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05gen21b(34,35장)/벧엘로 올라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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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창세기 제 21b 강
말씀 / 창세기 34:1 - 35:29
요절 / 창세기 35:1
벧엘로 올라가라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1).”
야곱은 산전수전을 다 겪고 벧엘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4장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지저분한 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는 강간, 속임, 탐욕, 살인, 폭력, 그리고 자기중심주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34장 전체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야곱은 이제까지 자신의 문제로 고통했습니다. 그러나 이후로는 자녀들의 문제로 고통을 겪습니다. 그는 자녀들을 통해서 여러 가지 훈련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게 됩니다. 이 시간 야곱이 어쩔 수 없이 벧엘로 올라가게 된 디나 사건의 경위를 살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연약함과 허물을 감당해 주시고 믿음의 조상으로 살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시간 우리도 나의 벧엘로 올라가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디나 사건(34:1-31)
디나는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이었습니다. 디나는 12형제 가운데 유일한 자매로서 오빠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며 공주와 같이 자랐습니다. 당시 가나안 문화는 매우 발달해 있었습니다. 야곱이 세겜 땅에 머물게 되자 디나는 그 땅 여자들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디나는 그들의 의상과 악세사리의 화려함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사귀기 시작했습니다. 디나의 행동은 신중하지 못했습니다. 자연히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 추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디나는 가나안 여인들 가운데서 단연 돋보였습니다. 세겜은 디나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세겜은 그 마음이 깊이 디나에게 연련하며 그 소녀를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말로 위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아비 하몰에게 청하여 이 소녀를 내 아내로 얻게 하여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세겜은 악을 행하였지만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변이 일어난 근본 원인은 야곱이 약속의 땅으로 올라가지 않고 세겜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서 볼 때 가장의 영적 상태가 중요합니다. 야곱의 내면에 있는 세상에 대한 소망이 자녀들에게 악 영향을 끼쳤습니다. 야곱은 디나 혼자서 돌아다녀도 방치했습니다. 디나는 믿음의 공동체 속에 살면서도 마음은 세상에 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면서 좀 촌스럽게 보여도 믿음의 영향권 속에서 사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같이 있는 것보다 더 안전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면서 살기 때문에 세상의 유행에 뒤쳐진다고 해서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로마서 12장에서 사도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입니다.
우리는 디나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 나타난 세겜의 아버지 하몰과 디나의 아버지 야곱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하몰은 야곱에게 말하러 왔습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자기 아들 세겜이 디나를 연련하여 하니 그를 세겜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리고 서로가 통혼하자고 합니다. 또 이 땅에 머물러 매매하여 기업을 얻으라고 합니다. 세겜도 디나의 아비와 남형들에게 나로 너희에게 은혜를 입게 하라. 너희가 내게 청구하는 것은 내가 수응하리니 아무리 큰 빙물과 예물을 청구할지라도 너희가 내게 말한 대로 수응하리라고 합니다. 이에 비해서 야곱은 잠잠하였습니다. 그는 자녀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지 않는 아버지였습니다.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아버지는 가족들을 힘들게 합니다. 가정의 문제이든, 영적인 문제이든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문제만 생겼다 하면 도망가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아내한테 모든 것을 맡기고 책임을 지지 않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영광을 받거나 좋을 때만 나서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소심하고 무책임한 아버지, 그러면서도 개인적인 고집과 야망은 무척이나 많은 아버지가 바로 야곱입니다. 