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4년 마23강 (18:15-35)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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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마태복음 23 강 (찬송가, 218장 네 맘과 정성을 다하여서, 아버지의 마음)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라
말씀: 마태복음8:15-35 요절: 마태복음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태복음 18장은 하나님의 자녀로 천국 시민이 된 우리들의 대인관계에 관한 권면입니다. 1∼14절은 소자 하나를 귀히 여기고 끝까지 감당하는 사랑에 대한 내용입니다. 15∼35절은 나에게 죄를 범한 형제를 권면하고 용서하는 내용입니다. 신앙생활을 지탱하는 두 개의 큰 기둥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성이고, 다른 하나는 공동체 안에서 형제간의 관계성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 형제간의 관계성을 잘 유지하는 비결은 회개와 기도, 사랑과 용서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공동체, 교회 안에서 용서의 목적과 한계에 대한 예수님의 권면입니다.
먼저, 용서의 목적입니다. 용서는 형제를 얻고 공동체를 하나 되게 하는 것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예수님은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그 사람과 1:1로 만나서 권고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권고의 원어는 ‘엘렝코’로 ‘빛으로 가져오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빛 되신 하나님 앞에 비추어 회개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과 공동체로 돌아오도록 권고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를 범하면 일단 감추고자 합니다. 죄를 인정하지 않고자 합니다. 죄를 인정하면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수치를 당하며 벌을 받거나 쫓겨날까 두려워합니다. 그렇다고 죄를 눈감아주면 죄의 정도는 심해지고 공동체가 병듭니다. 감정적으로 폭로하며 서로가 상처를 주고받고 관계성이 깨지면서 공동체가 분열되고 깨져버립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라고 말씀 하십니까?
다시 15∼17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인격적으로 개인의 비밀을 보장하면서 죄를 범한 형제가 듣도록 권고해야 합니다. 죄에 대해서 권고하고 용서하는 목적은 형제를 얻는 것입니다.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하나님께로 돌이키도록 돕는 것입니다. 여기서 죄를 범한 형제가 듣도록 돕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죄를 범한 형제를 대하며 문제아 취급을 하고 잘못된 문제만을 부각시켜서는 않됩니다. 그리고 듣고 회개하고 돌이키면 따뜻한 마음으로 영접해 주어야 합니다. 권고하는 목적은 형제를 책망하여 관계성을 파괴시켜 공동체에서 쫓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권고의 목적은 형제를 얻는 것이며 하나님의 공동체를 하나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를 범한 사람은 쉽게 인정하거나 듣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어? 이것 봐라! 네가 내 말을 안 들어?” 하면서 혈기를 부리고 물리력을 행사해야 합니까? 16절에 보면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확증하라고 했습니다. 무리를 지어 세를 과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지원을 받으면서 형제가 자기 죄문제를 객관적으로 보도록 도우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해서 교회의 뜻을 따르도록 권고해야 합니다.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그때 가서는 이방인과 세리같이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교회의 이름으로 징계를 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문제를 회개하지 않고 감추고자 하고 고집을 부리면 하나님의 교회는 상처를 입고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는 힘을 잃고 분열되기 시작합니다. 교회 안에 죄의 누룩이 퍼지고 사탄이 역사하여 형제들을 이간시킵니다. 죄문제는 분명하게 회개하도록 돕고 회개한 형제는 사랑과 섬김으로 따뜻한 마음으로 영접해 주어야 합니다. 그때 형제를 얻게 되고 신실한 하나님 역사의 동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18절을 다같이 읽어 봅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예수님은 교회의 바른 권징에 대한 권위를 인정하셨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죄로 인정하는 것은 죄가 되고 교회 공동체가 용서하면 죄가 사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 하나님의 세우신 주의 종들의 권면을 잘 분별하여 받아들이고 순종해야 합니다. 또한 주님이 인정하는 교회의 권징을 하기 위해서는 교회 구성원들은 합심해서 기도함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19∼20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으리라”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되게 하기 위해서는 말씀과 사랑에 기초한 권고와 중보기도, 합심기도가 병행되어야 합니다.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기도할 때 주님이 함께 하시므로 가장 좋은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 갈 수 있습니다. 합심해서 기도할 때, 성령이 역사하며 형제들의 마음을 얻고, 하나가 되며, 많은 문제들 속에도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고 이를 통해 성숙한 공동체로 성장하게 하십니다.
