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4년 마34강(28:1-20) 그가 살아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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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마태복음 34강
말씀 | 마태복음 28:1-20
요절 | 마태복음 28:6
그가 살아나셨느니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지난 18일 오후 1시 45분쯤 부산시 사하구 괴정동의 한 주택 방안에 김모(64)씨가 쓰러져 있는 것을 이웃이 발견해 119에 신고했습니다. 현장에 도착한 119구조대는 김씨의 건강상태가 위중하다고 판단, 김씨를 구급차에 태운 뒤 심폐소생술을 해가며 10여분 만에 인근 대학병원 응급실로 옮겼습니다. 15분 동안 심폐 소생술을 했는데 심장이 멎어 병원에서 사망 판정을 받은 것입니다. 당직의사는 사망 판정을 내리고 김씨를 영안실로 옮기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검안의와 검시관을 대동한 경찰은 김씨를 냉동고에 넣기 직전 마지막으로 살펴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김씨의 울대가 움직인 것입니다. 이 60대 남성이 영안실 냉동고에 들어가기 직전에 살아난 것입니다. 이 분은 마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으신 후 장사지냈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그의 몸은 이전과는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어야만 하는 우리에게 진정한 소망을 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깊이 살펴보고 부활신앙을 덧입기를 기도합니다.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습니다. 이들은 지난 금요일 예수님을 장사지내고 무덤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한참을 멍하니 무덤을 향하여 앉아 있다가 해가 지면서 안식일이 시작되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깊은 슬픔 가운데 안식일을 보내고 안식일이 끝나려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 무덤으로 향한 것입니다. 여인들의 마음은 온통 예수님께 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무덤에 도착할 때에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었습니다. 큰 지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천사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은 것은 승리자의 모습입니다. 특히 천사가 무덤의 돌을 굴려낸 것은 예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인들로 하여금 빈 무덤을 확인하게 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이 열리기 전 이미 부활하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을 두려워하여 무덤을 돌로 막고 인봉을 하고 군인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아무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주의 사자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습니다. 죽은 자를 지키라고 임명 받은 자들은 죽은 자 같이 되었고, 죽은 자는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아이러니 한 모습입니다. 경비병들과 종교지도자들과 로마 제국이 이전에는 승리자처럼 보였는데 진정한 승리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세상 권력과 사탄이 이기는 것처럼 보이고 예수님이 패배한 것처럼 보였는데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이 진정한 승리자이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천사는 새벽 일찍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에게 놀라운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그들이 찾고 있던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불쌍한 분이십니다. 사람들에게 모욕과 조롱을 받고, 하나님에게 버림받고 비참하게 죽어 무덤에 묻힌 예수입니다. 그녀들이 예수님께 충성했고 사랑했지만, 이제는 버림받아 죽은 슬픈 왕입니다. 더 이상 그들에게 사랑과 믿음과 소망이 되어줄 수 없는 한계적인 분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찾는 그들의 마음은 죽음이 주는 슬픔과 두려움으로 어두웠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이 부활을 기대하고 무덤을 찾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습니다. 천사는 여인들이 빈 무덤을 보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음을 확인하도록 했습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장사를 직접 목격했기에, 이제 빈 무덤을 보고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증언할 확실한 목격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여인을 증인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부활이 거짓이었다면 제자들이 여인을 증인으로 내세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이야기는 예수님의 부활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살 때 죽음 앞에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살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요11:25). 이 예수님은 죽음 앞에 연약한 한계를 가진 인생들이 영원히 믿고 의지하며 따를 참되고 유일한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이 약속 역시 반드시 지키실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인생은 사형 언도를 받은 죄수들이 형장으로 끌려가는 다른 사형수들을 보면서 자신의 순번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죽음을 기다리는 동안 슬픔과 공포가 밀려옵니다. 그래서 죽지 않으려고 저항해보지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담 이래 모든 인간은 다 죽음의 권세 아래 무릎을 꿇었습니다. 위대한 왕 알렉산더도, 불로초를 구했던 진시황도, 힘이 센 사람도, 많이 배운 사람도, 부자도 다 죽었습니다. 죽음은 천하무적이었습니다. 또 죽음 앞에 모든 인간은 슬퍼하고 두려워하고 무기력하고 허무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죽음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도 부활의 소망을 줍니다. 그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삽니다(요11:25).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습니다(고전15:22). 부활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썩지 않고 영광스럽고 강하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고전25:42-44). 부활의 소망 안에서 죽음 권세가 힘을 잃고 죽음이 가져온 슬픔과 공포도 힘을 잃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슬픔과 절망과 한계를 극복하게 합니다.