먼저 근심하고 분노해야 할 사람은 아버지인데 오히려 아들들이 더 분노합니다. 그가 문제 해결의 열쇠를 잡지 않았을 때 자녀들의 복수심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한국의 남편들은 자녀 교육 문제를 바쁘다는 핑계를 대면서 아내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신앙 교육과 인성 교육, 예절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은 가정의 제사장이요 리더입니다. 그러므로 남편들이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지도하는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하몰과 세겜이 디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제안한 것 중에 구속사적으로 위험이 내포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즉 그들은 너희가 원하는 것은 다 주겠다 그러니 타협하자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유혹하는 방법은 물질 만능의 유혹입니다. 돈만 벌 수 있다면, 안정만 찾을 수 있다면 다 좋은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별나게 사느냐고 비웃습니다. 그러나 그런 소리를 들어도 예수 믿는 사람들은 별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까? 그들이 속여 대답한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야곱의 아들들이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는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할례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우리 누이를 줄 수 없노니 이는 우리의 수욕이 됨이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몰과 세겜이 제시한 타협안을 거부하고 자신들이 해결책을 내어 놓았습니다.만일 그들 중 남자가 다 할례를 받고 우리와 같이 되면 서로 결혼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만일 우리를 듣지 아니하고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우리는 곧 우리 딸을 데리고 가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몰과 세겜은 자기 백성들을 설득하였습니다. 21-23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들은 우리와 친목하고 이 땅은 넓어 그들을 용납할 만하니 그들로 여기서 거주하며 매매하게 하고 우리가 그들의 딸을 아내로 취하고 우리 딸들도 그들에게 주자 그러나 우리 중에 모든 남자가 그들의 할례를 받음 같이 할례를 받아야 그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거하여 한 민족 되기를 허락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들의 생축과 재산과 그 모든 짐승이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 다만 그 말대로 하자 그리하면 그들이 우리와 함께 거하리라.” 하몰과 세겜은 자신들의 본 뜻은 숨기고 좋은 점만 말했습니다. 이는 야곱의 아들들이 속여 대답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할례를 행한 지 삼일에 어떤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까? 할례를 받은 지 삼일에 미쳐 그들이 고통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비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부지 중에 성을 엄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 칼로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여러 아들이 그 시체 있는 성으로 가서 노략하였습니다. 그들이 양과 소와 나귀와 그 성에 있는 것과 들에 있는 것과 그 모든 재물을 빼앗으며 그 자녀와 아내들을 사로잡고 집 속의 물건을 다 노략했습니다. 참으로 엄청난 살육이 자행되었습니다. 특히 이들이 할례를 행하고 나서 고통 중에 있을 때 살육한 것은 더욱 잔인하고 파렴치합니다. 시므온과 레위의 행위는 야곱에게 더 큰 부담을 주었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습니다. 그들이 종교의 이름을 빙자해서 이런 악을 행했기 때문에 더욱 수치스러웠습니다.
야곱은 그들을 어떻게 책망했습니까? 30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이 땅 사람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냄새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리하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야곱은 매우 두려웠습니다.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이 그들을 친다면 자신과 그 집은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말을 보면 한 문장 속에 ‘나’라는 말이 여섯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야곱의 관심은 늘 자기였습니다. 끝까지 이기적인 야곱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포기치 않으시고 믿음의 조상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열 두 조상들은 의인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내 세울 것이 없습니다.