이번 여름수양회 기간 동안 많은 분들의 중보기도와 합심기도를 통해 양들과 리더들의 마음이 열리고 회개하고 새롭게 되는 역사들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힘이 아닌, 우리의 생각이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개입이며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인간적으로 아무리 권고해도 듣지 않던 사람들이 말씀과 합심기도를 통해서 성령이 역사하자 자발적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가복음 9:29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기도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사람을 돕고 섬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중보기도와 합심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개인기도도 꼭 필요하지만 기회가 되면 기도제목을 나누고 합심해서 기도해야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꼭 모여서 기도해야 합니까? 꼭 금요기도 모임에 나와야 합니까? 내가 원할 때, 편한 시간에 기도실이든지, 전철이든지, 버스든지, 사무실에서든지 기도만 하면 되지 않나요? 그러나 오늘 19절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우리 주님은 비록 적지만 두세 사람이 모여 합심해서 기도하는 곳에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1+1은 얼마입니까?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2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1+1은 2가 아니라 무한대가 됩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개입하시기 때문입니다. 합심 기도할 때 우리의 생각과 상상을 초월한 위대한 일을 보여주십니다. 겨울에 장작더미에 불을 지필 때 처음에는 불을 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작지만 마른 가지 하나둘을 모아놓고 마른 잎을 이용하여 불을 붙이면 어느 순간 강열한 불길이 타오릅니다. 한번 불붙은 불길은 강력하여 생나무도 태우고 심지어는 돌이나 쇠까지도 녹여 버립니다. 마음으로부터 가정의 합심 기도모임, 팀모임, 금요기도모임을 사모하고 합심해서 기도합시다. 각자 기도의 불을 지핍시다. 그리할 때 악한 세력이 떠나며,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두려움과 이기적인 생각을 극복하고, 죄문제가 해결되고, 영혼이 자유롭게 되며, 깊은 상처가 치유되며, 하늘나라의 소망이 충만한 놀라운 기적이 각자의 삶과 우리모임에 임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두 번째는 용서의 한계입니다. 용서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무한정 하는 것입니다. 형제가 회개하고 돌이킬 때까지 긍휼히 여기는 마음, 짠한 마음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21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당시 랍비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죄를 범할 때 세 번까지 용서해 주라고 가르쳤습니다. 베드로는 랍비의 가르침보다 두배에 한번을 더한 7번까지 용서할 수 있다고 자신의 관용을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22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즉 490번까지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숫자적인 의미가 아니라 7은 완전수이기 때문에 회개할 때까지 무한정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영혼에 대한 사랑과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끝까지 인내하며 용서하라는 주님의 준엄한 명령입니다.
