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15년 요1강(1:1-18) 말씀이 육신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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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요한복음 제 1 강
말씀 | 요한복음 1:1-18
요절 |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육신은 신비 중의 신비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셨습니다. 하늘이 땅으로, 영원한 시간이 찰나적 시간 속으로, 무한이 유한으로, 거룩이 세속으로, 초역사가 역사로, 초자연이 자연 속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인간역사는 올라가고 커지는 상승을 영광이라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의 성육신은 낮아지고 작아지는 종의 영광, 자기희생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비우심으로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 복음서를 공부하는 목적은 우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우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입니다.
1a절을 보십시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1절은 창세기 1장 1절을 연상시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절에 나오는 태초는 영원의 한 시점이라면, 요한복음의 태초는 영원을 가리킵니다. 말씀은 헬라 원어로 ‘로고스’(Logos)인데 당시 헬라 사람들은 만유의 원인자를 로고스로 생각했습니다. 어떤 ‘지배적 이성’ 혹은 ‘만유의 정신’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은 막연하고 추상적이고 비인격적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신을 형상으로 만나고자 하는데 우리는 말씀 안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18절에서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나타냈다는 뜻은 말을 통해서 하나님을 나타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말씀은 누구이십니까? 그 말씀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함께 계셨다는 말은 하나님과 역동적인 사랑의 관계를 맺었다는 뜻입니다. 성삼위 하나님은 역동적인 사랑의 관계 속에서 충족한 사랑을 누리고 계셨습니다. 요10:30절에서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즉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씀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3절을 보십시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대개 창조신화들은 무엇을 만들 때 재료를 가지고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말을 통해서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말의 힘, 하나님의 말씀의 힘에 대해서 우리는 새롭게 배우게 됩니다. 말씀에는 왜 힘이 있습니까?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말은 말하는 사람의 인격이 중요합니다. 그 사람을 신뢰할 수 있을 때 말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신분에 따라서 말의 무게가 달라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말씀은 힘이 있고 사람을 살리고 치유하는 권능이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었습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완전한 생명입니다. 생명은 살아 있는 상태로서 죽음이 없는 것입니다. 생명은 죽음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살아납니다. 우리가 그를 믿기 전에는 죄로 인해 죽어 있었습니다(엡2:1). 그런데 그 생명이 성육신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를 영접하는 자는 생명을 소유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살아납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자들이 많습니다. 즉 왜 사는지 존재 이유를 알지 못하고 죽지 못해서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삶이 무의미하고 허무합니다. 사는 것이 지겹고 피곤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 날 때 생명의 충만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삶의 의미를 하나님 안에서 찾고 기쁘고 역동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지난 주에 예비군 훈련장에서 총기 난사를 한 사람의 유서에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허무하고 사는 것이 힘들어서 죽고 싶다고 했습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자였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도 죽음에 이르게 하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또 많은 청년들이 열등감, 공부에 대한 스테레스, 비교의식, 경쟁심, 자살충동, 가정 파괴, 왕따 문제 등으로 마음의 병을 앓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 진정 필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삶을 누릴 수 있는 시간 즉 여유입니다. 올바른 가치관입니다. 우리는 죽어 있는 청년들을 살리는 생명의 말씀을 힘써 전파할 의무가 있습니다. 병들고 죽음의 세력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 치유하고 살리는 말씀 역사,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했습니다(5). 어둠은 죽음 안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느끼기에 하나님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매우 가까워 우리 입에 있고 우리 마음에 있지만 그들에게는 말씀도 너무 멀게 느껴집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빛이 어둠 속에 왔는데 사람들이 인식을 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도 그 말씀도 멀게만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증인이 필요합니다. 시119:130에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열어 주시고 말씀을 공부하거나 들을 때에 빛을 비추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깨달음을 얻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습니다. 이는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께서 성육신을 통하여 죄악된 세상 ‘안으로’ 임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은 5절의 ‘비추다’를 현재형으로 사용함으로, 말씀 되신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이 쉼 없이 비추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실로 생명의 빛은 지금도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비추이며 생명을 부여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신자들로 하여금 빛의 사자로서 어둠의 세력과 싸우는 능력을 끊임없이 공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무지와 교만, 어둠을 사랑하는 마음, 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해 빛 가운데 나오기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죄가 드러나면 죽을까봐, 심판을 받을까봐 두려워합니다. 어둠의 포로가 되어 끊임없이 어둠 속으로 도피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빛의 증거자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빛의 증거자로 세례 요한을 보냈습니다. 그는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그를 믿게 하려 하였습니다.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입니다. 사람들은 요한을 빛으로 생각했지만 그는 참 빛이 아닙니다. 9절을 보십시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참 빛이란 거짓에 대해서 진실한 빛이란 뜻입니다. 거짓 빛은 실체가 없는 것이라면 참 빛은 실체가 있는 빛이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사람들을 비추는 많은 빛이 있습니다. 종교의 빛, 철학의 빛, 이성의 빛, 윤리 도덕의 빛, 과학 문명과 같은 물리적인 빛도 있습니다. 동양에서는 공자, 부처, 서양에서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칸트 같은 현자들이 윤리의 빛, 인간 이성의 빛을 비추었습니다. 이들은 마치 어둠을 조금 밝혀주는 촛불과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완전한 빛이었습니다. 그들이 빛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죽음을 정복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가진 그 분만이 진짜 유일한 빛이십니다. 예수님이 완전한 빛이시오 원형적인 빛이십니다. 예수님 한 분으로 인해 모든 진리가 정확하게 계시되었습니다. 참 빛이신 예수님은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인 죄와 죽음을 해결하셨습니다. 그는 각 사람에게 비추어서 어둠을 몰아내십니다. 이방인이나 헬라인이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관계없이 개인적으로 참 빛을 영접함으로 끊임없이 생명을 얻는 역사, 자유를 누리는 역사를 이루십니다.
