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22년 눅19강(11:1-13)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페이지 정보

본문
2022년 누가복음 제 19 강
말씀 | 누가복음 11:1-13
요절 | 누가복음 11:2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오늘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대화가 잘 될 때 관계가 깊어집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깊어질 때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기도의 용사들로 자라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새벽 오히려 미명에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시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도 무리들과 제자들을 보내고 난 다음에 홀로 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한 제자 중 하나가 예수님께 부탁을 하였습니다.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이 제자는 예수님이 무슨 제목으로 기도하시는지 궁금했던 것 같습니다. 기도는 쉽게 되지 않습니다. 기도는 배워야 합니다. 기도는 무엇보다 직접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루에 얼마나 어떻게 기도를 하는지 돌아보고 기도하는 삶에서 자라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응답이 어떻게 이루어 졌는지 기록하면서 기도하면 기도가 재미있고 즐겁습니다. 응답을 받는 기쁨,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나와 함께 일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가장 든든한 뒷배를 가진 사람이니 얼마나 담대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먼저 기도할 때 아버지여! 부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당시 사람들로서는 매우 충격적인 호칭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하나님 대신에 주님이란 뜻의 ‘아도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께 구하듯이 친밀감을 가지고 나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자녀들에게 아버지는 힘의 근원이요 의지의 대상입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을 보호해주고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며 지혜롭고 강건한 사람이 되도록 양육합니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넓은 품에 안겨 있을 때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어떤 경우에나 자식을 사랑합니다. 어떤 위험 가운데서도 자식을 보호하고 필요한 것을 신실하게 공급하십니다. 아버지는 자녀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주저말고 아버지에게 나아가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먼저 구해야 할까요?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거룩하다는 구별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는 피조물과 구별되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든지, 심지어 하나님은 죽었다고 말합니다. 이 얼마나 불경한 말들입니까?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의 권능이 자연과 역사와 우리의 현실 속에서 일하고 계신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기보다는 우상을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때 마음이 미련해지고 우둔해졌기 때문입니다(롬 1:21). 이런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모든 인간들로부터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신자들의 삶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거룩한 삶을 통해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나아오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음으로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즉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각 사람이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그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대로 인생을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개인과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 이루어질 때 이 땅은 공의와 인애가 충만한 곳이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대로 살 수 있도록 기도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므로 만유가 타락 이전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기도한 후에 우리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일용한 양식’은 우리가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입니다. 우리는 먹는 것,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건강, 일을 할 수 있는 직장, 쉼을 가질 수 있는 집, 일생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결혼, 장래를 위한 학업과 연구 등 늘 문제 속에서 이를 해결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매 순간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신실하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을 때 장래에 대한 염려와 세상 욕심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더 어려운 사람들과 나눔으로 함께 복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과거에 비해서 잘 먹고 잘 사는데 왜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내 삶의 공급자이심을 인정하고 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만족은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의 공급자이심을 인정하고 구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축복 속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고 그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죄 사함은 관계를 회복하고 발전시키는 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죄 용서를 구하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죄 지은 자에 대한 용서를 먼저 해야 합니다. 나는 용서하지 않으면서 용서를 받겠다는 것은 양심이 없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요, 늘 죄를 짓고 용서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고 자신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심판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복수하지 않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복수를 합니다. 그러나 내가 손해를 입고 욕을 먹고 상처를 받았지만 복수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죄를 범하고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생각만 해도 분이 나고 복수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용서하지 못하고 분을 품고 살면 내가 화병에 걸립니다. 또한 마음에 분을 품고 사는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우리가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십니다(막11:25). 또한 우리가 아무리 기도해도 기도의 응답이 되지 않습니다. 이사야 59:2은 말씀합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내가 나에게 죄를 지은 사람에게 복수하면 당장은 시원하지만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얼마나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이 드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하고 감당하며 사는 것이 훨씬 더 나에게 유익하고 복된 삶입니다.
