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서 06 고전9강(8:1-13)/ 지식보다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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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고린도전서 제 9강
말씀 / 고린도전서 8:1-13
요절 / 고린도전서 8:1
지식보다 사랑으로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오늘 말씀은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한 사도 바울의 대답입니다. 당시 고린도에는 우상에게 제물로 드린 고기들이 시장에서 많이 팔렸습니다.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면 일부는 자기가 먹고 일부는 제사장 몫이 되었습니다. 제사장이 그것을 다 먹을 수 없으니까 내다 팔았습니다. 그런데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를 먹어도 되는가, 절대로 먹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심각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 문제는 교회를 매우 시끄럽게 했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책임에 대해서 말하고, 하나님의 지혜로 두 극단을 하나로 통합하여 지식보다 사랑으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책임을 배우고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권리를 포기한 바울의 목자상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대 헬라인들은 다신교 사회에서 범신론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방인들은 세상에는 귀신들이 꽉 차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고기나 짐승을 잡아먹기 전에 반드시 그 일부를 먼저 신에게 바쳤습니다. 그리고 신전에서 제사를 드리면 귀신들이 음식물에 붙어 있다가 사람에게 들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신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제사장에게 드린 제물이 많이 남기 때문에 이것들을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또 당시 모든 사회 생활이 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고, 우상 숭배와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모임도 우상을 섬기는 신전에서 행해졌습니다. 또 불신 친구들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들로 음식을 차려 놓고 초대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야 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어도 되느냐, 먹어서는 안 되느냐 하는 문제가 크리스챤들에게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이런 문제는 고린도 교회뿐만 아니라 로마 교회에도 있었습니다. 로마서 14장 1-3절에 보면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영적 지식이 있는 사람은 부족한 사람들을 무시하였습니다. 자신이 깨달은 한 가지 진리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지식을 좀 가졌다고 교만하게 행하지 말고 사랑으로 덕을 세워야한다고 권면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안다며 스스로를 자랑하는 정도라면 하나님을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2).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면서 조금 열매가 있고, 성장하는 역사가 있을 때 우리는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사단은 우리 마음을 부추겨서 교만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교만한 마음을 보이기 시작하면 이 사람, 저 사람을 통해서 싸우십니다. 그리고 경고를 보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일임을 알고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갑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또한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진정으로 겸손하시고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같이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더욱 겸손하게 됩니다. 참된 지식은 사람을 덕스럽게 합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도 알아주십니다(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편에서 서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믿음이 자랄수록, 사회적인 지위가 높아질수록, 경험이 쌓이고, 지식이 많아질수록 마음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은 자기 위에 더 높으신 분이 있음을 인식하고 그 앞에 마음을 낮추는 것입니다. 무게 중심이 낮아질수록 안정되듯이 우리가 마음을 낮추면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행하여 공동체에 덕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는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리고 다 주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열심을 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이 은사와 기질에 따라서 약간씩 다릅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자 한다면 나와 방법이 다르다고 해서 틀린 것이 아님을 알고 서로 인정하고 세워주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 가운데 평화가 임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일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모임은 견고하게 서서 사단의 온갖 궤계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 역사를 힘있게 이루어 나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우상에게 바쳤던 음식을 먹는 일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먼저 우상에 대해 말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우상이란 무엇입니까?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상이란 나무 토막이나 깎아 세운 돌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이런 우상들은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갈망을 투영시켜 놓은 허상에 불과합니다. 우상은 신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신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늘과 땅에 많은 신과 주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버지이신 전능하신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그분은 만물을 창조하셨고, 우리도 그 분을 위해서 존재합니다(6). 신명기6:4,5절은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우리는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만 사랑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우상을 섬기지는 않지만 성경은 탐심도 우상 숭배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할 때 바로 그것이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때로는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되기도 하고 자녀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인정을 구하고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때마다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영적인 우상 숭배요 영적인 간음으로서 우리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투쟁을 적극적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내 마음의 첫 자리, 내 가정의 첫 자리에 모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의지하고 경배해야 할 유일한 분이십니다. 우리 구원자도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습니다(골1:15-17). 만물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합니다. 모든 식물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함으로 먹으면 깨끗합니다.
그러므로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아무 거리낌 없이 먹어도 됩니다. 그러나 7절을 보십시오. 이러한 지식은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 받은 지가 얼마 안 되어 영적으로 어려서 우상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었습니다. 또 우상을 몇 십년 동안 섬겨 오다가 예수님을 영접한 분도 있습니다. 이들은 여전히 우상을 무서운 힘을 가진 존재로 알고 두려워합니다. 이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은 실제로 우상에게 더렵혀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양심에 거리끼면서도 그런 음식을 먹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이들은 그 제물로 인해 양심이 약해지고 더러워집니다.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롬14:20).”