둘째, 벧엘로 올라가라(35:1-8)
야곱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나타나 방향을 주셨습니다. 35: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주셨던 약속을 20년 이상이 지난 후에도 변함없이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환란을 통해서 그 말씀에 순종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생각이 강하고 세상 욕심이 많은 야곱을 섬기기 위해서 오래 참으셨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음성도 듣고 보호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세속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야곱에게 나타나서 말씀을 주시고 감당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무조건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야곱이 신앙 생활을 오래 했는데도 여전히 옛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볼 때 실망스럽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이를 감당해 주시는 하나님을 볼 때 하나님은 참으로 은혜로우신 분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이런 사랑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없는 사랑, 끊없는 사랑, 영원한 사랑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하나님을 만나는 데 있어서 예배자의 정결함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34:7절에서 디나 사건은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이스라엘 전체가 정결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야곱은 자신들의 문제가 세상의 죄악된 문화에 물든 것임을 알고 근원적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고자 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맞으면 회개하고 돌이킵니다. 회개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야곱은 이제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환난 날에 그에게 응답하시며 그의 가는 길에 함께 하신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려고 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할 때 자기가 본래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잊고 믿지 않으면 현실의 비참함 속에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잃어 버린 사람은 미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잃어 버린 사람은 인간적인 불행 속에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잃어 버리면 오직 욕망 덩어리인 자기 자신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야곱과 그 가족들은 벧엘로 돌아가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했습니까? 4,5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그들이 발행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 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그들이 섬기던 모든 이방 신상들과 귀고리를 땅에 묻어버리고 벧엘로 향했습니다. 라헬이 훔쳐왔던 아버지의 드라빔 우상도 묻었습니다. 신상들은 대개 금으로 만들어진 값이 나가는 것들입니다. 또 가장 애지중지 하는 소장품들입니다. 한마디로 보물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이런 것들을 희생하고 포기했습니다. 그들이 말씀에 순종했을 때 그렇게 두려워하던 사면 고을들이 잠잠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기 때문에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을 보호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회복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회상하기 시작하면 성령의 능력이 터지기 시작합니다. 야곱과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은 무사히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렀습니다. 야곱은 거기서 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고 불렀습니다. 엘벧엘이란 벧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의 인생은 한 바퀴 돌아서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한 바퀴 도는 동안에 많은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8절을 보십시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훈련을 받는 동안 사랑하는 어머니 드보라가 죽었습니다. 그는 리브가의 유모였던 드보라를 어머니와 같이 존경하고 섬겼습니다. 드보라는 달리 갈 곳이 없는 나이 많은 노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런 그를 행복하게 돌보아 주었습니다. 야곱은 드보라의 죽음을 굉장히 슬퍼했습니다. 그가 드보라를 수목장한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굉장히 상심했다는 뜻입니다. 성숙이란 하찮은 사람을 돌보는 것입니다. 가치 없는 사람, 자기가 무시해도 좋은 사람까지 돌볼 수 있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미숙한 사람은 자기에게 필요한 사람만 돌봅니다. 유명한 사람만 골라서 사귀는 사람,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만 만나는 사람은 미숙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무시해도 되는 사람까지 사랑하고 죽음의 순간을 지켜주고 장사지내 주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야곱은 변했습니다. 그의 내면이 성숙해졌습니다. 이제는 자기 중심에서 타인 중심으로 변했습니다. 남의 아픔을 이해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연약한 사람들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셋째,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말라(9-29)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말씀을 주셨습니까? 10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야곱은 속이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환도뼈가 부러진 뒤에도 그의 세속적인 성향은 남아 있었습니다. 야곱은 세겜에 머물며 디나 사건을 겪고 우상을 버리고 몸을 정결케 하고 벧엘로 올라갔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성숙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성숙과 변화를 인정하시는 말씀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자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22:12)”라고 인정하신 것과 같습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을 가지고는 좌절과 인생의 어려움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새 이름에 합당하게 사는데 한참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나님은 소망 가운데 그를 참으시며 훈련하셨습니다.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셨는데 이스라엘이란 하나님을 이겼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인정받았다는 뜻입니다. 이름을 고쳐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한마디로 죄인이 변하여 의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어떻게 축복해 주셨습니까? 11-13절을 보십시오.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 이 말씀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셨던 말씀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신앙 출발을 할 때 주셨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 말씀을 기억하게 하시고 그 말씀을 믿도록 도우시고 그 말씀대로 행하십니다. 하나님은 야곱으로 하여금 한마디 말씀을 붙잡고 일생토록 체험하며 이루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땅과 후손을 주시고 함께 하십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후에 에서가 야곱과 함께 거하다가 타처로 떠나갔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언약이 야곱을 통해서 온전히 계승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야곱의 생애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들판의 잡초와 같이 살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밟히면서도 끈질긴 생명력과 도전 정신을 가지고 살아나왔습니다. 그의 일생에 험한 일들이 많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을 이루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처음 신앙을 출발했던 벧엘로 돌아오기까지 많은 훈련을 받았고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우리의 벧엘은 어디입니까? 우리가 처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던 그때의 사랑과 열정을 회복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때 주신 언약의 말씀을 성취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창세기 34:1 - 35:29
요절 / 창세기 35:1
벧엘로 올라가라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1).”