그가 세상에 왔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우준한 자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헛된 것들을 섬기며 살다가 멸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은 그렇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은 달라야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려왔습니다. 그러나 메시야가 오셨지만 그들이 정치적인 메시야, 세상적인 메시야, 영광의 메시야를 기다렸기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무관심하였고 도리어 박해하고 나중에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권세가 무엇입니까? 요구할 수 있는 권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엄청난 신분의 변화입니다.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이 권세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고(롬8:17),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을 상속합니다(벧전1:3,4). 이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원수가 되었는데(골1:21), 이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축복을 감사하고 적극적으로 누려야 합니다. 또 아들 됨의 권세를 적극적으로 행사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죄악된 세상에서 죄를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며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 나라 확장 사역에 쓰임 받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되었지만 그 믿음이 우리의 의는 아닙니다. 영접하고 믿는 것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물을 주실 때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가장 귀한 선물을 값없이 주는데 받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믿는 것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실 때 믿고 받아들이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혈육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부모님이 믿는다고 나도 자동적으로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나의 욕망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뜻 즉 인간의 이성적 노력이나 수양이나 율법 준수를 통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완전히 부패하여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수준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데 우리는 전적으로 무능하고 무관합니다. 왜냐하면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에게서 기대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낳으셔야 합니다. 거듭난 사람들은 하나님이 낳으신 자들입니다. 구원 받은 신자는 자기에게서 의로움이 없다는 것을 깊이 알고 늘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의 모든 주권을 겸손히 받들어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는 값싸게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사도 요한은 1절에서 이야기했던 ‘말씀’을 다시 언급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말씀은 태초, 곧 영원 이전부터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심지어 그 말씀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습니다. 저자 요한은 ‘말씀’이 사람으로 ‘변화’되었다고 하지 않고 ‘육신’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빌2:6-8).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성을 고집하거나 주장하지 않으시고 다 비우시고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 세상에 인간의 고뇌에 참여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 인생들과 동고동락하시고 친밀한 삶을 사시며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마침내는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으로서는 엄청난 희생을 치루신 것입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죄인의 괴수로 죽으신 십자가는 성육신의 절정입니다.
여기에서 거하셨다는 것은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고 거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장막 가운데 거하신 것을 연상시킵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신 하나님의 장막이 이제는 이 땅에 육신의 장막을 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성막을 대신하여 오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습니다. 감히 죄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모세가 그렇게 보고자 했던 영광입니다. 구약에는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서 주의 영광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성막이 되어 오셔서 우리에게 완전히 지성소를 개방하셨습니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휘장이 찢어지고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 열려서 누구나 언제든지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영광은 어떤 영광입니까?
