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04년 누가복음 제 10 강(눅5:12-26)/이 사람아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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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봄 수양회 제 1 강 (누가복음 제 10 강)
말씀/ 누가복음 5:12-26
요절/ 누가복음 5:20
이 사람아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오늘 우리는 한 문둥병자와 중풍병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얼짱, 몸짱을 환호하는 시대에 온 몸에 문둥병이 걸린 사람은 있을 자리가 없어 보입니다. 왕따 당하기 십상입니다. 대부분 그런 사람은 오래 쳐다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어떻게 대하시고 치료해 주셨습니까? 또 중풍병자가 나옵니다. 중풍병자는 무기력하였습니다.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참으로 무기력한 존재입니다. 경쟁이 치열한 시대에 그런 사람은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청년으로서 많은 일을 해야 할 그가 왜 그렇게 무기력한 것입니까? 힘이 없어 남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를 예수님은 어떻게 도와주셨습니까?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각자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인생 문제들을 해결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을 깨끗케 하신 예수님(12-16)
예수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여드름이 많이 나거나 아토스성 피부병으로 인해 얼굴이 붉어지거나 얼굴에 상처라도 생기면 매우 힘들어합니다. 그런데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그는 눈사람처럼 온 몸에 나균이 활짝 피었습니다. 그는 온 몸이 진물러서 고름이 생기고 냄새도 났을 것입니다. 그는 몸뚱아리가 어디 하나 성한 데가 없었습니다. 문둥병은 전염성이 있기 때문에 그는 마을 밖에서 혼자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가족들에게도 버림을 받고 친구들과 사회에서 따돌림을 받아야 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함께 부대끼며 살 때 인간의 정을 느끼고 희노애락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는 진 밖에서 혼자 살아야 하니 얼마나 외롭고 고독했을까요? 그는 어두컴컴한 움막에 누워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자고 일어나면 손가락이 하나 짤려 나갑니다. 그는 밖으로 나가 밝은 태양빛 아래 잘려져나간 손을 땅에 묻고 다시 움막으로 들어옵니다. 그에게 밝은 태양조차도 어둡게 보입니다. 그가 다시 자리에 누워있으면 마음은 매우 운명적이 되었습니다. 이제 눈썹도 빠지고, 귀도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는 괴물과 같았을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문둥병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러는 것은 둘째치고 자기가 자신의 몸을 볼 때도 너무나 더럽고 흉측해서 거울을 보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 혐오감으로 인해서 자기를 인정할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었습니다.
성경에서 문둥병은 죄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병이 깊어질수록 통증을 느끼지 못합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는 지을수록 죄의식을 갖지 않게 됩니다. 양심이 화인 맞은 사람처럼 무감각해집니다. 또한 문둥병이 걸리면 진 밖에 혼자 살아야 하듯이 죄도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 자신에 대해서도 관계성을 파괴합니다. 문둥병이 깊어지면 눈썹이 빠지고 눈이 빠지고 코가 문들어지고 지체가 떨어져 나가듯이 죄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의 형상을 파괴하여 괴물과 같이 만들어 버립니다. 문둥병은 더러운 고름을 흘러 냅니다. 마찬가지로 죄도 좋지 않은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붕대로 얼굴을 칭칭 감은 그가 예수님을 보고 나아와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쉰 목소리로 간구하였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12b).” 그는 자기의 뜻을 예수님께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자기가 깨끗하게 되기를 원하시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살다가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주님의 뜻을 묻고 싶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병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그는 낮아질대로 낮아져서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간구에는 믿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원하시면 자신을 깨끗케 하실 수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온 몸에 문둥병 걸린 사람이 깨끗케 될 수 있다니 얼마나 굉장한 믿음입니까? 그는 주님께서 깨끗케 하실 수 있다는 믿음과 소망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어떻게 치료하셨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 온 몸에 문둥병이 든 사람은 진물이 흐르고 냄새도 나고 접근하기가 역겨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의 환부에 대셨습니다. 아마 예수님은 그를 꼭 안아 주셨을 것입니다. 문둥병은 부정한 병이기 때문에 그에게 접촉하는 자마다 부정해 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치료하기 위해서 부정해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손이 그의 환부에 닿았을 때 그의 온 몸이 전율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의 마음의 상처들이 치료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문둥병이 곧 떠났습니다. 그의 살이 어린아이의 살과 같이 깨끗해졌습니다. 새로 태어난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깨끗하게 된 손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리고 만져보았습니다. 깨끗케 된 얼굴을 만져보며 기쁨에 넘쳐서 눈물을 줄줄 흘렸습니다. 자신도 이제는 깨끗한 얼굴로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이 기쁨을 온 세상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예수님은 그가 깨끗하고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그가 건강한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그의 생각보다 훨씬 깊고 넓습니다. 