야곱은 산전수전을 다 겪고 벧엘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4장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지저분한 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는 강간, 속임, 탐욕, 살인, 폭력, 그리고 자기중심주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34장 전체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야곱은 이제까지 자신의 문제로 고통했습니다. 그러나 이후로는 자녀들의 문제로 고통을 겪습니다. 그는 자녀들을 통해서 여러 가지 훈련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게 됩니다. 이 시간 야곱이 어쩔 수 없이 벧엘로 올라가게 된 디나 사건의 경위를 살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연약함과 허물을 감당해 주시고 믿음의 조상으로 살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시간 우리도 나의 벧엘로 올라가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디나 사건(34:1-31)
디나는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이었습니다. 디나는 12형제 가운데 유일한 자매로서 오빠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며 공주와 같이 자랐습니다. 당시 가나안 문화는 매우 발달해 있었습니다. 야곱이 세겜 땅에 머물게 되자 디나는 그 땅 여자들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디나는 그들의 의상과 악세사리의 화려함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사귀기 시작했습니다. 디나의 행동은 신중하지 못했습니다. 자연히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 추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디나는 가나안 여인들 가운데서 단연 돋보였습니다. 세겜은 디나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세겜은 그 마음이 깊이 디나에게 연련하며 그 소녀를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말로 위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아비 하몰에게 청하여 이 소녀를 내 아내로 얻게 하여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세겜은 악을 행하였지만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변이 일어난 근본 원인은 야곱이 약속의 땅으로 올라가지 않고 세겜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서 볼 때 가장의 영적 상태가 중요합니다. 야곱의 내면에 있는 세상에 대한 소망이 자녀들에게 악 영향을 끼쳤습니다. 야곱은 디나 혼자서 돌아다녀도 방치했습니다. 디나는 믿음의 공동체 속에 살면서도 마음은 세상에 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면서 좀 촌스럽게 보여도 믿음의 영향권 속에서 사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같이 있는 것보다 더 안전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면서 살기 때문에 세상의 유행에 뒤쳐진다고 해서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로마서 12장에서 사도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입니다.
우리는 디나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 나타난 세겜의 아버지 하몰과 디나의 아버지 야곱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하몰은 야곱에게 말하러 왔습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자기 아들 세겜이 디나를 연련하여 하니 그를 세겜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리고 서로가 통혼하자고 합니다. 또 이 땅에 머물러 매매하여 기업을 얻으라고 합니다. 세겜도 디나의 아비와 남형들에게 나로 너희에게 은혜를 입게 하라. 너희가 내게 청구하는 것은 내가 수응하리니 아무리 큰 빙물과 예물을 청구할지라도 너희가 내게 말한 대로 수응하리라고 합니다. 이에 비해서 야곱은 잠잠하였습니다. 그는 자녀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지 않는 아버지였습니다.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아버지는 가족들을 힘들게 합니다. 가정의 문제이든, 영적인 문제이든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문제만 생겼다 하면 도망가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아내한테 모든 것을 맡기고 책임을 지지 않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영광을 받거나 좋을 때만 나서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소심하고 무책임한 아버지, 그러면서도 개인적인 고집과 야망은 무척이나 많은 아버지가 바로 야곱입니다. 먼저 근심하고 분노해야 할 사람은 아버지인데 오히려 아들들이 더 분노합니다. 그가 문제 해결의 열쇠를 잡지 않았을 때 자녀들의 복수심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한국의 남편들은 자녀 교육 문제를 바쁘다는 핑계를 대면서 아내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신앙 교육과 인성 교육, 예절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은 가정의 제사장이요 리더입니다. 그러므로 남편들이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지도하는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하몰과 세겜이 디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제안한 것 중에 구속사적으로 위험이 내포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즉 그들은 너희가 원하는 것은 다 주겠다 그러니 타협하자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유혹하는 방법은 물질 만능의 유혹입니다. 돈만 벌 수 있다면, 안정만 찾을 수 있다면 다 좋은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별나게 사느냐고 비웃습니다. 그러나 그런 소리를 들어도 예수 믿는 사람들은 별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까? 그들이 속여 대답한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야곱의 아들들이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는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할례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우리 누이를 줄 수 없노니 이는 우리의 수욕이 됨이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몰과 세겜이 제시한 타협안을 거부하고 자신들이 해결책을 내어 놓았습니다.