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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014 마25강(20:1-16)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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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86회 작성일 14-09-07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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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마태복음 제 25강 
말씀 | 마태복음 20:1-16
요절 | 마태복음 20:15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우리는 지난 주 정 베드로 목자님을 통해서 “영생을 얻으려면”이라는 제목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다 지키면 영생을 얻을 수 있지만 연약한 죄인으로서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돈 많은 부자 청년은 영생을 갈구했지만 인상을 찡그리며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성 프란시스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 재물을 팔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은 부자 청년이 떠나가는 것을 보고 베드로가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한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시자 제자들이 다 놀랐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는 자기 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에게 경고를 주기 위해 이 비유 말씀을 주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습니다. 여기에서 포도원은 하나님 나라를 집주인은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한 나라의 국격은 통치자의 인격과 영향력에 좌우됩니다. 대통령이 독재를 하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행복할 수 없습니다. 독재자의 이기심으로 인해서 백성들이 고통을 받습니다. 그의 권력욕으로 인해서 감시를 받고 마음껏 모여서 집회를 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최대의 특권은 자유인데 감시를 받고 통제를 받기 때문에 불안합니다. 그러나 백성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대통령이 있는 곳에서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거룩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통치하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사모하는 나라입니다.

  집주인은 품꾼들을 고용해서 포도원에서 일을 하게 하려고 아침 일찍 나갔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일꾼을 직접 부르러 다니는 것은 인간들을 구원하시는 역사에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대개 주인들은 사람을 고용할 때 최대한의 이익을 만들어 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돈은 적게 주고 일은 많이 시킵니다. 또 능력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뽑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월급을 많이 주는 대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자기 시간이 너무 없고 일이 힘들다고 하소연을 합니다. 그래서 돈을 적게 받고 자기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직장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요즘 대졸자도 취직하기가 어렵습니다. 할 일이 없어 노는 백수, 백조생활은 자존감을 낮추어 불행하게 합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주인은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의 고통을 잘 알았습니다. 그는 주인으로서 사람들을 고용하는 목적이 이익이 아니었습니다. 그 포도원의 존재 목적은 품꾼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일거리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일꾼들이 자신의 존재의미를 느끼면서 행복하게 일할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천국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명을 주신 것은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일할 수 있다면 의미가 있고 행복할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도 좋겠지만 정말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 목자님들이 가정을 부양하고 자녀들을 양육하고 교육하기 위해서 직장에서 열심히 일을 합니다. 직장에서 일을 함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캠퍼스 복음 전도와 제자 양성, 세계 선교의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은퇴가 없습니다. 저는 이번에 CIS 수양회에 참석하고 선교지를 심방하면서 참으로 할 일이 많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그 넓은 땅이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어디에서든지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일하는 행복을 누리며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인이 제 삼시에 나가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었습니다. 삼시는 아홉시를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직장이나 학교에 나가서 일할 때 장터에서 놀고 서 있는 사람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노는 게 좋을 리가 없습니다. 일하고 싶지만 일할 기회가 없었고 고용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그들에게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상당하게 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들은 일자리를 얻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일한 시간만큼은 주겠지 생각하며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주인은 제 육시와 제 구시 즉 정오와 오후 세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였습니다.

  그 시간에 장터에 놀고 있는 사람은 분명 문제 있는 사람들입니다. 일을 구할 시간이 이미 지났습니다. 그들은 아주 게으른 사람들이거나 일찍 나와도 업체에서 원하지 않아 아예 포기한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오늘날로 하면 직장 구하기를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루 하루가 지루하고 불안하고 무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이런 사람들에게도 상당하게 주마 약속하고 포도원에 보냈습니다. 주인은 보통 사장들과 달랐습니다. 그들의 조건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주인은 삯을 주기 위해서 고용하는 사람 같았습니다. 아니면 포도원에 그만큼 일이 많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명인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할 일은 무궁무진합니다. 김우중 씨는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했는데 정말 세계에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우리가 섬겨야 할 양들이 많습니다. 해야 할 일들도 많습니다. 해야 할 일을 찾으면 하루의 시간이 부족합니다.