죄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징벌이 아니라 용서를 통해서 완전히 해결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용서가 얼마나 중요한가 한 가지 비유를 드셨습니다. 어떤 임금에게 1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있었습니다. 1만 달란트는 6천만 데나리온입니다. 1데나리온이 일군의 하루 품삯이니까 요즘 하루 일당 10만원으로 잡으면 1만 달란트는 6천만×10만원하면=6조원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일만 달란트, 6조원이나 되는 빚을 졌습니다. 이때 임금은 분명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빚을 진 그 사람도 대단하지만 6조원이나 되는 빚을 준 임금도 대단하십니다. 그런데 임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빚을 갚으라고 준엄하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종은 엎드려서 절하며 말했습니다.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그러나 임금은 그가 어떠한 일을 해도 가족 전체의 소유를 판다고 해도 빚을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불쌍히 여기시고 다시 결단을 내렸습니다. “내가 그의 빚을 탕감하노라” 그 종이 빚을 탕감 받을 만한 이유는 눈꼽 많지도 없어 보입니다. 단지 임금님이 그를 불쌍히 여겼기 때문에 빚을 탕감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임금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빚진 종은 우리 인간을, 빚은 우리의 죄값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빚진 죄값이 일만 달란트로서 셀 수 없이 많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하나님과 형제들 앞에 지은 죄가 얼마나 많은가? 성경에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가 얼마나 많은지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1:18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찬송가 289장 2절에 보면 ‘머리털보다 더 많던 내 죄가’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사람 머리털은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그 죄는 셀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엄청난 죄에 대한 대가를 어떻게 치를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르틴 루터는 자신의 죄값을 스스로 치르고자 했습니다. 고행과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에서 자유롭고 의로운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로 성지순례를 떠나 성당의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며 자신의 주홍 같은 죄악을 속죄하고자 했습니다. 식사를 할 때도 죄인이 어떻게 좋은 밥을 먹을 수 있는가 하면서 밥에 재를 뿌려서 먹었습니다. 마음에 죄악된 생각이 들면 그 때마다 신부님을 찾아가서 고해성사를 했습니다. 나중에는 신부님이 너무 부담스럽고 귀찮기도 해서 “루터야! 한꺼번에 하자” 그렇게까지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든 고행을 해도, 수많은 고해성사를 해도 자신의 죄가 깨끗해지고 마음에 평강과 자유의 확신이 들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우리 각자의 죄악은 끝이 없고 그 악함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우리 인간은 발바닥에서 머리끝까지 성한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죄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사1:6).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은 이런 죄악된 인간을 보시고 있노라면 속이 뒤집혀서 당장이라도 싹 쓰러버릴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늘 아버지 우리 주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뭐가 불쌍합니까? 하나도 불쌍하지 않지요. 괘씸하기만 하지요. 우리가 행한 죄악만 보면 눈꼽 많지도 불쌍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악은 증오하시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 죄인들은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너무나 커서 우리의 죄값을 다 탕감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롭고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반드시 죄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런데 그 죄값을 우리 각자에게 묻지 않으시고 독생자 예수님이 감당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의 어린양으로 이땅에 보내셔 우리 인생을 섬기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다 이루었다!”하시며 죄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이 없이는 도저히 죄사함을 받을 수 없고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늘 주님의 한량없는 긍휼로 죄사함의 용서를 받은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않됩니다. 그런데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은 백 데나이온 일만 달란트의 60만분의 1 빚진 동료를 어떻게 했습니까?
28∼30절을 다 같이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임금에게 빚을 탕감 받은 종은 너무나도 기쁨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는 길에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백 데나리온은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60만분의 1에 해당하는 아주 적은 돈입니다. 더구나 그 사람은 자신의 종도 아니고 동료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의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협박을 하였습니다. 그 친구가 땅에 엎드려서 갚겠다고 간청을 했습니다. “여보게 친구, 내가 그 백 데나리온 꼭 갚을께, 조금만 조금만 시간을 주게나” 그러나 그 사람은 용서하지 않고 친구를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럼, 이 사람이 왜 이렇게 은혜를 모르고 무정한 것입니까? 동료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임금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까마득하게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잊을 것을 잊어야 하는데 잊어서는 않되는 임금의 용서를 잊었습니다. 이런 종에 대해서 임금은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32, 33절 다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임금은 그에게 “이 악한 종아”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용서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다른 사람에게 당한 것을 생각하면 용서할 수 없습니다. 치가 떨리고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죄사함의 용서와 사랑의 섬김을 생각할 때 어떤 사람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를 위해 중보기도할 수 있습니다. 용서의 사랑만이 사람을 죄에서 자유롭게 하고 아름다운 동역자로 변화시킵니다. 십자가 상에서 강도의 마음을 변화시킨 것은 무서운 십자가의 형벌이 아니라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이었습니다. 십자가에 죽어가면서도 그를 위해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이 그를 변화시켰습니다.
