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4년 성탄메시지 오늘 너희를 위해 구주가 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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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성탄말씀 제3강 메시지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
✦말씀 : 누가복음 2:1-20
✦요절 : 누가복음 2:10, 11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
우리 구주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드립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볼 때 우리나라 뿐 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충격적인 좋지 않은 소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불안과 근심 걱정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세월호 침몰 사건으로 인해 희생을 당한 당사자는 물론 대한민국이 침몰한 것 같은 우울감으로 국민들은 시달려야 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경주 리조트 참사, 윤일병 폭행사건, 판교 환풍구 추락사고, 좀처럼 풀리지 않는 경제침체 소식 등 좋지 않은 소식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갔습니다.
전세계 적으로는 어떠했습니까? 파키스탄 탈레반 반군 무장 세력에 의한 148명의 억울한 죽음, 이로 인한 정부군의 보복 살인, 종교분쟁으로 인한 시리아 내전, 말레이시아 여객기 추락사건 등 좋지 않은 소식으로 가득 찬 한해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사는 우리는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기뻐서 웃을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천사의 성탄의 메시지 소식입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를 위해 구주가 나셨다는 소식입니다.
오늘 구주 예수님이 나셨다는 것이 왜 나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는가 깊이 묵상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본문을 크게 전반부 1~5절, 후반부 6~20절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절대 권력을 잡고 있는 로마의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명령과 요셉과 마리아를 포함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적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각기 고향으로 향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은 힘없는 이스라엘의 단면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습은 안타깝고 슬픈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이는 하나님께서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 명령을 쓰셔서 미가서 5장 2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는 말씀이 성취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후반부 6~20절은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긴 여행 끝에 요셉과 다윗이 베들레헴에 도착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첫 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이 말씀은 매우 엄청난 메시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위해 창세기 3장 15절 말씀대로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메시야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을 증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또 한편으론 매우 애처로운 장면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임산부는 특별대우를 해줍니다. 이미 여관에 사람들이 다 방을 잡고 있었습니다. 남는 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진통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요셉도 이런 일을 처음 당하는 것이라 당황이 되었습니다. 이리 저리 뛰어다니면서 간곡하게 방 좀 빌려달라고 애원을 해 보았지만 눈 하나 까닥하지 않았습니다.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 시간이 지나서 마리아는 원치 않게 마굿간에서 출산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말구유에 아기 예수님을 뉘었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인심이 고약하단 말인가? 요셉과 마리아는 속으로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각박한 사람들의 고약한 인심 때문에 울고, 만왕의 왕 되신 예수님을 비천한 말구유에 뉘일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생각할 때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본래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근본이 하나님이십니다.(빌립보서2:8a) 예수님은 창조주이십니다.(요1:3) 예수님은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십니다(요 3:16) 모든 권세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가장 높고 위엄 있고 호화로운 궁전에 천군 천사의 호위를 받는 가운데 태어나셔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비천한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사람은 퇴소한 가족과 친지들의 보호와 관심속에 태아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치 동물과 같은 취급을 받으사 위생시설이 좋지 않은 마굿간에서, 아무의 관심과 환영을 받지 못한 채 운명적으로 타어나셨습니다.
찬송가 108장, 114장은 이 예수님을 이렇게 찬송합니다. “그 어린 주 예수 눌 자리 없어 그 귀하신 몸이 구유에 있네 저 하늘의 별들이 반짝이는데 그 어린 주 예수 우시지 않네”
그러면 왜 예수님은 비천한 말구유에 탄생하셔야 했을까요?
첫째로 예수님께서 스스로 낮아지심은 우리를 섬기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시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창조주로서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버리셨습니다. 자존심을 버리셨습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 아니 지자체의 장, 국회의원만 되도 기세가 당당합니다. 아무나 만나주지 않습니다. 문턱이 높습니다. 자존심이 상하는 말을 들으면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다르십니다. 스스로 낮아 지사 육신을 덧입고 우리에게 먼저 다가와 함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보다 더 낮아져서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낮아 지사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가난함으로 우리는 부요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배워 실천할 때 진정한 성탄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말구유에 오신 것은 인생들의 모든 아픔과 질고를 먼저 체험하사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부자는 가난한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고통을 당해 보지 못한 사람은 고통당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픔과 슬픔을 맛보지 못한 사람은 그런 사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인생들의 아픔과 슬픔과 운명주의와 낮은 자존감, 등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을 친히 체험하시기 위해, 해결해 주시기 위해 말구유에 오신 것입니다.
