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15년 요2강(1:29-51) 와서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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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요한복음 제 2 강
말씀 | 요한복음 1:29-51
요절 | 요한복음 1:39
와서 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첫 제자들을 부르시는 내용입니다.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전도를 하심으로 구원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와서 보라.” 예수님의 전도는 매우 단순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도 같은 방식으로 친구들에게 “와 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말을 잘 해야 사람을 예수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주님을 만난 체험만 있으면 누구나 전도할 수 있습니다. 즉 받은 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만난 예수님을 증거 할 때 우리에게는 기쁨이 생깁니다. 예수님을 증거 할 때 믿음이 자라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시간 우리가 만난 예수님은 누구신지 생각해 보고 단순하지만 믿음으로 전도하여 구원 역사에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첫째,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29-34). 29절을 보십시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구약에서는 사람이 어린 양을 지고 가서 제사를 지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이 지고 오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희생양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십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창조된 질서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질서 있게 창조된 세상에 죄가 들어옴으로 세상의 질서가 깨졌습니다. 이 세상을 이렇게 망가뜨린 그 죄가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 죄가 무엇일까요? 반역의 죄입니다. 아담의 죄는 선악을 알고자 하고 하나님 같이 되고자 한 것입니다. 선악을 아는 일에서 하나님을 배제하려는 죄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고자 하는 죄, 곧 자신이 하나님이 되고자 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용서의 기도를 하신 죄는 아들을 못 박는 죄, 곧 반역의 죄입니다. 죄는 하나입니다. 근본적으로 거스르는 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제물을 바치면서도 반역을 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많은 은혜를 받았지만 그를 경외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자기 생각대로 살았습니다. 반역하는 것을 멋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하라고 할 때 하지 않겠다고 하면 주가가 올라가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반항의 쾌감입니다. 제인스 딘은 불멸의 반항아, 영원한 청춘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는 “이유 없는 반항”이라는 영화로 스타가 되었습니다. 그는 24세에 캘리포니아 국도를 180Km로 달리다가 교통사고로 즉사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미국에서 세 명의 소녀가 자살을 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수많은 여자들이 더 이상 삶의 의미가 없다며 창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반역하는 마음, 거역하는 마음, 교만한 마음을 품고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죄에 대해서 징벌을 내리시고 심판도 하시지만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제물을 가져 오시고 그 죄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낳고 축복 가운데 지내다가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명령을 듣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과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길을 떠납니다. 길을 가다가 이삭이 묻습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그러자 아브라함은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신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삭과 아브라함이 드린 어린 양은 예수님의 그림자였습니다.
출애굽 할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족별로 어린 양을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12:3). 이스라엘은 어린 양을 잡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발랐습니다. 그 피를 보시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중 아무도 멸하지 않으시고 넘어가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린 양의 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어린 양은 메시아의 그림자였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사람들이 가지고 온 어린 양도 사실은 오실 예수님의 그림자였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은 유월절 어린 양을 잡는 날이었습니다. 메시아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때문에 속죄양이 되사 찔리시고 상하시고 피 흘리셨습니다. 곤욕을 당하여 괴로우실 때에도 입을 열지 아니하시고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떨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사53:7).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죄악을 담당하신(사53:6) 어린 양이십니다. 사람이 자기 죄를 해결하려고 애를 쓰지만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가져온 양의 한계를 하나님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해결하시기 위해 어린 양을 준비하셨습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있어서 홍수 심판처럼 쓸어버리시거나, 자기 백성을 뽑아서 이방 나라에 던져 버리는 방법을 쓰실 수도 있는데 하나님은 성육신하셔서 친히 짊어지고 가십니다. 스스로 우리 죄를 대신 ‘지고’ 가심으로써 우리에게 속죄와 대속의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창조주가 속죄양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광을 받으려 오심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세상 죄를 짊어지는 속죄양이 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성육신도 어려운데 죄를 뒤집어 쓰고 담당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죄인들의 죄를 대신 지고 가시는 곳에 진정한 사랑과 섬김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은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셔서 완전히 없애버리십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참 자유를 덧입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죄 문제를 해결하고자 몸부림을 칩니다. 