예수님의 치료의 능력은 말씀에서 나왔습니다. 이는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의 말씀입니다. 말씀의 권세는 죄도 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는 어떤 운명적인 문제도 변화시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경계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를 사회에 온전히 환원시키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고치신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왔습니다. 예수님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인정과 인기에 초연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을수록 그는 더욱 한적한 곳에 가사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사람들의 요구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일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방향을 따라 일하시는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더러운 문둥병을 어떻게 깨끗케 하셨는가 배웠습니다. 우리는 몸에 오물을 묻히면 더럽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순수한 젊은이들은 더러움에 대해서 민감합니다. 연인이 서로 껴안는 것을 보면 토할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나는 언제 저런 사람을 만나는가 생각합니다. 음란한 그림을 보고 더럽다고 생각하면서도 낄낄거리면서 즐깁니다. 나중에는 죄를 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옳다 그르다는 구별도 없어집니다. 나에게 좋으면 좋은 것이요 나에게 나쁘면 나쁜 것입니다. 그들에게 죄란 나에게 나쁜 것이요 선이란 나에게 좋은 것입니다. 모든 기준이 자기 중심적입니다. 이게 상대주의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만연한 젊은이들의 생각입니다. 죄의 기준이 다릅니다. 상대주의적인 생각에 오염되어 죄에 대한 분명한 시각이 없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 온 몸에 문둥병 걸린 사람과 같습니다. 다른 사람도 다 그렇게 하는데 뭐, 하면서 합리화 하지만 다른 사람도 다 죄로 더럽혀진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더럽다고 여겨지면 목욕을 합니다. 영적으로 더럽혀졌다고 해서 매일 목욕을 한다고 깨끗해질까요? 죄를 비누로 씻어낼 수 있을까요?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잊어버릴 수 있을까요? 인간의 기억력이란 잊고자 하면 할수록 더욱 생생하게 기억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미칠 지경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 예수님은 아무리 더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깨끗하게 씻어주십니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9:12,13).”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나의 더러움을 씻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나의 더러운 죄를 깨끗하게 씻기 위하여 피흘리셨음을 믿고 죄를 회개하면 어떤 더러움도 깨끗하게 씻겨 집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을 때 검정 숯댕이 같은 인생이 흰눈보다 더 희어지게 됩니다. 우리의 더러움을 씻기는 보혈의 샘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II. 이 사람아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17-26)
하루는 예수님이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조사하기 위해서 나온 종교 재판관들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그 분위기는 긴장감이 돌고 썰렁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든지 예수님을 고소하기 위해서 꼬투리를 잡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이때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님 앞에 들여 놓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했습니다. 누구나 예수님께 나아가고자 할 때 어떤 장애물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장애물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인간적으로 친한 친구들이 예수님께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되기고 하고 남자 친구나 여자 친구가 장애물이 되기도 합니다. 인간적인 선배들이 신앙생활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또 본인 내면의 두려움이나 대인기피증도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유를 구속당할 것 같은 생각, 매일 것 같은 생각, 시간을 빼앗길 것이라는 생각, 자기만의 세계를 포기해야 할 것 같은 생각으로 예수님께 나아가기를 주저주저합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무리들이 너무 많이 집안에 모여 있어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하여 뒤돌아 갈 수도 있었습니다. 다음에 오자고 위로하기가 쉬웠습니다. 또 중풍병자가 너무 꿈지럭 거려서 늦었다고 서로 원망하고 불평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막힌 길은 뚫고 길이 없으면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 중에 공병대 출신이 있었던가 봅니다. 그들은 지붕에 올라가서 기왓장을 벗겨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흙을 걷어내고 나무를 자르고 도배지도 벗겨냈습니다. 잠시 후 구멍이 뻥 뚫렸습니다. 예수님의 머리 위로 파란 하늘이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머리에 흙먼지를 쓰셔야 했습니다. 앞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이게 왠 날벼락이냐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잔치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저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들이 있느냐고 소리를 쳤습니다. 환자들 중에는 새치기 하지 말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합심동역해서 지붕에서부터 중풍이를 침상채 예수님 앞에 살살 내려 놓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불가능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어떤 장애물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장애물은 그들의 믿음을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어떻게 그들에게서 이런 행동이 나왔을까요? 