사도들도 한 때는 죽음이 두려워 예수님을 등지고 도망갔고, 예수님의 제자임을 부인했습니다. 그들은 죽음이 주는 두려움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시인하는 일에 실패했고 가슴을 치며 통곡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졌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기로 결의한 그 공회 앞에 끌려가 살벌한 위협을 받을 때도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하며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행4:1-21). 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결과 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되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는 자들은 어떤 상황을 만나도 요동하지 않으며 기쁨과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죽음마저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굴의 용기로 모든 한계 상황을 극복하면서 복음 역사를 섬길 수 있습니다. 부활신앙이 있는 사람은 열매가 없어도 기가 죽지 않고 목자 생활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란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히11:35-38a).”
여인들이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전할 메시지는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신다는 것입니다. 처음 제자들을 만나서 부르셨던 곳에서 다시 그들에게 사명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장면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요21:15)” 예수님은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시 시작하심으로서 실패를 만회하고 새롭게 시작하고자 하십니다. 우리도 복음역사를 열심히 섬기지만 실패를 경험할 때 힘든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갈릴리서 보자. 새롭게 시작하자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실패를 만회해 주고 새롭게 역사를 시작할 힘과 용기를 줍니다. 힘든 사람은 좀 쉬면서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은혜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사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자들은 새롭게 사명을 영접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사도행전의 역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장면은 바뀌어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에 당황한 종교 지도자들은 음험한 술수를 도모하였습니다. 여자들이 제자들에게 가는 동안 경비병 중 몇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모든 된 일을 보고했습니다. 의도한 일은 아니었겠지만 경비병들은 부활의 증인이 된 셈이고, 대제사장들은 부활의 기적을 들은 셈이었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양심을 속이지만 않는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군병들의 보고를 통해 명백한 증거들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꾸몄습니다. 그들은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도둑질했다는 소문을 퍼뜨리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역사적 사건은 결코 몇 사람의 거짓으로 은폐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이 속임수를 쓸 것이라 예견했으나(27:63,64), 오히려 스스로 속임수를 씁니다. 하지만 경비병이 잠든 사이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이야기는 그 자체가 모순입니다. 잠든 사람이 누가 시체를 훔쳐갔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이를 통해 대제사장들이 꾸민 이야기가 얼마나 믿을 만하지 못한지 보여줍니다. 거짓이 진실을 막을 수 없습니다. 거짓은 잠시 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은 진실이 이깁니다. 워터게이트 사건 때 진실을 은폐하다 감옥에 갔던 백악관 보좌관 찰스 콜슨은 옥중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자신의 경험을 기초로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이었다면 역사 속에 밝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장면이 바뀌어 이제 다시 갈릴리에서 만난 예수님과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갈릴리에서 만난 제자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을 뵈옵고 경배하는 사람도 있었고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도마와 같은 경우가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상처 난 못 자국에 자기 손을 넣어보지 않으면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제자들의 이런 반응은 예수님의 부활이 사람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상태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명령을 하십니다.
18-2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을 보고도 의심하며 망설이는 제자들을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친밀하게 나아오셔서 지상명령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피조 세계의 모든 질서를 다스릴 전권을 예수님에게 부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상 사역을 하실 때도 권세를 가지고 계셨습니다(7:29,9:6,9,21:23). 그런데 이제 땅 위에서 뿐 아니라 하늘에서도 모든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왕으로서 부활하셨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세상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주겠다고 제안했는데(4:8-9) 예수님은 이를 거절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결과로 부활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완전한 권세를 얻으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왕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이 다스리고 계시고 세상 역사를 움직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권위를 기초로 제자들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예수님의 명령의 주동사는 ‘제자를 삼으라’이며 3개의 종속 분사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선교는 제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제자란 배우는 자, 학생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명하신 선교의 핵심은 복음 선포보다도 제자로서 살도록 계속 양육을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선교의 대상자가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지속적으로 배우고 성장하는 데 목표를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만드는 일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첫째, 선교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10장 5,6절에서 선교의 범위를 이스라엘에 제한하셨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세상 모든 족속을 그의 제자 삼고자 하십니다. 제자들이 모든 족속을 선교하기 위해 그들의 지경을 넓혀야 합니다. 공간적으로 이스라엘의 한계를 넘어야 할 뿐 아니라, 그들 내면의 유다이즘을 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모든 족속을 선교하기 위해 넘어야 할 유다이즘들이 있습니다. 나와 취향이 다른 사람들,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왕이신 예수님의 우주적 선교 명령에 순종하려면 자기 한계를 넘어 모든 족속에게 나가야 합니다.
