검사 후 철거명령을 내렸습니다. 이곳은 현재 듀크 목자가 지부장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현재 6가정이 섬기고 있는데 국민 대다수가 하루 1달러로 생활을 합니다. 그들이 센터 임대시 연간 3천불의 임대료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성탄 헌금이 야바텍 새 센터 구입을 위한 지원에 쓰여질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을 통해 나이지리아 구원 역사와 제자 양성 역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길 소망합니다. 또한 상시적으로 구제해야 할 선교사 가정이 20가정이 됩니다. 코로나 19로 어려운 때에 이들을 지원함으로 세계선교 역사가 중단없이 이루어지길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드리는 성탄 보배합을 받으시고 세계 만민 구원 역사를 힘있게 이루어 가시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태복음 2:1-12
요절 | 마태복음 2:11
경배 받으실 왕 예수님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오늘은 동방 박사들의 경배 이야기입니다. 박사들은 온 세상을 구원할 경배 받으실 왕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방인인데 유대인의 왕을 찾아 왔습니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찾아왔고 그를 경배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들에게 유대인의 왕은 어떤 분이었을까요? 예수님은 어떤 점에서 모든 사람들의 경배를 받기에 합당한 왕이실까요? 우리도 경배 받으실 왕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헤롯 왕 때에 예수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셨습니다. 헤롯 왕은 폭군이었고 독재자였습니다. 에돔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에 의해서 왕으로 임명 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성전을 재건하고, 원형 경기장과 도적들을 퇴치하였습니다. 그러나 말년에는 정적에 대한 공포로 극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아내 마리암네와 ‘알렉산더'(Alexander)와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 등 최소한 2명의 아들들과 처남들을 죽였습니다. 예수님 탄생 소식을 들은 후에는 2살 이하의 아이들을 수없이 죽였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의 시대 상황은 이렇게 어두웠습니다.
이런 때에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기 위해서 왔노라고 말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페르시아에서 제사를 드리는 성직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귀족계급이었고, 철학, 과학, 역사, 의학, 기하학, 천문학 등 모든 학문을 통달한 최고의 지성인들이었습니다. 학문 중에서도 가장 수준 높은 학문은 천문학 곧 점성술이었습니다. 동양에서도 천자문을 뗀 후에는 소학을 배우고 사서삼경을 공부했는데, 제일 마지막에 공부하는 것이 주역이라고 부르는 역경입니다. 역경은 음양의 이치와 하늘의 별자리를 통해서 하늘의 뜻을 살피는 학문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사람의 노력이나 뜻으로 되지 않습니다. 농부가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하늘에서 비를 내려주지 않으면 결실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천석지기는 사람의 노력으로 되지만 만석지기는 하늘이 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들이 하늘의 뜻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어느 시대에나 세상의 이치를 공부한 후에는 하늘의 뜻을 살피는 공부를 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하늘의 별자리의 움직임을 통해서 하늘의 뜻을 살피고 시대를 분별했습니다.
우리도 나이를 먹고 신앙이 성숙해 갈수록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이루는 일에 힘을 쓰게 됩니다. 왜냐하면 남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고,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 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뜻은 고작 7,80년이지만 하나님의 뜻은 영원합니다. 우리가 내가 죽으면 사라질 자기실현을 이루고자 애를 쓰기보다 영원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사는 것이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이집트와 그리스를 비롯한 주변 국가들의 책들을 수집해서 연구했습니다. 당시 페르시아 지역에는 바벨론 포로 이후 흩어진 유대인들이 많았습니다. 박사들은 그들을 통해서 성경을 구입해서 읽고 연구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잘 알았습니다. 민수기 24장 17절은 동방에서 온 발람 선지자가 예언한 내용입니다. “한 별이 야곱에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서 나올 것이라.” 이 예언은 유대인들을 통해서 동방에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할 즈음에는 사람들이 곧 메시아가 탄생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메시아 탄생을 기다렸습니다. 동방박사들도 메시아 탄생을 고대하면서 하늘의 별들을 관찰했습니다(민24:17). 특히 그들은 세상의 권력자들 밑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입니다. 세상 권력자들의 한계를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인생들을 다스려 줄 참된 왕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매일 하늘을 쳐다보면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발견하여 진리대로 사는 것을 인생의 참 기쁨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수단으로 삼지 않고 목적으로 삼았던 구도자들입니다. 그러다가 찬란하게 빛나는 메시아의 별이 나타난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도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30)”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것은 비밀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공개된 것이었습니다.
