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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22년 눅18강(10:25-42)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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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8회 작성일 22-11-27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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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18 강
말씀 | 누가복음 10:25-42
요절 | 누가복음 10:37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은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우리가 믿는 사람으로서 인간애를 나타내는 것이 제대로 된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 교제하는 일에 힘을 쓸 때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관심이 나를 넘어서 어려운 이웃에게로 향하기를 기도합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율법교사는 학자요 율법의 전문가입니다. 그는 예수님과 율법 실력을 겨루어 보고자 했습니다. 그는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질문했습니다. 그는 나름대로 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반문하였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그는 대답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우리는 보통 알면 행할 것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율법 교사들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런데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어 진리와 지식의 참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롬 2:17-21, 고후 3:14-15).”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을 무시하고 율법 “조문”에 너무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롬 10:2-3, 고후 3:6). 사람이 율법을 안다고 잘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확한 진리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되 성령의 인도하심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데서 자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공부할 때에 하나님께서 통찰력을 주시고 그 말씀을 행하고자 하는 소원과 행할 능력까지 부어 주십니다(빌 2:13). 진리의 유일한 원천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생활을 할 때 진리를 아는데서 자라게 됩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매년 반복적으로 공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알지만 반복해서 실행할 때 예수님의 성품과 사역에서 자라게 되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가 성장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그 중에서 지식이 중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배운 대로 행할 수 있을까요? 공동체 안에서 본을 보면서 배우게 됩니다. 공동체 속에서 사랑하고 섬기고 말씀을 실천하는 본을 보면서 우리는 서로 자라갑니다. 소감을 나누고, 자신의 경험을 나누면서 우리는 함께 예수님의 제자로 성장해 갑니다. 이번 카타르 월드컵에서 우승후보 아르헨티나는 메시의 꿈을 위해서 모든 선수들이 애를 썼지만 사우디에 2대 1로 패했습니다. 신문기사 제목이 ‘팀워크는 스타보다 강하다’였습니다. 우리가 공동체 속에서 서로 사랑하고 예수님을 배우고자 힘쓸 때 혼자서는 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로서 본성이 사랑이십니다. 혼자서는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본질이 공동체로서 역동적으로 사랑하십니다.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닮아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본질입니다.

  그런데 율법 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레위기에서 말하는 이웃은 과부와 고아와 가난한 자, 이방인들, 도움이 필요한 자들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나 돼지처럼 무시하였습니다.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든지 교제하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그러니 마음에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기쁨도 없고 영생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율법 교사의 질문에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의도는“마지막 부활 때 내가 구원 받는 것에 대해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라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까요? 갈라디아서 3장 11,12절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였음이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영생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할 때 우리는 영생을 얻습니다. 에베소서 2:8-9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우리가 오직 은혜로, 선물로 구원을 받았으니 감사한 마음으로 이웃을 마음을 다해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내 이웃입니까 라고 물은 율법 교사에게 예를 들어 이웃이 누구인지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간 것을 보면 유대인이 분명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까지 거리는 27Km정도입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690m이고 여리고는 해수면 아래로 390m이니 1080m 차이가 납니다. 그 길은 내리막길이고 구불구불하고 비탈졌습니다. 주변에 바위들이 널려 있는 황량한 곳입니다. 그 길에는 여행객 이외에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는 동굴들이 많이 있습니다. 강도들은 이곳 동굴에 은신하면서 지나가는 행인들을 약탈했습니다. 강도들이 돈만 빼앗지 않고 옷을 벗기고 죽도록 때렸습니다. 강도를 당한 사람은 옷을 벗김을 받고 맞았기 때문에 과다출혈과 저체온증으로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상태입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들입니다. 누구보다도 율법을 잘 알고 율법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높은 수준의 경건을 지녔을 것입니다. 그들이 없으면 성전 예배가 이루어지지 않고 종교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제사를 지내야 하기 때문에 시체를 만져서 부정해 지면 안 되었습니다. 시체를 만지면 7일 동안 부정해지기 때문에 예배를 섬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이었습니다. 이는 이미 제사를 다 지내고 할 일을 마쳤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강도 만난 사람을 도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이 사람을 도왔다가 나중에 귀찮아지니까 그렇게 하였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길거리에 쓰러진 사람을 돕다가 경찰서에 참고인으로 불려가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도 많은 경우 자신에게 어떤 피해나 손해가 올 것을 생각해서 무의식적으로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순수한 혈통을 지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이 강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이방인들과 피가 섞인 혼혈족이었기 때문에 경멸했습니다. 당연히 사마리아 사람들도 자기들을 멸시하는 유대인들을 증오했습니다. 그래서 이름없는 이 사마리아 사람도 죽어가는 유대인을 보고 피하여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 사람은 죽어가는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부어서 응급조치를 했습니다. 포도주는 소독효과가 있고 기름은 통증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런 후에 자기 옷을 찢어서 상처를 싸매었습니다. 자기 짐승에 태우고 자신은 걸어서 주막으로 갔습니다. 밤새도록 죽어가는 사람을 간호했습니다.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고 했습니다. 비용이 더 들면 자기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강도만난 사람이 주막에서 치료를 받고 편히 쉴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그에게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보면 불쌍히 여기는 인간애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평지설교에서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즐거워하는 사람과 함께 즐거워하고 슬퍼하는 사람과 함께 슬퍼합니다. 이웃과 함께 기쁨과 슬픔, 아픔을 나누어야 합니다. 