8절을 보십시오.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합니다. 음식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먹지 않는다고 해서 나쁠 것도 없고, 먹는다고 해서 나을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먹는 문제로 서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하나님과 우상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자기의 자유가 약한 자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9). 지식에 사랑이 따라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약한 영혼을 죽이는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지식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우상의 전에서 열리는 연회에 참여하여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약한 자들이 그것을 보고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합니다. 믿는 사람이 점치는 집에 드나들고, 술집에 드나들면서 나는 거리낌이 없다고 제사 음식을 먹고 술을 먹는다면 믿음이 약한 사람이 이를 보고 담력을 얻어 방종하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들의 죄가 얼마나 크다고 했습니까? 11,12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구원해 놓은 형제를 고기 먹는 사소한 문제로 실족케 한다면 그 죄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이는 예수님에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어떤 자세로 형제를 섬기겠다고 합니까?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며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바울은 형제를 실족케 한다면 자기는 평생 동안,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갈5:6절에서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바울은 지식보다 사랑을 중히 여겼습니다. 사랑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성경 지식이 좀 있다고 교만하게 행하고, 어린 형제들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은 영적인 깡패나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가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의 신앙을 위해서 말에도 성숙해야 합니다. 잠언 12:18절에 보면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은 생명나무와 같아도 잔인한 말은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잠15:4).” 우리가 함부로 판단하는 말, 남을 깎아 내리는 말, 부정적인 말, 불신의 말을 내뱉을 때 다른 사람의 신앙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또 관계성을 파괴하고 모임을 허물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혀를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천금과 같이 써야 합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를 사랑하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권리를 포기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고, 권리를 포기하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바울도 맛있는 고기 맛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고기를 먹어야 힘을 쓸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요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도 괜찮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약한 양심을 가진 형제들을 위해서 영원히 먹지 아니하며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겠다고 합니다. 그가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을 때 우상의 제물에 대한 지식이 있던 형제들은 “그것 봐!”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편의 형제들은 가슴이 철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을 이해하고 자기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그는 교회에 평화를 가져왔고 고린도 교회 공동체를 견고하게 세울 수 있었습니다. 이는 바울의 차원 높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생각이 같은 사람끼리 지내는 것도 평화를 이루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생각이 다르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형제를 세우는 사람들은 더욱 차원 높은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요 형제를 더 잘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지식도 필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지식으로 남을 판단하고, 약한 형제에게 불신을 심는다면 주님을 심히도 슬프시게 하는 죄입니다. 아무리 자기 생각이 옳더라도 그 마음에 사랑이 없으면 형제를 실족케 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할 때 큰 소리로 할 수도 있고 소리내지 않고 속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모양으로 하든 믿음으로 하는 기도를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드럼을 치면서 찬송을 해야 속이 시원한 사람이 있고 그런 것을 보면 불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대로 찬송가에 나오는 것만을 경건하게 생각하고 조용하게 예배를 드려야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조용하면 조용한대로의 경건이 있고 큰 소리에는 큰 소리대로의 경건이 있습니다. 한 미국 교회에서는 술집에서 쓰던 오르간을 교회에 헌납을 했는데 그것을 받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써야하는가, 받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다투다가 교회가 분열되기도 했습니다. 술집에서 쓰던 오르간으로 예배를 드리느냐 드리지 않느냐가 교회를 분열시킬 정도로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이 생명을 걸고 싸울 정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집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가 문제로 갈라섰고, 베드로와도 싸웠습니다. 그는 순교할 정도로 자신이 옳은 일이라면 생명을 걸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우상에게 드린 제물을 먹을 수 있다는 자신의 이론과 신학이 있었지만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는 매우 성숙하여 먹는 사람도 하나님을 위하여 먹고, 먹지 않는 사람도 하나님을 위하여 먹지 않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통합시켰습니다. 그래서 이쪽 사람도 얻고 저쪽 사람도 다 얻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평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는 자기 의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둘 다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사랑으로 덕을 세우는 성숙한 종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사소한 문제로 다투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권리를 포기할 줄 아는 성숙한 종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생명을 걸고 싸워야 할 문제와 기꺼이 용납할 수 있는 문제를 구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고 싶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고,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절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교회 공동체를 아름답고 성숙하게 가꾸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고린도전서 8:1-13
요절 / 고린도전서 8:1
