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2020년롬13강(10:1-21) 말씀을 통한 구원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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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로마서 제 13 강
말씀 | 로마서 10:1-21
요절 | 로마서 10:9
말씀을 통한 구원의 역사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2017년 10월 22일 열린 베네치아 마라톤에서 선두권 선수들보다 1분가량 뒤쳐져 달리던 파니엘(25)은 어느 순간 자기가 선두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파니엘은 바로 옆에서 달리던 선수들을 제치고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1등으로 결승선을 넘었습니다. 1986년 시작된 이 대회에서 이탈리아 선수가 우승한 것은 22년만이었습니다. 파니엘은 하루 아침에 전국적인 스타가 됐습니다.
당초 선두 그룹은 에티오피아의 다우드, 케냐의 춤바, 무타이 등 6명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중에 다우드는 석달 전 열린 독일 마라톤의 우승자였습니다. 그러나 25㎞ 지점을 달리던 이 선수들은 길을 인도하던 오토바이가 길을 잘못 회전하는 바람에 엉뚱한 곳을 달렸습니다. 이들은 수백 미터를 간 뒤에야 잘못된 것을 알고 돌아왔지만 2분이나 잃어버린 뒤였습니다. 그들이 올바른 코스를 놓치고 잘못된 코스로 들어섰기에 열심히 달렸지만 그들은 상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올바른 지식을 알지 못해 구원을 받지 못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올바른 지식을 잘 알고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겠습니다. 또한 이 구원의 복음을 이웃에게 전하고자 하는 소원과 결단을 새롭게 가지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하고 그들에게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그들이 복음 진리를 깨닫고 돌이키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구원을 받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교를 빼고 모든 종교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에 이르고자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율법을 지킬 힘이 없습니다. 아무리 자기 의를 세우려고 노력해 보지만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지식이 없는 사랑, 사랑이 없는 지식과 마찬가지로 지식이 없는 열심은 위험합니다.
자기 의를 추구하는 것은 내려놓기 힘든 매력이 있습니다. 자기를 높일 수 있습니다. 멋있어 보입니다. 자기 의가 있으면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게 됩니다. 우리가 율법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면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를 주장하고, 자기 의를 드러내려다가 하나님의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는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죄를 지은 모든 인간들에게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 저주와 죽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모두 지고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심으로 율법을 다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지은 모든 죄의 값을 다 치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과거 어떤 더러운 죄를 지었어도, 몹쓸 죄를 지었어도, 이런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조롱과 멸시를 받으시고 대신 죽어 주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우리에게 ‘너는 이제 무죄다’, ‘너는 의로운 사람이다’, ‘너는 구원을 받았다’고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그를 통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그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과 화목하며 사랑의 교제를 풍성히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6,7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이것은 구원자를 찾고 만나기 위해 열심히 하늘과 땅을 찾아다니며, 온갖 수양과 고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율법의 행위들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단지 말씀을 듣고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구원의 길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알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을 알게 될 때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됩니다. 사도 바울과 전도자들이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은 내게 너무 가까이 있습니다. 내 입에, 내 마음에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 공부를 통해서 구원에 이르는 참된 지식을 깨달아야 합니다. 말씀 공부를 통해서 내가 죄인인 것을 알고, 나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셨음을 믿고 영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검과 같이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합니다.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예리하여 우리 마음의 깊은 곳과 영혼의 문제들을 드러냅니다. 말씀과 성령은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아는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갖게 합니다. 말씀과 성령은 우리를 거듭나게 합니다. 새 생명을 줍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우리가 말씀을 듣고 깨달아 내 입으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며,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복음이 너무나 쉽고 간단해서 잘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뭔가 자신이 해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공부하여 진리의 길을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라는 진실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고백 없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고 축복하셨습니다(마16:13-18).
