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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014년 마태복음 특강(15:21-28) 주여 옳소이다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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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86회 작성일 14-08-03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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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마태복음 특강
말씀 | 마태복음 15:21-28
요절 | 마태복음 15:27

주여 옳소이다마는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15장 전반부를 보면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다고 그들을 더럽다고 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회개하고 예수님의 보혈을 믿고 말씀에 순종함으로 마음을 씻어야 합니다. 15장 후반부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더럽다고 하는 이방인을 영접하십니다. 특히 가나안 여인은 자신을 ‘개’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도 ‘주여 옳습니다’하면서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영접한 이방인들은 예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잔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나가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두로는 갈릴리 북서쪽 해안인 게네사렛으로부터 67km정도의 거리에 위치해 있고, 두로에서 30km 더 가면 시돈입니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왔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수로보니게 여인으로 나옵니다. 이 여인은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을 대적한 이방 민족입니다. 여러 이방 족속 중에서도 가나안 족속은 유대인들이 가장 증오하는 민족에 속했습니다. 가나안 족속은 이스라엘 민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완전히 멸망시키도록 명령받은 민족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와 소리 질렀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아름답게 커야 할 딸이 귀신에게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괴이한 소리를 지르고 자해를 하고 눈이 뒤집히고, 때로는 공포감을 심었습니다. 여러 번 죽고자 시도했습니다. 「엑소시스트」라는 영화를 보면 귀신에 들려 고통하는 것이 무엇인가 똑똑히 볼 수 있습니다. 사랑스럽고 순수한 아이가 어느 날 이방 신전에 갔다가 충격을 먹고 귀신에 들렸습니다. 귀신들린 딸을 보고 있는 어머니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 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지방에 오셨다는 소식에 여인은 한 걸음에 달려와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녀는 이방인이지만 예수님을 보고 “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지금도 기다리는 메시야의 호칭입니다. 그녀는 메시야는 유대인만의 메시야가 아니라 자신의 메시야도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이방인의 메시야, 온 인류의 메시야가 되심을 믿었습니다. 특히 여인이 예수님을 부를 때 세 차례 모두 ‘주님’이라고 부른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22,25,27). 이방 지역에서 자신을 메시야로 부르는 여인을 만났을 때 예수님은 매우 기쁘셨을 것입니다. 자기 땅에서 배척을 받으셨지만 이방 지역에서는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으니 얼른 이 여인을 도와주어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23절을 보십시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때에 침묵하시는 주님을 생각하면 믿음을 잃고 반항적이 되기 쉽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침묵에 때로는 배신감을 느낍니다. 이상하게 예수님의 침묵에 답답한 사람은 제자들이었습니다. 여자는 계속해서 큰 소리를 지르며 도와달라고 따라오는데 예수님은 침묵하시니 그 사이에 낀 제자들이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기꺼이 도와주실 것이 아니면 그녀를 보내라고 요청했습니다. 제자들은 난감한 가운데 여자의 딸을 빨리 고쳐서 보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런 요청을 했을 것입니다.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이 이 여인의 요구를 거절할 일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의 기대와 달리 예수님은 한 술 더 떠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24).” 침묵해도 마음이 상하는데 기껏 입을 열어서 하시는 말씀이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인종 차별처럼 느껴집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방인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의 전략을 밝히신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먼저 구원을 받고 그들에 의해서 이방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은 구약에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에도 먼저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적용되었던 그 원칙을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하십니다. 특히 예수님은 그 자신도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점을 밝히심으로써, 이러한 원칙이 그 자신 스스로 정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먼저 산 위에 있는 도시와 같은 모델이 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개인이 일하는 것보다 공동체가 일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이삭과 야곱을 거치면서 열두 지파를 세우셨습니다. 그 후에 이스라엘 민족을 만드셨습니다. 그들을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로 세워 세상 만민을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를 잘 세우면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거기에 동참하기를 원합니다. 자연히 사람들이 교회로 말씀을 배우기 위해서,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알기 위해서 몰려드는 것입니다. 교회가 매력을 발산함으로 사람들이 제 발로 교회를 찾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개인 전도도 중요하지만 이런 공동체를 잘 이루어서 복음을 전하고 세상을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실 때까지 이 원칙을 지키셨습니다. 그는 부활 이후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제자를 삼도록 방향을 주십니다(마28:19-20). 우리가 세계 선교를 열심히 해왔습니다.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했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지속하기 위해서 본국이 건강하게 성장해야 한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배우게 되었습니다. 본국의 역사가 튼튼하게 서 갈 때 선교사들도 안심을 하고 확신있게 선교지에서 일할 수 있습니다. 마치 친정집이 튼튼하면 여자가 시집을 가서도 자신 있게 시집살이는 하는 것과 같습니다. 본국 역사가 튼튼하면 선교사들을 힘 있게 지원할 수 있습니다. 작게는 가정 교회에 사랑이 충만하고 말씀이 살아 있으면 동역하는 목자들은 양들을 이 모임으로 데려오고 싶어집니다. 우리 모두 가정 교회가 배가 될 비전을 품고 전도와 교육에 힘써서 건강한 모임으로 키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침묵과 차별처럼 들리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에도 불구하고 간구하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인의 포기치 않는 간구에 예수님은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25,26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뭐라구요 나를 개라구요! 미친 개에게 물려 볼래요! 이렇게 말하면서 여인의 속이 뒤집어 질 수 있습니다. 그 시대는 오늘날처럼 애완용으로 기르는 개가  흔치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개는 야생이었습니다. 개는 더럽고 길거리를 함부로 다니는 위험한 동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흔히 이방인들을 ‘깨끗하지 못하고 거칠다’는 의미로 ‘개’라고 불렀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대하는 태도는 이 말 한마디로 충분히 설명이 가능했습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경멸적인 호칭을 사용하신 것은 충격적입니다. 그것도 귀신들려 고통당하는 딸을 고치고자 나온 여인에게 이런 호칭을 사용한 것은 더 충격적입니다. 예수님은 가나안 여인과 말씀하시면서 자녀와 개를 구분하셨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분명하게 구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좀 전에는 이스라엘을 먼저 돕고자 하시는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이 참고 참고 요청한 것에 대해 예수님의 답변은 기가 막혔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을 자녀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먼저 선택하시고 자녀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선택을 했다고 해서 인간 자체가 다른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똑같이 더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자녀 삼으시고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지금은 믿음이 없고 속이 더러워도 자녀입니다. 15장 전반부에서 외식으로 인해 속이 더러워진 것을 보셨습니다. 그들은 그 속을 씻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더럽다고 하는 이방인들은 예수님에게 나와서 씻음을 받고자 합니다. 예수님에게 구원을 요청합니다. 예수님이 자녀인 유대인들을 볼 때 정말 속이 타들어 가는 듯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유대 땅을 떠나 이방 땅 두로와 시돈에 와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이 말씀 속에는 예수님의 유대인들을 향한 안타까운 심정이 들어 있습니다.