만일 그들 중 남자가 다 할례를 받고 우리와 같이 되면 서로 결혼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만일 우리를 듣지 아니하고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우리는 곧 우리 딸을 데리고 가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몰과 세겜은 자기 백성들을 설득하였습니다. 21-23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들은 우리와 친목하고 이 땅은 넓어 그들을 용납할 만하니 그들로 여기서 거주하며 매매하게 하고 우리가 그들의 딸을 아내로 취하고 우리 딸들도 그들에게 주자 그러나 우리 중에 모든 남자가 그들의 할례를 받음 같이 할례를 받아야 그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거하여 한 민족 되기를 허락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들의 생축과 재산과 그 모든 짐승이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 다만 그 말대로 하자 그리하면 그들이 우리와 함께 거하리라.” 하몰과 세겜은 자신들의 본 뜻은 숨기고 좋은 점만 말했습니다. 이는 야곱의 아들들이 속여 대답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할례를 행한 지 삼일에 어떤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까? 할례를 받은 지 삼일에 미쳐 그들이 고통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비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부지 중에 성을 엄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 칼로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여러 아들이 그 시체 있는 성으로 가서 노략하였습니다. 그들이 양과 소와 나귀와 그 성에 있는 것과 들에 있는 것과 그 모든 재물을 빼앗으며 그 자녀와 아내들을 사로잡고 집 속의 물건을 다 노략했습니다. 참으로 엄청난 살육이 자행되었습니다. 특히 이들이 할례를 행하고 나서 고통 중에 있을 때 살육한 것은 더욱 잔인하고 파렴치합니다. 시므온과 레위의 행위는 야곱에게 더 큰 부담을 주었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습니다. 그들이 종교의 이름을 빙자해서 이런 악을 행했기 때문에 더욱 수치스러웠습니다.
야곱은 그들을 어떻게 책망했습니까? 30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이 땅 사람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냄새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리하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야곱은 매우 두려웠습니다.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이 그들을 친다면 자신과 그 집은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말을 보면 한 문장 속에 ‘나’라는 말이 여섯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야곱의 관심은 늘 자기였습니다. 끝까지 이기적인 야곱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포기치 않으시고 믿음의 조상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열 두 조상들은 의인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내 세울 것이 없습니다.
둘째, 벧엘로 올라가라(35:1-8)
야곱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나타나 방향을 주셨습니다. 35: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주셨던 약속을 20년 이상이 지난 후에도 변함없이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환란을 통해서 그 말씀에 순종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생각이 강하고 세상 욕심이 많은 야곱을 섬기기 위해서 오래 참으셨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음성도 듣고 보호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세속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야곱에게 나타나서 말씀을 주시고 감당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무조건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야곱이 신앙 생활을 오래 했는데도 여전히 옛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볼 때 실망스럽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이를 감당해 주시는 하나님을 볼 때 하나님은 참으로 은혜로우신 분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이런 사랑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없는 사랑, 끊없는 사랑, 영원한 사랑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하나님을 만나는 데 있어서 예배자의 정결함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34:7절에서 디나 사건은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이스라엘 전체가 정결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야곱은 자신들의 문제가 세상의 죄악된 문화에 물든 것임을 알고 근원적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고자 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맞으면 회개하고 돌이킵니다. 회개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야곱은 이제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환난 날에 그에게 응답하시며 그의 가는 길에 함께 하신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려고 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할 때 자기가 본래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잊고 믿지 않으면 현실의 비참함 속에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잃어 버린 사람은 미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잃어 버린 사람은 인간적인 불행 속에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잃어 버리면 오직 욕망 덩어리인 자기 자신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야곱과 그 가족들은 벧엘로 돌아가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했습니까? 4,5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그들이 발행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 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그들이 섬기던 모든 이방 신상들과 귀고리를 땅에 묻어버리고 벧엘로 향했습니다. 