둘째,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명령에 따라 주는 세례는 성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는 세례입니다. 세례의 본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이 죽은 것과, 삼 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사람으로 살아난 것을 믿는 것이 세례입니다.
셋째, 가르쳐야 합니다. 이제까지 가르침은 예수님 고유의 사역이었습니다. 제자들을 파송할 때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주셨지만, 가르침을 명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기에 앞서 자신의 가르침의 권위를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목적은 지식의 전달에 있지 않고, ‘지키도록 하라’, 곧 순종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삶의 변화, 순종에 이르기까지 해야 하기에, 제자의 삶은 일정 기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생을 두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순종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순종해 감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닮은 제자로 성장해 나갈 수 있으며, 또 이런 순종의 제자들을 키워나갈 수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며, 순종하는 사람들을 키우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 양성의 핵심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중대한 한 가지 선언과 함께 고별 말씀을 마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태는 자신의 복음서를 임마누엘로 시작하여 임마누엘로 마칩니다. 구약 시대 성막을 통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이제 예수님을 통해 그의 백성인 새 이스라엘, 교회 공동체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은 육체로 함께 거하지 않으나, 성령님을 보내심으로 그들과 영원히 함께 거하며 그들에게 맡긴 대사명을 감당하도록 도우십니다. 예수님은 세상 끝 날까지 제자들과 항상 함께 계십니다. 이 약속은 제자 당대만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교회 공동체를 계승한 후대 사람들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 약속대로 오늘날 예수님을 배우며 따르고 순종하는 우리 모임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주님의 임마누엘의 약속을 믿고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모든 족속을 제자 만드는 세계 선교 사명에 순종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캠퍼스와 세계로 나아가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은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심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말씀 | 마태복음 28:1-20
요절 | 마태복음 28:6
그가 살아나셨느니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지난 18일 오후 1시 45분쯤 부산시 사하구 괴정동의 한 주택 방안에 김모(64)씨가 쓰러져 있는 것을 이웃이 발견해 119에 신고했습니다. 현장에 도착한 119구조대는 김씨의 건강상태가 위중하다고 판단, 김씨를 구급차에 태운 뒤 심폐소생술을 해가며 10여분 만에 인근 대학병원 응급실로 옮겼습니다. 15분 동안 심폐 소생술을 했는데 심장이 멎어 병원에서 사망 판정을 받은 것입니다. 당직의사는 사망 판정을 내리고 김씨를 영안실로 옮기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검안의와 검시관을 대동한 경찰은 김씨를 냉동고에 넣기 직전 마지막으로 살펴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김씨의 울대가 움직인 것입니다. 이 60대 남성이 영안실 냉동고에 들어가기 직전에 살아난 것입니다. 이 분은 마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으신 후 장사지냈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그의 몸은 이전과는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어야만 하는 우리에게 진정한 소망을 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깊이 살펴보고 부활신앙을 덧입기를 기도합니다.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습니다. 이들은 지난 금요일 예수님을 장사지내고 무덤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한참을 멍하니 무덤을 향하여 앉아 있다가 해가 지면서 안식일이 시작되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깊은 슬픔 가운데 안식일을 보내고 안식일이 끝나려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 무덤으로 향한 것입니다. 여인들의 마음은 온통 예수님께 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무덤에 도착할 때에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었습니다. 큰 지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천사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은 것은 승리자의 모습입니다. 특히 천사가 무덤의 돌을 굴려낸 것은 예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인들로 하여금 빈 무덤을 확인하게 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이 열리기 전 이미 부활하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을 두려워하여 무덤을 돌로 막고 인봉을 하고 군인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아무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주의 사자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습니다. 죽은 자를 지키라고 임명 받은 자들은 죽은 자 같이 되었고, 죽은 자는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아이러니 한 모습입니다. 경비병들과 종교지도자들과 로마 제국이 이전에는 승리자처럼 보였는데 진정한 승리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세상 권력과 사탄이 이기는 것처럼 보이고 예수님이 패배한 것처럼 보였는데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이 진정한 승리자이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천사는 새벽 일찍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에게 놀라운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그들이 찾고 있던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불쌍한 분이십니다. 사람들에게 모욕과 조롱을 받고, 하나님에게 버림받고 비참하게 죽어 무덤에 묻힌 예수입니다. 그녀들이 예수님께 충성했고 사랑했지만, 이제는 버림받아 죽은 슬픈 왕입니다. 더 이상 그들에게 사랑과 믿음과 소망이 되어줄 수 없는 한계적인 분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찾는 그들의 마음은 죽음이 주는 슬픔과 두려움으로 어두웠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이 부활을 기대하고 무덤을 찾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습니다. 