  개라는 말을 들을 때 남자들은 이성적으로 반응하지만 여자는 감정적으로 반응하기가 쉽습니다. 왜냐하면 남자와 여자는 다양한 면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화장실에 갈 때 남자는 짧게 일을 끝내고 단지 일을 보는 장소로 여깁니다. 그런데 여자는 화장실에 가면 시간이 길어집니다. 그곳은 단지 일을 보는 곳이 아니라 전투 준비를 하는 장소입니다. 쇼핑을 가면 남자는 살게 정해져 있지만 여자는 살 게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남자는 목적했던 물건을 구입하면 끝이지만 여자는 과정을 즐기므로 언제까지나 쇼핑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여자는 자존심이 강합니다. 남자의 입장에서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일인데, 여자는 화가 나면 심술을 부리고 싶어 합니다. 여자는 누구 때문에 화가 나면 ‘확 심술을 부려볼까’라고 생각합니다. 남자에게는 없는 여자의 특성입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에서도 그런 심술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나안 여자는 보통 여자들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참으로 놀랍고 지혜로운 대답이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주여 옳소이다’ 하면서 인정했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지는 것이 마땅치 않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여인도 흉악하게 귀신들린 딸, 곧 자녀 문제로 예수님에게 나왔습니다. 여인은 자녀를 생각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자녀를 보고 아파하는 마음은 같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개와 같은 이방인이라는 사실도 받아들였습니다. 자녀 문제로 인해서 여인은 마음이 깨어질대로 깨어졌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 처하게 되니 예수님의 침묵이나 인종차별적인 발언이나 그 어떤 것도 상처가 되지 않았습니다.

  여인이 낮아진 마음을 갖게 되자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딸을 고치고자 하는 사랑은 포기할 줄 모르는 믿음과 끈기를 갖게 했고 여기서 지혜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그 주인들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들은 먹습니다.” 여자는 자신을 개라고 영접하자 개에 대한 긍정적인 면이 떠올랐습니다. 개의 가장 큰 특징은 주인에게 순종한다는 점입니다. 주인을 위해서라면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위기가 닥쳤을 때는 주인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거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후리 수양관에서 두 마리의 개를 보았습니다. 정말 개 팔자가 상 팔자였습니다. 주인이 주면 먹고 어디든지 누워서 뒹굴고 마음껏 놀았습니다. 개는 원래 빈둥거리고 뒹굴거리는 게 정상입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의 사랑을 받으면서 때로는 신발끈도 잘라 놓고 제 운동화를 갖고 놀다가 뒷굼치를 찢어놓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개를 때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려니 하고 받아주고 사랑합니다. 이와 같이 여자가 자신을 개라고 받아들이자 예수님의 사랑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개는 사람이 자기 욕을 해도 무슨 염불하는 소리로 듣고 미워하지 않습니다. 자기 욕을 해도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이 가나안 여인은 개를 잘 이해했고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구했습니다. 주인의 개를 사랑하는 그 사랑에 의지하여 은혜를 구했습니다.