레미제라블에 등장하는 장발장은 르미에르 신부의 용서와 관용, 사랑과 섬김에 깊이 감동되어 어려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선행을 행합니다. 장발장과 르미에르신부가 처음 만날 때의 대화를 일부 소개하겠습니다. 신부 : 당신이 말하기 전부터 나는 당신의 또 하나의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장발장(놀라운 듯 눈을 크게 떳다) : 정말입니까? 당신은 저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까? 르미에르 신부 : 그렇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나의 형제’지요^^. 르미에르 신부는 장발장을 형제로 영접하고 먹이고 재워주었습니다. 값진 은그릇을 훔쳐 도망치다 경찰에 잡혀왔지만 그를 변론하고 귀한 은 촛대를 두 개씩이나 더 주면서 용서하고 정직하게 살도록 권면합니다. 장발장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만 르미에르 신부의 용서와 사랑이 그의 마음을 녹이고 있었습니다. 반면 장발장을 쫒고 있던 쟈베르 경감은 긍휼의 마음이 없었습니다. 오직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민중의 지팡이로서 법을 집행하는 충성스런 경찰이었습니다. 결국 죄를 범한 사람을 용서할 수 없었고 자신도 용서할 수 없어서 최악의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35절을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인생의 끝자락에 있는 많은 현자들에게 ‘인생을 살면서 가장 아쉬운 점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많은 답변의 공통점은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용서하고, 섬기지 못한 점’이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이란 시를 소개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 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 고 물을 겁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에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 하루를 최선을 다하여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느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꿔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나는 자랑스럽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하겠습니다. (글 : 윤동주)] 우리도 인생의 결실을 맺는 시점에서 돌이켜 보면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더 사랑했으면 좋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쉬울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사랑하고 지금 용서해야 합니다. 사랑에는 책임이 있어야 하고 용서에는 용기가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이기적인 죄악된 본성으로 할 수 없지만 기도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때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용서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용서는 저절로 시간이 지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준엄한 명령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간절한 소망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고 아름다운 교회공동체를 이루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힘쓰도록 권면하고 계십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합심기도와 형제를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이 우리 가운데 넘칠 수 있길 기도합니다. 그래서 내가 먼저 변해야 형제가 변합니다. 용서의 사랑이 넘쳐야 죄악과 분노가 범람한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놀라운 역사가 흥황이 일어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며 사람들 사이에서 피스메이커로서 용서와 사랑이 넘치는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를 이룰 수 있길 기도합니다.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라
말씀: 마태복음8:15-35 요절: 마태복음 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태복음 18장은 하나님의 자녀로 천국 시민이 된 우리들의 대인관계에 관한 권면입니다. 1∼14절은 소자 하나를 귀히 여기고 끝까지 감당하는 사랑에 대한 내용입니다. 15∼35절은 나에게 죄를 범한 형제를 권면하고 용서하는 내용입니다. 신앙생활을 지탱하는 두 개의 큰 기둥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성이고, 다른 하나는 공동체 안에서 형제간의 관계성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 형제간의 관계성을 잘 유지하는 비결은 회개와 기도, 사랑과 용서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공동체, 교회 안에서 용서의 목적과 한계에 대한 예수님의 권면입니다.
먼저, 용서의 목적입니다. 용서는 형제를 얻고 공동체를 하나 되게 하는 것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예수님은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그 사람과 1:1로 만나서 권고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권고의 원어는 ‘엘렝코’로 ‘빛으로 가져오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빛 되신 하나님 앞에 비추어 회개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과 공동체로 돌아오도록 권고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를 범하면 일단 감추고자 합니다. 죄를 인정하지 않고자 합니다. 죄를 인정하면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수치를 당하며 벌을 받거나 쫓겨날까 두려워합니다. 그렇다고 죄를 눈감아주면 죄의 정도는 심해지고 공동체가 병듭니다. 감정적으로 폭로하며 서로가 상처를 주고받고 관계성이 깨지면서 공동체가 분열되고 깨져버립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라고 말씀 하십니까?