그들은 친구를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중풍병을 꼭 치료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절박한 심정을 가지고 친구를 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이 충만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기발했고 행동은 저돌적인 탱크와 같았습니다. 그들의 행동을 저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만 그들의 파워풀한 행동에 혀를 내두를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신사적으로 하기를 좋아합니다. 양을 돕는데 깊은 이해에 기초해서 고상하게 도와야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분명하고 매몰차게 도와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신사적으로 도와야할 때도 있지만 무지막지하게 도와야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신사적으로 돕고자 하는 생각은 자기를 사랑하는 데서 나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를 어떻게 평가하셨습니까? 2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그들의 무례한 행동을 나무라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사람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통로는 오직 믿음뿐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는 병을 고치러 나왔는데 예수님은 먼저 죄사함을 주셨습니다. 이는 근원적인 치료를 하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짐에 눌려서 중풍병자와 같이 무기력합니다. 예수님은 먼저 그를 짓누르고 있는 죄의 짐을 벗겨 주고자 하셨습니다. 천로역정에 보면 크리스챤이 어깨에 큰 짐을 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죄의 짐이었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배반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존귀하게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보기에 심히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죄된 인간은 하나님께서 나를 왜 이렇게 지으셨느냐고 불평을 하고 원망을 합니다. 비교의식과 열등의식에 사로잡혀서 자기를 평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슬프시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파괴된 인간은 이웃을 사랑하기보다 이용하고 이기적인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이웃을 해하려 듭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평과 공의를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정직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거짓되고 속이기를 좋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정복하고 다스리고 개척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로 인해서 안일을 사랑하고 무기력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이킬 때 우리는 모든 것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죄사함을 선포하시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서로 무슨 의논을 했습니까? 그들은 “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며 속으로 궁시렁거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신성모독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죄를 사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도 다 아셨습니다. 그래서 물으셨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23)?” 둘 다 어렵지만 죄 사함을 주는 것보다 병을 고치는 것이 더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병을 고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라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알게 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땅에서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기쁜 소식입니다. 놀라운 소식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인간이 가장 불행한 것은 죄와 죽음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죄를 사해 주시고 죽음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이것이 복음 즉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그는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모든 사람이 놀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일어나 걷게 하심으로 그가 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증명하셨습니다. 죄는 죽어야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으면 죄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죄는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그 죄를 안고 끙끙거리며 힘든 하루 하루를 살아갑니다. 죄의 짐으로 인해 심령이 눌리고 얼굴은 시꺼멓게 되고 삶에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서 고생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사함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침내 그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물과 피를 흘리고 죽으셨습니다. 그는 아무 죄가 없는 분이시지만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인간의 죄를 사하는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으면 우리의 삶이 어떻게 달라질까요? 먼저 하나님과 화평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가 우리 마음에 임하게 됩니다. 죄를 지으면 욕하는 사람이 없어도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서 편하지 않습니다. 