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15년 부활특강(요20:1-31) 내가 주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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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부활절 특강
말씀 | 요한복음 20:1-31
요절 | 요한복음 20:18
내가 주를 보았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오늘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는 자료는 수천 가지가 넘습니다. 게리 하버마스 같은 역사가는 1975년부터 수집한 자료만 2200가지가 넘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근거는 크게 성경 자체의 증거, 구전, 기록문서, 빈 무덤, 부활의 증인 등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증인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부활 장은 구약 성경의 부활에 대한 인용은 없고 증인들의 체험을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생생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 주님은 어디 계신지 묻습니다. 이에 대한 답을 찾고 고난을 감당하며 부활의 증인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았습니다. 공관복음서는 막달라 마리아와 몇 명이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 왔다고 하는데 요한복음은 그 내용이 없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보다 그 이름이 먼저 나오고 오늘 말씀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이 여인은 예수님을 사랑했고 교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그녀는 일곱 귀신들린 데서 구원을 받았고 예수님을 따르며 그를 끝까지 섬겼습니다. 제자들이 다 도망갔을 때도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을 지켰고, 장사지내고,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뜨겁게 사랑했던 여인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 즉 요한에게 달려가서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어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어 무덤에 있어야 할 예수님이 어디 가셨는가? 시몬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마라톤 대회가 열렸습니다. 제자들이 힘을 다하여 달려갔습니다. 아무래도 젊은 요한이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구부려 세마포가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습니다. 그는 상당히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세밀한 관찰을 통해 우리는 부활의 증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달려오던 속도를 늦추지 않고 곧바로 무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가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어떤 도둑놈이 시체를 훔쳐간단 말인가? 또 시체를 훔쳐가더라도 어떻게 세마포는 공기가 빠져나간 것처럼 헝클어뜨리지 않고 알몸만 빼내어 갈 수 있을까?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8절을 보면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믿은 것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디에 계신 것인가?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이때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의 시체 뉘였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아있었습니다. 천사들이 말했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마리아가 대답합니다.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13).” 마리아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그를 어디 두었는지 알지 못하겠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면서도 알지 못한 사건을 우리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두 제자가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하였습니다.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그들이 언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까? 15,1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자신이 옮길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찾는 예수님은 죽으신 분이었습니다. 자신이 가져가고 옮길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가 찾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도 마리아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이 살아 있다고 생각합니까? 죽어 있다고 생각합니까? 예수님이 일하시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예수님과 상관없이 사람이 모든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마르다와 마리아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그가 살아날 것을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아니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믿음이 이론적일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나의 현실 문제와 부활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이 생각하며 행동합니다.
예수님이 죽었는데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 마리아가 슬퍼하는 이유입니까?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예수님이 가버리셨다는 것이 슬픔의 원인입니다. 1세기 말에 예수님이 어디 계시는가 논쟁이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1세기 성도들은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계시지도 않고, 그렇다고 살아계셔서 그의 통치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늘에 가버리셨는가? 아니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여전히 이 세상에서 일하고 계시는가? 예수님이 인간인가, 신인가의 논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오셨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는 어려울 때 예수님의 부재로 인해서 고통을 겪습니다. 예수님이 어디 계시는가? 우리는 세월호 사건이 일어날 때 예수님은 어디 계셨는가? 저먼윙스 여객기가 알프스 산에 추락할 때 주님은 어디 계셨는가? 인간이 겪는 비극과 그로 인한 슬픔, 인간의 한계 속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의 존재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고난 받는 사람들이 겪는 아픔과 슬픔을 생각할 때 우리는 무어라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에게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사람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다 죽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의 순간에 주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죽음은 대부분 예기치 못한 때에 도적과 같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주님은 함께 슬퍼하고 안타까워하고 계십니다. 동시에 그는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십니다. 죽음은 잠입니다. 죽음은 새로운 나라에 들어가는 통로입니다. 죽음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격한 슬픔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지금은 울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때입니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에게는 미래가 열렸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열렸습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생겼습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에 우리도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슬피 울며 예수님을 찾는 마리아를 위해서 예수님이 그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마리아야!” 이 말을 듣자 마리아가 돌이켜 “랍오니여, 선생님”하고 부르며 예수님이 살아나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공관복음서와 같이 부활에 대한 성경 말씀을 인용 하지 않았지만 생생한 증거를 통해서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가져오고 가져 갈 수 있는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찾아내야 하는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예수님께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녀를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바로 막달라 마리아 뒤에 계셨습니다. 그녀가 울고 있을 때에도 예수님은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가 고통 받고 있을 때, 절망하고 있을 때 주님은 항상 함께 하십니다. 다만 우리가 주님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자기 슬픔이 크면 아무것도 볼 수가 없습니다. 자기 생각이 많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열 명의 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도마에게도 찾아가셨습니다. 핍박자 사울에게도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에 나에게도 찾아오십니다.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을 기억함으로 위로를 받습니다. 죽었는데 그는 자기 안에 살아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의 평소의 말과 행동이 현재 자신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의 말과 행동이 현재의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과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사람들을 찾아오심으로 영향을 끼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주권자로서 주도적으로 우리를 이끄시며 일을 해 나가십니다.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미래가 열립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자기 이름을 부를 때 돌이켜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보려면 돌이켜야 합니다. 무덤이나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는 현실만 봄으로 문제 속에 함몰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돌이켜 말씀을 볼 때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역사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성령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며 필요를 공급하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마리아는 예수님을 붙들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셨기 때문에 붙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올라가신 다음에 붙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붙드는 것은 곧 아버지를 붙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아버지를 붙들도록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을 붙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으면 어떻게 붙들겠습니까?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다른 보혜사로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성령님은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을 붙드는 것은 곧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을 붙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육신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지만 그가 보내신 성령님은 이 역사 속에서 우리와 함께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정신없이 살다보면 예수님을 놓치고 살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기억함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살펴봄으로, 소감을 쓰고 기도하면서 예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증거하였습니다. 마리아는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 할 때 기쁨이 충만하고 확신이 넘쳤을 것입니다. 슬픈 마리아는 가고 행복한 해피 마리아가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그의 증인이 됩니다.