  이 사마리아 인은 이름도 없습니다. 종교적 지위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애가 있었습니다. 한 영혼을 귀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사람 자체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한 때입니다.

  예수님은 율법 교사에게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야 영생의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으십니다(마 9:13). 오늘날 사고를 당하고 질병을 앓고 재난을 당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 때에 이 사회는 더욱 사람이 살 만한 곳이 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에도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희생적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이들을 생각할 때 늘 은혜가 되고 감동이 됩니다. 우리 목자의 삶은 영유간에 강도 만난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희생적으로 섬기는 삶입니다. 나의 물질과 재능을 드려서 마귀에게 공격을 받고 상한 사람들을 회복하는 삶입니다. 본인이 어려운 가운데 섬기는 분들의 모습은 더욱 감동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고 돌보는 것은 매우 복된 일입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을 위해서 값을 치루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갑에서 돈을 지출하는 것입니다. 바쁜 일정에 차질이 생겨서 손해와 불편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이런 대가를 지불하면서 주저 없이 도와주는 사람이 진정한 이웃입니다. 또 영적으로 죽어가는 캠퍼스 영혼들을 긍휼히 여기고 시간과 물질과 수고를 감수하면서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 일행이 길 갈 때에 한 마을에 들어가셨습니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예수님도 그들을 사랑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마을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적극적으로 집으로 초청했습니다.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 나아가 한 가지 요청을 했습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마르다는 예수님 일행을 위해서 많은 음식을 준비하려니 일손이 부족했습니다. 그런데 동생 마리아는 눈치도 없이 예수님 앞에서 말씀을 듣고 있는 모습을 보니 섭섭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마르다는 직접 마리아에게 요청을 해야 할텐데 예수님께 요청을 했습니다. 예수님께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의외였습니다. 41,42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새번역은 42절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손님을 초청해 놓고 혼자 계시도록 한다든지 하면 그것도 예의에 어긋난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음식을 풍성하게 대접하는 것보다 주님과 교제를 하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와 교제할 때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도 나옵니다. 이웃을 사랑하고자 할 때 많은 음식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정성스럽게 한두 가지 음식만으로도 족합니다. 예수님은 열심히 말씀을 가르치셨고,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목마른 사슴처럼 열심히 말씀을 청종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제자에게 가장 우선되는 일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배우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교제에 힘쓰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에 힘쓸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 뜻을 행할 힘을 얻게 됩니다.  그렇게 하려면 분주한 일들을 정리해야 합니다. 포도나무가 열매를 잘 맺으려면 가지치기를 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가지치기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르다처럼 주님을 섬기면서도 주님께 불평을 하기가 쉽습니다.

  예수님은 식사 준비하는 마르다의 섬김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열심히 주님을 섬기는 것은 칭찬받을 일입니다.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식사를 할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너무나 성대하게 준비하려다보니 분주해지고 불평이 생겼습니다. 많은 일로 인해서 염려하고 근심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예수님을 섬기고 불평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섬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 하여도 족하다고 하십니다. 기쁨과 감사함으로 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진수성찬을 준비하는 것보다도 육개장이든, 닭갈비든 간단하게 식사를 준비하고 예수님 곁에서 그 분의 말씀을 듣는 것을 더욱 소중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그 어떤 일보다 소중하고 복된 일입니다.

  많은 사람이 분주한 삶으로 인해서 말씀을 듣는 소중한 시간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분주한 일로 인해서 기도하고 말씀 안에서 주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잃어버린 것이죠.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일어나자마자 습관적으로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교제하셨습니다. 사도행전 6장 2,4절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교제하는 것은 그 어떤 일보다 소중합니다. 우리가 분주한 일들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교제하는 일에 집중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배웠습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강도만난 사람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관심을 표시하고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섬기는 것이 이웃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일상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를 위해서 먼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과 기도하며 교제하는데 우선순위를 둘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실 내 속에는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이 없습니다. 먼저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그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사랑을 부어 주시고 사랑할 능력도 부어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 이번 한 주 동안만이 아니라 일생 동안 이런 선한 사마리아 인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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