죄를 지으면 언제 심판을 받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죄를 숨기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조금만 잘못되어도 내 죄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정죄의식에 빠집니다. 그러나 죄사함을 받으면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 할 수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죄사함을 받으면 모든 자연 만물이 새롭게 보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사랑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나에게 해를 끼치고 미워했던 사람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 아버지의 끊임없는 인도하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고난이 닥쳐와도 고난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이 계속될 것을 믿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을 확신할 때 피곤할 수밖에 없고 포기하고 싶은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담대하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여전히 나를 통해 선한 일을 이루실 것임을 확신할 때 우리는 기쁨을 잃지 않는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도전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기력한 인생에서 죄사함을 받고 밝고 힘찬 인생을 사는 분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오기드온 목자님을 보십시오. 그는 중풍병에서 나음을 받고 이제는 어엿한 가장으로서, 캠퍼스 목자로서 중심을 기키며 헌신하고 있습니다. 박기드온 선교사님도 중풍병자와 같았습니다. 사실 그는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엄청난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짐으로 인해 70대 늙은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자 아주 용기있고 힘있는 사람이 되어 지금은 우즈벡의 영적 아버지로 쓰임 받고 있습니다. 저도 정욕과 허무로 인해서 무기력한 삶을 살았습니다. 죄짐으로 인해서 헛생각이나 하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을 듣고 죄사함을 확신하자 마음이 날아갈 듯이 가벼워지고 담대해졌습니다. 그래서 일생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겁 없이 결단했습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캠퍼스 지성인들을 섬기는 일에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죄사함을 받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된 우리 공동체가 건강하게 되어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죄를 용서해 주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것을 한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시고 중풍병자를 일으켜 세우심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죄는 사람을 더럽고 추하게 하고 무기력하게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문둥병자와 중풍병자가 이를 잘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더러운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셨습니다. 이제 서로 사랑을 하고 섬기고 개척할 수 있도록 새 힘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통해서 새로운 생명들이 많이 탄생하고 번성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고 확장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누가복음 5:12-26
요절/ 누가복음 5:20
이 사람아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오늘 우리는 한 문둥병자와 중풍병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얼짱, 몸짱을 환호하는 시대에 온 몸에 문둥병이 걸린 사람은 있을 자리가 없어 보입니다. 왕따 당하기 십상입니다. 대부분 그런 사람은 오래 쳐다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어떻게 대하시고 치료해 주셨습니까? 또 중풍병자가 나옵니다. 중풍병자는 무기력하였습니다.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참으로 무기력한 존재입니다. 경쟁이 치열한 시대에 그런 사람은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청년으로서 많은 일을 해야 할 그가 왜 그렇게 무기력한 것입니까? 힘이 없어 남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를 예수님은 어떻게 도와주셨습니까?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각자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인생 문제들을 해결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을 깨끗케 하신 예수님(12-16)
예수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여드름이 많이 나거나 아토스성 피부병으로 인해 얼굴이 붉어지거나 얼굴에 상처라도 생기면 매우 힘들어합니다. 그런데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그는 눈사람처럼 온 몸에 나균이 활짝 피었습니다. 그는 온 몸이 진물러서 고름이 생기고 냄새도 났을 것입니다. 그는 몸뚱아리가 어디 하나 성한 데가 없었습니다. 문둥병은 전염성이 있기 때문에 그는 마을 밖에서 혼자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가족들에게도 버림을 받고 친구들과 사회에서 따돌림을 받아야 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함께 부대끼며 살 때 인간의 정을 느끼고 희노애락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는 진 밖에서 혼자 살아야 하니 얼마나 외롭고 고독했을까요? 그는 어두컴컴한 움막에 누워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자고 일어나면 손가락이 하나 짤려 나갑니다. 그는 밖으로 나가 밝은 태양빛 아래 잘려져나간 손을 땅에 묻고 다시 움막으로 들어옵니다. 그에게 밝은 태양조차도 어둡게 보입니다. 그가 다시 자리에 누워있으면 마음은 매우 운명적이 되었습니다. 이제 눈썹도 빠지고, 귀도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는 괴물과 같았을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문둥병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러는 것은 둘째치고 자기가 자신의 몸을 볼 때도 너무나 더럽고 흉측해서 거울을 보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 혐오감으로 인해서 자기를 인정할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었습니다.