이방의 박사들이 동방의 왕이 아니고 유대인의 왕인데 경배(敬拜)하려 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경배란 예배와 같은 의미입니다. 최상의 가치를 가지신 분으로 인정하고 공손하게 절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메시아로서 경배 받으실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민족과 국경을 초월해서 예배해야 할 분이십니다. 그 분은 성육신하셨지만 하나님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경배한 첫 번째 사람들로서 동방박사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메시아일 뿐만 아니라 세계 만민의 구세주이기 때문입니다.
몽골에서 사역했던 이용규 선교사가 쓴 ⌜내려놓음⌟이란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예배 시간에 ‘벌러르’라는 자매가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몇 달 전에 기도로 듣지 못하던 귀가 열린 자매였습니다. 예배가 시작되기 몇 시간 전에 소를 잃어버려서 소를 찾으러 다니다가 예배 시간이 임박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소를 버려두고 들판을 가로질러서 뛰어온 것입니다. 벌러르 자매는 초신자였지만 소를 버려두고 올만큼 예배를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예배드리는 것을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겼습니다. 이용규 선교사는 하나님께 벌러르 자매가 소가 아닌 예배를 택한 그 믿음의 결단을 부끄럽게 하지 말아달라고, 다시 소를 찾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예배가 마치자마자 밖에서 소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잃어버렸던 소가 벌러르 자매를 따라서 교회에 온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예배드리는 자를 축복해 주시고 만나 주십니다. 잠언 8:17 “나를 간절히 찾는 자들이 나를 만날 것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동방 박사들의 소식을 들은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소동했습니다. 왕은 즉시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었습니다. 그들은 인공지능기(AI)와 같이 대답했습니다.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은 왕궁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헤롯 왕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그들은 헤롯이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는 입발린 말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향했습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8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해발 600m가 넘는 높은 산마루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곳은 지금 팔레스타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공격을 받아서 건물들은 파괴되고 살기가 매우 힘든 지역입니다. 그곳에 예수님이 탄생하셨던 장소가 있는데 바위가 파진 굴과 같습니다. 베들레헴은 다윗 왕의 고향으로서 어릴 적 그는 이곳에서 양을 치면서 자랐습니다(삼상16:1; 17:2). 더욱이 중요한 사실은 메시아가 이곳에서 탄생하실 것이라고 미가 선지자가 예언한 것입니다. 미가서 5장 2절을 보면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저자 마태가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는 말씀을 미5:4절을 더해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는 말씀으로 바꾸었습니다. 왕이시지만 목자처럼 다스린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마태복음에서 강조하는 예수님은 목자 같은 긍휼로 다스리는 왕이십니다. 왕과 목자는 상반되는 존재입니다. 왕은 권력을 가지고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 지시하고 부려먹습니다. 반면에 목자는 양들을 돌보고 자녀와 같이 섬기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왕이시지만 목자처럼 다스리십니다. 그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양들의 생명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십니다. 양들이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도록 인도하십니다.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 때에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을 할 때에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던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동방 박사들을 그 별이 인도하게 했습니다. 별을 보며 인생을 탐구한 박사들에게 별은 아주 친근한 존재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금은 말씀과 성령으로 인도하십니다. 특히 주일 메시지나 일용할 양식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인도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 때 성령님의 조명을 통해 느껴지는 것과 지성의 판단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경험하게 됩니다. 내가 받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 안에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박사들은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을 때의 특징이 기쁨입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었을 때에 기쁨이 충만해서 물동이를 두고 마을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자기가 만난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세리 삭개오도 예수님이 자기의 이름을 불러 주시며 함께 집에 오셔서 식사를 할 때에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는 주님을 만난 기쁨으로 인해 자기의 소유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안드레와 요한은 하루 밤을 예수님과 함께 지내고 나서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기뻐하며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박사들은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였습니다. 