문제 있는 사람들은 ‘네가 내 마음을 알아?’ 좋은 말을 해주어도 간섭을 하면 네가 내가 보태준 것 있어? 너나 잘해. 하며 톡쏘아 부칩니다. 그만큼 인간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해 주지 못합니다. 부모가, 친한 친구가, 유명한 카운슬러가 나의 아픔과 고통을 다 이해할 수 없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의 모든 문제를 다 이해하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말구유에 오신 예수님의 안에 새 생명과 새 소망과 위로와 사랑과 평화, 기쁨과 회복이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문제를 안고 있습니까? 아무에게도 말 못하는 문제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의 모든 문제를 이해하시고 해결해 주시러 오신 우리 주님께 맡기십시오. 그러면 우리 주님은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아기 예수님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기간 동안 메시야를 갈망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종교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은 제일 먼저 메시야의 탄생 소식을 전해 주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상외로 목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주셨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로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 지라”
하나님께서는 당시 가장 비천한 계급에 속해있던 목자들에게 성탄의 첫 메시지를 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순수한 마음을 가진 목자들, 열심히 충성스럽게 양을 돌보던 목자들에게 성탄의 메시지를 전해 주신 것입니다. 목자들과 같이 순수하고 열심히 주와 복음을 위해 일하는 사람에게 성탄의 기쁨은 임하게 됩니다.
양을 돌보던 목자들 곁에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주의 영광이 목자들을 환하게 비추었습니다. 주의 영광이 비추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초자연적인 현상 앞에서 목자들은 놀라며 무서워했습니다.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목자들에게 천사는 성탄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10, 11절을 보십시오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
첫째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을 창설하시고 그 안에서 영생하며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말마 암아 에덴을 상실했고 죄로 인해 고통하다가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존재로 인간은 전락되었습니다. 즉 아담의 범죄로 인해 우리 인생은 기쁨을 상실했습니다.
사람들은 기쁨을 얻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합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스팩을 쌓고. 좋은 인간관계를 맺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래서 대학 졸업과 동시에 대기업에 취직이 되면 기쁜 것은 사실입니다. 장학금을 받으면 기쁩니다. 연말 보너스를 많이 받으면 기쁩니다. 기뻐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개콘과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억지로라도 웃게 만듭니다. 스마트폰에서 카톡이나 게임을 통해 기쁨을 찾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쁨이 얼마나 오래 갈까요? 그 기쁨의 질은 어느 정도일까요? 짧으면 하루, 길면 1달 갑니다. 그 이후는 또 다른 기쁨을 찾아야 기쁩니다. 세상에 주는 기쁨은 이와 같이 일시적입니다. 상대적입니다. 내가 기쁘면 상대는 슬픕니다. 모든 법칙이 그렇습니다. 스포츠경기, 교육, 선거, 사업 등 상대를 이겨야만 성공할 수 있고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탄생소식은 어떠합니까? 온 세상 모두에게 줄 수 있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영원한 기쁨이요 영혼의 만족을 주는 기쁨입니다. 온 세상 누구에게 기쁨이 되는 것은 오직 복음 뿐 입니다..
이 소식은 내가 그토록 미워하는 사람, 내게 상처를 준 사람, 가장 가깝고도 먼나라 일본, 인권탁압이 가장심한 나라 북한의 김정은 같은 사람에게도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빈부나 귀천이 없이 국가와 민족의 구별이 없이 예수님의 탄생 소식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탄생이 우리에게 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될 수 있습니까?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주가 되시기 때문에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1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
오늘은 지금을 말합니다. 즉 현재성을 의미합니다. 2000여년 전에 예수님이 말구유에 오셨지만 그 예수님을 지금 내가 마음에 모시면 기쁘다는 것입니다. 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영생을 주시기 위해, 낮아지신 아기 예수님을 지금 이 시간 내 맘속에 영접할 때 우리는 기쁨을 새롭게 맛보게 됩니다.
