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4년 마21강(16:13-28)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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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마태복음 제 21 강
말씀 | 마태복음 16:13-28
요절 | 마태복음 16:15,16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신가? 이 질문은 모든 사람에게 가장 중대한 질문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아는 일은 구원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고 그가 하신 일을 알 때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요17:3). 예수님 당시나 오늘이나 그를 피상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신앙 고백을 하지 못하고 겉도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에 바른 신앙고백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신앙고백 위에 제자의 길을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이곳은 헬몬산 기슭에 있는 곳으로 이스라엘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합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북쪽으로 40Km 떨어진 곳인데 인근에 요단강의 수원이 되는 바네아스 계곡이 있습니다. 헬라와 가나안 여러 신의 신당들이 들어 차 있는 그 아름다운 계곡에서 예수님은 중요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14).” 예수님의 두 번째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5)” 이 물음은 주관적인 질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제까지 성경을 공부하고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경험하고 체험한 예수님은 누구이신지를 묻는 것입니다. 이때 시몬 베드로가 무릎을 탁 꿇으며 고백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Simon Peter answered, "You are the Christ, the Son of the living God.")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아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이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구약시대에는 왕, 선지자, 제사장들이 세움을 받을 때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왕이요, 선지자요, 제사장의 직분을 다 행하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습니다. 헬라어 원어에는 그리스도라는 단어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단어 사이에 관사 '호'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바로 오랫동안 대망되어온 구원자 바로 ‘그’ 그리스도가 되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는 ‘그 그리스도’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바로 그 약속된 메시아로 인류의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구약 성경은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창세기 3:15절에 여자의 후손이라는 예언부터 이사야 선지자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이(사7:14), 처녀 마리아가 잉태함으로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나셨습니다. 창세기 3장에 여자의 후손이 발꿈치를 상한다는 예언, 이사야 53장에 예언된 메시아의 고난, 그리고 채찍에 맞으시고 고난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시는 모습은 구약에 예언된 오실 그리스도가 바로 예수님이심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가득 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복이 있다고 칭찬하시면서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덧붙여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올바로 아는 지식은 오직 하나님의 계시가 있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지식과 지혜로 예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1:1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고린도전서 12:2절은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를 그리스도라 시인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받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알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지만 하나님의 계시가 임할 때 깨달음을 얻게 되고 신구약을 관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할 때 구원을 받습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죄사함을 받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때 그리스도로서 그는 나의 왕이 되어 주십니다. 왕이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 백성을 다스려 원수로부터 보호하고 안전을 지켜주고 평안히 먹고 살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왕으로서 우리를 다스려 주십니다. 또한 선지자로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배부르게 하십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여러 가지 일로 불만족하는 우리에게 그는 만족을 주십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와 생명의 떡을 먹을 때 우리는 행복합니다. 그는 또한 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그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이면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의 신성을 등한시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으로서 우리의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베드로는 그동안 예수님의 사역을 볼 때 이 분이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 아들이심을 확신했습니다. 예수님이 성난 파도를 잠잠하게 한 사건, 중풍병자의 죄 사함을 선포하고 일어나 걷게 한 사건, 죽은 나사로와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린 사건, 야이로의 딸을 살린 사건, 예수님 자신의 선언 등과 나중에 그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이심을 확신하게 했습니다. 또 예수님은 자신과 하나님 아버지가 하나라고 선언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은 주시라는 고백은 그가 만유의 주시며 우주의 통치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권세 위에 뛰어난 분이시기 때문에 만유의 모든 것들이 예수님께 경배 드려야 마땅합니다. 그는 또한 개인의 주이십니다. 이는 예수님은 나 자신의 삶의 통치자라는 뜻입니다. 