  주인은 제 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이 또 있었습니다. 그는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여기 서 있느냐?” 물었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을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라고 하자 그들에게도 포도원에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제 십일 시는 오후 다섯 시로 해 질 시간입니다. 이제 업무를 마치고 퇴근해야 할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할 일을 찾지 못하고 하루 종일 놀았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 손으로 하루를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빈손으로 집에 들어가면 그를 기다리는 아내와 아이들은 굶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아무 열매 없이 인생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 아무 열매 없이 노년이 되고, 또 열매 없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그런데 주인은 인생의 황혼기에 있는 그를 불러주셨습니다. 그가 들어가 일할 수 있는 시간은 짧았지만 주인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이는 주인이 그들의 노동력을 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일꾼으로서의 존재의미를 주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직분을 맡기신 은혜를 이렇게 감사했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 1:12).”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은혜는 직분을 맡기신 것입니다. 바울은 일생 박해자로 살았는데, 예수님은 그런 사람에게조차 이방인의 사도라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인생을 공치고 황혼 앞에 선 사람에게조차 하나님은 일꾼으로의 부르심을 주십니다. 우리 가운데 학생 때 이곳에 온 사람도 있지만 직장 생활을 하다가 늦게 온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분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사명이 없는 인생, 할 일이 없는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는가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찾지 못해서 방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소중한 존재로 여기사 영적으로 죽은 영혼들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도록 부르십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은 은혜입니다. 저는 CIS 지역들이 대부분 한국 선교사님들에 의해서 개척되고 있음을 보면서 하나님께 깊이 감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쓰고 계심을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일러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고 하였습니다. 제 십일 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습니다. 주인이 그들을 불러준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1/10 데나리온만 받아도 감사한 일입니다. 그들은 한 데나리온을 받고 너무나 황송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날 줄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대박을 맞았습니다. 자신들이 한 일에 비해서 너무나 큰 임금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받은 품삯은 적당한 것이 아니라 오직 주인의 은혜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은혜를 받고 어쩔 줄 몰라 할 때 먼저 온 사람들의 마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먼저 온 자들은 나중에 온 자들보다 더 받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자신들도 한 데나리온만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받은 후에 집 주인을 원망했습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먼저 온 사람들은 주인이 그들에게 약속한 대로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감사함이 없었습니다. 자신들을 나중 온 사람들과 같이 대우했기 때문입니다. 그들 마음에는 나중 온 사람들과 비교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주인에게 받은 직분에 대한 감사 대신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뎠다는 자기의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인이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주인이 자신들을 불공평하게 대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루 종일 일하고도 마지막에 온 사람들과 비교하며 같은 대우를 받자 주인에 대한 원망이 쏟아졌습니다.

  그들의 태도에 대한 주인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13-15절을 보십시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주인은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주인은 약속을 지켰습니다. 문제는 주인이 왜 나중 온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는가 입니다. 그것이 주인이 불공평하다는 판단을 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인과의 약속이고 주인은 약속을 지켰습니다. 또 나중에 온 사람에게 긍휼을 베푼 것은 주인의 자유입니다. 주인은 자기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주인된 권리입니다. 먼저 온 사람들이 나중 온 사람들을 대하는 주인의 태도에 왈가왈부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월권행위입니다. 먼저 온 사람들은 나중 온 사람들과 비교해 우월감을 가진 것이 자기를 높이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종일 수고하고 더위를 견뎠다는 자기 의가 스스로를 주인의 자리까지 높아지게 했습니다. 먼저 온 사람들도 자격이 있어서 포도원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주인의 은혜로 들어왔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의를 내세우며 은혜를 잊고 교만해졌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자격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자기 의를 내세울 수 없고 교만해 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나에게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늘 감사하고 항상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인은 교만해진 그들에게 ‘내가 주인이고 너는 품꾼이다’ 라고 분명한 선을 긋습니다. 사람이 자기 분수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담이 범죄하게 된 원인이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교만한 마음을 품은데 있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으라는 자유에 대해 감사하는 대신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했다고 불평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것이 발전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반역을 하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주인은 그들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내가 선함으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영어 성경에는 “Are you envious because I am generous? (나의 너그러움 때문에 네가 시기하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나중 온 사람에게 넘치는 삯을 준 동인은 오직 주인의 너그러움입니다. 주인은 자비와 긍휼이 넘치는 분이십니다. 이런 주인의 너그러움이 시기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주인의 너그러움이 악이 될 수 있을까요?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먼저 온 사람들이 주인의 너그러움을 잘못된 것으로 인식하고 원망하며 나중 온 사람을 시기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인의 너그러움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루 종일 일했지만 주인을 아는데 실패했습니다. 주인과 인격적인 관계성을 깊이 맺지 못했습니다.

