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15년 요3강(2:1-22) 물을 포도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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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요한복음 제 3 강
말씀 | 요한복음 2:1-22
요절 | 요한복음 2:9
물을 포도주로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
오늘 말씀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곱 개 표적 중 첫 번째 표적입니다. 이 표적은 예수님이 누구시며 어떤 일을 하러 오신 분인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새 창조를 이루시며 우리의 삶에 모자란 것들을 채워주십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성전을 정화하심으로서 그는 인류 구속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시며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하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우리의 모자람을 풍성히 채워주시는 예수님(1-11).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청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거기 계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결혼식은 즐겁고 기쁩니다. 아름다운 하늘 아래,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결혼을 하는 신랑 신부는 말할 것도 없고 친구들도 기뻐합니다. 또한 이미 결혼한 사람들도 자신들이 결혼하던 때를 기억하며 즐거워합니다. 결혼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창설하신 제도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인간의 행복을 위한 환경과 말씀과 사명을 주시고 결혼 제도를 세우심으로 가정을 아담한 천국으로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시험에 빠져 죄를 지은 인간은 실낙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셔서 먼저 결혼식에 참석하셨습니다.
결혼식이 끝나고 잔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서로 인사를 하며 즐거움을 나누고 있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축하객이 예상보다 많이 왔나 봅니다. 사람들이 포도주를 많이 마셔버리면 자연히 없어집니다. 포도주가 모자란 것은 우리 삶의 모습을 잘 보여 줍니다. 주인이 아무리 잘 준비해도 시간이 지나면 모자라게 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의욕적으로 시작해도 시간이 가면 열정이 떨어집니다. 믿음도 현실의 벽에 부딪치면서 떨어집니다. 사랑도 배신을 당하면서 떨어집니다. 능력도, 지혜도 떨어집니다. 여러 면에서 모자라는 문제는 현실입니다. 과거에는 먹을 것이 모자라서 사람들이 힘들어 하였습니다. 지금은 먹을 것이 넘치지만 상대적인 박탈감, 비교의식, 경쟁의식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행복해 하지 않습니다. 과거보다 더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서민들은 물질의 부족함을 항상 느낍니다. 사랑의 관계, 친구 관계에서 부족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우리는 여러 모양의 모자람의 문제를 경험합니다.
이런 모자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손님으로 왔지만 주인의식을 가지고 잔치 자리를 살피고 있었습니다. 포도주가 모자라면 신랑 신부를 축복하러 온 사람들에게 주인이 원망 듣기 쉽습니다. 또 포도주가 떨어진다는 것은 주인에게는 수치요, 손님에게는 모욕이라 고소 조건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포도주를 속성으로 만들 수도 없고 그 작은 마을에서 포도주를 사오기도 어려웠습니다. 마리아는 포도주가 떨어진 어려운 상황을 연회장에게 들고 나가야 마땅할 것 같은데 예수님께 들고 나아가 아뢰었습니다.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이는 마리아의 기도였습니다. 마리아는 연회장이라고 해서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모자람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 예수님께 문제를 들고 나가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부족한 것을 채워주실 것을 믿고 나아가는 사람들이 새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 예수님께 나아가 사람들의 필요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채우시는 것을 체험하며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입니다. 믿음으로 구하는 사람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어떠합니까? 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예수님이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는 말씀은 거절의 표현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에게는 기다림과 신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나름대로 일하지 않고 하나님의 때를 따라서 일하십니다. 예수님은 필요한 환경이 준비되기를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일하십니다. 우리는 무언가 모자라고 부족할 때 이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사람이 되기보다 조용히 주님께 문제를 들고 나가서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할 뿐만 아니라 마리아처럼 사람들을 준비시켜야 합니다.
