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주일말씀 성경별메시지 심포지엄 성경 검색
문제지 성경별문제지

특강 05고전1강(1:1-17)/ 십자가를 헛되지 않게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147회 작성일 05-09-18 08:37

본문

2005년 가을 고린도전서 제 1 강                                                             
말씀 / 고린도전서 1:1 - 17
요절 / 고린도전서 1:17

십자가를 헛되지 않게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2차전도 여행 때 개척함으로 이루어졌습니다(50-52년). 바울은 고린도에서 1년 반 동안 복음 역사를 감당하고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와 함께 에베소로 가고 거기에 그들 부부를 남겨둔 다음 안디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곧 3차 전도 여행의 여정에 올라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지방을 경유하여 에베소로 왔습니다(행18:18-23). 바울은 그가 세운 고린도 교회에 대한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면서도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하여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듣고 있었습니다.
  먼저는 글로에라는 자매님 집에서 보내온 소식이었는데 주로 교회 내에 파쟁이 있다는 것이었고(1:11,12), 심지어는 그들의 목자인 사도 바울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쓴 것이 1-4장의 내용입니다.  학자들은 고린도전서를 쓴 시기를 55년 봄으로 보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의 특징은 신자들이 실제 생활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에 대한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가 실제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그 문제들의 해결 방향은 율법이나 헬라인의 인본주의적인 사상에 근거한 것이나 시대의 조류에 맞춘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회개할 점과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의 교훈은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세상에서 죄와 많은 문제에 부딪히고 있는 신자들에게 복음적인 삶의 지침이 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의문을 가진 자들이 있었고 그에 대한 분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사도임을 내세우는 이유는 자기의 권위를 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가 전한 복음이 훼손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종을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은 자신의 부족함으로 인해서 책잡힐 것이 있다면 철저하게 회개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양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는 길입니다. 목자와 양 사이에 신뢰 관계가 생기면 그 양은 반드시 성장하고 열매를 맺습니다. 

  바울은 이 서신을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 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썼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이 세상에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는 말씀 선포와 성례와 치리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바울은 이 교회의 성도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간구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로 인하여 근심을 한다든가, 독설을 퍼붓는다든가 하지 않고 먼저 그들로 인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고린도라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믿음으로 살고 있다는 자체가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들이 홍익대 앞에 살면서 믿음의 중심을 지키면서 산다는 것 자체가 큰 감사제목입니다. 또한 캠퍼스 미션을 감당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인데 변함없이 이 일에 충성하는 여러분들을 생각할 때 감사를 드립니다.

  바울은 구체적으로 그들의 어떤 점을 인해서 감사하고 있습니까? 5-8절을 보십시오. “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고린도 교회는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했습니다. 구변은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메시지도 잘 전하고 말씀도 잘 알아들었습니다. 또 진리의 말씀이 풍성했습니다. 그들 안에는 영적인 지식이 풍족했습니다. 사도 바울과 학자 아볼로와 베드로가 그곳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열정적으로 배웠습니다. 그들 가운데 일대일 말씀 공부가 왕성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룹 공부도 뜨거웠습니다. 또한 성령의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남으로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그리스도의 증거가 풍족하게 있음으로 복음 신앙에 견고하게 서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같이 음란하고 물질적이고 다원화된 도시에서 이런 말씀의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나고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복음을 통해서 흉악한 죄인들이 회개하고 거룩하게 변화되어 하나님의 일군들이 되는 역사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에도 이런 구원의 역사를 새롭게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런 역사가 계속해서 일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9절을 보십시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사람들과의 교제보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갖기에 힘써야 합니다. 사람들과의 교제를 통해서 우리는 배움과 섬김의 기회를 갖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교제가 기초가 되지 않으면 사람들과의 교제가 피곤하게 됩니다. 사랑의 원천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주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은 우리가 말씀을 묵상할 때 성령을 통해서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십니다.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으로서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요16:14,15).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그 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면 예수님도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길은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교제할 수 있습니다.예수님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예수님의 피는 참된 음료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6:56)”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신 것을 묵상하십시오. 예수님의 사랑과 고난을 묵상해 보십시오. 십자가 상에서  드린 그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살을 찢기고 피를 흘리신 것을 믿으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그와 함께 먹고 마시게 됩니다(계3:20).

  우리가 예수님과 교제하는 결과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님과 교제할 때 참된 만족이 있고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과 교제할 때 무한한 풍요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 이외에 더 필요한 무엇이 없습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찬102).” 우리 주님과 교제하는 일을 힘쓸 때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덧입게 됩니다.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기고 거룩함이 자라게 됩니다.

