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4년 마28강(23:1-39) 화 있을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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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마태복음 28강
말씀 | 마태복음 23:1-39
요절 | 마태복음 23:13
화 있을진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오늘 말씀은 성경을 가르치는 목자들에게는 듣기가 부담스러울 것입니다. 우리가 가르친 대로 다 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무리에게 종교지도자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도록 경고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르치는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목자로서 제가 지은 죄가 많습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로 이 직분을 감당하고 있음을 고백하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권위는 인정하셨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필사하고 해석하고 가르쳤습니다. 이들은 모세의 권위로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성경 선생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죄인이며 어떻게 죄사함을 받으며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배우게 됩니다. 이들의 가르침은 바른 말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행위는 따라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들은 열심히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쳤지만 자신들은 말씀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무거운 짐을 양들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들은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양들에게는 아주 구체적인 방향까지 주면서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들은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이를 볼 때 가르치는 것과 가르치는 대로 사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르치는 자들은 자신이 가르치는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르침이 힘이 있으려면 가르치는 대로 행해야 합니다. 선생들의 삶은 처음에는 잘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삶이 어떠한지 알게 되고 그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자세가 달라지게 됩니다. 말만하고 행하지 않는 가르침은 권위가 없습니다. 자기도 하지 못하면서 가르친다면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가르치는 사람은 남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자신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그 가르침에 대해서 확신을 하게 되고 또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돼야 듣는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게 됩니다. 가르치는 목적은 그대로 행하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자기도 하지 못할 일을 가르친다면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 자기의 몸을 쳐서 복종을 시켰습니다(고전9:27).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할 때 우리는 자신의 이기심과 교만, 불순종과 반항적인 속성을 부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은 성실하고 충성스럽게 살아야 합니다. 가르치는 삶에 합당하려면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타인에게는 관용을 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엄격하게 하라고 해서 항상 죄의식에 시달리고 자신을 용서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거룩하고 순결해야 그 가르침이 생수와 같이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고 듣는 사람의 영혼을 살릴 수 있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행복하지 않는데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을 가르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사람이 행복하고 즐거울 때 듣는 사람도 기쁘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광내는 것을 좋아하는 광돌이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했습니다.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상명하복이라는 질서나 권위는 상실되고 수평적인 관계가 새롭게 형성되고 있습니다. 권위는 인정하지만 권위주의는 통하지 않습니다. 한 국회의원이 세월호 유가족들과 대화하는데 그를 태우고 온 대리 기사가 30분이 지나자 시간을 너무 많이 끌기 때문에 가고자 했습니다. 그때 그는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야 거기 안 서. 몇 분도 못 기다려”하고 소리치고 세월호 유가족들은 그를 때려서 갈비뼈 두 개를 부러뜨렸습니다. 이런 권위주의는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한 분이시오 우리는 다 형제라는 것입니다. 수평적인 관계가 되다 보니 겸손하게 서로 배우고 가르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지시하는 관계가 아니라 양방향으로 소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한편 우리 전문인 자비량 선교사님들이 무슨 학위도 없고 지식이 많은 것도 아니고 말을 잘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현지인들이 말씀을 배우고 순종하는 것은 선교사님들이 말씀대로 살고자 애쓰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목자님들이 신학자들보다 신학을 잘 알지 못하지만 성령의 역사로 거듭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양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할 때 양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본을 보이는 것이야 말로 가장 힘 있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배운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 이십니다.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이십니다(9,10). 즉 사람을 높이는 칭호를 통해 큰 자가 되려고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교회 내에서 자꾸 높이는 칭호를 사용하면 자신이 정말 높은 자라는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교만에 빠질 수 있습니다. 또 교회 내에 자꾸 계급적인 요소를 만들게 됩니다. 가르치는 자들은 영광을 적극적으로 하나님에게 돌려야 합니다. 배우는 자도 가르치는 자를 존경해야 하지만 지나치게 높이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1,12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섬기는 자가 되고 자신을 낮추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오늘날은 섬기는 리더십이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섬기는 리더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그들의 행복을 위해서 일합니다. 