성경에서 문둥병은 죄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병이 깊어질수록 통증을 느끼지 못합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는 지을수록 죄의식을 갖지 않게 됩니다. 양심이 화인 맞은 사람처럼 무감각해집니다. 또한 문둥병이 걸리면 진 밖에 혼자 살아야 하듯이 죄도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 자신에 대해서도 관계성을 파괴합니다. 문둥병이 깊어지면 눈썹이 빠지고 눈이 빠지고 코가 문들어지고 지체가 떨어져 나가듯이 죄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의 형상을 파괴하여 괴물과 같이 만들어 버립니다. 문둥병은 더러운 고름을 흘러 냅니다. 마찬가지로 죄도 좋지 않은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붕대로 얼굴을 칭칭 감은 그가 예수님을 보고 나아와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쉰 목소리로 간구하였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12b).” 그는 자기의 뜻을 예수님께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자기가 깨끗하게 되기를 원하시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살다가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주님의 뜻을 묻고 싶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병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그는 낮아질대로 낮아져서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간구에는 믿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원하시면 자신을 깨끗케 하실 수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온 몸에 문둥병 걸린 사람이 깨끗케 될 수 있다니 얼마나 굉장한 믿음입니까? 그는 주님께서 깨끗케 하실 수 있다는 믿음과 소망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어떻게 치료하셨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 온 몸에 문둥병이 든 사람은 진물이 흐르고 냄새도 나고 접근하기가 역겨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의 환부에 대셨습니다. 아마 예수님은 그를 꼭 안아 주셨을 것입니다. 문둥병은 부정한 병이기 때문에 그에게 접촉하는 자마다 부정해 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치료하기 위해서 부정해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손이 그의 환부에 닿았을 때 그의 온 몸이 전율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의 마음의 상처들이 치료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문둥병이 곧 떠났습니다. 그의 살이 어린아이의 살과 같이 깨끗해졌습니다. 새로 태어난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깨끗하게 된 손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리고 만져보았습니다. 깨끗케 된 얼굴을 만져보며 기쁨에 넘쳐서 눈물을 줄줄 흘렸습니다. 자신도 이제는 깨끗한 얼굴로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이 기쁨을 온 세상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예수님은 그가 깨끗하고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그가 건강한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그의 생각보다 훨씬 깊고 넓습니다. 예수님의 치료의 능력은 말씀에서 나왔습니다. 이는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의 말씀입니다. 말씀의 권세는 죄도 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는 어떤 운명적인 문제도 변화시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경계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를 사회에 온전히 환원시키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고치신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왔습니다. 예수님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인정과 인기에 초연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을수록 그는 더욱 한적한 곳에 가사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사람들의 요구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일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방향을 따라 일하시는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더러운 문둥병을 어떻게 깨끗케 하셨는가 배웠습니다. 우리는 몸에 오물을 묻히면 더럽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순수한 젊은이들은 더러움에 대해서 민감합니다. 연인이 서로 껴안는 것을 보면 토할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나는 언제 저런 사람을 만나는가 생각합니다. 음란한 그림을 보고 더럽다고 생각하면서도 낄낄거리면서 즐깁니다. 나중에는 죄를 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옳다 그르다는 구별도 없어집니다. 나에게 좋으면 좋은 것이요 나에게 나쁘면 나쁜 것입니다. 그들에게 죄란 나에게 나쁜 것이요 선이란 나에게 좋은 것입니다. 모든 기준이 자기 중심적입니다. 이게 상대주의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만연한 젊은이들의 생각입니다. 죄의 기준이 다릅니다. 상대주의적인 생각에 오염되어 죄에 대한 분명한 시각이 없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 온 몸에 문둥병 걸린 사람과 같습니다. 다른 사람도 다 그렇게 하는데 뭐, 하면서 합리화 하지만 다른 사람도 다 죄로 더럽혀진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더럽다고 여겨지면 목욕을 합니다. 영적으로 더럽혀졌다고 해서 매일 목욕을 한다고 깨끗해질까요? 죄를 비누로 씻어낼 수 있을까요?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잊어버릴 수 있을까요? 인간의 기억력이란 잊고자 하면 할수록 더욱 생생하게 기억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미칠 지경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 예수님은 아무리 더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깨끗하게 씻어주십니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9:12,13).”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나의 더러움을 씻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나의 더러운 죄를 깨끗하게 씻기 위하여 피흘리셨음을 믿고 죄를 회개하면 어떤 더러움도 깨끗하게 씻겨 집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을 때 검정 숯댕이 같은 인생이 흰눈보다 더 희어지게 됩니다. 우리의 더러움을 씻기는 보혈의 샘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II. 이 사람아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17-26)