지식보다 사랑으로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오늘 말씀은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한 사도 바울의 대답입니다. 당시 고린도에는 우상에게 제물로 드린 고기들이 시장에서 많이 팔렸습니다.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면 일부는 자기가 먹고 일부는 제사장 몫이 되었습니다. 제사장이 그것을 다 먹을 수 없으니까 내다 팔았습니다. 그런데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를 먹어도 되는가, 절대로 먹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심각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 문제는 교회를 매우 시끄럽게 했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책임에 대해서 말하고, 하나님의 지혜로 두 극단을 하나로 통합하여 지식보다 사랑으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책임을 배우고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권리를 포기한 바울의 목자상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대 헬라인들은 다신교 사회에서 범신론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방인들은 세상에는 귀신들이 꽉 차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고기나 짐승을 잡아먹기 전에 반드시 그 일부를 먼저 신에게 바쳤습니다. 그리고 신전에서 제사를 드리면 귀신들이 음식물에 붙어 있다가 사람에게 들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신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제사장에게 드린 제물이 많이 남기 때문에 이것들을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또 당시 모든 사회 생활이 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고, 우상 숭배와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모임도 우상을 섬기는 신전에서 행해졌습니다. 또 불신 친구들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들로 음식을 차려 놓고 초대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야 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어도 되느냐, 먹어서는 안 되느냐 하는 문제가 크리스챤들에게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이런 문제는 고린도 교회뿐만 아니라 로마 교회에도 있었습니다. 로마서 14장 1-3절에 보면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영적 지식이 있는 사람은 부족한 사람들을 무시하였습니다. 자신이 깨달은 한 가지 진리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지식을 좀 가졌다고 교만하게 행하지 말고 사랑으로 덕을 세워야한다고 권면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안다며 스스로를 자랑하는 정도라면 하나님을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2).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면서 조금 열매가 있고, 성장하는 역사가 있을 때 우리는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사단은 우리 마음을 부추겨서 교만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교만한 마음을 보이기 시작하면 이 사람, 저 사람을 통해서 싸우십니다. 그리고 경고를 보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일임을 알고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갑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또한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진정으로 겸손하시고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같이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더욱 겸손하게 됩니다. 참된 지식은 사람을 덕스럽게 합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도 알아주십니다(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편에서 서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믿음이 자랄수록, 사회적인 지위가 높아질수록, 경험이 쌓이고, 지식이 많아질수록 마음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은 자기 위에 더 높으신 분이 있음을 인식하고 그 앞에 마음을 낮추는 것입니다. 무게 중심이 낮아질수록 안정되듯이 우리가 마음을 낮추면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행하여 공동체에 덕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는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리고 다 주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열심을 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이 은사와 기질에 따라서 약간씩 다릅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자 한다면 나와 방법이 다르다고 해서 틀린 것이 아님을 알고 서로 인정하고 세워주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 가운데 평화가 임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일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모임은 견고하게 서서 사단의 온갖 궤계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 역사를 힘있게 이루어 나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우상에게 바쳤던 음식을 먹는 일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먼저 우상에 대해 말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우상이란 무엇입니까?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상이란 나무 토막이나 깎아 세운 돌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이런 우상들은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갈망을 투영시켜 놓은 허상에 불과합니다. 우상은 신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신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늘과 땅에 많은 신과 주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버지이신 전능하신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그분은 만물을 창조하셨고, 우리도 그 분을 위해서 존재합니다(6). 신명기6:4,5절은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우리는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만 사랑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우상을 섬기지는 않지만 성경은 탐심도 우상 숭배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할 때 바로 그것이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때로는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되기도 하고 자녀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인정을 구하고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때마다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영적인 우상 숭배요 영적인 간음으로서 우리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투쟁을 적극적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내 마음의 첫 자리, 내 가정의 첫 자리에 모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의지하고 경배해야 할 유일한 분이십니다. 우리 구원자도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습니다(골1:15-17). 만물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합니다. 모든 식물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함으로 먹으면 깨끗합니다.
그러므로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아무 거리낌 없이 먹어도 됩니다. 그러나 7절을 보십시오. 이러한 지식은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 받은 지가 얼마 안 되어 영적으로 어려서 우상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었습니다. 또 우상을 몇 십년 동안 섬겨 오다가 예수님을 영접한 분도 있습니다. 이들은 여전히 우상을 무서운 힘을 가진 존재로 알고 두려워합니다. 이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은 실제로 우상에게 더렵혀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양심에 거리끼면서도 그런 음식을 먹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이들은 그 제물로 인해 양심이 약해지고 더러워집니다.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롬14:20).”