자기 죄를 스스로 짊어지고 고행하기도 하고 잊어버리고자 애를 쓰고 합리화하기도 하지만 해결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짊어지고 가시는데 이것이 복음입니다. 시103:12절에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다고 했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8,19).”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고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고 새 사람이 된 사람들이 바로 신자들입니다. 이 구원의 감격을 그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다윗은 왕이요 시인이요 음악가요 큰 부자요 네 명의 아내를 두고 좋은 친구를 가진 세상에서 아무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런 것으로 인해 자신이 행복하다고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은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롬4:7,8).” 이 복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지고한 복입니다. 죄 사함을 경험한 사람은 하늘을 날 듯한 기쁨을 누립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과 같습니다. 우리가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온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를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란 사실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는 자기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자기보다 앞선 것은 그가 자기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보다 6개월 늦게 태어나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선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었습니다. 그의 물세례를 받기 위해서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왔는데 그는 사람들의 이런 관심을 예수님에게 돌리고 그를 구주로 영접하도록 준비시켰습니다. 요한이 또 증언합니다. 그가 예수님께 물 세례를 베풀었을 때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33,34).” 요한은 이 광경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십니다. 성령 세례는 예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는 요한의 물세례의 한계를 극복하고 죄를 태워버리십니다. 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를 거듭나게 하시고 그 속에 생수의 강이 흐르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오순절에 성령이 불같이 믿는 사람들에게 임했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는 권능을 받고 내가 있는 곳에서부터 복음을 전 세계에 전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께 받은 바 은혜를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제자들에게 강림하신 이후로 복음을 전도하여 오늘날과 같이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둘째, 와서 보라(35-51).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했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당시는 성전에서 어린 양을 잡아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니 무슨 말입니까? 성전의 제사를 대체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 영원히 단번에 속죄 제사를 드리십니다. 그 이후로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 속에 성령의 역사로 피흘림을 통한 속죄 사역이 각 사람에게 이루어집니다. 두 제자는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으셨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에게서 무엇을 얻기를 바라느냐는 것입니다. 너희가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바라고 따르십니까? 제자들은 선문답을 하듯이 대답합니다.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이는 예수님의 주소를 묻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당신의 제자가 되겠다는 요청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와서 보라고 초청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의 인격과 사상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와서 보라” 하시며 구원과 영생의 길을 가르쳐 주시는 예수님의 초청은 얼마나 값진 것입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새 언약의 참여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멀리서 추측하거나 상상하지 말고 직접 와서 체험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도 주님께 나아가서 그를 만나야 합니다. 그것은 일대일로 말씀도 공부하고 예배도 드리고 말씀을 믿고 회개의 소감을 쓰면서 그를 배우는 것입니다. 부분적인 면만 보지 말고 총체적인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남녀노소 빈부귀천를 가리지 않고 다 초청하십니다.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거하면서 대화도 나누어 보고 관찰을 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40,41절을 보십시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안드레는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시몬에게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증거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래 동안 기다리고 기다렸던 분은 바로 메시야, 즉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구원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행운입니다. 좋은 부모님, 좋은 선생님, 좋은 친구, 좋은 선배를 만나는 것은 행운입니다. 국가적으로 좋은 지도자를 만나는 것도 시대의 행운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큰 행운은 메시아를 만나는 것입니다. 메시아를 만나는 사람은 영생을 얻습니다.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습니다. 병자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의사를 만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죄인들은 무엇보다 죄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실 메시아를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죄 사함을 받고 새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죄인이 감옥에서 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을 들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그에게 최대의 행복은 사면을 받고 감옥에서 나가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심판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이야 말로 가장 큰 축복입니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나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영접하면 됩니다. 