마리아는 하인들을 어떻게 준비시켰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말하며 하인들을 준비시켰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대로 될 것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모든 것이 그대로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가 말씀하시면 모든 것이 그대로 됩니다. 우리에게 모자란 것을 채우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신11:22,23). 이해가 되지 않아도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새 창조를 이루십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마리아는 손발을 움직여 일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일하시는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어디 가서 모자란 포도주를 빌려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에게 지혜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하고, 열정이 부족하더라도 몸을 움직이려고 하기보다 말씀이 오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종들은 빨리 무슨 일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들은 몸으로 때우는데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들을 수 있는 준비된 마음을 가지고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려야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심으로써 부족한 것들이 채워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합당한 말씀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세미한 음성을 들려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귀를 열어 주님의 말씀을 듣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사실 마리아 자신이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짐을 체험했습니다. 마리아가 처녀였을 때 천사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마리아는 천사에게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대답해주었습니다. 이때 마리아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하며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처녀의 몸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잔치가 회복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불순종을 통해서 에덴의 행복을 상실한 인간에게 순종을 통해서 에덴의 행복이 회복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되 그대로 되니라는 창세기 1장의 구조가 요한복음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자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온전히 믿어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가 포도주를 창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 나라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생명을 잉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실 것을 기대하면서 주신 말씀에 순종하면 됩니다.
이삭은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자 그랄로 가서 애굽으로 내려가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게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26:2,3).” 이삭이 그 말씀에 순종하여 그랄에 거주하였습니다. 그는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들의 필요를 풍성하게 채워주십니다.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여있었습니다. 이는 세 드럼통정도 되는 많은 분량입니다.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인들은 잔치 집에 온 손님들을 섬기느라 매우 바빴습니다. 그리고 정결예식에 물을 채우는 것은 이미 끝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자기 생각을 부인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물을 떠다가 항아리에 채웠습니다. 채우되 아귀까지 채웠습니다. 이는 그들의 순종이 온전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100% 마음을 다해서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순종하기 어렵습니다. 맹물을 떠다가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하면 냉수 마시고 속 차리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포도주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무슨 일이 미칠지 생각하지 않고 다시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무슨 말씀이든지 그대로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이 이해가 되어야 순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을 순종하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단순하게 순종합니다. 이들에게 순종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믿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해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해되는 것만 순종한다는 것은 내가 상황을 다 조정하겠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순종해서 더 높은 차원의 앎에 이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해가 되어야 순종하는 이성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신앙의 세계를 알아가는 것이 더딜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이해가 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순종하여 참된 이해에 이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요구되어지는 자세는 순종뿐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내게 기적을 베풀어 주기 위해서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자기 생각만 붙들고 자기주장만 내세운다고 해서 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만들어 주세요. 이렇게 해 주세요. 그러나 열쇠는 주님이 쥐고 계십니다. 마음을 비우고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그리고 순종하십시오.
티핑 포인트란 한 순간에 상황 변화를 일으키는 극적인 지점을 일컫는 말입니다. 티핑포인트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변화가 없지만 폭발적인 변화는 예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어 순종할 때 응답되지 않는 현실에 낙담하지 않고 끝까지 티핑포인트가 있음을 믿고 기쁨과 소망으로 믿음의 길을 달려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정결 예식용 물이 포도주로 바뀌었습니다. 물은 H₂O인데 포도주는 C₂H5OH입니다. OH가 창조된 것입니다. 포도주가 어디서 났는지 연회장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인들은 알았습니다. 그들은 순종을 하면서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는 권능자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습니다. 앞으로 문제가 생길 때 그들은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연회장의 말을 들어보면 예수님이 만들어 주신 포도주는 최고로 좋은 포도주였습니다. 사람이 내는 포도주와 예수님이 주신 포도주가 비교 됩니다. 세상의 포도주는 처음에 맛이 있지만 시간 갈수록 시들시들해집니다. 갈수록 농도가 낮아집니다. 그래서 실망합니다. 그러다 사람에게 속고 돈과 시간 빼앗겨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터넷 게임이나 영화가 주는 쾌락들, 정욕의 만족에서 오는 즐거움 같은 것들이 그러합니다. 반면 예수님이 주시는 포도주는 한결 같이 좋은 포도주입니다. 우리에게 늘 기쁨과 만족을 줍니다. 성령 충만의 기쁨,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쁨, 거룩한 삶의 기쁨, 영적 성장의 기쁨을 줍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포도주는 은혜와 진리의 포도주입니다. 세상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포도주입니다. 나에게 있던 사랑이 끝나고 말씀으로 주어진 사랑이 더 좋은 사랑입니다. 내 능력과 열심으로 일하다가 사역이 끝났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온 능력과 열심을 가지고 일할 때 더 좋은 능력과 열정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이 첫 표적을 통해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기도와 순종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예수님은 바닥이 나는 우리 인생들에게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게 채워주는 분이십니다.