교회란 십자가가 달린 건물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할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입니다. 믿음을 통해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됩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면 구원을 받는 동시에 그에 합당한 삶의 자세가 요구됩니다. 인생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이기 때문에 주님의 뜻에 순종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결혼을 할 때, 결혼서약을 입으로 하고 나면, 신랑으로서 신부로서 상대방에게 충성하고 헌신해야 하는 것과 같이, 예수님께 대한 고백은 그에 대한 충성과 헌신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며 성도들과도 사랑하며 함께 일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면서 동시에 세상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삶을 살 때 고난이 따릅니다. 돈을 최고 가치로 생각하는 사람들, 인본주의에 기초한 가치관으로 사는 사람들과 갈등을 빚게 됩니다. 이런 가운데 말씀을 통해 분별을 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하시고 따를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이렇게 살 때 믿는 자들에 대한 성경의 약속이 무엇입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부끄러움은 심판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십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주님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넘치고 생명이 풍성합니다. 기쁨과 자유와 선함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자를 어찌 부르며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을 수 있습니까?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을 수 있습니까?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겠습니까?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나가는 자와 파송하는 자가 다 중요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 전파의 중요성과 전도자의 아름다운 발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코로나 19로 인해서 절실히 필요한 것이 이 이 악한 바이러스의 확진을 막고 사망자를 줄이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바이러스를 치료할 수 있는 백신을 만드는 것입니다. 죄는 바이러스와 같이 급속도로 퍼져나갑니다. 이 바이러스를 죽이는 백신이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그는 죄와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구원자임이 증명되었습니다. 이 좋은 복음을 전파하고 보내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죄사함의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와 선교사들의 헌신과 수고를 통해서 죽어있던 생명들이 살아납니다. 이들의 희생과 수고는 아름답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깁니다. 우리나라는 실학자들이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가운데 믿음이 생기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대부분은 누군가 전해주는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가만히 있는데 믿음이 생기고 자라는 경우는 결코 없습니다. 성경을 자꾸 읽고 배우고 듣게 되면서 반석 같은 믿음을 소유하게 됩니다.
우리는 전도자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믿음은 말씀을 들어야 생기고, 말씀을 들으려면 반드시 전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없으면 믿음을 가질 수 없고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때부터 시작됩니다. 복음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성경책을 전해주든지, 말씀을 읽어주든지,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성경공부와 예배에 초청할 때 복음을 듣게 되고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한국 최초의 그리스도교 순교자인 토마스 선교사(1840-66)의 이야기는 좋은 예가 됩니다. 그는 27세의 젊은이였습니다. 그는 한국에 들어온 자비량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백령도에서 먼저 전도하였습니다. 지금도 주민의 65%가 그리스도인이고 12개 교회가 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백령도 선교 후에 셔먼호를 타고 평양에 가서 전도하였습니다. 셔먼호가 갯벌에 갇히자 조선군의 화공으로 배에 불이 붙었습니다. 그는 배에서 나와 야소, 야소를 외치며 성경을 손에 들고 전해주고자 했습니다. 그를 찌르는 조선군 박춘권에게 성경을 전해주었습니다. 박춘권은 나중에 회심하여 널다리골 교회 영수가 되었습니다. 이 교회는 나중에 장대현교회로 바뀌었고 평양대부흥 운동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한 분이시지만 항상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을 택해서 준비시키신 후에 복음을 전하십니다. 그런데 만일 택함 받은 사람이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은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까? 스스로 복음을 깨닫고 구원받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교회나 성경공부에 참석해서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믿음이 생기고 구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15b) 사람들은 죄를 짓기 위해서 발을 빨리 움직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해주는 발이야 말로 가장 아름답습니다. 그 발은 다른 사람도 살리고 나도 살게 합니다. 꾸준히 전도하는 사람은 신앙생활에 생명력이 넘칩니다.
어떤 이들은 복음을 들을 만한 충분한 기회를 얻지 못해서 알지 못했다고 핑계합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복음의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땅 끝까지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복음을 듣지 못한 것이 아니라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종일 손을 벌리고 계십니다(21). 이스라엘 백성이 신실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에게 주신 약속에 신실한 분이십니다. 또한 복음의 은총을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심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시기하여 돌아오게 하려 하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이스라엘에 대한 변함없는 신실함이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거슬러 말하는 백성이라도 손을 벌려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힘써 복음을 전파합시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말씀을 전파하심으로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가 전파하는 복음의 말씀을 사람들이 듣고 믿음을 갖게 됩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미련하게 보이는 전도를 통해서 구원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힘써 전도하고 선교하는 가운데 구원 역사에 동참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로마서 10:1-21
요절 | 로마서 10:9
말씀을 통한 구원의 역사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2017년 10월 22일 열린 베네치아 마라톤에서 선두권 선수들보다 1분가량 뒤쳐져 달리던 파니엘(25)은 어느 순간 자기가 선두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파니엘은 바로 옆에서 달리던 선수들을 제치고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1등으로 결승선을 넘었습니다. 1986년 시작된 이 대회에서 이탈리아 선수가 우승한 것은 22년만이었습니다. 파니엘은 하루 아침에 전국적인 스타가 됐습니다.