하루는 예수님이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조사하기 위해서 나온 종교 재판관들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그 분위기는 긴장감이 돌고 썰렁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든지 예수님을 고소하기 위해서 꼬투리를 잡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이때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님 앞에 들여 놓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했습니다. 누구나 예수님께 나아가고자 할 때 어떤 장애물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장애물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인간적으로 친한 친구들이 예수님께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되기고 하고 남자 친구나 여자 친구가 장애물이 되기도 합니다. 인간적인 선배들이 신앙생활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또 본인 내면의 두려움이나 대인기피증도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유를 구속당할 것 같은 생각, 매일 것 같은 생각, 시간을 빼앗길 것이라는 생각, 자기만의 세계를 포기해야 할 것 같은 생각으로 예수님께 나아가기를 주저주저합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무리들이 너무 많이 집안에 모여 있어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하여 뒤돌아 갈 수도 있었습니다. 다음에 오자고 위로하기가 쉬웠습니다. 또 중풍병자가 너무 꿈지럭 거려서 늦었다고 서로 원망하고 불평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막힌 길은 뚫고 길이 없으면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 중에 공병대 출신이 있었던가 봅니다. 그들은 지붕에 올라가서 기왓장을 벗겨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흙을 걷어내고 나무를 자르고 도배지도 벗겨냈습니다. 잠시 후 구멍이 뻥 뚫렸습니다. 예수님의 머리 위로 파란 하늘이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머리에 흙먼지를 쓰셔야 했습니다. 앞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이게 왠 날벼락이냐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잔치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저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들이 있느냐고 소리를 쳤습니다. 환자들 중에는 새치기 하지 말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합심동역해서 지붕에서부터 중풍이를 침상채 예수님 앞에 살살 내려 놓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불가능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어떤 장애물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장애물은 그들의 믿음을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어떻게 그들에게서 이런 행동이 나왔을까요? 그들은 친구를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중풍병을 꼭 치료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절박한 심정을 가지고 친구를 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이 충만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기발했고 행동은 저돌적인 탱크와 같았습니다. 그들의 행동을 저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만 그들의 파워풀한 행동에 혀를 내두를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신사적으로 하기를 좋아합니다. 양을 돕는데 깊은 이해에 기초해서 고상하게 도와야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분명하고 매몰차게 도와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신사적으로 도와야할 때도 있지만 무지막지하게 도와야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신사적으로 돕고자 하는 생각은 자기를 사랑하는 데서 나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를 어떻게 평가하셨습니까? 2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그들의 무례한 행동을 나무라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사람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통로는 오직 믿음뿐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는 병을 고치러 나왔는데 예수님은 먼저 죄사함을 주셨습니다. 이는 근원적인 치료를 하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짐에 눌려서 중풍병자와 같이 무기력합니다. 예수님은 먼저 그를 짓누르고 있는 죄의 짐을 벗겨 주고자 하셨습니다. 천로역정에 보면 크리스챤이 어깨에 큰 짐을 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죄의 짐이었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배반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존귀하게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보기에 심히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죄된 인간은 하나님께서 나를 왜 이렇게 지으셨느냐고 불평을 하고 원망을 합니다. 비교의식과 열등의식에 사로잡혀서 자기를 평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슬프시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파괴된 인간은 이웃을 사랑하기보다 이용하고 이기적인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이웃을 해하려 듭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평과 공의를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정직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거짓되고 속이기를 좋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정복하고 다스리고 개척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로 인해서 안일을 사랑하고 무기력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이킬 때 우리는 모든 것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죄사함을 선포하시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서로 무슨 의논을 했습니까? 