둘째, 새 성전 되신 예수님(12-22). 그 후에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이 와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는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는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제자들은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였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이 표적을 행하심으로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행하는지를 보이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를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은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고 말하며 놀랍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성전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그림자였습니다.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성전을 통해서 말씀을 듣고 속죄제사를 드림으로 죄사함을 받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통해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실상이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혼인 잔치의 포도주는 십자가 보혈을 상징한다면 성전 정결 사건은 예수님의 부활을 예표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온 세상에 하늘 포도주를 부어주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이 세상에 영광스런 새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영광은 이 세상에 임하는 죄 사함과 천국 결혼 잔치, 하나님의 자녀 되는 축복과 기쁨 등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의 영광의 절정은 그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온 세상에 죄사함의 포도주가 쏟아 부어집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성전이 임하고 언약이 회복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이루어질 일들을 바라보실 때 마음이 어떠셨을까요? 죽음은 슬프고 고통스런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임한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얼마나 누리고 있습니까? 우리가 세상의 부를 많이 누리지는 못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부요는 풍성히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 기쁨, 사랑,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사람답게 사는 진리의 말씀을 풍성히 누리며 진리를 배움으로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우리의 모자람을 풍족히 채워주십니다. 그는 말씀을 통해 새 창조를 이루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이런 축복을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물질이 부족합니다. 또 지혜도 부족합니다. 사랑도 부족합니다. 양도 부족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양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지혜가 부족한데 기도할 때 말씀을 통해서 지혜를 주십니다. 사랑도 주십니다. 때마다 부족한 물질도 기도할 때 채워주십니다. 매달을 살아가는 것이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을 인하여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 모자람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영광을 돌리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요한복음 2:1-22
요절 | 요한복음 2:9
물을 포도주로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
오늘 말씀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곱 개 표적 중 첫 번째 표적입니다. 이 표적은 예수님이 누구시며 어떤 일을 하러 오신 분인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새 창조를 이루시며 우리의 삶에 모자란 것들을 채워주십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성전을 정화하심으로서 그는 인류 구속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시며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하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우리의 모자람을 풍성히 채워주시는 예수님(1-11).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청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거기 계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결혼식은 즐겁고 기쁩니다. 아름다운 하늘 아래,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결혼을 하는 신랑 신부는 말할 것도 없고 친구들도 기뻐합니다. 또한 이미 결혼한 사람들도 자신들이 결혼하던 때를 기억하며 즐거워합니다. 결혼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창설하신 제도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인간의 행복을 위한 환경과 말씀과 사명을 주시고 결혼 제도를 세우심으로 가정을 아담한 천국으로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시험에 빠져 죄를 지은 인간은 실낙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셔서 먼저 결혼식에 참석하셨습니다.
결혼식이 끝나고 잔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서로 인사를 하며 즐거움을 나누고 있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축하객이 예상보다 많이 왔나 봅니다. 사람들이 포도주를 많이 마셔버리면 자연히 없어집니다. 포도주가 모자란 것은 우리 삶의 모습을 잘 보여 줍니다. 주인이 아무리 잘 준비해도 시간이 지나면 모자라게 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의욕적으로 시작해도 시간이 가면 열정이 떨어집니다. 믿음도 현실의 벽에 부딪치면서 떨어집니다. 사랑도 배신을 당하면서 떨어집니다. 능력도, 지혜도 떨어집니다. 여러 면에서 모자라는 문제는 현실입니다. 과거에는 먹을 것이 모자라서 사람들이 힘들어 하였습니다. 지금은 먹을 것이 넘치지만 상대적인 박탈감, 비교의식, 경쟁의식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행복해 하지 않습니다. 과거보다 더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서민들은 물질의 부족함을 항상 느낍니다. 사랑의 관계, 친구 관계에서 부족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우리는 여러 모양의 모자람의 문제를 경험합니다.