당초 선두 그룹은 에티오피아의 다우드, 케냐의 춤바, 무타이 등 6명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중에 다우드는 석달 전 열린 독일 마라톤의 우승자였습니다. 그러나 25㎞ 지점을 달리던 이 선수들은 길을 인도하던 오토바이가 길을 잘못 회전하는 바람에 엉뚱한 곳을 달렸습니다. 이들은 수백 미터를 간 뒤에야 잘못된 것을 알고 돌아왔지만 2분이나 잃어버린 뒤였습니다. 그들이 올바른 코스를 놓치고 잘못된 코스로 들어섰기에 열심히 달렸지만 그들은 상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올바른 지식을 알지 못해 구원을 받지 못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올바른 지식을 잘 알고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겠습니다. 또한 이 구원의 복음을 이웃에게 전하고자 하는 소원과 결단을 새롭게 가지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하고 그들에게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그들이 복음 진리를 깨닫고 돌이키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구원을 받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교를 빼고 모든 종교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에 이르고자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율법을 지킬 힘이 없습니다. 아무리 자기 의를 세우려고 노력해 보지만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지식이 없는 사랑, 사랑이 없는 지식과 마찬가지로 지식이 없는 열심은 위험합니다.
자기 의를 추구하는 것은 내려놓기 힘든 매력이 있습니다. 자기를 높일 수 있습니다. 멋있어 보입니다. 자기 의가 있으면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게 됩니다. 우리가 율법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면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를 주장하고, 자기 의를 드러내려다가 하나님의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는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죄를 지은 모든 인간들에게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 저주와 죽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모두 지고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심으로 율법을 다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지은 모든 죄의 값을 다 치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과거 어떤 더러운 죄를 지었어도, 몹쓸 죄를 지었어도, 이런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조롱과 멸시를 받으시고 대신 죽어 주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우리에게 ‘너는 이제 무죄다’, ‘너는 의로운 사람이다’, ‘너는 구원을 받았다’고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그를 통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그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과 화목하며 사랑의 교제를 풍성히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6,7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이것은 구원자를 찾고 만나기 위해 열심히 하늘과 땅을 찾아다니며, 온갖 수양과 고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율법의 행위들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단지 말씀을 듣고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구원의 길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알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을 알게 될 때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됩니다. 사도 바울과 전도자들이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은 내게 너무 가까이 있습니다. 내 입에, 내 마음에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 공부를 통해서 구원에 이르는 참된 지식을 깨달아야 합니다. 말씀 공부를 통해서 내가 죄인인 것을 알고, 나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셨음을 믿고 영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검과 같이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합니다.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예리하여 우리 마음의 깊은 곳과 영혼의 문제들을 드러냅니다. 말씀과 성령은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아는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갖게 합니다. 말씀과 성령은 우리를 거듭나게 합니다. 새 생명을 줍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우리가 말씀을 듣고 깨달아 내 입으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며,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복음이 너무나 쉽고 간단해서 잘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뭔가 자신이 해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공부하여 진리의 길을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라는 진실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고백 없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고 축복하셨습니다(마16:13-18).