인생 길을 걷는 것은 나이지만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순종하고 헌신함으로 그가 나의 주이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역사의 주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의 역사도 주관하는 통치자라는 사실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시라는 고백은 모든 피조물이 그 안에서 하나 됨을 발견하게 합니다. 즉 예수님은 주시라는 고백은 사람을 나누기도 하고 하나가 되게 하는 역할도 합니다. 요한복음 14:6절에서 예수님은 유일한 구원자로서 자기 선언을 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는 지금도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지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각자가 처한 현실이 다르지만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시며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우리가 그를 더욱 체험적으로 알고 그의 인격을 닮아가며 성숙하도록 훈련도 하십니다. 주님의 임재는 말씀을 듣거나 공부할 때, 묵상할 때 임합니다. 때로는 기도하는 가운데 임하십니다. 저는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교회로 오는 길을 걸으면서 주님의 임재를 누리며 기뻐합니다. 우리 모두 일상생활 속에서 주님과의 친밀함이 더욱 자라는 가운데 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알아가고 나누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고 고백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일까요? 로마서 10:9절은 말씀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며 고백하는 것은 생명을 건 고백이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는 로마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던 때였습니다. 물론 로마는 다신교 사회에서 여러 신들을 인정했지만 유대교의 영향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을 이단시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엄청난 박해를 가했습니다. 모든 신자는 마땅히 예수님을 그리스도 곧 나의 구원자시오, 나의 왕이시오, 나의 생명과 인생의 주인(the Lord)이 되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런 신앙 고백을 할 때 하나님의 자녀요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집니다.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은 하나님의 집,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사탄에게 빼앗긴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출함으로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신앙 고백을 하는 것은 결혼하는 부부가 결혼 서약을 함으로 연합하여 한 가정을 이루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함으로 하나가 됩니다. 신앙고백은 사랑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사랑고백을 드리지 않으면 돈이나, 인기 스타나, 우상 등 엉뚱한 대상에게 사랑 고백을 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과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자라가는 것입니다. 또 일생 동안 그의 인격과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능력을 체험해 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이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그와 동행하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이 왜 중요한지 18절을 살펴봄으로 알아보겠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너는 베드로라” 말씀하시고 이어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네 위에” 라고 하시지 않고 “이 반석 위에” 라고 말씀하심으로 베드로와 반석이 다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반석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불안정합니다. 그는 뒤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계시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반석은 하나님의 계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신앙 고백은 주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베드로와 이 반석은 서로 같은 것일 수 있는 가능성도 있습니다. 작은 돌 같은 베드로를 큰 반석 같이 여기시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베드로는 반석의 기능을 할 것이기에 베드로라고 불리웁니다.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이스라엘의 반석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옛 이스라엘의 반석이었듯이 베드로는 새 이스라엘 즉 교회의 기초가 됩니다. 우리가 주의해야할 것은 베드로는 교회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교회의 단일함 즉 통일성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반석은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반석이라는 사상은 구약에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반석은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 또는 그의 계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기초는 하나님 아버지시오 그의 계시에 의해서 은혜로 세워집니다. 또한 교회는 예수님께서 “내 교회”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때 예수님의 소유입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십니다. 우리는 그의 자녀로서 구원 역사에 쓰임 받습니다. 이제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친히 교회를 세우시고 다스리십니다. 주님이 다스리시는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결코 이기지 못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예수님은 교회에 천국 열쇠를 맡기셨습니다. 이 권세는 모든 사도들과 복음 전파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복음 전파를 통하여 믿는 사람들에게 천국을 열어주게 되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 천국을 결과적으로 닫아버리게 됩니다. 사탄의 나라가 아무리 강한 문을 가지고 방어를 한다고 해도 교회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가 담대하게 어둠의 나라를 공격해 나아갑니다. 교회는 공격하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반석 위에 서 있기에 흔들리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사탄의 나라를 흔들어 무너뜨립니다. 교회는 그 영역을 꾸준히 확장해 나가면서 승리합니다. 남바나바 목자님은 이번 여름 수양회를 가고자 할 때 직장에서 휴가를 얻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동료들이 그 기간에 휴가를 가겠다고 미리 정해놓았기 때문에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가 고민할 때 동역자는 기도하도록 책망을 했습니다. 