천사는 여인들이 빈 무덤을 보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음을 확인하도록 했습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장사를 직접 목격했기에, 이제 빈 무덤을 보고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증언할 확실한 목격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여인을 증인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부활이 거짓이었다면 제자들이 여인을 증인으로 내세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이야기는 예수님의 부활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살 때 죽음 앞에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살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요11:25). 이 예수님은 죽음 앞에 연약한 한계를 가진 인생들이 영원히 믿고 의지하며 따를 참되고 유일한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이 약속 역시 반드시 지키실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인생은 사형 언도를 받은 죄수들이 형장으로 끌려가는 다른 사형수들을 보면서 자신의 순번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죽음을 기다리는 동안 슬픔과 공포가 밀려옵니다. 그래서 죽지 않으려고 저항해보지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담 이래 모든 인간은 다 죽음의 권세 아래 무릎을 꿇었습니다. 위대한 왕 알렉산더도, 불로초를 구했던 진시황도, 힘이 센 사람도, 많이 배운 사람도, 부자도 다 죽었습니다. 죽음은 천하무적이었습니다. 또 죽음 앞에 모든 인간은 슬퍼하고 두려워하고 무기력하고 허무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죽음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도 부활의 소망을 줍니다. 그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삽니다(요11:25).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습니다(고전15:22). 부활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썩지 않고 영광스럽고 강하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고전25:42-44). 부활의 소망 안에서 죽음 권세가 힘을 잃고 죽음이 가져온 슬픔과 공포도 힘을 잃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슬픔과 절망과 한계를 극복하게 합니다.
사도들도 한 때는 죽음이 두려워 예수님을 등지고 도망갔고, 예수님의 제자임을 부인했습니다. 그들은 죽음이 주는 두려움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시인하는 일에 실패했고 가슴을 치며 통곡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졌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기로 결의한 그 공회 앞에 끌려가 살벌한 위협을 받을 때도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하며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행4:1-21). 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결과 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되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는 자들은 어떤 상황을 만나도 요동하지 않으며 기쁨과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죽음마저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굴의 용기로 모든 한계 상황을 극복하면서 복음 역사를 섬길 수 있습니다. 부활신앙이 있는 사람은 열매가 없어도 기가 죽지 않고 목자 생활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란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히11:35-38a).”
여인들이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전할 메시지는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신다는 것입니다. 처음 제자들을 만나서 부르셨던 곳에서 다시 그들에게 사명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장면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요21:15)” 예수님은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시 시작하심으로서 실패를 만회하고 새롭게 시작하고자 하십니다. 우리도 복음역사를 열심히 섬기지만 실패를 경험할 때 힘든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갈릴리서 보자. 새롭게 시작하자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실패를 만회해 주고 새롭게 역사를 시작할 힘과 용기를 줍니다. 힘든 사람은 좀 쉬면서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은혜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사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자들은 새롭게 사명을 영접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사도행전의 역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장면은 바뀌어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에 당황한 종교 지도자들은 음험한 술수를 도모하였습니다. 여자들이 제자들에게 가는 동안 경비병 중 몇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모든 된 일을 보고했습니다. 의도한 일은 아니었겠지만 경비병들은 부활의 증인이 된 셈이고, 대제사장들은 부활의 기적을 들은 셈이었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양심을 속이지만 않는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군병들의 보고를 통해 명백한 증거들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꾸몄습니다. 그들은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도둑질했다는 소문을 퍼뜨리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역사적 사건은 결코 몇 사람의 거짓으로 은폐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이 속임수를 쓸 것이라 예견했으나(27:63,64), 오히려 스스로 속임수를 씁니다. 하지만 경비병이 잠든 사이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이야기는 그 자체가 모순입니다. 잠든 사람이 누가 시체를 훔쳐갔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이를 통해 대제사장들이 꾸민 이야기가 얼마나 믿을 만하지 못한지 보여줍니다. 거짓이 진실을 막을 수 없습니다. 거짓은 잠시 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은 진실이 이깁니다. 워터게이트 사건 때 진실을 은폐하다 감옥에 갔던 백악관 보좌관 찰스 콜슨은 옥중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자신의 경험을 기초로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이었다면 역사 속에 밝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장면이 바뀌어 이제 다시 갈릴리에서 만난 예수님과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갈릴리에서 만난 제자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을 뵈옵고 경배하는 사람도 있었고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도마와 같은 경우가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상처 난 못 자국에 자기 손을 넣어보지 않으면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제자들의 이런 반응은 예수님의 부활이 사람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상태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명령을 하십니다.