교회란 십자가가 달린 건물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할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입니다. 믿음을 통해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됩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면 구원을 받는 동시에 그에 합당한 삶의 자세가 요구됩니다. 인생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이기 때문에 주님의 뜻에 순종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결혼을 할 때, 결혼서약을 입으로 하고 나면, 신랑으로서 신부로서 상대방에게 충성하고 헌신해야 하는 것과 같이, 예수님께 대한 고백은 그에 대한 충성과 헌신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며 성도들과도 사랑하며 함께 일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면서 동시에 세상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삶을 살 때 고난이 따릅니다. 돈을 최고 가치로 생각하는 사람들, 인본주의에 기초한 가치관으로 사는 사람들과 갈등을 빚게 됩니다. 이런 가운데 말씀을 통해 분별을 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하시고 따를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이렇게 살 때 믿는 자들에 대한 성경의 약속이 무엇입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부끄러움은 심판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십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주님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넘치고 생명이 풍성합니다. 기쁨과 자유와 선함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자를 어찌 부르며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을 수 있습니까?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을 수 있습니까?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겠습니까?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나가는 자와 파송하는 자가 다 중요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 전파의 중요성과 전도자의 아름다운 발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코로나 19로 인해서 절실히 필요한 것이 이 이 악한 바이러스의 확진을 막고 사망자를 줄이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바이러스를 치료할 수 있는 백신을 만드는 것입니다. 죄는 바이러스와 같이 급속도로 퍼져나갑니다. 이 바이러스를 죽이는 백신이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그는 죄와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 구원자임이 증명되었습니다. 이 좋은 복음을 전파하고 보내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죄사함의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와 선교사들의 헌신과 수고를 통해서 죽어있던 생명들이 살아납니다. 이들의 희생과 수고는 아름답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깁니다. 우리나라는 실학자들이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가운데 믿음이 생기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대부분은 누군가 전해주는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가만히 있는데 믿음이 생기고 자라는 경우는 결코 없습니다. 성경을 자꾸 읽고 배우고 듣게 되면서 반석 같은 믿음을 소유하게 됩니다.
우리는 전도자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믿음은 말씀을 들어야 생기고, 말씀을 들으려면 반드시 전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없으면 믿음을 가질 수 없고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때부터 시작됩니다. 복음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성경책을 전해주든지, 말씀을 읽어주든지,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성경공부와 예배에 초청할 때 복음을 듣게 되고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한국 최초의 그리스도교 순교자인 토마스 선교사(1840-66)의 이야기는 좋은 예가 됩니다. 그는 27세의 젊은이였습니다. 그는 한국에 들어온 자비량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백령도에서 먼저 전도하였습니다. 지금도 주민의 65%가 그리스도인이고 12개 교회가 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백령도 선교 후에 셔먼호를 타고 평양에 가서 전도하였습니다. 셔먼호가 갯벌에 갇히자 조선군의 화공으로 배에 불이 붙었습니다. 그는 배에서 나와 야소, 야소를 외치며 성경을 손에 들고 전해주고자 했습니다. 그를 찌르는 조선군 박춘권에게 성경을 전해주었습니다. 박춘권은 나중에 회심하여 널다리골 교회 영수가 되었습니다. 이 교회는 나중에 장대현교회로 바뀌었고 평양대부흥 운동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한 분이시지만 항상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을 택해서 준비시키신 후에 복음을 전하십니다. 그런데 만일 택함 받은 사람이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은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까? 스스로 복음을 깨닫고 구원받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교회나 성경공부에 참석해서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믿음이 생기고 구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15b) 사람들은 죄를 짓기 위해서 발을 빨리 움직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해주는 발이야 말로 가장 아름답습니다. 그 발은 다른 사람도 살리고 나도 살게 합니다. 꾸준히 전도하는 사람은 신앙생활에 생명력이 넘칩니다.
어떤 이들은 복음을 들을 만한 충분한 기회를 얻지 못해서 알지 못했다고 핑계합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복음의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땅 끝까지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복음을 듣지 못한 것이 아니라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종일 손을 벌리고 계십니다(21). 이스라엘 백성이 신실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에게 주신 약속에 신실한 분이십니다. 또한 복음의 은총을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심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시기하여 돌아오게 하려 하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이스라엘에 대한 변함없는 신실함이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거슬러 말하는 백성이라도 손을 벌려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힘써 복음을 전파합시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말씀을 전파하심으로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가 전파하는 복음의 말씀을 사람들이 듣고 믿음을 갖게 됩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미련하게 보이는 전도를 통해서 구원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힘써 전도하고 선교하는 가운데 구원 역사에 동참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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