  여인은 ‘주님, 옳소이다’라고 말할 때 주님의 은혜를 계속 간구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얻을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는 ‘주님, 옳습니다’라고 인정하지 못합니다. 주님이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것 같을 때 ‘옳습니다’ 인정하지 못합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 ‘옳습니다’ 인정하지 못합니다. 내 자존심이 무너지고 개 취급을 당할 때 ‘옳습니다’ 인정하지 못하고 ‘이건 아닙니다. 뭔가 틀렸습니다’라고 반발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하신 일은 ‘옳습니다’ 인정해야 합니다. 이 때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다. 자존심을 버리고 ‘부스러기’라도 구해야 합니다. 부스러기만 주셔도 구원을 얻습니다.

  여인의 지혜로운 반응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28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여자여 네 믿음이 정말 대단히 크구나! 라는 감탄사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믿음이 크다’라고 칭찬하신 것은 이 경우가 유일합니다. 예수님은 이방 여인의 큰 믿음에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그녀의 딸이 즉시 나았습니다. 예수님은 먼 거리에 있는 그녀의 딸을 온전히 치료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때로는 개 취급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직장에서 상관들에게 무시를 받습니다. 학생들은 동료들에게 말로 행동으로 상처를 받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도 하나님께 대해서 상처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속히 응답해 주시지 않을 때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여인에게서 주권 신앙을 배웁니다. 주님이 침묵하시고, 거절하시고, 차별하시고, 멸시까지 하실 때에도 주님에 대한 태도가 변함이 없습니다. 주님을 믿기 때문에 토라지지 않습니다. 반발하지 않습니다. 쓴 뿌리를 품지 않습니다. 변함없이 주님을 의지하고 사랑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기대하며 그를 바라봅니다. 주님이 나에게 무관심한 것 같아도 변함없이 그를 신뢰하는 믿음 이것이 진정한 믿음이요 주권신앙입니다. 

  욥은 하루 아침에 재산을 잃고 열 자녀를 잃고 건강도 잃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이런 상황에서 “그래도 순전함을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2:9)”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으로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이제까지 쓸 수 있게 하신 것으로 인해 감사하고 자신은 빈 손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는 가장 힘든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찬송했습니다. 욥은 사탄의 시험을 이기고 결국은 정금 같이 믿음이 연단을 받고 이전보다 갑절의 복을 받고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여인에게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겸손한 믿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지적해 주면 잘 인정하지 않습니다. 변명하기 바쁩니다. 그러나 여인은 달랐습니다. ‘옳소이다.’ 무슨 뜻입니까? 자신이 개와 같다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개와 같이 비천한 자입니다. 주님 말씀이 옳습니다. 백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여인은 조금도 변명하거나 자기 의를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100% 자신의 비천함을, 자격 없음을 인정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겸손이요 진정한 믿음입니다. 

  여인에게서 우리가 또 배우는 것은 부스러기 은혜를 구하는 믿음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이 자신을 개 취급 한다고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쓸모없는 자라고 자학하거나 낮은 자존감으로 고통하지 않았습니다. 개와 같은 자이기 때문에 개에 준하는 긍휼을 베풀어 달라는 것입니다. 밥상에 잘 차려진 음식은 아니어도 괜찮으니 부스러기라도 달라는 것입니다. 그 부스러기가 주님 편에서는 별 것 아닐지 모르지만 자기 편에서는 너무나 소중하고 감지덕지하다는 것입니다. 그 부스러기 은혜만으로도 딸이 나을 수만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대단한 신뢰를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으로 인해서 영광을 받으셨고 그 딸을 치료하심으로 그녀를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금 기도해 보다가 응답이 없으면 포기해 버립니다. 조금 아쉬운 소리 해 보다가 거절당하고 무시당하면 자존심이 상해서 틀어져 버립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끝까지 물고 늘어졌습니다. 여인은 뿔개미 정신, 진돗개 스피릿이 충만했습니다. 도전 정신이 있었습니다. 무슨 소리를 들어도 포기치 않고 물러서지 않는 열정,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투쟁을 하면서 쉽게 포기하지 말고 믿음으로 도전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열매를 맺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사탄과의 영적인 전쟁에서, 또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 병든 자녀들과 양들을 구원해 주시도록 겸손히 은혜를 구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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