  우리나라는 매우 바쁘게 돌아가는 사회입니다. 바쁘게 살다 보니 하나님과의 교제가 부족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벽 기도를 오전 6시에서 5시 30분으로 30분 일찍 하게 되었습니다. 아침 시간에 주님과의 교제를 깊게 가짐으로서 우리의 내면이 풍성해지고 힘이 생깁니다. 새벽 기도 시간에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고 기도하면서 주님과 교제를 가질 때 하루 하루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새벽 일찍 한적한 곳에 가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기에 힘썼습니다. 그랬을 때 그는 날마다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고 힘있게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에 복음이 편만해 질 때까지 개척 역사를 섬길 수 있었던 원동력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에 힘썼기 때문입니다. 열정이 없으면 좋은 환경이 주어져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열정이 있으면 아무리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복음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가 캠퍼스 제자 양성 역사를 섬기려면 도전 정신과 개척 정신이 충만해야 합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장애물들을 뛰어 넘어 개척 역사를 섬기려면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열정과 비전은 주님과의 교제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의 교제를 깊이 갖게 될 때 동역자들과도 깊은 사랑의 교제를 가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까지 그들로 인해서 감사를 한 후에 그들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있었던 문제들이 무엇이었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그들 가운데는 분쟁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쟁이었습니까? 11,12절을 보십시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그들 가운데 분쟁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그리스도보다 사람을 앞세운 데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교회를 개척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속했다는 사람들은 개척 조상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에게서 복음 신앙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들은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래서 우상의 제물도 자유롭게 먹었습니다. 바울이 그곳을 개척하고 나서 아볼로에게 교회를 위임했습니다. 아볼로는 구약과 헬라 철학에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매우 박식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깊이가 있었습니다. 아볼로에게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우리는 깊이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볼로를 중심으로 지식인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그는 화려한 미사여구를 구사하면서 메시지를 전했을 것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듣고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게바에게서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에게 배웠다고 자신들이 정통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베드로 주위에는 율법적인 유대인들이 중심이 되어 모였을 것입니다. 이도 저도 아닌 사람들은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해서 또 한 파를 형성했습니다.

  물론 당시 지도자들이 분쟁하지는 않았습니다. 바울과 아볼로, 바울과 게바는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 깊이 신뢰했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를 위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영웅숭배의 기질이 있습니다. 영웅 밑에 들어가서 보호받고 기득권을 누리고 싶어 하는 기질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누구에게서 배웠다, 나는 누구 파라고 말하면서 분파를 만들었습니다. 사실은 자기의 생각과 유익을 좇아서 이런 파를 만드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들어서 세를 과시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우리는 팀 모임이나 지파 별로 또는 일대일 목자 중심으로 똘똘 뭉쳐서 벽을 쌓고 싶은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끼리끼리 교제를 나누고 다른 팀이나 지파에는 무관심하기 쉽습니다. 우리의 일대일 관계가 장점이 많지만 인간적인 될 때는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단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내세우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하나가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분쟁이 어떤 점에서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합니까? 13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바울은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결코 나누이지 않았습니다. 또 누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까?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해서 피 흘려 죽으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목자들의 사랑이 있지만 그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영접하고 그런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주목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양들의 마음을 그리스도께로 향하도록 힘써 노력했습니다. 14-16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외에는 다른 아무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당시 세례를 받는 것은 목숨과 바꿀 정도로 중한 예식이었습니다.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님과 연합하고 그리스도께 속했다고 선포하는 순간부터 핍박이 뒤따랐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에게 세례를 받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세례 주는 일을 자제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이름이 드러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도 자기의 사역이 놀랍게 성장하자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를 그리스도라고 생각하고 몰려드는 양떼들에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도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자신은 쇠하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앗씨시의 성자 프란체스코가 사역을 할 때 자신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관을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서 재를 그 머리에 뿌리면서 나는 죽었습니다. 나를 보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목하라고 하면서 관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이사무엘 선교사님이나 마더 배리 선교사님을 통한 사역이 위대하지만 그들을 자랑하기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힘써 자랑해야합니다. 그것이 그 분들이 원하는 바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계속해서 쓰실 수 있는 길입니다.

  다 같이 17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식을 섬기는 일로 시간을 보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교회가 커지면 결혼식, 장례식, 돌 잔치, 회갑 잔치, 세례식, 성찬식 등 예식을 행하는 일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일보다는 오직 복음을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병고침을 받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이 그를 찾을 때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막1:3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기쁜 소식, 좋은 소식, 복된 소식이란 뜻입니다. 복음의 핵심 내용은 예수님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죄사함을 받고 영생과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이것이 제자도입니다. 자기를 주장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뜻을 찾고 순종하고자 애를 쓰게 됩니다. 이런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나가고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을 공급받아 살게 됩니다. 여기에 거룩함과 풍요와 생명과 기쁨과 자유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고 인간의 지혜나 인본적인 철학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고린도의 어떤 신자들은 인간의 지혜와 달변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들은 전형적인 헬라인으로서 수사학과 철학 연구에 지나칠 정도로 몰두했습니다. 그 결과 십자가의 이름과 형식만 남고 내용은 없어졌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무력하고 효력이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할 때 사람은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변화하게 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말 중심, 지식 중심, 사람 중심이 되면 안 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죄사함이 일어나고 인격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증거될 때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때 죄의 속박에서 자유케 되고 흑암의 권세가 떠나가고 기쁨과 사랑과 생명이 충만하게 됩니다.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은 예수님과 교제를 깊이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교제는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것이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배를 보는 것도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높이기보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즉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지체의식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힘써 전함으로써 구원 역사를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주장하려는 의지를 부인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고 순종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과 자유함과 풍성한 축복이 우리와 함께 할 줄 믿습니다.


첨부파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323건 73 페이지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