그가 기도했을 때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다른 동료들이 일을 다 끝내지 못해서 휴가를 뒤로 미루었기 때문에 남바나바 목자님은 수양회에 처음부터 끝날 까지 참석해서 은혜를 풍성히 받고 분반 리더 직분도 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천국 열쇠들을 가지고 있기에 다양한 방면에서 선교를 해야 합니다. 어린아이, 청소년, 대학생, 어른들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나이지리아, 일본, 중국, 태국, 러시아, 미국 등 세계 233개국에 선교를 해야 합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우리가 가진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선교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복음을 전파하며 제자들을 양성하고 파송하기를 기도합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 예수님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알리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지상 사역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구원자가 되는 데 있어서 반드시 고난과 죽음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십니다. 당시에 많은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메시야관은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것이었습니다. 힘이 있고 권세가 있고 영광을 받으시는 메시야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난과 버림받음과 죽음을 통해서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부활을 통해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메시야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습니다. 항변했다는 말은 꾸짖다, 책망하다는 뜻입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22).” 베드로는 자기 나름대로의 메시야 관이 있었고 예수님께 거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고난 받고 죽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예수님은 베드로의 항변을 사탄이 그를 통해 역사하시는 것으로 보시고 책망하십니다. 방금 전에만 해도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하시며 칭찬을 받던 그가 졸지에 사탄이라는 심한 책망을 받았습니다. 사탄에게 내 뒤로 썩 물러가라 하시며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방해하지 말도록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만민의 죄를 사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생각한 사람의 일은 지상 메시아 왕국의 성취, 그로 인한 영광, 또한 그의 예수님께 대한 인간적인 의리 등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마땅히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꿈을 버려야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의 일을 이루고 싶은 마음으로 결국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아무리 열정이 있고 영적인 깨달음도 있지만 문제는 사람의 방법으로 구원역사를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를 버리지 못했을 때 나중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다시 말씀하십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크리스천들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의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욕망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기의 꿈을 포기하고 자기의 소원을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는 예수님을 절대적인 우선순위에 놓고 따르기 위해 감당해야 할 모든 짐을 말합니다. 신자들은 예수님을 절대적인 목표로 삼고 따르기 위해 자신의 욕망을 기꺼이 부인하고 또 필요한 짐을 기꺼이 지고 가야 합니다. 금요 모임에 참석해서 기도하는 짐, 일대일의 짐, 섬김의 짐, 선교의 짐을 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인간적인 생각과 욕망을 죽여야 합니다. 때로는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의 육신의 목숨을 버리기까지 해야 합니다. 복음적인 프란체스코 교황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십자가 없이 나아가고 십자가 없이 교회를 세우고 십자가 없이 그리스도를 고백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속적으로는 사제요, 주교요 추기경이요 교황일수 있지만 주님의 제자들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로 신앙고백을 했으면 고난이 있다 해도 헌신하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의 주연 배우 짐 카비젤은 예수님 역을 하고 나면 헐리우드에서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이름이 세상에서 무명으로 남을지라도 천국에 새겨진 자신의 이름을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겠다고 고백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과 축복이 무엇입니까? 25-27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이 말씀은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을 앞두고 수군들 앞에서 행한 연설 중 일부와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단하되 자기의 육신의 목숨을 버리기까지 하며 따를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나 자기의 목숨을 잃지 않고자 예수님을 부인하고 따르지 않을 때 그는 영원한 생명을 잃게 됩니다. 실로 주님을 따르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므로 이 세상에서 나의 모든 것을 바쳐 따를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영광으로 다시 오실 때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갚아주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름없이 살다가 죽을지 모르지만 주님은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시고 상상하지 못한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이 땅의 무리들은 우리가 정상에서 밀려나는 순간 모든 것을 잊어버릴 것입니다. 미친 듯이 응원하다가도 한번 미끄러지면 그때부터 거들떠보지도 않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기를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팔일 후에 산에 가셔서 자신의 변화된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승천하셔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역사에 나타난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을 통해서 놀라운 열매가 맺히고 하나님 나라는 확장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보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으로부터 솟아나는 기쁨과 은혜로 인해 기꺼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며 주님을 따르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마태복음 16:13-28