다시 15∼17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인격적으로 개인의 비밀을 보장하면서 죄를 범한 형제가 듣도록 권고해야 합니다. 죄에 대해서 권고하고 용서하는 목적은 형제를 얻는 것입니다.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하나님께로 돌이키도록 돕는 것입니다. 여기서 죄를 범한 형제가 듣도록 돕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죄를 범한 형제를 대하며 문제아 취급을 하고 잘못된 문제만을 부각시켜서는 않됩니다. 그리고 듣고 회개하고 돌이키면 따뜻한 마음으로 영접해 주어야 합니다. 권고하는 목적은 형제를 책망하여 관계성을 파괴시켜 공동체에서 쫓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권고의 목적은 형제를 얻는 것이며 하나님의 공동체를 하나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를 범한 사람은 쉽게 인정하거나 듣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어? 이것 봐라! 네가 내 말을 안 들어?” 하면서 혈기를 부리고 물리력을 행사해야 합니까? 16절에 보면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확증하라고 했습니다. 무리를 지어 세를 과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지원을 받으면서 형제가 자기 죄문제를 객관적으로 보도록 도우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해서 교회의 뜻을 따르도록 권고해야 합니다.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그때 가서는 이방인과 세리같이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교회의 이름으로 징계를 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문제를 회개하지 않고 감추고자 하고 고집을 부리면 하나님의 교회는 상처를 입고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는 힘을 잃고 분열되기 시작합니다. 교회 안에 죄의 누룩이 퍼지고 사탄이 역사하여 형제들을 이간시킵니다. 죄문제는 분명하게 회개하도록 돕고 회개한 형제는 사랑과 섬김으로 따뜻한 마음으로 영접해 주어야 합니다. 그때 형제를 얻게 되고 신실한 하나님 역사의 동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18절을 다같이 읽어 봅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예수님은 교회의 바른 권징에 대한 권위를 인정하셨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죄로 인정하는 것은 죄가 되고 교회 공동체가 용서하면 죄가 사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 하나님의 세우신 주의 종들의 권면을 잘 분별하여 받아들이고 순종해야 합니다. 또한 주님이 인정하는 교회의 권징을 하기 위해서는 교회 구성원들은 합심해서 기도함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19∼20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으리라”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되게 하기 위해서는 말씀과 사랑에 기초한 권고와 중보기도, 합심기도가 병행되어야 합니다.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기도할 때 주님이 함께 하시므로 가장 좋은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 갈 수 있습니다. 합심해서 기도할 때, 성령이 역사하며 형제들의 마음을 얻고, 하나가 되며, 많은 문제들 속에도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고 이를 통해 성숙한 공동체로 성장하게 하십니다.
이번 여름수양회 기간 동안 많은 분들의 중보기도와 합심기도를 통해 양들과 리더들의 마음이 열리고 회개하고 새롭게 되는 역사들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힘이 아닌, 우리의 생각이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개입이며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인간적으로 아무리 권고해도 듣지 않던 사람들이 말씀과 합심기도를 통해서 성령이 역사하자 자발적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가복음 9:29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기도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사람을 돕고 섬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중보기도와 합심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개인기도도 꼭 필요하지만 기회가 되면 기도제목을 나누고 합심해서 기도해야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꼭 모여서 기도해야 합니까? 꼭 금요기도 모임에 나와야 합니까? 내가 원할 때, 편한 시간에 기도실이든지, 전철이든지, 버스든지, 사무실에서든지 기도만 하면 되지 않나요? 그러나 오늘 19절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우리 주님은 비록 적지만 두세 사람이 모여 합심해서 기도하는 곳에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1+1은 얼마입니까?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2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1+1은 2가 아니라 무한대가 됩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개입하시기 때문입니다. 합심 기도할 때 우리의 생각과 상상을 초월한 위대한 일을 보여주십니다. 겨울에 장작더미에 불을 지필 때 처음에는 불을 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작지만 마른 가지 하나둘을 모아놓고 마른 잎을 이용하여 불을 붙이면 어느 순간 강열한 불길이 타오릅니다. 한번 불붙은 불길은 강력하여 생나무도 태우고 심지어는 돌이나 쇠까지도 녹여 버립니다. 마음으로부터 가정의 합심 기도모임, 팀모임, 금요기도모임을 사모하고 합심해서 기도합시다. 각자 기도의 불을 지핍시다. 그리할 때 악한 세력이 떠나며,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두려움과 이기적인 생각을 극복하고, 죄문제가 해결되고, 영혼이 자유롭게 되며, 깊은 상처가 치유되며, 하늘나라의 소망이 충만한 놀라운 기적이 각자의 삶과 우리모임에 임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두 번째는 용서의 한계입니다. 용서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무한정 하는 것입니다. 형제가 회개하고 돌이킬 때까지 긍휼히 여기는 마음, 짠한 마음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21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당시 랍비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죄를 범할 때 세 번까지 용서해 주라고 가르쳤습니다. 베드로는 랍비의 가르침보다 두배에 한번을 더한 7번까지 용서할 수 있다고 자신의 관용을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22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즉 490번까지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숫자적인 의미가 아니라 7은 완전수이기 때문에 회개할 때까지 무한정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영혼에 대한 사랑과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끝까지 인내하며 용서하라는 주님의 준엄한 명령입니다.
