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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014년 마32강(26:31-56)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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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92회 작성일 14-10-26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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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마태복음 제 32 강 
말씀 | 마태복음 26:31-56
요절 | 마태복음 26:39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오늘 말씀은 십자가를 지기 전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홀로 외로운 길, 십자가의 길을 가십니다. 예수님은 감당하기 어려운 십자가 죽음의 고난 앞에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힘든 순간에 겟세마네 기도를 드리시며 하나님의 뜻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기도를 배우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을 드시고 나서 제자들에게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31).” 예수님은 임박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짐 때문에 무겁게 눌리면서도, 제자들이 직면하게 될 두려움과 절망을 내다보시면서 안타까워하십니다. 제자들이 어두움의 때를 준비하도록 배려하십니다. 본인이 힘들면 자기중심적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때에도 제자들을 배려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 후에 살아난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후에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수제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다른 제자들은 버릴지라도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아직도 이 의리의 사나이 베드로의 마음을 모르십니까?”라고 속으로 말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진심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래, 내가 네 진심을 안다. 한번 해 본 말이다”라고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돌직구를 날리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한두 번은 실수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 번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 뜻을 가지고 완전히 부인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철저한 실패를 예견하셨습니다. 이는 베드로의 실패를 미리 말씀하심으로 나중에 그가 절망하지 않고 예수님께 돌이키도록 하려 하심입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예수님은 한 번도 허투루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자신에 대해 깊이 돌아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 확신에 차서 큰 소리를 칩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다른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했습니다. 이를 볼 때 사람은 자기의 연약함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그들을 말리지 않고 기도하고자 작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적 싸움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좋은 본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도 위기의 때에 인간적인 힘과 능력을 믿고 자신하지 말고, 예수님과 같이 겸손하게 하나님께 나아가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겸손한 자세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만이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36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겟세마네는 감람산 중턱에 있는 작은 동산입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습관적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매우 특별한 기도를 드리십니다. 제자들에게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세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조금 더 나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고민하고 슬퍼하셨습니다. 38절을 보면 예수님의 마음이 매우 심히 고민하고 죽게 되었다고 고백하십니다. 이는 말문이 막히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아주 괴로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런 가운데 예수님은 세 제자들에게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자신의 고난에 동참하여 함께 기도를 해 달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동역자들에게 여러 번 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엡 6:19, 골4:3, 살전 5:25, 살후 3:1). 예수님도 기도를 부탁하셨는데 우리도 서로 기도를 부탁하고 또 서로를 위해서 중보 기도하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어야겠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슬퍼하고 고민이 되셨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와 똑 같은 육체를 지니셨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짐을 지고 형벌을 당하셔야 합니다. 한 사람의 죄값이 지옥 형벌인데 온 인류의 죄를 예수님은 어깨에 메고 죽임을 당하십니다. 더 나아가 성부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성이 단절되는 고통이 큽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조금의 간격도 없고 영원히 일체가 되는 사랑의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진노의 대상이 되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당하셔야 합니다. 육체적 고통보다 정신적 영적인 고통이 훨씬 더 큰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그 순간에 고통이 너무나 커서 부르짖으십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27:46)!” 예수님의 이 고통은 지옥의 형벌을 맛보지 않고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당해야 하는 고통을 아셨기 때문에 고민하고 슬퍼하사 죽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고통을 어떻게 감당하십니까? 39절을 보십시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예수님은 너무나 절박해서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너무나도 필요한 때였기에 그 도움을 간절하게 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내 아버지여!” 하고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6:9)”라고 부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과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양자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이십니다. 절대적인 사랑의 대상이십니다. 예수님은 고난 앞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절대적인 사랑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솔직하게 자신의 괴로운 마음을 아뢰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는 다른 길이 없는지 물으신 것입니다. 다른 길이 있다면 제발 십자가 형벌을 거두어 달라고 간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바람은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의 기도의 초점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두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의 바람을 말씀드리고 또 하나는 나의 바람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 경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주시도록, 내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도록 간청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기 위해서 내 꿈을 접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돈이나 애지중지하는 것을 그냥 놓아버리기만 해도 우리 내면에서 대단한 일이 일어납니다. 탐욕이라는 악마가 죽는 것입니다(리처드 포스터).”