이런 모자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손님으로 왔지만 주인의식을 가지고 잔치 자리를 살피고 있었습니다. 포도주가 모자라면 신랑 신부를 축복하러 온 사람들에게 주인이 원망 듣기 쉽습니다. 또 포도주가 떨어진다는 것은 주인에게는 수치요, 손님에게는 모욕이라 고소 조건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포도주를 속성으로 만들 수도 없고 그 작은 마을에서 포도주를 사오기도 어려웠습니다. 마리아는 포도주가 떨어진 어려운 상황을 연회장에게 들고 나가야 마땅할 것 같은데 예수님께 들고 나아가 아뢰었습니다.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이는 마리아의 기도였습니다. 마리아는 연회장이라고 해서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모자람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 예수님께 문제를 들고 나가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부족한 것을 채워주실 것을 믿고 나아가는 사람들이 새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 예수님께 나아가 사람들의 필요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채우시는 것을 체험하며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입니다. 믿음으로 구하는 사람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어떠합니까? 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예수님이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는 말씀은 거절의 표현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에게는 기다림과 신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나름대로 일하지 않고 하나님의 때를 따라서 일하십니다. 예수님은 필요한 환경이 준비되기를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일하십니다. 우리는 무언가 모자라고 부족할 때 이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사람이 되기보다 조용히 주님께 문제를 들고 나가서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할 뿐만 아니라 마리아처럼 사람들을 준비시켜야 합니다.
마리아는 하인들을 어떻게 준비시켰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말하며 하인들을 준비시켰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대로 될 것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모든 것이 그대로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가 말씀하시면 모든 것이 그대로 됩니다. 우리에게 모자란 것을 채우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신11:22,23). 이해가 되지 않아도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새 창조를 이루십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마리아는 손발을 움직여 일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일하시는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어디 가서 모자란 포도주를 빌려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에게 지혜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하고, 열정이 부족하더라도 몸을 움직이려고 하기보다 말씀이 오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종들은 빨리 무슨 일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들은 몸으로 때우는데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들을 수 있는 준비된 마음을 가지고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려야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심으로써 부족한 것들이 채워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합당한 말씀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세미한 음성을 들려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귀를 열어 주님의 말씀을 듣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사실 마리아 자신이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짐을 체험했습니다. 마리아가 처녀였을 때 천사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마리아는 천사에게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대답해주었습니다. 이때 마리아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하며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처녀의 몸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잔치가 회복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불순종을 통해서 에덴의 행복을 상실한 인간에게 순종을 통해서 에덴의 행복이 회복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되 그대로 되니라는 창세기 1장의 구조가 요한복음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자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온전히 믿어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가 포도주를 창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 나라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생명을 잉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실 것을 기대하면서 주신 말씀에 순종하면 됩니다.
이삭은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자 그랄로 가서 애굽으로 내려가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게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26:2,3).” 이삭이 그 말씀에 순종하여 그랄에 거주하였습니다. 그는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들의 필요를 풍성하게 채워주십니다.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여있었습니다. 이는 세 드럼통정도 되는 많은 분량입니다.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인들은 잔치 집에 온 손님들을 섬기느라 매우 바빴습니다. 그리고 정결예식에 물을 채우는 것은 이미 끝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자기 생각을 부인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물을 떠다가 항아리에 채웠습니다. 채우되 아귀까지 채웠습니다. 이는 그들의 순종이 온전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100% 마음을 다해서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순종하기 어렵습니다. 맹물을 떠다가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하면 냉수 마시고 속 차리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포도주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무슨 일이 미칠지 생각하지 않고 다시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무슨 말씀이든지 그대로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이 이해가 되어야 순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을 순종하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단순하게 순종합니다. 이들에게 순종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믿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해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해되는 것만 순종한다는 것은 내가 상황을 다 조정하겠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순종해서 더 높은 차원의 앎에 이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해가 되어야 순종하는 이성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신앙의 세계를 알아가는 것이 더딜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이해가 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순종하여 참된 이해에 이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요구되어지는 자세는 순종뿐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내게 기적을 베풀어 주기 위해서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자기 생각만 붙들고 자기주장만 내세운다고 해서 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만들어 주세요. 이렇게 해 주세요. 그러나 열쇠는 주님이 쥐고 계십니다. 마음을 비우고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그리고 순종하십시오.