라헬이 훔쳐왔던 아버지의 드라빔 우상도 묻었습니다. 신상들은 대개 금으로 만들어진 값이 나가는 것들입니다. 또 가장 애지중지 하는 소장품들입니다. 한마디로 보물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이런 것들을 희생하고 포기했습니다. 그들이 말씀에 순종했을 때 그렇게 두려워하던 사면 고을들이 잠잠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기 때문에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을 보호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회복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회상하기 시작하면 성령의 능력이 터지기 시작합니다. 야곱과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은 무사히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렀습니다. 야곱은 거기서 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고 불렀습니다. 엘벧엘이란 벧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의 인생은 한 바퀴 돌아서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한 바퀴 도는 동안에 많은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8절을 보십시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훈련을 받는 동안 사랑하는 어머니 드보라가 죽었습니다. 그는 리브가의 유모였던 드보라를 어머니와 같이 존경하고 섬겼습니다. 드보라는 달리 갈 곳이 없는 나이 많은 노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런 그를 행복하게 돌보아 주었습니다. 야곱은 드보라의 죽음을 굉장히 슬퍼했습니다. 그가 드보라를 수목장한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굉장히 상심했다는 뜻입니다. 성숙이란 하찮은 사람을 돌보는 것입니다. 가치 없는 사람, 자기가 무시해도 좋은 사람까지 돌볼 수 있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미숙한 사람은 자기에게 필요한 사람만 돌봅니다. 유명한 사람만 골라서 사귀는 사람,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만 만나는 사람은 미숙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무시해도 되는 사람까지 사랑하고 죽음의 순간을 지켜주고 장사지내 주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야곱은 변했습니다. 그의 내면이 성숙해졌습니다. 이제는 자기 중심에서 타인 중심으로 변했습니다. 남의 아픔을 이해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연약한 사람들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셋째,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말라(9-29)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말씀을 주셨습니까? 10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야곱은 속이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환도뼈가 부러진 뒤에도 그의 세속적인 성향은 남아 있었습니다. 야곱은 세겜에 머물며 디나 사건을 겪고 우상을 버리고 몸을 정결케 하고 벧엘로 올라갔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성숙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성숙과 변화를 인정하시는 말씀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자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22:12)”라고 인정하신 것과 같습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을 가지고는 좌절과 인생의 어려움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새 이름에 합당하게 사는데 한참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나님은 소망 가운데 그를 참으시며 훈련하셨습니다.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셨는데 이스라엘이란 하나님을 이겼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인정받았다는 뜻입니다. 이름을 고쳐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한마디로 죄인이 변하여 의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어떻게 축복해 주셨습니까? 11-13절을 보십시오.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 이 말씀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셨던 말씀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신앙 출발을 할 때 주셨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 말씀을 기억하게 하시고 그 말씀을 믿도록 도우시고 그 말씀대로 행하십니다. 하나님은 야곱으로 하여금 한마디 말씀을 붙잡고 일생토록 체험하며 이루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땅과 후손을 주시고 함께 하십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후에 에서가 야곱과 함께 거하다가 타처로 떠나갔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언약이 야곱을 통해서 온전히 계승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야곱의 생애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들판의 잡초와 같이 살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밟히면서도 끈질긴 생명력과 도전 정신을 가지고 살아나왔습니다. 그의 일생에 험한 일들이 많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을 이루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처음 신앙을 출발했던 벧엘로 돌아오기까지 많은 훈련을 받았고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우리의 벧엘은 어디입니까? 우리가 처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던 그때의 사랑과 열정을 회복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때 주신 언약의 말씀을 성취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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