요절 | 마태복음 16:15,16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신가? 이 질문은 모든 사람에게 가장 중대한 질문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아는 일은 구원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고 그가 하신 일을 알 때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요17:3). 예수님 당시나 오늘이나 그를 피상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신앙 고백을 하지 못하고 겉도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에 바른 신앙고백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신앙고백 위에 제자의 길을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이곳은 헬몬산 기슭에 있는 곳으로 이스라엘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합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북쪽으로 40Km 떨어진 곳인데 인근에 요단강의 수원이 되는 바네아스 계곡이 있습니다. 헬라와 가나안 여러 신의 신당들이 들어 차 있는 그 아름다운 계곡에서 예수님은 중요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14).” 예수님의 두 번째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5)” 이 물음은 주관적인 질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제까지 성경을 공부하고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경험하고 체험한 예수님은 누구이신지를 묻는 것입니다. 이때 시몬 베드로가 무릎을 탁 꿇으며 고백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Simon Peter answered, "You are the Christ, the Son of the living God.")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아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이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구약시대에는 왕, 선지자, 제사장들이 세움을 받을 때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왕이요, 선지자요, 제사장의 직분을 다 행하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습니다. 헬라어 원어에는 그리스도라는 단어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단어 사이에 관사 '호'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바로 오랫동안 대망되어온 구원자 바로 ‘그’ 그리스도가 되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는 ‘그 그리스도’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바로 그 약속된 메시아로 인류의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구약 성경은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창세기 3:15절에 여자의 후손이라는 예언부터 이사야 선지자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이(사7:14), 처녀 마리아가 잉태함으로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나셨습니다. 창세기 3장에 여자의 후손이 발꿈치를 상한다는 예언, 이사야 53장에 예언된 메시아의 고난, 그리고 채찍에 맞으시고 고난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시는 모습은 구약에 예언된 오실 그리스도가 바로 예수님이심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가득 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복이 있다고 칭찬하시면서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덧붙여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올바로 아는 지식은 오직 하나님의 계시가 있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지식과 지혜로 예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1:1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고린도전서 12:2절은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를 그리스도라 시인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받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알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지만 하나님의 계시가 임할 때 깨달음을 얻게 되고 신구약을 관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할 때 구원을 받습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죄사함을 받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때 그리스도로서 그는 나의 왕이 되어 주십니다. 왕이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 백성을 다스려 원수로부터 보호하고 안전을 지켜주고 평안히 먹고 살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왕으로서 우리를 다스려 주십니다. 또한 선지자로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배부르게 하십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여러 가지 일로 불만족하는 우리에게 그는 만족을 주십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와 생명의 떡을 먹을 때 우리는 행복합니다. 그는 또한 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그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이면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의 신성을 등한시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으로서 우리의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십니다. 베드로는 그동안 예수님의 사역을 볼 때 이 분이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 아들이심을 확신했습니다. 예수님이 성난 파도를 잠잠하게 한 사건, 중풍병자의 죄 사함을 선포하고 일어나 걷게 한 사건, 죽은 나사로와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린 사건, 야이로의 딸을 살린 사건, 예수님 자신의 선언 등과 나중에 그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이심을 확신하게 했습니다. 또 예수님은 자신과 하나님 아버지가 하나라고 선언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은 주시라는 고백은 그가 만유의 주시며 우주의 통치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권세 위에 뛰어난 분이시기 때문에 만유의 모든 것들이 예수님께 경배 드려야 마땅합니다. 그는 또한 개인의 주이십니다. 이는 예수님은 나 자신의 삶의 통치자라는 뜻입니다. 인생 길을 걷는 것은 나이지만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순종하고 헌신함으로 그가 나의 주이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역사의 주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의 역사도 주관하는 통치자라는 사실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시라는 고백은 모든 피조물이 그 안에서 하나 됨을 발견하게 합니다. 