그들은 “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며 속으로 궁시렁거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신성모독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죄를 사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도 다 아셨습니다. 그래서 물으셨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23)?” 둘 다 어렵지만 죄 사함을 주는 것보다 병을 고치는 것이 더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병을 고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라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알게 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땅에서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기쁜 소식입니다. 놀라운 소식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인간이 가장 불행한 것은 죄와 죽음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죄를 사해 주시고 죽음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이것이 복음 즉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그는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모든 사람이 놀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일어나 걷게 하심으로 그가 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증명하셨습니다. 죄는 죽어야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으면 죄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죄는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그 죄를 안고 끙끙거리며 힘든 하루 하루를 살아갑니다. 죄의 짐으로 인해 심령이 눌리고 얼굴은 시꺼멓게 되고 삶에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서 고생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사함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침내 그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물과 피를 흘리고 죽으셨습니다. 그는 아무 죄가 없는 분이시지만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인간의 죄를 사하는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으면 우리의 삶이 어떻게 달라질까요? 먼저 하나님과 화평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가 우리 마음에 임하게 됩니다. 죄를 지으면 욕하는 사람이 없어도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서 편하지 않습니다. 죄를 지으면 언제 심판을 받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죄를 숨기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조금만 잘못되어도 내 죄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정죄의식에 빠집니다. 그러나 죄사함을 받으면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 할 수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죄사함을 받으면 모든 자연 만물이 새롭게 보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사랑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나에게 해를 끼치고 미워했던 사람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 아버지의 끊임없는 인도하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고난이 닥쳐와도 고난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이 계속될 것을 믿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을 확신할 때 피곤할 수밖에 없고 포기하고 싶은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담대하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여전히 나를 통해 선한 일을 이루실 것임을 확신할 때 우리는 기쁨을 잃지 않는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도전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기력한 인생에서 죄사함을 받고 밝고 힘찬 인생을 사는 분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오기드온 목자님을 보십시오. 그는 중풍병에서 나음을 받고 이제는 어엿한 가장으로서, 캠퍼스 목자로서 중심을 기키며 헌신하고 있습니다. 박기드온 선교사님도 중풍병자와 같았습니다. 사실 그는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엄청난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짐으로 인해 70대 늙은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자 아주 용기있고 힘있는 사람이 되어 지금은 우즈벡의 영적 아버지로 쓰임 받고 있습니다. 저도 정욕과 허무로 인해서 무기력한 삶을 살았습니다. 죄짐으로 인해서 헛생각이나 하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을 듣고 죄사함을 확신하자 마음이 날아갈 듯이 가벼워지고 담대해졌습니다. 그래서 일생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겁 없이 결단했습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캠퍼스 지성인들을 섬기는 일에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죄사함을 받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된 우리 공동체가 건강하게 되어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죄를 용서해 주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것을 한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시고 중풍병자를 일으켜 세우심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죄는 사람을 더럽고 추하게 하고 무기력하게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문둥병자와 중풍병자가 이를 잘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더러운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셨습니다. 이제 서로 사랑을 하고 섬기고 개척할 수 있도록 새 힘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통해서 새로운 생명들이 많이 탄생하고 번성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고 확장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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