죄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징벌이 아니라 용서를 통해서 완전히 해결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용서가 얼마나 중요한가 한 가지 비유를 드셨습니다. 어떤 임금에게 1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있었습니다. 1만 달란트는 6천만 데나리온입니다. 1데나리온이 일군의 하루 품삯이니까 요즘 하루 일당 10만원으로 잡으면 1만 달란트는 6천만×10만원하면=6조원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일만 달란트, 6조원이나 되는 빚을 졌습니다. 이때 임금은 분명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빚을 진 그 사람도 대단하지만 6조원이나 되는 빚을 준 임금도 대단하십니다. 그런데 임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빚을 갚으라고 준엄하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종은 엎드려서 절하며 말했습니다.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그러나 임금은 그가 어떠한 일을 해도 가족 전체의 소유를 판다고 해도 빚을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불쌍히 여기시고 다시 결단을 내렸습니다. “내가 그의 빚을 탕감하노라” 그 종이 빚을 탕감 받을 만한 이유는 눈꼽 많지도 없어 보입니다. 단지 임금님이 그를 불쌍히 여겼기 때문에 빚을 탕감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임금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빚진 종은 우리 인간을, 빚은 우리의 죄값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빚진 죄값이 일만 달란트로서 셀 수 없이 많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하나님과 형제들 앞에 지은 죄가 얼마나 많은가? 성경에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가 얼마나 많은지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1:18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찬송가 289장 2절에 보면 ‘머리털보다 더 많던 내 죄가’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사람 머리털은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그 죄는 셀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엄청난 죄에 대한 대가를 어떻게 치를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르틴 루터는 자신의 죄값을 스스로 치르고자 했습니다. 고행과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에서 자유롭고 의로운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로 성지순례를 떠나 성당의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며 자신의 주홍 같은 죄악을 속죄하고자 했습니다. 식사를 할 때도 죄인이 어떻게 좋은 밥을 먹을 수 있는가 하면서 밥에 재를 뿌려서 먹었습니다. 마음에 죄악된 생각이 들면 그 때마다 신부님을 찾아가서 고해성사를 했습니다. 나중에는 신부님이 너무 부담스럽고 귀찮기도 해서 “루터야! 한꺼번에 하자” 그렇게까지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든 고행을 해도, 수많은 고해성사를 해도 자신의 죄가 깨끗해지고 마음에 평강과 자유의 확신이 들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우리 각자의 죄악은 끝이 없고 그 악함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우리 인간은 발바닥에서 머리끝까지 성한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죄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사1:6).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은 이런 죄악된 인간을 보시고 있노라면 속이 뒤집혀서 당장이라도 싹 쓰러버릴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늘 아버지 우리 주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뭐가 불쌍합니까? 하나도 불쌍하지 않지요. 괘씸하기만 하지요. 우리가 행한 죄악만 보면 눈꼽 많지도 불쌍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악은 증오하시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 죄인들은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너무나 커서 우리의 죄값을 다 탕감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롭고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반드시 죄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런데 그 죄값을 우리 각자에게 묻지 않으시고 독생자 예수님이 감당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의 어린양으로 이땅에 보내셔 우리 인생을 섬기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다 이루었다!”하시며 죄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이 없이는 도저히 죄사함을 받을 수 없고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늘 주님의 한량없는 긍휼로 죄사함의 용서를 받은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않됩니다. 그런데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은 백 데나이온 일만 달란트의 60만분의 1 빚진 동료를 어떻게 했습니까?