즉 예수님은 주시라는 고백은 사람을 나누기도 하고 하나가 되게 하는 역할도 합니다. 요한복음 14:6절에서 예수님은 유일한 구원자로서 자기 선언을 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는 지금도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지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각자가 처한 현실이 다르지만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시며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우리가 그를 더욱 체험적으로 알고 그의 인격을 닮아가며 성숙하도록 훈련도 하십니다. 주님의 임재는 말씀을 듣거나 공부할 때, 묵상할 때 임합니다. 때로는 기도하는 가운데 임하십니다. 저는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교회로 오는 길을 걸으면서 주님의 임재를 누리며 기뻐합니다. 우리 모두 일상생활 속에서 주님과의 친밀함이 더욱 자라는 가운데 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알아가고 나누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고 고백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일까요? 로마서 10:9절은 말씀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며 고백하는 것은 생명을 건 고백이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는 로마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던 때였습니다. 물론 로마는 다신교 사회에서 여러 신들을 인정했지만 유대교의 영향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을 이단시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엄청난 박해를 가했습니다. 모든 신자는 마땅히 예수님을 그리스도 곧 나의 구원자시오, 나의 왕이시오, 나의 생명과 인생의 주인(the Lord)이 되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런 신앙 고백을 할 때 하나님의 자녀요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집니다.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은 하나님의 집,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사탄에게 빼앗긴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출함으로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신앙 고백을 하는 것은 결혼하는 부부가 결혼 서약을 함으로 연합하여 한 가정을 이루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함으로 하나가 됩니다. 신앙고백은 사랑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사랑고백을 드리지 않으면 돈이나, 인기 스타나, 우상 등 엉뚱한 대상에게 사랑 고백을 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과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자라가는 것입니다. 또 일생 동안 그의 인격과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능력을 체험해 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이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그와 동행하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이 왜 중요한지 18절을 살펴봄으로 알아보겠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너는 베드로라” 말씀하시고 이어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네 위에” 라고 하시지 않고 “이 반석 위에” 라고 말씀하심으로 베드로와 반석이 다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반석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불안정합니다. 그는 뒤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계시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반석은 하나님의 계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신앙 고백은 주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베드로와 이 반석은 서로 같은 것일 수 있는 가능성도 있습니다. 작은 돌 같은 베드로를 큰 반석 같이 여기시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베드로는 반석의 기능을 할 것이기에 베드로라고 불리웁니다.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이스라엘의 반석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옛 이스라엘의 반석이었듯이 베드로는 새 이스라엘 즉 교회의 기초가 됩니다. 우리가 주의해야할 것은 베드로는 교회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교회의 단일함 즉 통일성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반석은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반석이라는 사상은 구약에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반석은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 또는 그의 계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기초는 하나님 아버지시오 그의 계시에 의해서 은혜로 세워집니다. 또한 교회는 예수님께서 “내 교회”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때 예수님의 소유입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십니다. 우리는 그의 자녀로서 구원 역사에 쓰임 받습니다. 이제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친히 교회를 세우시고 다스리십니다. 주님이 다스리시는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결코 이기지 못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예수님은 교회에 천국 열쇠를 맡기셨습니다. 이 권세는 모든 사도들과 복음 전파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복음 전파를 통하여 믿는 사람들에게 천국을 열어주게 되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 천국을 결과적으로 닫아버리게 됩니다. 사탄의 나라가 아무리 강한 문을 가지고 방어를 한다고 해도 교회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가 담대하게 어둠의 나라를 공격해 나아갑니다. 교회는 공격하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반석 위에 서 있기에 흔들리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사탄의 나라를 흔들어 무너뜨립니다. 교회는 그 영역을 꾸준히 확장해 나가면서 승리합니다. 남바나바 목자님은 이번 여름 수양회를 가고자 할 때 직장에서 휴가를 얻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동료들이 그 기간에 휴가를 가겠다고 미리 정해놓았기 때문에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가 고민할 때 동역자는 기도하도록 책망을 했습니다. 그가 기도했을 때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다른 동료들이 일을 다 끝내지 못해서 휴가를 뒤로 미루었기 때문에 남바나바 목자님은 수양회에 처음부터 끝날 까지 참석해서 은혜를 풍성히 받고 분반 리더 직분도 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천국 열쇠들을 가지고 있기에 다양한 방면에서 선교를 해야 합니다. 