리더의 권위는 섬김과 인격과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이런 가르침은 세상과는 정 반대입니다. 우리 속담에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가는 말이 고우면 개 무시를 당한다고 합니다. 섬기고자 하면 사람들은 그를 바보 취급을 하고 이용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변함없이 성실하게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그러면 진정성이 통하게 되고 영적 권위가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분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긍휼이 늘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13-36절까지는 일곱 가지 “화 있을진저”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죄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 하나 살펴보겠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의 안내 책임을 맡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 나라의 문을 닫아 놓고 그 길을 막고 있습니다. 여기서 ‘천국 문을 닫는다’는 것은 ‘가르치는 것과 삶이 다르기 때문에 백성들이 배운 후에 떠나는 것’을 말합니다. 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바알세불에 지폈다, 귀신들렸다고 말함으로 백성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천국 문을 막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는 자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또 그들은 십일조에 대해서 철저하게 드리도록 가르쳤습니다. 심지어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 까지 드리도록 가르쳤습니다. 월급의 십일조뿐만 아니라 보너스와 용돈의 십일조도 드려야 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면서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습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내는 것은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대한 감사에 기초해서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생활비뿐만 아니라 성전 운영에 쓰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들과 과부들을 위한 구제를 위해서도 쓰였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표현이요 이웃의 어려움에 동참하고자 하는 긍휼한 마음의 표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십일조는 하나님과 인간의 바른 관계를 고백하는 신앙의 표현이었습니다. 내가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다하겠다는 고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감사, 이웃에 대한 긍휼, 공의를 저버렸습니다. 십일조는 내용을 담는 형식이라면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형식과 내용이 다 중요한 것입니다. 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을 드리는 것은 돈을 드리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죄를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는 죄로 지적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 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 가리이까 하는도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7-10).”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화을 입는 다섯 번째 이유는 그들이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먼저 안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그러면 겉도 깨끗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회칠한 무덤과 같았습니다.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이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이 속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탐욕과 방탕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탐욕과 방탕을 제거하기 위해서 먼저 자기 발견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고백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날마다 내면의 죄를 씻어야 합니다. 죄 사함을 받은 은혜가 있고 속 사람이 살아나게 되면 사랑을 실천할 수 있고, 분수에 맞게 검소하게 살 수 있습니다. 거룩하고 순결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속이 깨끗하면 별로 꾸미지 않아도 아름답습니다. 그런 사람의 삶은 향기를 발하게 됩니다.
그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3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이 말씀대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사도들을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죄를 볼 때 통곡을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여기서 너희 집은 하나님이 떠나버린 성전을 가리킵니다. 그들의 죄로 인한 심판으로 AD 70년 로마 장군 디도에게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거의 2000년 동안 고국을 잃고 세계를 떠돌아다녀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그는 심판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깊이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자들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으로 오래 참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에게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말씀대로 사는 가운데 주님의 품 안에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주 보다 더 나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실 우리가 거룩함에서 성장하게 되면 자기 삶에 있는 죄를 더 민감하게 느끼게 됩니다. 자기 생활에서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는 모든 것들을 제거하려는 열망이 강렬하게 일어납니다. 자기의 진보를 자랑하기는커녕, 점차 자기 죄를 인정하는 자세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죄를 제거하는 방법을 찾게 됩니다. 이것이 거룩한 삶을 사는 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죄악된 자기를 죽이는 삶이 소극적이라면 다른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기를 힘쓰는 것은 적극적인 방법입니다. 목자로서 말씀을 배우고 먼저 자신을 가르치고 나서 양들에게 가르치는 생활을 힘써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말씀을 전하기 전에 회개하는 소감을 씁니다. 회개하는 삶은 영적인 투쟁입니다. 자기를 가르치는 과정입니다. 제가 신앙생활을 할수록 더욱 고약한 모습, 자기 고집, 변화되지 않는 모습을 더욱 깊이 발견합니다. 제가 날마다 회개하고 섬김과 사랑을 실천하기를 기도합니다. 겸손과 섬김의 종으로 사는 가운데 내적인 열매가 풍성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신앙 생활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태복음 23:1-39