죄를 지으면 죄책감으로 인해서 심령이 막히고 영적인 힘과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지적하실 때마다 이를 인정하고 고백할 때 죄사함을 받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죄책감을 제거해주시고 평강과 기쁨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점차적으로 죄를 멀리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더욱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더 나아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겟세마세 동산에서 졸고 있는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 말씀하셨습니다(22:46).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두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연약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러다가 계집 종 앞에서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밖에 나가서 통곡하였습니다. 우리는 강한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한 사실을 자각할 때 매 순간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함으로서 하나님께 필요한 양식을 얻고, 죄 사함을 받고, 시험을 이기고, 풍성한 열매를 맺어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내용을 가르쳐 주시고 이제는 기도할 때 어떤 자세로 기도해야 하는지 알려 주십니다. 즉 강청해야 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여행 중에 있던 한 사람이 예기치 않게 친구 집을 방문했습니다. 손님을 잘 대접하는 것이 유대인의 풍습입니다. 그런데 집에는 배고픈 친구를 먹일 양식이 없습니다. 같은 동네에 사는 다른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한 밤중이라 집안의 불은 이미 꺼져있습니다. 친구는 자식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럴지라도 배고픈 친구를 위해서 염치불구하고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친구에게 떡 세 덩이를 꾸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친구는 아무런 대답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집에서 나를 기다리는 배고픈 친구를 위해서 그냥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며 친구를 깨웠습니다. 밖에서 외치는 소리에 잠자던 친구가 깨어났습니다. 하지만 일어나서 음식을 주는 것이 몹시 귀찮았습니다. 집안 형편도 넉넉하지 않습니다. 일어나서 불을 켜고 음식을 찾아주면 한 이불을 덮고 자는 가족들 모두가 깨어날 것입니다. 이런 생각에 모른 척하고 계속 누워있었습니다. 친구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며 떡 세 덩이를 꾸어달라고 외칩니다. 결국 잠자던 친구는 견디지 못하고 일어나서 떡을 내어줍니다.
8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간청함’은 문자적으로는 ‘부끄러움이 없음 (the shamelessness)’입니다. 염치 불구하고 계속해서 뻔뻔하게 구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현대 번역은 ‘끈질김 (persistence)’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잠자던 친구는 벗됨을 인하여 떡을 내준 것이 아니라 끈덕지게 간구했기 때문에 귀찮아서 내어주었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당장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포기치 말고 달라붙어서 끈덕지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셔서 강청하는 자녀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과 약속의 말씀을 생각할 때 반드시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가장 좋은 것을 주십니다. 또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때를 그가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기도가 지체될 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자 계산하고 계시고, 우리가 구하는 것의 가치를 알기를 원하시고, 또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기를 원하십니다. 아이가 달라는 대로 주면 버릇이 나빠집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인내를 배우도록 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25년 동안 약속하신 아들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그가 100살이 되었을 때 아들 이삭을 주시고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습니다. 다니엘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늘에서 바로 응답하여 천사를 보냈지만 하늘에서 적군과의 싸움이 있어서 전달이 지체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영적인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받기 까지 간절히 구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에 반복해서 구해야 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우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약 4:2).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모두 현재 명령형입니다. 동작의 반복성을 강조합니다. 기도하는 일에 있어서 입으로 구하고 발로 찾고 손으로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면서 내가 처한 환경에 따라 구해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을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고 모든 것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냥 주시지 않고 기도라는 통로를 통해서 주십니다. 우리가 기도의 응답을 받는 것을 보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사람을 통해서 응답이 주어집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사람에게 구걸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심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에스라는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때에 왕에게 구하면 모든 것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하였습니다. 에스라 8:22입니다.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 그는 사람에게 구하기보다 하나님께 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존심이 있었습니다. 나를 진정으로 도우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고 사람에게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슬프시게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신실하게 응답하십니다.
11-13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가장 좋은 성령을 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은 성령이십니다. 성령님은 삼위의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성령은 보혜사로서 우리의 위로자요 변호자이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깊이 이해하시고 늘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변호해주십니다. 또 우리가 기도할 때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알지 못할 때에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성령은 때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할 때 필요한 말씀을 떠오르게 하시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우리 내면에 예수님의 성품이 새겨지게 하십니다(갈5:22,23). 예수님을 주로 믿는 사람은 성령께서 내주하십니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는 것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이요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이 누리는 가장 큰 복입니다.