8절을 보십시오.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합니다. 음식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먹지 않는다고 해서 나쁠 것도 없고, 먹는다고 해서 나을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먹는 문제로 서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하나님과 우상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자기의 자유가 약한 자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9). 지식에 사랑이 따라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약한 영혼을 죽이는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지식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우상의 전에서 열리는 연회에 참여하여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약한 자들이 그것을 보고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합니다. 믿는 사람이 점치는 집에 드나들고, 술집에 드나들면서 나는 거리낌이 없다고 제사 음식을 먹고 술을 먹는다면 믿음이 약한 사람이 이를 보고 담력을 얻어 방종하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들의 죄가 얼마나 크다고 했습니까? 11,12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구원해 놓은 형제를 고기 먹는 사소한 문제로 실족케 한다면 그 죄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이는 예수님에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어떤 자세로 형제를 섬기겠다고 합니까?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며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바울은 형제를 실족케 한다면 자기는 평생 동안,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갈5:6절에서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바울은 지식보다 사랑을 중히 여겼습니다. 사랑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성경 지식이 좀 있다고 교만하게 행하고, 어린 형제들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은 영적인 깡패나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가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의 신앙을 위해서 말에도 성숙해야 합니다. 잠언 12:18절에 보면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은 생명나무와 같아도 잔인한 말은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잠15:4).” 우리가 함부로 판단하는 말, 남을 깎아 내리는 말, 부정적인 말, 불신의 말을 내뱉을 때 다른 사람의 신앙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또 관계성을 파괴하고 모임을 허물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혀를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천금과 같이 써야 합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를 사랑하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권리를 포기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고, 권리를 포기하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바울도 맛있는 고기 맛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고기를 먹어야 힘을 쓸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요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도 괜찮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약한 양심을 가진 형제들을 위해서 영원히 먹지 아니하며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겠다고 합니다. 그가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을 때 우상의 제물에 대한 지식이 있던 형제들은 “그것 봐!”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편의 형제들은 가슴이 철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을 이해하고 자기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그는 교회에 평화를 가져왔고 고린도 교회 공동체를 견고하게 세울 수 있었습니다. 이는 바울의 차원 높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생각이 같은 사람끼리 지내는 것도 평화를 이루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생각이 다르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형제를 세우는 사람들은 더욱 차원 높은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요 형제를 더 잘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지식도 필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지식으로 남을 판단하고, 약한 형제에게 불신을 심는다면 주님을 심히도 슬프시게 하는 죄입니다. 아무리 자기 생각이 옳더라도 그 마음에 사랑이 없으면 형제를 실족케 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할 때 큰 소리로 할 수도 있고 소리내지 않고 속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모양으로 하든 믿음으로 하는 기도를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드럼을 치면서 찬송을 해야 속이 시원한 사람이 있고 그런 것을 보면 불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대로 찬송가에 나오는 것만을 경건하게 생각하고 조용하게 예배를 드려야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조용하면 조용한대로의 경건이 있고 큰 소리에는 큰 소리대로의 경건이 있습니다. 한 미국 교회에서는 술집에서 쓰던 오르간을 교회에 헌납을 했는데 그것을 받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써야하는가, 받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다투다가 교회가 분열되기도 했습니다. 술집에서 쓰던 오르간으로 예배를 드리느냐 드리지 않느냐가 교회를 분열시킬 정도로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이 생명을 걸고 싸울 정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집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가 문제로 갈라섰고, 베드로와도 싸웠습니다. 그는 순교할 정도로 자신이 옳은 일이라면 생명을 걸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우상에게 드린 제물을 먹을 수 있다는 자신의 이론과 신학이 있었지만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는 매우 성숙하여 먹는 사람도 하나님을 위하여 먹고, 먹지 않는 사람도 하나님을 위하여 먹지 않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통합시켰습니다. 그래서 이쪽 사람도 얻고 저쪽 사람도 다 얻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평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는 자기 의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둘 다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사랑으로 덕을 세우는 성숙한 종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사소한 문제로 다투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권리를 포기할 줄 아는 성숙한 종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생명을 걸고 싸워야 할 문제와 기꺼이 용납할 수 있는 문제를 구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고 싶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고,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절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교회 공동체를 아름답고 성숙하게 가꾸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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