요절 | 마태복음 23:13
화 있을진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오늘 말씀은 성경을 가르치는 목자들에게는 듣기가 부담스러울 것입니다. 우리가 가르친 대로 다 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무리에게 종교지도자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도록 경고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르치는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목자로서 제가 지은 죄가 많습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로 이 직분을 감당하고 있음을 고백하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권위는 인정하셨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필사하고 해석하고 가르쳤습니다. 이들은 모세의 권위로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성경 선생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죄인이며 어떻게 죄사함을 받으며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배우게 됩니다. 이들의 가르침은 바른 말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행위는 따라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들은 열심히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쳤지만 자신들은 말씀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무거운 짐을 양들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들은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양들에게는 아주 구체적인 방향까지 주면서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들은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이를 볼 때 가르치는 것과 가르치는 대로 사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르치는 자들은 자신이 가르치는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르침이 힘이 있으려면 가르치는 대로 행해야 합니다. 선생들의 삶은 처음에는 잘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삶이 어떠한지 알게 되고 그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자세가 달라지게 됩니다. 말만하고 행하지 않는 가르침은 권위가 없습니다. 자기도 하지 못하면서 가르친다면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가르치는 사람은 남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자신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그 가르침에 대해서 확신을 하게 되고 또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돼야 듣는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게 됩니다. 가르치는 목적은 그대로 행하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자기도 하지 못할 일을 가르친다면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 자기의 몸을 쳐서 복종을 시켰습니다(고전9:27).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할 때 우리는 자신의 이기심과 교만, 불순종과 반항적인 속성을 부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은 성실하고 충성스럽게 살아야 합니다. 가르치는 삶에 합당하려면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타인에게는 관용을 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엄격하게 하라고 해서 항상 죄의식에 시달리고 자신을 용서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거룩하고 순결해야 그 가르침이 생수와 같이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고 듣는 사람의 영혼을 살릴 수 있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행복하지 않는데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을 가르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사람이 행복하고 즐거울 때 듣는 사람도 기쁘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광내는 것을 좋아하는 광돌이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했습니다.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상명하복이라는 질서나 권위는 상실되고 수평적인 관계가 새롭게 형성되고 있습니다. 권위는 인정하지만 권위주의는 통하지 않습니다. 한 국회의원이 세월호 유가족들과 대화하는데 그를 태우고 온 대리 기사가 30분이 지나자 시간을 너무 많이 끌기 때문에 가고자 했습니다. 그때 그는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야 거기 안 서. 몇 분도 못 기다려”하고 소리치고 세월호 유가족들은 그를 때려서 갈비뼈 두 개를 부러뜨렸습니다. 이런 권위주의는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한 분이시오 우리는 다 형제라는 것입니다. 수평적인 관계가 되다 보니 겸손하게 서로 배우고 가르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지시하는 관계가 아니라 양방향으로 소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한편 우리 전문인 자비량 선교사님들이 무슨 학위도 없고 지식이 많은 것도 아니고 말을 잘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현지인들이 말씀을 배우고 순종하는 것은 선교사님들이 말씀대로 살고자 애쓰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목자님들이 신학자들보다 신학을 잘 알지 못하지만 성령의 역사로 거듭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양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할 때 양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본을 보이는 것이야 말로 가장 힘 있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배운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 이십니다.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이십니다(9,10). 즉 사람을 높이는 칭호를 통해 큰 자가 되려고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교회 내에서 자꾸 높이는 칭호를 사용하면 자신이 정말 높은 자라는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교만에 빠질 수 있습니다. 또 교회 내에 자꾸 계급적인 요소를 만들게 됩니다. 가르치는 자들은 영광을 적극적으로 하나님에게 돌려야 합니다. 배우는 자도 가르치는 자를 존경해야 하지만 지나치게 높이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1,12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섬기는 자가 되고 자신을 낮추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오늘날은 섬기는 리더십이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섬기는 리더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그들의 행복을 위해서 일합니다. 리더의 권위는 섬김과 인격과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이런 가르침은 세상과는 정 반대입니다. 우리 속담에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가는 말이 고우면 개 무시를 당한다고 합니다. 