결론적으로 기도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심으로서 기도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기도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내가 원하는 대로 응답이 되지 않는다고 기도하기를 포기하지 말고 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기도하라고 백번 말하고 기도에 대한 지식을 쌓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제로 10분, 30분, 한 시간 시간을 내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기도에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가 성탄 연합 예배를 위해서 합심해서 기도해야겠습니다. 새해를 준비하기 위해서 기도해야겠습니다. 우리가 하루 30분 이상 기도하는 일에 헌신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누가복음 11:1-13
요절 | 누가복음 11:2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오늘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대화가 잘 될 때 관계가 깊어집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깊어질 때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기도의 용사들로 자라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새벽 오히려 미명에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시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도 무리들과 제자들을 보내고 난 다음에 홀로 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한 제자 중 하나가 예수님께 부탁을 하였습니다.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이 제자는 예수님이 무슨 제목으로 기도하시는지 궁금했던 것 같습니다. 기도는 쉽게 되지 않습니다. 기도는 배워야 합니다. 기도는 무엇보다 직접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루에 얼마나 어떻게 기도를 하는지 돌아보고 기도하는 삶에서 자라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응답이 어떻게 이루어 졌는지 기록하면서 기도하면 기도가 재미있고 즐겁습니다. 응답을 받는 기쁨,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나와 함께 일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가장 든든한 뒷배를 가진 사람이니 얼마나 담대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먼저 기도할 때 아버지여! 부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당시 사람들로서는 매우 충격적인 호칭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하나님 대신에 주님이란 뜻의 ‘아도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께 구하듯이 친밀감을 가지고 나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자녀들에게 아버지는 힘의 근원이요 의지의 대상입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을 보호해주고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며 지혜롭고 강건한 사람이 되도록 양육합니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넓은 품에 안겨 있을 때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어떤 경우에나 자식을 사랑합니다. 어떤 위험 가운데서도 자식을 보호하고 필요한 것을 신실하게 공급하십니다. 아버지는 자녀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주저말고 아버지에게 나아가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먼저 구해야 할까요?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거룩하다는 구별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는 피조물과 구별되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든지, 심지어 하나님은 죽었다고 말합니다. 이 얼마나 불경한 말들입니까?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의 권능이 자연과 역사와 우리의 현실 속에서 일하고 계신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기보다는 우상을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때 마음이 미련해지고 우둔해졌기 때문입니다(롬 1:21). 이런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모든 인간들로부터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신자들의 삶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거룩한 삶을 통해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나아오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음으로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즉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각 사람이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그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대로 인생을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개인과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 이루어질 때 이 땅은 공의와 인애가 충만한 곳이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대로 살 수 있도록 기도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므로 만유가 타락 이전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기도한 후에 우리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일용한 양식’은 우리가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입니다. 우리는 먹는 것,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건강, 일을 할 수 있는 직장, 쉼을 가질 수 있는 집, 일생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결혼, 장래를 위한 학업과 연구 등 늘 문제 속에서 이를 해결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매 순간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신실하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을 때 장래에 대한 염려와 세상 욕심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더 어려운 사람들과 나눔으로 함께 복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과거에 비해서 잘 먹고 잘 사는데 왜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내 삶의 공급자이심을 인정하고 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만족은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의 공급자이심을 인정하고 구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축복 속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고 그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죄 사함은 관계를 회복하고 발전시키는 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죄 용서를 구하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죄 지은 자에 대한 용서를 먼저 해야 합니다. 나는 용서하지 않으면서 용서를 받겠다는 것은 양심이 없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요, 늘 죄를 짓고 용서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고 자신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심판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복수하지 않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복수를 합니다. 그러나 내가 손해를 입고 욕을 먹고 상처를 받았지만 복수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죄를 범하고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생각만 해도 분이 나고 복수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용서하지 못하고 분을 품고 살면 내가 화병에 걸립니다. 또한 마음에 분을 품고 사는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우리가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십니다(막11:25). 또한 우리가 아무리 기도해도 기도의 응답이 되지 않습니다. 이사야 59:2은 말씀합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내가 나에게 죄를 지은 사람에게 복수하면 당장은 시원하지만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얼마나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이 드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하고 감당하며 사는 것이 훨씬 더 나에게 유익하고 복된 삶입니다.