영접한다는 것은 그를 마음 첫 자리에 모시는 것이요 그를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따르겠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나서 자기 형제 시몬을 찾아 데리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42).” 게바는 반석이라는 뜻인데 예수님은 그를 수제자로 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초대 교회를 이끈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시골의 한 어부를 그 시대를 이끌어 갈 영적인 지도자로 소망을 두시고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키우십니다. 원석과 같은 그들을 다듬어 보배로운 기초 돌, 성전의 돌로 삼으십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베드로의 인생은 놀라운 전환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현재 모습만 보지 않으십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서 놀랍게 변화될 비전을 보시고 친히 인도하십니다. 육신적인 나에게 거룩한 성민이 될 비전을 두고 키우십니다. 사랑하는 자기와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고 아기자기하게 살 소망으로 충만한 젊은이들을 불러 세계를 품고 섬기는 사명인으로 키우십니다. 죄인 중의 괴수와 같은 나에게 왕 같은 제사장이 될 비전을 두고 키우십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내 인생에 두신 하나님의 비전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어디까지 왔든지 새롭게 주님이 주시는 비전을 보고 달려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두 제자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직접 전도하십니다. 43,44절을 보십시오.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예수님은 빌립을 만나 나를 따르라 하시자 그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습니다. 불가항력적인 힘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형제들, 그들의 친구들로 구성되었습니다. 빌립은 예수님과 함께 거하면서 받은 바 은혜가 컸던지 바로 자기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평생 공부해 왔고 메시야를 오랫동안 기다려왔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에 예언된 분이 바로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말한 것입니다. 빌립은 매우 명석한 사람인데 예수님이 성경에서 약속하신 분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습니다. 그 깨달음이 놀랍고 감격적이었기 때문에 친구 나다나엘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증거한 것입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나다나엘은 매우 경건하고 순수한 정통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나사렛의 역사를 알고 있었습니다. 나사렛 지방은 국경 지대로서 이민족의 침입을 많이 받았고 이방인들과 피가 많이 섞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나사렛 사람들을 무시했습니다. 빌립은 명석한 사람이지만 친구 나다나엘과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그도 할 말이 많이 있었지만 단순하게 초청했습니다. “와서 보라!” 얼마나 확신이 넘치는 초청입니까? 와서 보라. 네가 와서 체험해 보라는 말입니다. 와서 보면 너도 알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 하신 후에 공회는 제자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고 결의하였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을 불러 경고하며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19,20)”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반신반의하며 전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지식이라고 생각하며 주저하지도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보고 들은 사실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변화되었습니다. 어떤 핍박과 순교라 할지라도 그들의 증거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생명력입니다. 빌립은 친구가 거절했다고 물러서지 않고 다시 한 번 더 초청했습니다. 그의 초청으로 나다나엘의 인생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래서 친구가 좋은 것입니다. 우리도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와서 보라고 증거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이미 아셨습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47).” 이 말을 듣고 나다나엘이 여쭈었습니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48).”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하나님을 찾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찾는 것을 주님은 보셨고 그의 고민을 아셨습니다. 그의 속 마음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를 찾기 전에 우리를 보시고 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찾고 찾는 사람은 반드시 만나게 됩니다. 진리를 사모하는 사람들은 진리 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놀라는 것을 보시고 더 놀라운 일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야곱이 꿈에 본 사다리를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야곱이 본 사다리로서 하나님과 인간 세상을 연결하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의 고백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여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늘과 땅, 영원과 시간,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게 됩니다. 엡1:10절은 말씀합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저는 처음 복음을 증거했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이 매우 신기했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말로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전도하는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십니다. 전도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주셔서 권능을 체험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대사로 쓰십니다. 우리가 체험한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생명이 생명을 낳듯이 예수님의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이 생명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을 통해서 이 세상의 죄인들이 구원을 받고 새 피조물로 태어나서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을 보는 것이야 말로 기쁘고 보람된 일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와서 보라는 초청의 역사를 이루도록 은혜를 부어 주시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만나는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말씀 | 요한복음 1:29-51