  주인이 그들을 포도원에 품꾼으로 부른 것은 은혜로운 부르심이었습니다. 일꾼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부르심이 은혜이고 삯도 은혜입니다. 그들은 포도원에서 일하는 동안 주인의 은혜로운 성품을 알아야 했습니다. 주인과 교제하며 일할 때 감사와 기쁨이 넘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주인과 사귐을 갖는 일에 소홀했습니다. 고생스럽게 일만 했습니다. 그리고 나중 온 사람에 대한 우월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결과적으로 주인의 너그러움을 전혀 누리지 못했고, 너그러움을 악하게 생각하는 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탕자의 비유에서 첫째 아들의 태도와 같습니다. 둘째가 아버지 집을 떠나서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돌아왔을 때 기뻐하기보다는 그를 영접하는 아버지를 판단했습니다. 자기는 죽도록 일만 했는데 재산을 허비하고 돌아온 자식을 위하여 소를 잡고 잔치를 베풀고 그의 지위를 회복해주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와 함께 돌아온 동생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감사해야 마땅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리나 창기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의롭게 되는 것을 도저히 봐줄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고생을 했는데 이방인들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의롭게 되는 것을 보고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습니다. 이와 같이 바리새인들은 낡은 가죽부대가 되어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었습니다. 먼저 온 제자들은 나중 온 사람들이 세상에서 즐길 것을 다 즐기고 늦게 와서는 은혜롭게 소감을 발표하고 인정을 받고 쓰임 받는 것을 보고 영접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전도를 해서 양을 얻는 사람들은 은혜를 처음 체험하고 감격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구신자들은 전도해서 양을 얻고 돕기가 어렵습니다. 새 순에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먼저 온 사람들은 나중 온 사람들이 은혜를 입어 열심히 주님을 섬기는 것을 보면서 팔짱을 낀 채로 언제까지 가나 두고 보자 하는 식으로 빈정거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먼저 온 사람들은 나중 온 사람들이 받는 은혜를 자기도 사모해야 합니다. 또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 고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첫 사랑을 회복하지 않고 미지근한 상태로 신앙생활을 계속하면 주님은 토하여 내치실 것입니다. 먼저 온 사람들은 열심히 일을 하고 나서 자신은 무익한 종이라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시간을 헛되게 보내지 않고 의미있는 삶을 산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도 큰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만으로도 큰 은혜인데 영생까지 약속대로 받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비유의 결론을 말씀하십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이는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것에 대한 강력한 경고입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으니 무엇을 얻으리이까?”라며 자신만만했습니다. 이런 그의 태도에 대해서 주님은 경고하십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 앞에 소유를 버리지 못하고 돌아간 부자 청년에 대해 우월감을 가졌습니다. 만일 그가 돌아와 제자가 되었다면 그보다 먼저 왔다는 우월감을 가졌을 것입니다. 먼저 왔다는 생각이 제자의 삶에 치명적 약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가리는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먼저 왔기 때문에 더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걸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먼저 된 자로 나중 되지 않고, 먼저 된 자로 계속 남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부르심이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임을 알고 그 은혜 안에 깊이 거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가 족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자격 없는데 더 은혜를 받는 것 같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찬양하십시오. 신자에게 약속된 한 데나리온의 품삯은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시는 영생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 데나리온도 받을 자격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님을 통해 아무 조건없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영생의 은혜 한 가지만 해도 일생 감사해도 부족할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목자의 직분까지 주셨으니 은혜 위에 은혜 아닙니까? 우리가 일생 감당할 수 없는 은혜 주심을 기억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며 살아야겠습니다. 이번 가을 학기에 하나님의 포도원인 캠퍼스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아 열심히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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