첫째, 예수님의 낮아지심으로 인한 영광입니다. 예수님은 타락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높고 높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낮아져 내려 오셨습니다. 더럽고 냄새나는 구유에 태어나셨고 강보에 싸이셨습니다. 니고데모의 무지와 완악함을 감당해 주시고, 사마리아 여인을 감당해 주셨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발각되어 돌에 맞아 죽게 된 여인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는 제자들의 냄새나는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낮아지심을 통해 그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가 자기를 낮추어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자기를 낮추어 학생들과 함께 할 때 거기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거기에서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둘째,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은혜가 충만합니다. 은혜란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만물을 다스리며 하나님을 섬기는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런데 범죄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의 장벽이 생겨나고 온 땅에 사망의 저주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어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모든 저주와 진노를 쏟아 부으셨습니다. 그는 우리 죄인들을 대신하여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의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이십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삶과 죽으심을 통해 하나님의 우리 인생들에 대한 사랑을 온전히 드러내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진리가 충만하십니다. 진리란 시대와 상황에 매이지 않는 불변의 것입니다. 모든 인생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절대적인 표준입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온갖 거짓과 속임이 난무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는 이유는 사탄이 주는 거짓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사탄이 심는 거짓말이 세상을 혼돈과 어두움 가운데 빠지게 하였습니다. 사탄은 태초부터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을 이기시고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진리를 삶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충만하다는 것은 차고 흘러넘친다는 것입니다. 분수와 같이 끝없이 용솟음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퍼주어도 줄어들지 않습니다. 아무리 배워도 다 배울 수 없는 진리입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서 말한 사람이 없습니다. 즉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품 속에서 하나님의 심장의 박동 소리를 듣는 분이, 즉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아시던 분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롭게 나타나셨습니다. 이전에는 안식일에 일하지 않는 하나님이신데 안식일에도 일하는 하나님, 이전에는 벌하시는 하나님,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었는데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집을 나가 허랑방탕하던 탕자를 있는 그대로 맞아주시고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사람들이 그때까지 알고 있던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 본래 하나님의 모습을 예수님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를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성육신의 은혜를 다시 배우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불신 가정에서 태어나 하나님에 대해서 막연했던 저에게 예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세상이 자연히 존재하였던 것으로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창조하셨음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돈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더 귀한 사람, 사람보다 귀한 하나님이 계심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죄를 막연히 나쁜 것으로 알았는데 내가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알게 해 주시고 죄사함을 주셨습니다. 인생이 허무하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자 내 인생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사명인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무관심했는데 이제는 사랑하고자 힘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나의 인생은 전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삶의 기쁨과 행복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게 하십니다. 제가 예수님을 통해서 받은 은혜가 너무나 커서 감사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은혜의 더 깊고 풍성한 세계를 체험하게 하십니다. 진리의 더 깊은 세계를 알게 하십니다. 부모님을 만나 이 세상에 오게 된 것,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복된 인생을 사는 것도 큰 축복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만난 것이 저의 인생에서 가장 큰 축복입니다. 제가 성육신의 진리를 배우며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힘써 나누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요한복음 1:1-18
요절 |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육신은 신비 중의 신비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셨습니다. 하늘이 땅으로, 영원한 시간이 찰나적 시간 속으로, 무한이 유한으로, 거룩이 세속으로, 초역사가 역사로, 초자연이 자연 속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인간역사는 올라가고 커지는 상승을 영광이라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의 성육신은 낮아지고 작아지는 종의 영광, 자기희생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비우심으로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 복음서를 공부하는 목적은 우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우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입니다.
1a절을 보십시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1절은 창세기 1장 1절을 연상시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절에 나오는 태초는 영원의 한 시점이라면, 요한복음의 태초는 영원을 가리킵니다. 말씀은 헬라 원어로 ‘로고스’(Logos)인데 당시 헬라 사람들은 만유의 원인자를 로고스로 생각했습니다. 어떤 ‘지배적 이성’ 혹은 ‘만유의 정신’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은 막연하고 추상적이고 비인격적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신을 형상으로 만나고자 하는데 우리는 말씀 안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18절에서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나타냈다는 뜻은 말을 통해서 하나님을 나타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말씀은 누구이십니까? 그 말씀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함께 계셨다는 말은 하나님과 역동적인 사랑의 관계를 맺었다는 뜻입니다. 성삼위 하나님은 역동적인 사랑의 관계 속에서 충족한 사랑을 누리고 계셨습니다. 요10:30절에서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즉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씀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3절을 보십시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대개 창조신화들은 무엇을 만들 때 재료를 가지고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말을 통해서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말의 힘, 하나님의 말씀의 힘에 대해서 우리는 새롭게 배우게 됩니다. 말씀에는 왜 힘이 있습니까?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말은 말하는 사람의 인격이 중요합니다. 그 사람을 신뢰할 수 있을 때 말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신분에 따라서 말의 무게가 달라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말씀은 힘이 있고 사람을 살리고 치유하는 권능이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었습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완전한 생명입니다. 생명은 살아 있는 상태로서 죽음이 없는 것입니다. 생명은 죽음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살아납니다. 우리가 그를 믿기 전에는 죄로 인해 죽어 있었습니다(엡2:1). 그런데 그 생명이 성육신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를 영접하는 자는 생명을 소유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살아납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자들이 많습니다. 