요절 | 요한복음 1:39
와서 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첫 제자들을 부르시는 내용입니다.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전도를 하심으로 구원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와서 보라.” 예수님의 전도는 매우 단순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도 같은 방식으로 친구들에게 “와 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말을 잘 해야 사람을 예수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주님을 만난 체험만 있으면 누구나 전도할 수 있습니다. 즉 받은 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만난 예수님을 증거 할 때 우리에게는 기쁨이 생깁니다. 예수님을 증거 할 때 믿음이 자라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시간 우리가 만난 예수님은 누구신지 생각해 보고 단순하지만 믿음으로 전도하여 구원 역사에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첫째,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29-34). 29절을 보십시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구약에서는 사람이 어린 양을 지고 가서 제사를 지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이 지고 오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희생양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십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창조된 질서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질서 있게 창조된 세상에 죄가 들어옴으로 세상의 질서가 깨졌습니다. 이 세상을 이렇게 망가뜨린 그 죄가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 죄가 무엇일까요? 반역의 죄입니다. 아담의 죄는 선악을 알고자 하고 하나님 같이 되고자 한 것입니다. 선악을 아는 일에서 하나님을 배제하려는 죄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고자 하는 죄, 곧 자신이 하나님이 되고자 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용서의 기도를 하신 죄는 아들을 못 박는 죄, 곧 반역의 죄입니다. 죄는 하나입니다. 근본적으로 거스르는 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제물을 바치면서도 반역을 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많은 은혜를 받았지만 그를 경외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자기 생각대로 살았습니다. 반역하는 것을 멋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하라고 할 때 하지 않겠다고 하면 주가가 올라가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반항의 쾌감입니다. 제인스 딘은 불멸의 반항아, 영원한 청춘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는 “이유 없는 반항”이라는 영화로 스타가 되었습니다. 그는 24세에 캘리포니아 국도를 180Km로 달리다가 교통사고로 즉사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미국에서 세 명의 소녀가 자살을 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수많은 여자들이 더 이상 삶의 의미가 없다며 창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반역하는 마음, 거역하는 마음, 교만한 마음을 품고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죄에 대해서 징벌을 내리시고 심판도 하시지만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제물을 가져 오시고 그 죄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낳고 축복 가운데 지내다가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명령을 듣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과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길을 떠납니다. 길을 가다가 이삭이 묻습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그러자 아브라함은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신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삭과 아브라함이 드린 어린 양은 예수님의 그림자였습니다.
출애굽 할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족별로 어린 양을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12:3). 이스라엘은 어린 양을 잡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발랐습니다. 그 피를 보시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중 아무도 멸하지 않으시고 넘어가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린 양의 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어린 양은 메시아의 그림자였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사람들이 가지고 온 어린 양도 사실은 오실 예수님의 그림자였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은 유월절 어린 양을 잡는 날이었습니다. 메시아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때문에 속죄양이 되사 찔리시고 상하시고 피 흘리셨습니다. 곤욕을 당하여 괴로우실 때에도 입을 열지 아니하시고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떨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사53:7).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죄악을 담당하신(사53:6) 어린 양이십니다. 사람이 자기 죄를 해결하려고 애를 쓰지만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가져온 양의 한계를 하나님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해결하시기 위해 어린 양을 준비하셨습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있어서 홍수 심판처럼 쓸어버리시거나, 자기 백성을 뽑아서 이방 나라에 던져 버리는 방법을 쓰실 수도 있는데 하나님은 성육신하셔서 친히 짊어지고 가십니다. 스스로 우리 죄를 대신 ‘지고’ 가심으로써 우리에게 속죄와 대속의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창조주가 속죄양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광을 받으려 오심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세상 죄를 짊어지는 속죄양이 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성육신도 어려운데 죄를 뒤집어 쓰고 담당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죄인들의 죄를 대신 지고 가시는 곳에 진정한 사랑과 섬김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은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셔서 완전히 없애버리십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참 자유를 덧입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죄 문제를 해결하고자 몸부림을 칩니다. 자기 죄를 스스로 짊어지고 고행하기도 하고 잊어버리고자 애를 쓰고 합리화하기도 하지만 해결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짊어지고 가시는데 이것이 복음입니다. 시103:12절에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다고 했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8,19).”