티핑 포인트란 한 순간에 상황 변화를 일으키는 극적인 지점을 일컫는 말입니다. 티핑포인트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변화가 없지만 폭발적인 변화는 예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어 순종할 때 응답되지 않는 현실에 낙담하지 않고 끝까지 티핑포인트가 있음을 믿고 기쁨과 소망으로 믿음의 길을 달려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정결 예식용 물이 포도주로 바뀌었습니다. 물은 H₂O인데 포도주는 C₂H5OH입니다. OH가 창조된 것입니다. 포도주가 어디서 났는지 연회장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인들은 알았습니다. 그들은 순종을 하면서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는 권능자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습니다. 앞으로 문제가 생길 때 그들은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연회장의 말을 들어보면 예수님이 만들어 주신 포도주는 최고로 좋은 포도주였습니다. 사람이 내는 포도주와 예수님이 주신 포도주가 비교 됩니다. 세상의 포도주는 처음에 맛이 있지만 시간 갈수록 시들시들해집니다. 갈수록 농도가 낮아집니다. 그래서 실망합니다. 그러다 사람에게 속고 돈과 시간 빼앗겨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터넷 게임이나 영화가 주는 쾌락들, 정욕의 만족에서 오는 즐거움 같은 것들이 그러합니다. 반면 예수님이 주시는 포도주는 한결 같이 좋은 포도주입니다. 우리에게 늘 기쁨과 만족을 줍니다. 성령 충만의 기쁨,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쁨, 거룩한 삶의 기쁨, 영적 성장의 기쁨을 줍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포도주는 은혜와 진리의 포도주입니다. 세상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포도주입니다. 나에게 있던 사랑이 끝나고 말씀으로 주어진 사랑이 더 좋은 사랑입니다. 내 능력과 열심으로 일하다가 사역이 끝났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온 능력과 열심을 가지고 일할 때 더 좋은 능력과 열정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이 첫 표적을 통해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기도와 순종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예수님은 바닥이 나는 우리 인생들에게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게 채워주는 분이십니다.
둘째, 새 성전 되신 예수님(12-22). 그 후에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이 와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는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는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제자들은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였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이 표적을 행하심으로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행하는지를 보이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를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은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고 말하며 놀랍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성전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그림자였습니다.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성전을 통해서 말씀을 듣고 속죄제사를 드림으로 죄사함을 받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통해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실상이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혼인 잔치의 포도주는 십자가 보혈을 상징한다면 성전 정결 사건은 예수님의 부활을 예표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온 세상에 하늘 포도주를 부어주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이 세상에 영광스런 새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영광은 이 세상에 임하는 죄 사함과 천국 결혼 잔치, 하나님의 자녀 되는 축복과 기쁨 등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의 영광의 절정은 그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온 세상에 죄사함의 포도주가 쏟아 부어집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성전이 임하고 언약이 회복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이루어질 일들을 바라보실 때 마음이 어떠셨을까요? 죽음은 슬프고 고통스런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임한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얼마나 누리고 있습니까? 우리가 세상의 부를 많이 누리지는 못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부요는 풍성히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 기쁨, 사랑,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사람답게 사는 진리의 말씀을 풍성히 누리며 진리를 배움으로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우리의 모자람을 풍족히 채워주십니다. 그는 말씀을 통해 새 창조를 이루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이런 축복을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물질이 부족합니다. 또 지혜도 부족합니다. 사랑도 부족합니다. 양도 부족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양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지혜가 부족한데 기도할 때 말씀을 통해서 지혜를 주십니다. 사랑도 주십니다. 때마다 부족한 물질도 기도할 때 채워주십니다. 매달을 살아가는 것이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을 인하여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 모자람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영광을 돌리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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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다운로드 | DATE : 2015-06-07 14:4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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