18-2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을 보고도 의심하며 망설이는 제자들을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친밀하게 나아오셔서 지상명령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피조 세계의 모든 질서를 다스릴 전권을 예수님에게 부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상 사역을 하실 때도 권세를 가지고 계셨습니다(7:29,9:6,9,21:23). 그런데 이제 땅 위에서 뿐 아니라 하늘에서도 모든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왕으로서 부활하셨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세상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주겠다고 제안했는데(4:8-9) 예수님은 이를 거절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결과로 부활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완전한 권세를 얻으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왕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이 다스리고 계시고 세상 역사를 움직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권위를 기초로 제자들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예수님의 명령의 주동사는 ‘제자를 삼으라’이며 3개의 종속 분사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선교는 제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제자란 배우는 자, 학생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명하신 선교의 핵심은 복음 선포보다도 제자로서 살도록 계속 양육을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선교의 대상자가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지속적으로 배우고 성장하는 데 목표를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만드는 일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첫째, 선교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10장 5,6절에서 선교의 범위를 이스라엘에 제한하셨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세상 모든 족속을 그의 제자 삼고자 하십니다. 제자들이 모든 족속을 선교하기 위해 그들의 지경을 넓혀야 합니다. 공간적으로 이스라엘의 한계를 넘어야 할 뿐 아니라, 그들 내면의 유다이즘을 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모든 족속을 선교하기 위해 넘어야 할 유다이즘들이 있습니다. 나와 취향이 다른 사람들,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왕이신 예수님의 우주적 선교 명령에 순종하려면 자기 한계를 넘어 모든 족속에게 나가야 합니다.
둘째,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명령에 따라 주는 세례는 성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는 세례입니다. 세례의 본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이 죽은 것과, 삼 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사람으로 살아난 것을 믿는 것이 세례입니다.
셋째, 가르쳐야 합니다. 이제까지 가르침은 예수님 고유의 사역이었습니다. 제자들을 파송할 때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주셨지만, 가르침을 명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기에 앞서 자신의 가르침의 권위를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목적은 지식의 전달에 있지 않고, ‘지키도록 하라’, 곧 순종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삶의 변화, 순종에 이르기까지 해야 하기에, 제자의 삶은 일정 기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생을 두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순종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순종해 감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닮은 제자로 성장해 나갈 수 있으며, 또 이런 순종의 제자들을 키워나갈 수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며, 순종하는 사람들을 키우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 양성의 핵심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중대한 한 가지 선언과 함께 고별 말씀을 마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태는 자신의 복음서를 임마누엘로 시작하여 임마누엘로 마칩니다. 구약 시대 성막을 통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이제 예수님을 통해 그의 백성인 새 이스라엘, 교회 공동체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은 육체로 함께 거하지 않으나, 성령님을 보내심으로 그들과 영원히 함께 거하며 그들에게 맡긴 대사명을 감당하도록 도우십니다. 예수님은 세상 끝 날까지 제자들과 항상 함께 계십니다. 이 약속은 제자 당대만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교회 공동체를 계승한 후대 사람들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 약속대로 오늘날 예수님을 배우며 따르고 순종하는 우리 모임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주님의 임마누엘의 약속을 믿고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모든 족속을 제자 만드는 세계 선교 사명에 순종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캠퍼스와 세계로 나아가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은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심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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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다운로드 | DATE : 2014-11-30 13:5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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