즉 왜 사는지 존재 이유를 알지 못하고 죽지 못해서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삶이 무의미하고 허무합니다. 사는 것이 지겹고 피곤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 날 때 생명의 충만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삶의 의미를 하나님 안에서 찾고 기쁘고 역동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지난 주에 예비군 훈련장에서 총기 난사를 한 사람의 유서에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허무하고 사는 것이 힘들어서 죽고 싶다고 했습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자였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도 죽음에 이르게 하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또 많은 청년들이 열등감, 공부에 대한 스테레스, 비교의식, 경쟁심, 자살충동, 가정 파괴, 왕따 문제 등으로 마음의 병을 앓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 진정 필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삶을 누릴 수 있는 시간 즉 여유입니다. 올바른 가치관입니다. 우리는 죽어 있는 청년들을 살리는 생명의 말씀을 힘써 전파할 의무가 있습니다. 병들고 죽음의 세력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 치유하고 살리는 말씀 역사,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했습니다(5). 어둠은 죽음 안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느끼기에 하나님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매우 가까워 우리 입에 있고 우리 마음에 있지만 그들에게는 말씀도 너무 멀게 느껴집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빛이 어둠 속에 왔는데 사람들이 인식을 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도 그 말씀도 멀게만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증인이 필요합니다. 시119:130에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열어 주시고 말씀을 공부하거나 들을 때에 빛을 비추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깨달음을 얻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습니다. 이는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께서 성육신을 통하여 죄악된 세상 ‘안으로’ 임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은 5절의 ‘비추다’를 현재형으로 사용함으로, 말씀 되신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이 쉼 없이 비추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실로 생명의 빛은 지금도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비추이며 생명을 부여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신자들로 하여금 빛의 사자로서 어둠의 세력과 싸우는 능력을 끊임없이 공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무지와 교만, 어둠을 사랑하는 마음, 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해 빛 가운데 나오기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죄가 드러나면 죽을까봐, 심판을 받을까봐 두려워합니다. 어둠의 포로가 되어 끊임없이 어둠 속으로 도피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빛의 증거자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빛의 증거자로 세례 요한을 보냈습니다. 그는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그를 믿게 하려 하였습니다.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입니다. 사람들은 요한을 빛으로 생각했지만 그는 참 빛이 아닙니다. 9절을 보십시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참 빛이란 거짓에 대해서 진실한 빛이란 뜻입니다. 거짓 빛은 실체가 없는 것이라면 참 빛은 실체가 있는 빛이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사람들을 비추는 많은 빛이 있습니다. 종교의 빛, 철학의 빛, 이성의 빛, 윤리 도덕의 빛, 과학 문명과 같은 물리적인 빛도 있습니다. 동양에서는 공자, 부처, 서양에서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칸트 같은 현자들이 윤리의 빛, 인간 이성의 빛을 비추었습니다. 이들은 마치 어둠을 조금 밝혀주는 촛불과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완전한 빛이었습니다. 그들이 빛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죽음을 정복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가진 그 분만이 진짜 유일한 빛이십니다. 예수님이 완전한 빛이시오 원형적인 빛이십니다. 예수님 한 분으로 인해 모든 진리가 정확하게 계시되었습니다. 참 빛이신 예수님은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인 죄와 죽음을 해결하셨습니다. 그는 각 사람에게 비추어서 어둠을 몰아내십니다. 이방인이나 헬라인이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관계없이 개인적으로 참 빛을 영접함으로 끊임없이 생명을 얻는 역사, 자유를 누리는 역사를 이루십니다.
그가 세상에 왔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우준한 자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헛된 것들을 섬기며 살다가 멸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은 그렇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은 달라야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려왔습니다. 그러나 메시야가 오셨지만 그들이 정치적인 메시야, 세상적인 메시야, 영광의 메시야를 기다렸기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무관심하였고 도리어 박해하고 나중에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권세가 무엇입니까? 요구할 수 있는 권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엄청난 신분의 변화입니다.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이 권세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고(롬8:17),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을 상속합니다(벧전1:3,4). 이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원수가 되었는데(골1:21), 이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축복을 감사하고 적극적으로 누려야 합니다. 또 아들 됨의 권세를 적극적으로 행사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죄악된 세상에서 죄를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며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 나라 확장 사역에 쓰임 받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되었지만 그 믿음이 우리의 의는 아닙니다. 영접하고 믿는 것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물을 주실 때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가장 귀한 선물을 값없이 주는데 받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믿는 것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실 때 믿고 받아들이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혈육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부모님이 믿는다고 나도 자동적으로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나의 욕망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뜻 즉 인간의 이성적 노력이나 수양이나 율법 준수를 통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완전히 부패하여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수준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데 우리는 전적으로 무능하고 무관합니다. 왜냐하면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에게서 기대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낳으셔야 합니다. 거듭난 사람들은 하나님이 낳으신 자들입니다. 구원 받은 신자는 자기에게서 의로움이 없다는 것을 깊이 알고 늘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의 모든 주권을 겸손히 받들어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는 값싸게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사도 요한은 1절에서 이야기했던 ‘말씀’을 다시 언급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말씀은 태초, 곧 영원 이전부터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심지어 그 말씀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습니다. 저자 요한은 ‘말씀’이 사람으로 ‘변화’되었다고 하지 않고 ‘육신’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빌2:6-8).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성을 고집하거나 주장하지 않으시고 다 비우시고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 세상에 인간의 고뇌에 참여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 인생들과 동고동락하시고 친밀한 삶을 사시며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마침내는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으로서는 엄청난 희생을 치루신 것입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죄인의 괴수로 죽으신 십자가는 성육신의 절정입니다.