죄를 지으면 죄책감으로 인해서 심령이 막히고 영적인 힘과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지적하실 때마다 이를 인정하고 고백할 때 죄사함을 받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죄책감을 제거해주시고 평강과 기쁨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점차적으로 죄를 멀리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더욱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더 나아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겟세마세 동산에서 졸고 있는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 말씀하셨습니다(22:46).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두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연약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러다가 계집 종 앞에서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밖에 나가서 통곡하였습니다. 우리는 강한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한 사실을 자각할 때 매 순간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함으로서 하나님께 필요한 양식을 얻고, 죄 사함을 받고, 시험을 이기고, 풍성한 열매를 맺어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내용을 가르쳐 주시고 이제는 기도할 때 어떤 자세로 기도해야 하는지 알려 주십니다. 즉 강청해야 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여행 중에 있던 한 사람이 예기치 않게 친구 집을 방문했습니다. 손님을 잘 대접하는 것이 유대인의 풍습입니다. 그런데 집에는 배고픈 친구를 먹일 양식이 없습니다. 같은 동네에 사는 다른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한 밤중이라 집안의 불은 이미 꺼져있습니다. 친구는 자식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럴지라도 배고픈 친구를 위해서 염치불구하고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친구에게 떡 세 덩이를 꾸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친구는 아무런 대답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집에서 나를 기다리는 배고픈 친구를 위해서 그냥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며 친구를 깨웠습니다. 밖에서 외치는 소리에 잠자던 친구가 깨어났습니다. 하지만 일어나서 음식을 주는 것이 몹시 귀찮았습니다. 집안 형편도 넉넉하지 않습니다. 일어나서 불을 켜고 음식을 찾아주면 한 이불을 덮고 자는 가족들 모두가 깨어날 것입니다. 이런 생각에 모른 척하고 계속 누워있었습니다. 친구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며 떡 세 덩이를 꾸어달라고 외칩니다. 결국 잠자던 친구는 견디지 못하고 일어나서 떡을 내어줍니다.
8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간청함’은 문자적으로는 ‘부끄러움이 없음 (the shamelessness)’입니다. 염치 불구하고 계속해서 뻔뻔하게 구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현대 번역은 ‘끈질김 (persistence)’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잠자던 친구는 벗됨을 인하여 떡을 내준 것이 아니라 끈덕지게 간구했기 때문에 귀찮아서 내어주었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당장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포기치 말고 달라붙어서 끈덕지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셔서 강청하는 자녀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과 약속의 말씀을 생각할 때 반드시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가장 좋은 것을 주십니다. 또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때를 그가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기도가 지체될 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자 계산하고 계시고, 우리가 구하는 것의 가치를 알기를 원하시고, 또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기를 원하십니다. 아이가 달라는 대로 주면 버릇이 나빠집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인내를 배우도록 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25년 동안 약속하신 아들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그가 100살이 되었을 때 아들 이삭을 주시고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습니다. 다니엘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늘에서 바로 응답하여 천사를 보냈지만 하늘에서 적군과의 싸움이 있어서 전달이 지체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영적인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받기 까지 간절히 구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에 반복해서 구해야 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우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약 4:2).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모두 현재 명령형입니다. 동작의 반복성을 강조합니다. 기도하는 일에 있어서 입으로 구하고 발로 찾고 손으로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면서 내가 처한 환경에 따라 구해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을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고 모든 것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냥 주시지 않고 기도라는 통로를 통해서 주십니다. 우리가 기도의 응답을 받는 것을 보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사람을 통해서 응답이 주어집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사람에게 구걸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심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에스라는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때에 왕에게 구하면 모든 것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하였습니다. 에스라 8:22입니다.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 그는 사람에게 구하기보다 하나님께 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존심이 있었습니다. 나를 진정으로 도우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고 사람에게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슬프시게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신실하게 응답하십니다.
11-13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가장 좋은 성령을 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은 성령이십니다. 성령님은 삼위의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성령은 보혜사로서 우리의 위로자요 변호자이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깊이 이해하시고 늘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변호해주십니다. 또 우리가 기도할 때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알지 못할 때에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성령은 때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할 때 필요한 말씀을 떠오르게 하시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우리 내면에 예수님의 성품이 새겨지게 하십니다(갈5:22,23). 예수님을 주로 믿는 사람은 성령께서 내주하십니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는 것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이요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이 누리는 가장 큰 복입니다.
결론적으로 기도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심으로서 기도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기도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내가 원하는 대로 응답이 되지 않는다고 기도하기를 포기하지 말고 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기도하라고 백번 말하고 기도에 대한 지식을 쌓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제로 10분, 30분, 한 시간 시간을 내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기도에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가 성탄 연합 예배를 위해서 합심해서 기도해야겠습니다. 새해를 준비하기 위해서 기도해야겠습니다. 우리가 하루 30분 이상 기도하는 일에 헌신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