우리는 기쁘지 않은 이유를 이 세상 것에서 찾습니다. 물질이 부족해서, 시험을 잘 못 봐서, 건강이 좋지 않아서, 열매가 없어서, 자녀 문제 때문에 부모문제 때문에, 정치인들이 정치를 잘 못해서. 기쁘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쁘지 않은 근본적인 이유는 죄 문제 때문입니다. 죄는 죄로 끝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로마서 6:23 말씀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합니다. 죄 아래 있는 인간은 누구도 예외 없이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또 죽음 후에는 반드시 불심판이 있습니다.(계21:8)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일입니까?
본문에서 예수님을 구주, 곧 그리스도 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는 아기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만왕의 왕이요, 선지자요 구원자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만이 진정한 메시야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심판을 면하게 하시며 영생을 선물로 주시는 분이 바로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이 죽으심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죄로부터 구원을 받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천하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바가 없습니다.(사도행전 4:12)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해 우리는 스스로 해결 할 수 없었던 죄로부터 값없이 속량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려주시는 왕이 되십니다. 이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진정 기쁘고 행복하고 평화가 임합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의 뿌리는 죄입니다. 개인의 죄 때문에 모든 문제가 발생합니다. 죄의 노예가 되면 어떻게 됩니까? 내 스스로 자신을 제어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울부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반복적으로 짓는 정욕 죄, 각종 탐심 등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죄의 독소는 우리를 파멸로 이끌어 갑니다. 세월호 사건은 유병언이란 한 개인의 죄악때문에 생긴 결과입니다. 서울대 교수를 비롯한 성희롱 사건이 끊이지 않는 것 역시 죄문제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인과 국가의 근본문제는 죄 문제입니다.
이런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구주 예수님이 오늘 탄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일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스도 구주로 오신 소식만큼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없습니다.
제가 성탄 메시지를 맡았지만 사업차 인도를 가게 되어 중간에 메시지를 할 수 없다고 엘리야 목자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솔직히 메시지보다도 성탄 예배보다도 인도 출장을 가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의 인간적인 생각을 아시고 출장을 연기시키셨습니다. 인간적으로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메시지를 기쁨으로 준비하는 것이 부담이 되었습니다. 머리로만 성탄을 준비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메시지를 준비 하면서 예수님은 저를 섬기시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셨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온 맘으로 아기 예수님으로 인한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저희 가정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축복하시기를 원하시는가 깨닫고 감사했습니다.
사실 이번에 며느리를 보게 되었는데 집으로 초청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초라한 집을 보고 며느리가 실망을 할 것 같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상견례를 음식점에서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목자의 가정으로 사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인가? 비록 부자로 살진 못하지만 말구유에 오신 예수님을 생각할 현재 살고 있는 곳이 궁궐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 홍대 근처, 센터 근처에 사는 것만으로도 큰 축복을 받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잠시 인간적인 생각을 하였던 것을 회개합니다.
무엇보다 기도해 왔던 대로 영성이 있는 좋은 며느리 감을 주셨습니다. 또 물질이 전혀 없는 가운데 먼저 방을 계약했습니다. 그리고 합심기도 했습니다. 그러할 때 저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요한 목자가 다니는 회사에서 무이자로 회사 창사 이래 처음으로 5,000만원이라는 거액을 대출 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의 결혼기념일은 성탄절인 12월 25일입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성탄 선물로 아들 요한이가 잘 성장하여 믿음의 결혼을 하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저희 가정과 함께하시고 베스트의 길로 인도하시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삶 그 자체가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아들 요한 목자 가정이 이 땅에 겸손하게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겸손과 사랑으로 홍대 영혼을 구원하는 목자의 가정으로 크게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근본 목적은 단 한가지입니다.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사 참된 기쁨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죄 사함 받은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 나를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새롭게 심령에 새기고 영접함으로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성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말구유에 오신 아기 예수님께 진심으로 감사와 경배와 찬송을 돌려드립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
✦말씀 : 누가복음 2:1-20
✦요절 : 누가복음 2:10, 11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
우리 구주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드립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볼 때 우리나라 뿐 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충격적인 좋지 않은 소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불안과 근심 걱정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세월호 침몰 사건으로 인해 희생을 당한 당사자는 물론 대한민국이 침몰한 것 같은 우울감으로 국민들은 시달려야 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경주 리조트 참사, 윤일병 폭행사건, 판교 환풍구 추락사고, 좀처럼 풀리지 않는 경제침체 소식 등 좋지 않은 소식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갔습니다.