여기에서 거하셨다는 것은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고 거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장막 가운데 거하신 것을 연상시킵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신 하나님의 장막이 이제는 이 땅에 육신의 장막을 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성막을 대신하여 오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습니다. 감히 죄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모세가 그렇게 보고자 했던 영광입니다. 구약에는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서 주의 영광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성막이 되어 오셔서 우리에게 완전히 지성소를 개방하셨습니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휘장이 찢어지고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 열려서 누구나 언제든지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영광은 어떤 영광입니까?
첫째, 예수님의 낮아지심으로 인한 영광입니다. 예수님은 타락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높고 높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낮아져 내려 오셨습니다. 더럽고 냄새나는 구유에 태어나셨고 강보에 싸이셨습니다. 니고데모의 무지와 완악함을 감당해 주시고, 사마리아 여인을 감당해 주셨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발각되어 돌에 맞아 죽게 된 여인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는 제자들의 냄새나는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낮아지심을 통해 그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가 자기를 낮추어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자기를 낮추어 학생들과 함께 할 때 거기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거기에서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둘째,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은혜가 충만합니다. 은혜란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만물을 다스리며 하나님을 섬기는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런데 범죄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의 장벽이 생겨나고 온 땅에 사망의 저주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어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모든 저주와 진노를 쏟아 부으셨습니다. 그는 우리 죄인들을 대신하여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의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이십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삶과 죽으심을 통해 하나님의 우리 인생들에 대한 사랑을 온전히 드러내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진리가 충만하십니다. 진리란 시대와 상황에 매이지 않는 불변의 것입니다. 모든 인생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절대적인 표준입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온갖 거짓과 속임이 난무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는 이유는 사탄이 주는 거짓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사탄이 심는 거짓말이 세상을 혼돈과 어두움 가운데 빠지게 하였습니다. 사탄은 태초부터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을 이기시고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진리를 삶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충만하다는 것은 차고 흘러넘친다는 것입니다. 분수와 같이 끝없이 용솟음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퍼주어도 줄어들지 않습니다. 아무리 배워도 다 배울 수 없는 진리입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서 말한 사람이 없습니다. 즉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품 속에서 하나님의 심장의 박동 소리를 듣는 분이, 즉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아시던 분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롭게 나타나셨습니다. 이전에는 안식일에 일하지 않는 하나님이신데 안식일에도 일하는 하나님, 이전에는 벌하시는 하나님,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었는데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집을 나가 허랑방탕하던 탕자를 있는 그대로 맞아주시고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사람들이 그때까지 알고 있던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 본래 하나님의 모습을 예수님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를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성육신의 은혜를 다시 배우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불신 가정에서 태어나 하나님에 대해서 막연했던 저에게 예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세상이 자연히 존재하였던 것으로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창조하셨음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돈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더 귀한 사람, 사람보다 귀한 하나님이 계심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죄를 막연히 나쁜 것으로 알았는데 내가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알게 해 주시고 죄사함을 주셨습니다. 인생이 허무하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자 내 인생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사명인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무관심했는데 이제는 사랑하고자 힘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나의 인생은 전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삶의 기쁨과 행복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게 하십니다. 제가 예수님을 통해서 받은 은혜가 너무나 커서 감사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은혜의 더 깊고 풍성한 세계를 체험하게 하십니다. 진리의 더 깊은 세계를 알게 하십니다. 부모님을 만나 이 세상에 오게 된 것,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복된 인생을 사는 것도 큰 축복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만난 것이 저의 인생에서 가장 큰 축복입니다. 제가 성육신의 진리를 배우며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힘써 나누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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