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고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고 새 사람이 된 사람들이 바로 신자들입니다. 이 구원의 감격을 그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다윗은 왕이요 시인이요 음악가요 큰 부자요 네 명의 아내를 두고 좋은 친구를 가진 세상에서 아무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런 것으로 인해 자신이 행복하다고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은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롬4:7,8).” 이 복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지고한 복입니다. 죄 사함을 경험한 사람은 하늘을 날 듯한 기쁨을 누립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과 같습니다. 우리가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온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를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란 사실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는 자기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자기보다 앞선 것은 그가 자기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보다 6개월 늦게 태어나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선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었습니다. 그의 물세례를 받기 위해서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왔는데 그는 사람들의 이런 관심을 예수님에게 돌리고 그를 구주로 영접하도록 준비시켰습니다. 요한이 또 증언합니다. 그가 예수님께 물 세례를 베풀었을 때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33,34).” 요한은 이 광경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십니다. 성령 세례는 예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는 요한의 물세례의 한계를 극복하고 죄를 태워버리십니다. 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를 거듭나게 하시고 그 속에 생수의 강이 흐르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오순절에 성령이 불같이 믿는 사람들에게 임했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는 권능을 받고 내가 있는 곳에서부터 복음을 전 세계에 전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께 받은 바 은혜를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제자들에게 강림하신 이후로 복음을 전도하여 오늘날과 같이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둘째, 와서 보라(35-51).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했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당시는 성전에서 어린 양을 잡아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니 무슨 말입니까? 성전의 제사를 대체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 영원히 단번에 속죄 제사를 드리십니다. 그 이후로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 속에 성령의 역사로 피흘림을 통한 속죄 사역이 각 사람에게 이루어집니다. 두 제자는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으셨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에게서 무엇을 얻기를 바라느냐는 것입니다. 너희가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바라고 따르십니까? 제자들은 선문답을 하듯이 대답합니다.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이는 예수님의 주소를 묻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당신의 제자가 되겠다는 요청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와서 보라고 초청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의 인격과 사상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와서 보라” 하시며 구원과 영생의 길을 가르쳐 주시는 예수님의 초청은 얼마나 값진 것입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새 언약의 참여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멀리서 추측하거나 상상하지 말고 직접 와서 체험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도 주님께 나아가서 그를 만나야 합니다. 그것은 일대일로 말씀도 공부하고 예배도 드리고 말씀을 믿고 회개의 소감을 쓰면서 그를 배우는 것입니다. 부분적인 면만 보지 말고 총체적인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남녀노소 빈부귀천를 가리지 않고 다 초청하십니다.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거하면서 대화도 나누어 보고 관찰을 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40,41절을 보십시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안드레는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시몬에게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증거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래 동안 기다리고 기다렸던 분은 바로 메시야, 즉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구원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행운입니다. 좋은 부모님, 좋은 선생님, 좋은 친구, 좋은 선배를 만나는 것은 행운입니다. 국가적으로 좋은 지도자를 만나는 것도 시대의 행운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큰 행운은 메시아를 만나는 것입니다. 메시아를 만나는 사람은 영생을 얻습니다.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습니다. 병자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의사를 만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죄인들은 무엇보다 죄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실 메시아를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죄 사함을 받고 새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죄인이 감옥에서 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을 들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그에게 최대의 행복은 사면을 받고 감옥에서 나가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심판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이야 말로 가장 큰 축복입니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나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영접하면 됩니다. 영접한다는 것은 그를 마음 첫 자리에 모시는 것이요 그를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따르겠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나서 자기 형제 시몬을 찾아 데리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42).” 