전세계 적으로는 어떠했습니까? 파키스탄 탈레반 반군 무장 세력에 의한 148명의 억울한 죽음, 이로 인한 정부군의 보복 살인, 종교분쟁으로 인한 시리아 내전, 말레이시아 여객기 추락사건 등 좋지 않은 소식으로 가득 찬 한해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사는 우리는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기뻐서 웃을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천사의 성탄의 메시지 소식입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를 위해 구주가 나셨다는 소식입니다.
오늘 구주 예수님이 나셨다는 것이 왜 나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는가 깊이 묵상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본문을 크게 전반부 1~5절, 후반부 6~20절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절대 권력을 잡고 있는 로마의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명령과 요셉과 마리아를 포함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적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각기 고향으로 향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은 힘없는 이스라엘의 단면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습은 안타깝고 슬픈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이는 하나님께서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 명령을 쓰셔서 미가서 5장 2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는 말씀이 성취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후반부 6~20절은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긴 여행 끝에 요셉과 다윗이 베들레헴에 도착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첫 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이 말씀은 매우 엄청난 메시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위해 창세기 3장 15절 말씀대로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메시야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을 증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또 한편으론 매우 애처로운 장면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임산부는 특별대우를 해줍니다. 이미 여관에 사람들이 다 방을 잡고 있었습니다. 남는 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진통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요셉도 이런 일을 처음 당하는 것이라 당황이 되었습니다. 이리 저리 뛰어다니면서 간곡하게 방 좀 빌려달라고 애원을 해 보았지만 눈 하나 까닥하지 않았습니다.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 시간이 지나서 마리아는 원치 않게 마굿간에서 출산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말구유에 아기 예수님을 뉘었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인심이 고약하단 말인가? 요셉과 마리아는 속으로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각박한 사람들의 고약한 인심 때문에 울고, 만왕의 왕 되신 예수님을 비천한 말구유에 뉘일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생각할 때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본래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근본이 하나님이십니다.(빌립보서2:8a) 예수님은 창조주이십니다.(요1:3) 예수님은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십니다(요 3:16) 모든 권세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가장 높고 위엄 있고 호화로운 궁전에 천군 천사의 호위를 받는 가운데 태어나셔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비천한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사람은 퇴소한 가족과 친지들의 보호와 관심속에 태아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치 동물과 같은 취급을 받으사 위생시설이 좋지 않은 마굿간에서, 아무의 관심과 환영을 받지 못한 채 운명적으로 타어나셨습니다.
찬송가 108장, 114장은 이 예수님을 이렇게 찬송합니다. “그 어린 주 예수 눌 자리 없어 그 귀하신 몸이 구유에 있네 저 하늘의 별들이 반짝이는데 그 어린 주 예수 우시지 않네”
그러면 왜 예수님은 비천한 말구유에 탄생하셔야 했을까요?
첫째로 예수님께서 스스로 낮아지심은 우리를 섬기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시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창조주로서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버리셨습니다. 자존심을 버리셨습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 아니 지자체의 장, 국회의원만 되도 기세가 당당합니다. 아무나 만나주지 않습니다. 문턱이 높습니다. 자존심이 상하는 말을 들으면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다르십니다. 스스로 낮아 지사 육신을 덧입고 우리에게 먼저 다가와 함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보다 더 낮아져서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낮아 지사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가난함으로 우리는 부요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배워 실천할 때 진정한 성탄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말구유에 오신 것은 인생들의 모든 아픔과 질고를 먼저 체험하사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부자는 가난한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고통을 당해 보지 못한 사람은 고통당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픔과 슬픔을 맛보지 못한 사람은 그런 사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인생들의 아픔과 슬픔과 운명주의와 낮은 자존감, 등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을 친히 체험하시기 위해, 해결해 주시기 위해 말구유에 오신 것입니다.