28∼30절을 다 같이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임금에게 빚을 탕감 받은 종은 너무나도 기쁨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는 길에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백 데나리온은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60만분의 1에 해당하는 아주 적은 돈입니다. 더구나 그 사람은 자신의 종도 아니고 동료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의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협박을 하였습니다. 그 친구가 땅에 엎드려서 갚겠다고 간청을 했습니다. “여보게 친구, 내가 그 백 데나리온 꼭 갚을께, 조금만 조금만 시간을 주게나” 그러나 그 사람은 용서하지 않고 친구를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럼, 이 사람이 왜 이렇게 은혜를 모르고 무정한 것입니까? 동료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임금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까마득하게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잊을 것을 잊어야 하는데 잊어서는 않되는 임금의 용서를 잊었습니다. 이런 종에 대해서 임금은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32, 33절 다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임금은 그에게 “이 악한 종아”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용서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다른 사람에게 당한 것을 생각하면 용서할 수 없습니다. 치가 떨리고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죄사함의 용서와 사랑의 섬김을 생각할 때 어떤 사람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를 위해 중보기도할 수 있습니다. 용서의 사랑만이 사람을 죄에서 자유롭게 하고 아름다운 동역자로 변화시킵니다. 십자가 상에서 강도의 마음을 변화시킨 것은 무서운 십자가의 형벌이 아니라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이었습니다. 십자가에 죽어가면서도 그를 위해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이 그를 변화시켰습니다.
레미제라블에 등장하는 장발장은 르미에르 신부의 용서와 관용, 사랑과 섬김에 깊이 감동되어 어려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선행을 행합니다. 장발장과 르미에르신부가 처음 만날 때의 대화를 일부 소개하겠습니다. 신부 : 당신이 말하기 전부터 나는 당신의 또 하나의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장발장(놀라운 듯 눈을 크게 떳다) : 정말입니까? 당신은 저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까? 르미에르 신부 : 그렇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나의 형제’지요^^. 르미에르 신부는 장발장을 형제로 영접하고 먹이고 재워주었습니다. 값진 은그릇을 훔쳐 도망치다 경찰에 잡혀왔지만 그를 변론하고 귀한 은 촛대를 두 개씩이나 더 주면서 용서하고 정직하게 살도록 권면합니다. 장발장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만 르미에르 신부의 용서와 사랑이 그의 마음을 녹이고 있었습니다. 반면 장발장을 쫒고 있던 쟈베르 경감은 긍휼의 마음이 없었습니다. 오직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민중의 지팡이로서 법을 집행하는 충성스런 경찰이었습니다. 결국 죄를 범한 사람을 용서할 수 없었고 자신도 용서할 수 없어서 최악의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35절을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인생의 끝자락에 있는 많은 현자들에게 ‘인생을 살면서 가장 아쉬운 점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많은 답변의 공통점은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용서하고, 섬기지 못한 점’이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이란 시를 소개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 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 고 물을 겁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에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 하루를 최선을 다하여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느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꿔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나는 자랑스럽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하겠습니다. (글 : 윤동주)] 우리도 인생의 결실을 맺는 시점에서 돌이켜 보면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더 사랑했으면 좋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쉬울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사랑하고 지금 용서해야 합니다. 사랑에는 책임이 있어야 하고 용서에는 용기가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이기적인 죄악된 본성으로 할 수 없지만 기도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때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용서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용서는 저절로 시간이 지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준엄한 명령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간절한 소망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고 아름다운 교회공동체를 이루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힘쓰도록 권면하고 계십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합심기도와 형제를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이 우리 가운데 넘칠 수 있길 기도합니다. 그래서 내가 먼저 변해야 형제가 변합니다. 용서의 사랑이 넘쳐야 죄악과 분노가 범람한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놀라운 역사가 흥황이 일어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며 사람들 사이에서 피스메이커로서 용서와 사랑이 넘치는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를 이룰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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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회 다운로드 | DATE : 2014-08-25 08:2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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