  큰 출판사의 사장이 어느 날 유명한 스님을 찾아갔습니다. 그가 인생의 큰 고민거리를 이야기했지만 스님은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사장은 조용히 기다렸습니다. 이윽고 스님이 아름다운 찻잔에 차를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차가 넘쳐 장판을 타고 그 사장에게 흘러왔습니다.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스님에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스님이 대답했습니다. “그대의 인생은 차가 넘치는 찻잔과 같소. 새로운 것이 들어갈 여유가 없지요. 더 받아들이지 말고 쏟아버리시오.” 자기를 비우지 않으면 더 큰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자기를 비우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감당하는 길입니다. 자기를 비우고 내려놓는 것이 성장의 기회입니다. 변화를 통해서 성장하려면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셨습니다.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최고의 지위에 있는 분이십니다. 그가 성육신하신 것도 놀라운 내려놓음인데 이제 자기의 목숨까지 인류 구원을 위해서 내려놓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자기포기, 내려놓음을 통해서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배워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는 큰 소리를 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베드로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41절을 보십시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시험에 들지 않으려면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육신이 약하기 때문에 더욱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육신이 약하기 때문에 기도하지 못한다고 변호해 주셨지만 사실은 약하기 때문에 기도해야 한다는 적극적인 의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약함을 아셨기 때문에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42)” 예수님의 두 번째 기도 내용은 첫 번째 기도보다 진전됩니다. ‘이 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는 자기의 요청을 포기하시고 이제 전적으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기도는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듣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가 분명하게 되자 예수님은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친히 기도를 가르치신 적이 있습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 지금 예수님은 자신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를 몸소 실천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적극적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겠다고 기도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 자기의 뜻을 접습니다. 이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겟세마네는 ‘기름 짜는 틀’이라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22:44절에 보면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겟세마네 기도는 대충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혼신의 힘을 다하는 목숨을 건 기도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 받아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 이런 기도를 드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기도는 노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가 행동하기보다 더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그 뜻에 순종하고자 결단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누가복음 22:43절을 보면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 하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이 힘을 다하여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할 때 천사를 보내사 친히 도와주셨습니다. 우리도 힘든 마음을 부인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때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충만히 공급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두 번째 기도를 마치고 다시 오사 보신즉 제자들은 더욱 곤하게 자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이 피곤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의지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만을 의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하셨습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외롭고 고독하게 혼자서 영적인 싸움을 해야 합니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피할 수 없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절대고독의 시간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고 있는 제자들을 깨우지 않고 나아가사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셨습니다. 히브리서 5:7절은 말씀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하나님은 예수님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가 십자가를 넉넉히 질 수 있도록 힘을 하늘로부터 공급해 주셨습니다. 기도하고 돌아오신 예수님의 태도가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45,46절을 보십시오.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세 번 기도하시는 모습은 눈 앞에 다가온 위험 앞에서도 육신이 연약하여 준비하지 못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모습과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응답을 받을 때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얻기까지 반복해서 기도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영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실 모든 준비를 마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죄인의 손’에 붙들려서 당할 모든 수모와 고난에 대한 준비를 하셨습니다. ‘죄인들’을 만나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모든 준비를 하셨고 힘을 얻으셨고 확고한 결심을 하셨습니다. 기도가 얼마나 예수님을 강하게 하고 힘 있게 하고 확고하게 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도우셨고 힘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중요한 선택을 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만나기 전,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하기 전, 예수님처럼 이와 같은 기도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기도로 영적인 준비를 갖출 때 예수님처럼 승리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을 쳐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죽이는 길도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빨리 도망치자고 하지 않으십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기도에 승리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향해 자발적으로 담대히 나아가셨습니다. 
 
  47-56절은 유다의 키스와 예수님의 체포, 제자들의 실패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신 것은 무력해서 굴욕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자원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 고난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우리가 왜 고난을 받아야 합니까? 힘이 없어서 고난을 받는 것입니까? 우리가 원한다면 고난을 피할 기회를 찾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원함으로 고난을 받을 때 예수님을 배우는 내적인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원대로 살고자 기도할 때 생명 구원 역사에 귀히 쓰임 받을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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