문제 있는 사람들은 ‘네가 내 마음을 알아?’ 좋은 말을 해주어도 간섭을 하면 네가 내가 보태준 것 있어? 너나 잘해. 하며 톡쏘아 부칩니다. 그만큼 인간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해 주지 못합니다. 부모가, 친한 친구가, 유명한 카운슬러가 나의 아픔과 고통을 다 이해할 수 없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의 모든 문제를 다 이해하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말구유에 오신 예수님의 안에 새 생명과 새 소망과 위로와 사랑과 평화, 기쁨과 회복이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문제를 안고 있습니까? 아무에게도 말 못하는 문제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의 모든 문제를 이해하시고 해결해 주시러 오신 우리 주님께 맡기십시오. 그러면 우리 주님은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아기 예수님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기간 동안 메시야를 갈망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종교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은 제일 먼저 메시야의 탄생 소식을 전해 주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상외로 목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주셨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로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 지라”
하나님께서는 당시 가장 비천한 계급에 속해있던 목자들에게 성탄의 첫 메시지를 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순수한 마음을 가진 목자들, 열심히 충성스럽게 양을 돌보던 목자들에게 성탄의 메시지를 전해 주신 것입니다. 목자들과 같이 순수하고 열심히 주와 복음을 위해 일하는 사람에게 성탄의 기쁨은 임하게 됩니다.
양을 돌보던 목자들 곁에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주의 영광이 목자들을 환하게 비추었습니다. 주의 영광이 비추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초자연적인 현상 앞에서 목자들은 놀라며 무서워했습니다.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목자들에게 천사는 성탄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10, 11절을 보십시오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
첫째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을 창설하시고 그 안에서 영생하며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말마 암아 에덴을 상실했고 죄로 인해 고통하다가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존재로 인간은 전락되었습니다. 즉 아담의 범죄로 인해 우리 인생은 기쁨을 상실했습니다.
사람들은 기쁨을 얻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합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스팩을 쌓고. 좋은 인간관계를 맺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래서 대학 졸업과 동시에 대기업에 취직이 되면 기쁜 것은 사실입니다. 장학금을 받으면 기쁩니다. 연말 보너스를 많이 받으면 기쁩니다. 기뻐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개콘과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억지로라도 웃게 만듭니다. 스마트폰에서 카톡이나 게임을 통해 기쁨을 찾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쁨이 얼마나 오래 갈까요? 그 기쁨의 질은 어느 정도일까요? 짧으면 하루, 길면 1달 갑니다. 그 이후는 또 다른 기쁨을 찾아야 기쁩니다. 세상에 주는 기쁨은 이와 같이 일시적입니다. 상대적입니다. 내가 기쁘면 상대는 슬픕니다. 모든 법칙이 그렇습니다. 스포츠경기, 교육, 선거, 사업 등 상대를 이겨야만 성공할 수 있고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탄생소식은 어떠합니까? 온 세상 모두에게 줄 수 있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영원한 기쁨이요 영혼의 만족을 주는 기쁨입니다. 온 세상 누구에게 기쁨이 되는 것은 오직 복음 뿐 입니다..
이 소식은 내가 그토록 미워하는 사람, 내게 상처를 준 사람, 가장 가깝고도 먼나라 일본, 인권탁압이 가장심한 나라 북한의 김정은 같은 사람에게도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빈부나 귀천이 없이 국가와 민족의 구별이 없이 예수님의 탄생 소식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탄생이 우리에게 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될 수 있습니까?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주가 되시기 때문에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1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
오늘은 지금을 말합니다. 즉 현재성을 의미합니다. 2000여년 전에 예수님이 말구유에 오셨지만 그 예수님을 지금 내가 마음에 모시면 기쁘다는 것입니다. 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영생을 주시기 위해, 낮아지신 아기 예수님을 지금 이 시간 내 맘속에 영접할 때 우리는 기쁨을 새롭게 맛보게 됩니다.