어린아이, 청소년, 대학생, 어른들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나이지리아, 일본, 중국, 태국, 러시아, 미국 등 세계 233개국에 선교를 해야 합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우리가 가진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선교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복음을 전파하며 제자들을 양성하고 파송하기를 기도합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 예수님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알리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지상 사역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구원자가 되는 데 있어서 반드시 고난과 죽음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십니다. 당시에 많은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메시야관은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것이었습니다. 힘이 있고 권세가 있고 영광을 받으시는 메시야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난과 버림받음과 죽음을 통해서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부활을 통해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메시야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했습니다. 항변했다는 말은 꾸짖다, 책망하다는 뜻입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22).” 베드로는 자기 나름대로의 메시야 관이 있었고 예수님께 거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고난 받고 죽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예수님은 베드로의 항변을 사탄이 그를 통해 역사하시는 것으로 보시고 책망하십니다. 방금 전에만 해도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하시며 칭찬을 받던 그가 졸지에 사탄이라는 심한 책망을 받았습니다. 사탄에게 내 뒤로 썩 물러가라 하시며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방해하지 말도록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만민의 죄를 사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생각한 사람의 일은 지상 메시아 왕국의 성취, 그로 인한 영광, 또한 그의 예수님께 대한 인간적인 의리 등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마땅히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꿈을 버려야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의 일을 이루고 싶은 마음으로 결국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아무리 열정이 있고 영적인 깨달음도 있지만 문제는 사람의 방법으로 구원역사를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를 버리지 못했을 때 나중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다시 말씀하십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크리스천들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의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욕망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기의 꿈을 포기하고 자기의 소원을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는 예수님을 절대적인 우선순위에 놓고 따르기 위해 감당해야 할 모든 짐을 말합니다. 신자들은 예수님을 절대적인 목표로 삼고 따르기 위해 자신의 욕망을 기꺼이 부인하고 또 필요한 짐을 기꺼이 지고 가야 합니다. 금요 모임에 참석해서 기도하는 짐, 일대일의 짐, 섬김의 짐, 선교의 짐을 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인간적인 생각과 욕망을 죽여야 합니다. 때로는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의 육신의 목숨을 버리기까지 해야 합니다. 복음적인 프란체스코 교황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십자가 없이 나아가고 십자가 없이 교회를 세우고 십자가 없이 그리스도를 고백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속적으로는 사제요, 주교요 추기경이요 교황일수 있지만 주님의 제자들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로 신앙고백을 했으면 고난이 있다 해도 헌신하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의 주연 배우 짐 카비젤은 예수님 역을 하고 나면 헐리우드에서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이름이 세상에서 무명으로 남을지라도 천국에 새겨진 자신의 이름을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겠다고 고백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과 축복이 무엇입니까? 25-27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이 말씀은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을 앞두고 수군들 앞에서 행한 연설 중 일부와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단하되 자기의 육신의 목숨을 버리기까지 하며 따를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나 자기의 목숨을 잃지 않고자 예수님을 부인하고 따르지 않을 때 그는 영원한 생명을 잃게 됩니다. 실로 주님을 따르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므로 이 세상에서 나의 모든 것을 바쳐 따를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영광으로 다시 오실 때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갚아주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름없이 살다가 죽을지 모르지만 주님은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시고 상상하지 못한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이 땅의 무리들은 우리가 정상에서 밀려나는 순간 모든 것을 잊어버릴 것입니다. 미친 듯이 응원하다가도 한번 미끄러지면 그때부터 거들떠보지도 않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기를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팔일 후에 산에 가셔서 자신의 변화된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승천하셔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역사에 나타난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을 통해서 놀라운 열매가 맺히고 하나님 나라는 확장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보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으로부터 솟아나는 기쁨과 은혜로 인해 기꺼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며 주님을 따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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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회 다운로드 | DATE : 2014-08-10 13:4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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