왕께 경배할 때는 빈 손으로 올 수 없습니다. 그들은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경배라는 것은 자신의 마음과 성품과 모든 것을 다 드리는 것입니다. 그들이 엎드려 아기께 경배했다는 것은 순종하고 복종하고 헌신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님을 나의 왕이요 나의 구주로 믿고 마음 첫 자리에 모시고 진심과 애정을 쏟았습니다. 예수님은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신명기 6:4,5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우리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면 우리에게는 무엇이 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이런 명령을 내리실 수가 있을까요? 세상에 누가 우리에게 이런 명령과 요구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이런 명령을 내리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먼저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서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선한 목자로서 나를 돌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나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하게 사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잘 아십니다. 우상은 섬기면 섬길수록 내가 피폐해집니다. 남는 것은 허무함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서 사랑할 때 생명의 풍성함을 맛보고 참된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인간이란 존재가 그렇게 지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생수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팠는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입니다(렘 2:13). 하나님은 그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귀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가 먼저 나를 사랑하셨기에 그런 사랑을 요구하실 수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나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롬12:1,2). 이것을 헌신이라고 합니다. 왕께 바치는 것을 진상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천 쌀, 안성 유기, 파주 참 게장, 밀양 대추, 나주 배 등이 있었습니다. 가장 귀중한 것을 왕에게 바쳤습니다. 이처럼 동방박사들도 가장 귀한 황금, 유황, 몰약을 아기 예수님께 예물로 드렸습니다. 황금은 왕에게 드리는 선물입니다(시72:15). 황금은 변치 않는 충성을 상징합니다. 유향은 어떤 나무들의 껍질에서 얻은 번지르르하고 향기가 나는 수지(樹脂-진)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었습니다(사60:6). 유향은 순결을 상징합니다. 제사장이 백성들을 대신하여 성소에 들어가서 사용했습니다.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 유향을 드린 것입니다. 몰약은 값비싼 향료와 향수로서(시45:8), 역시 나무에서 얻었으며 시신의 방부처리에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몰약은 죽을 사람에게 드리는 예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인류의 구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나타냅니다.
이와 같이 박사들은 예물을 드리고 경배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예배의 본질입니다. 우리도 예배를 드릴 때 준비된 마음과 함께 헌금을 드립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물입니다. 박사들은 순수하게 예수님을 만나고 보배합을 드려서 예배했기 때문에 기쁨이 더욱 컸습니다. 순수한 영혼의 기쁨을 소유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목적이 자기 욕심이나 세속적인 것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경배하고자 할 때 기쁨이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자신의 현실문제 해결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병 고침을 받기 위해서 온 것도 아닙니다. 다른 무엇을 구하기 위해 나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경배하면 손해 본다고 생각하고 경배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한 경배를 드릴 때 기쁨이 넘치고 감사가 넘치고 생명력이 충만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참된 안식을 누립니다.
이번 성탄절에 우리는 나이지리아 야바텍 센터 구입과 선교사님들을 위한 구제를 위해서 성탄 보배합을 드리고자 합니다. 야바텍 센터는 이디모데 안나 선교사님들이 윤안드레 선교사님 가정과 함께 개척하고 사역을 한 곳입니다. 이 센터는 개울 옆에 있어서 비가 올 때마다 침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국가에서 안전검사 후 철거명령을 내렸습니다. 이곳은 현재 듀크 목자가 지부장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현재 6가정이 섬기고 있는데 국민 대다수가 하루 1달러로 생활을 합니다. 그들이 센터 임대시 연간 3천불의 임대료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성탄 헌금이 야바텍 새 센터 구입을 위한 지원에 쓰여질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을 통해 나이지리아 구원 역사와 제자 양성 역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길 소망합니다. 또한 상시적으로 구제해야 할 선교사 가정이 20가정이 됩니다. 코로나 19로 어려운 때에 이들을 지원함으로 세계선교 역사가 중단없이 이루어지길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드리는 성탄 보배합을 받으시고 세계 만민 구원 역사를 힘있게 이루어 가시기를 기도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