섬기고자 하면 사람들은 그를 바보 취급을 하고 이용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변함없이 성실하게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그러면 진정성이 통하게 되고 영적 권위가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분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긍휼이 늘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13-36절까지는 일곱 가지 “화 있을진저”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죄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 하나 살펴보겠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의 안내 책임을 맡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 나라의 문을 닫아 놓고 그 길을 막고 있습니다. 여기서 ‘천국 문을 닫는다’는 것은 ‘가르치는 것과 삶이 다르기 때문에 백성들이 배운 후에 떠나는 것’을 말합니다. 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바알세불에 지폈다, 귀신들렸다고 말함으로 백성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천국 문을 막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는 자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또 그들은 십일조에 대해서 철저하게 드리도록 가르쳤습니다. 심지어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 까지 드리도록 가르쳤습니다. 월급의 십일조뿐만 아니라 보너스와 용돈의 십일조도 드려야 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면서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습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내는 것은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대한 감사에 기초해서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생활비뿐만 아니라 성전 운영에 쓰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들과 과부들을 위한 구제를 위해서도 쓰였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표현이요 이웃의 어려움에 동참하고자 하는 긍휼한 마음의 표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십일조는 하나님과 인간의 바른 관계를 고백하는 신앙의 표현이었습니다. 내가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다하겠다는 고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감사, 이웃에 대한 긍휼, 공의를 저버렸습니다. 십일조는 내용을 담는 형식이라면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형식과 내용이 다 중요한 것입니다. 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을 드리는 것은 돈을 드리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죄를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는 죄로 지적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 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 가리이까 하는도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7-10).”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화을 입는 다섯 번째 이유는 그들이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먼저 안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그러면 겉도 깨끗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회칠한 무덤과 같았습니다.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이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이 속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탐욕과 방탕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탐욕과 방탕을 제거하기 위해서 먼저 자기 발견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고백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날마다 내면의 죄를 씻어야 합니다. 죄 사함을 받은 은혜가 있고 속 사람이 살아나게 되면 사랑을 실천할 수 있고, 분수에 맞게 검소하게 살 수 있습니다. 거룩하고 순결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속이 깨끗하면 별로 꾸미지 않아도 아름답습니다. 그런 사람의 삶은 향기를 발하게 됩니다.
그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3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이 말씀대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사도들을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죄를 볼 때 통곡을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여기서 너희 집은 하나님이 떠나버린 성전을 가리킵니다. 그들의 죄로 인한 심판으로 AD 70년 로마 장군 디도에게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거의 2000년 동안 고국을 잃고 세계를 떠돌아다녀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그는 심판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깊이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자들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으로 오래 참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에게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말씀대로 사는 가운데 주님의 품 안에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주 보다 더 나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실 우리가 거룩함에서 성장하게 되면 자기 삶에 있는 죄를 더 민감하게 느끼게 됩니다. 자기 생활에서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는 모든 것들을 제거하려는 열망이 강렬하게 일어납니다. 자기의 진보를 자랑하기는커녕, 점차 자기 죄를 인정하는 자세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죄를 제거하는 방법을 찾게 됩니다. 이것이 거룩한 삶을 사는 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죄악된 자기를 죽이는 삶이 소극적이라면 다른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기를 힘쓰는 것은 적극적인 방법입니다. 목자로서 말씀을 배우고 먼저 자신을 가르치고 나서 양들에게 가르치는 생활을 힘써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말씀을 전하기 전에 회개하는 소감을 씁니다. 회개하는 삶은 영적인 투쟁입니다. 자기를 가르치는 과정입니다. 제가 신앙생활을 할수록 더욱 고약한 모습, 자기 고집, 변화되지 않는 모습을 더욱 깊이 발견합니다. 제가 날마다 회개하고 섬김과 사랑을 실천하기를 기도합니다. 겸손과 섬김의 종으로 사는 가운데 내적인 열매가 풍성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신앙 생활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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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다운로드 | DATE : 2014-09-28 14:4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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