우리는 기쁘지 않은 이유를 이 세상 것에서 찾습니다. 물질이 부족해서, 시험을 잘 못 봐서, 건강이 좋지 않아서, 열매가 없어서, 자녀 문제 때문에 부모문제 때문에, 정치인들이 정치를 잘 못해서. 기쁘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쁘지 않은 근본적인 이유는 죄 문제 때문입니다. 죄는 죄로 끝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로마서 6:23 말씀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합니다. 죄 아래 있는 인간은 누구도 예외 없이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또 죽음 후에는 반드시 불심판이 있습니다.(계21:8)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일입니까?
본문에서 예수님을 구주, 곧 그리스도 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는 아기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만왕의 왕이요, 선지자요 구원자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만이 진정한 메시야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심판을 면하게 하시며 영생을 선물로 주시는 분이 바로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이 죽으심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죄로부터 구원을 받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천하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바가 없습니다.(사도행전 4:12)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해 우리는 스스로 해결 할 수 없었던 죄로부터 값없이 속량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려주시는 왕이 되십니다. 이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진정 기쁘고 행복하고 평화가 임합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의 뿌리는 죄입니다. 개인의 죄 때문에 모든 문제가 발생합니다. 죄의 노예가 되면 어떻게 됩니까? 내 스스로 자신을 제어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울부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반복적으로 짓는 정욕 죄, 각종 탐심 등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죄의 독소는 우리를 파멸로 이끌어 갑니다. 세월호 사건은 유병언이란 한 개인의 죄악때문에 생긴 결과입니다. 서울대 교수를 비롯한 성희롱 사건이 끊이지 않는 것 역시 죄문제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인과 국가의 근본문제는 죄 문제입니다.
이런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구주 예수님이 오늘 탄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일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스도 구주로 오신 소식만큼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없습니다.
제가 성탄 메시지를 맡았지만 사업차 인도를 가게 되어 중간에 메시지를 할 수 없다고 엘리야 목자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솔직히 메시지보다도 성탄 예배보다도 인도 출장을 가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의 인간적인 생각을 아시고 출장을 연기시키셨습니다. 인간적으로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메시지를 기쁨으로 준비하는 것이 부담이 되었습니다. 머리로만 성탄을 준비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메시지를 준비 하면서 예수님은 저를 섬기시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셨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온 맘으로 아기 예수님으로 인한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저희 가정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축복하시기를 원하시는가 깨닫고 감사했습니다.
사실 이번에 며느리를 보게 되었는데 집으로 초청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초라한 집을 보고 며느리가 실망을 할 것 같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상견례를 음식점에서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목자의 가정으로 사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인가? 비록 부자로 살진 못하지만 말구유에 오신 예수님을 생각할 현재 살고 있는 곳이 궁궐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 홍대 근처, 센터 근처에 사는 것만으로도 큰 축복을 받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잠시 인간적인 생각을 하였던 것을 회개합니다.
무엇보다 기도해 왔던 대로 영성이 있는 좋은 며느리 감을 주셨습니다. 또 물질이 전혀 없는 가운데 먼저 방을 계약했습니다. 그리고 합심기도 했습니다. 그러할 때 저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요한 목자가 다니는 회사에서 무이자로 회사 창사 이래 처음으로 5,000만원이라는 거액을 대출 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의 결혼기념일은 성탄절인 12월 25일입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성탄 선물로 아들 요한이가 잘 성장하여 믿음의 결혼을 하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저희 가정과 함께하시고 베스트의 길로 인도하시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삶 그 자체가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아들 요한 목자 가정이 이 땅에 겸손하게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겸손과 사랑으로 홍대 영혼을 구원하는 목자의 가정으로 크게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근본 목적은 단 한가지입니다.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사 참된 기쁨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죄 사함 받은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 나를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새롭게 심령에 새기고 영접함으로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성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말구유에 오신 아기 예수님께 진심으로 감사와 경배와 찬송을 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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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_성탄메시지.hwp (23.0K)
5회 다운로드 | DATE : 2014-12-23 06: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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