게바는 반석이라는 뜻인데 예수님은 그를 수제자로 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초대 교회를 이끈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시골의 한 어부를 그 시대를 이끌어 갈 영적인 지도자로 소망을 두시고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키우십니다. 원석과 같은 그들을 다듬어 보배로운 기초 돌, 성전의 돌로 삼으십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베드로의 인생은 놀라운 전환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현재 모습만 보지 않으십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서 놀랍게 변화될 비전을 보시고 친히 인도하십니다. 육신적인 나에게 거룩한 성민이 될 비전을 두고 키우십니다. 사랑하는 자기와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고 아기자기하게 살 소망으로 충만한 젊은이들을 불러 세계를 품고 섬기는 사명인으로 키우십니다. 죄인 중의 괴수와 같은 나에게 왕 같은 제사장이 될 비전을 두고 키우십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내 인생에 두신 하나님의 비전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어디까지 왔든지 새롭게 주님이 주시는 비전을 보고 달려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두 제자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직접 전도하십니다. 43,44절을 보십시오.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예수님은 빌립을 만나 나를 따르라 하시자 그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습니다. 불가항력적인 힘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형제들, 그들의 친구들로 구성되었습니다. 빌립은 예수님과 함께 거하면서 받은 바 은혜가 컸던지 바로 자기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평생 공부해 왔고 메시야를 오랫동안 기다려왔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에 예언된 분이 바로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말한 것입니다. 빌립은 매우 명석한 사람인데 예수님이 성경에서 약속하신 분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습니다. 그 깨달음이 놀랍고 감격적이었기 때문에 친구 나다나엘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증거한 것입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나다나엘은 매우 경건하고 순수한 정통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나사렛의 역사를 알고 있었습니다. 나사렛 지방은 국경 지대로서 이민족의 침입을 많이 받았고 이방인들과 피가 많이 섞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나사렛 사람들을 무시했습니다. 빌립은 명석한 사람이지만 친구 나다나엘과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그도 할 말이 많이 있었지만 단순하게 초청했습니다. “와서 보라!” 얼마나 확신이 넘치는 초청입니까? 와서 보라. 네가 와서 체험해 보라는 말입니다. 와서 보면 너도 알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 하신 후에 공회는 제자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고 결의하였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을 불러 경고하며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19,20)”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반신반의하며 전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지식이라고 생각하며 주저하지도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보고 들은 사실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변화되었습니다. 어떤 핍박과 순교라 할지라도 그들의 증거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생명력입니다. 빌립은 친구가 거절했다고 물러서지 않고 다시 한 번 더 초청했습니다. 그의 초청으로 나다나엘의 인생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래서 친구가 좋은 것입니다. 우리도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와서 보라고 증거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이미 아셨습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47).” 이 말을 듣고 나다나엘이 여쭈었습니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48).”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하나님을 찾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찾는 것을 주님은 보셨고 그의 고민을 아셨습니다. 그의 속 마음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를 찾기 전에 우리를 보시고 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찾고 찾는 사람은 반드시 만나게 됩니다. 진리를 사모하는 사람들은 진리 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놀라는 것을 보시고 더 놀라운 일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야곱이 꿈에 본 사다리를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야곱이 본 사다리로서 하나님과 인간 세상을 연결하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의 고백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여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늘과 땅, 영원과 시간,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게 됩니다. 엡1:10절은 말씀합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저는 처음 복음을 증거했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이 매우 신기했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말로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전도하는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십니다. 전도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주셔서 권능을 체험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대사로 쓰십니다. 우리가 체험한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생명이 생명을 낳듯이 예수님의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이 생명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을 통해서 이 세상의 죄인들이 구원을 받고 새 피조물로 태어나서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을 보는 것이야 말로 기쁘고 보람된 일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와서 보라는 초청의 역사를 이루도록 은혜를 부어 주시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만나는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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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다운로드 | DATE : 2015-05-24 15:0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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