한편 제자들은 예수님이 살아나셨음을 어떻게 믿게 되었습니까?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습니다. 제자들은 외부와 자신들을 차단시켰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두려웠습니다. 그들은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폐증 환자와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두려움으로 자기 세계 속에 갇혀 있는 사람에게도 찾아오십니다. 슬픔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도 찾아가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친히 찾아가십니다. 우리는 때로 내가 내 발로 주님을 찾아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먼저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나의 마음을 열어주시고 영적인 소원을 주셨기 때문에 주님께 나아올 수 있던 것입니다. 때로는 목자님들의 전도를 통해서 찾아오십니다. 주님은 여러 모양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주님은 당신을 어떻게 찾아오셨습니까?
제자들이 모인 곳의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님은 오셔서 가운데 서서 이르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신비하게도 우리와 다른 차원의 삶을 살고 계십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살지만 부활하신 주님은 물리적인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아니하십니다. 그는 어디든지 계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닫힌 문을 지나 제자들 가운데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강은 구원받은 자가 누릴 수 있는 완전한 평화입니다. 이는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된 자들이 누리는 평화입니다. 세상이 주는 것은 일시적이고 조건적이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강을 받은 우리는 환난 가운데서도 깊은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습니다.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고 그들을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로 부르심을 받고 죄사함과 영생을 얻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하고 산 증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성령을 받을 때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영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성령의 능력과 부어주시는 사랑을 받아서 세상에 나아가야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명인은 절제의 영을 받아서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세상에 나아가서 해야 할 일은 죄 사함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는 죄가 사하여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의 죄는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파괴하고 하나님께 반역하고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죄는 불법입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 됩니다. 죄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나 죄사함을 받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됩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를 드려 속죄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우리는 죄사함을 받습니다.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으로 서게 됩니다. 죄사함을 받아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그와 교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살아나신 것을 믿을 때 죄사함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이 기쁘고 복된 소식을 세상에 나아가 전하라고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일을 감당해야 할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은 구원 역사의 기초를 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 중 의심이 많은 도마는 아직도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24,25절을 보십시오.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도마는 실증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의심하였지만 확실한 증거를 구하고 있습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혀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제자들에게 인사를 하셨습니다. “샬롬!”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리고 예수님은 도마에게 이르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예수님은 도마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도마를 사랑하셨습니다. 의심이 많은 그를 깊이 이해하시고 부활의 증거를 확실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이때 도마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나의 주님이시요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 예수님은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바로 우리를 위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우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우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위엄을 갖추고 화려하게 오지 않으셨습니다. 아주 조용하고 일상적인 방법으로 오셨습니다.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동산지기인 줄로 알았습니다. 엠마오 상의 제자들은 평범한 나그네로 알았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25리를 함께 갔습니다. 도마는 의심했습니다. 제자들 중에는 보면서도 의심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우리 곁에서 어떤 사람을 통해서 초라하고 남루한 차림으로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제자들은 거짓말을 위해 평생 고난과 죽음까지 감수할 수 있단 말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믿음은 장차 나타날 그의 영광에 동참하기 위해서 고난도 기꺼이 동참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복음을 전하는 것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복음 역사 가운데도, 해외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님들과 함께 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심을 인하여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말씀 | 요한복음 20:1-31
요절 | 요한복음 20:18
내가 주를 보았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오늘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는 자료는 수천 가지가 넘습니다. 게리 하버마스 같은 역사가는 1975년부터 수집한 자료만 2200가지가 넘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근거는 크게 성경 자체의 증거, 구전, 기록문서, 빈 무덤, 부활의 증인 등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증인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부활 장은 구약 성경의 부활에 대한 인용은 없고 증인들의 체험을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생생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 주님은 어디 계신지 묻습니다. 이에 대한 답을 찾고 고난을 감당하며 부활의 증인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았습니다. 공관복음서는 막달라 마리아와 몇 명이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 왔다고 하는데 요한복음은 그 내용이 없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보다 그 이름이 먼저 나오고 오늘 말씀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이 여인은 예수님을 사랑했고 교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그녀는 일곱 귀신들린 데서 구원을 받았고 예수님을 따르며 그를 끝까지 섬겼습니다. 제자들이 다 도망갔을 때도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을 지켰고, 장사지내고,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뜨겁게 사랑했던 여인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 즉 요한에게 달려가서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어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어 무덤에 있어야 할 예수님이 어디 가셨는가? 시몬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마라톤 대회가 열렸습니다. 제자들이 힘을 다하여 달려갔습니다. 아무래도 젊은 요한이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구부려 세마포가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습니다. 그는 상당히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세밀한 관찰을 통해 우리는 부활의 증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달려오던 속도를 늦추지 않고 곧바로 무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가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어떤 도둑놈이 시체를 훔쳐간단 말인가? 또 시체를 훔쳐가더라도 어떻게 세마포는 공기가 빠져나간 것처럼 헝클어뜨리지 않고 알몸만 빼내어 갈 수 있을까?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8절을 보면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믿은 것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디에 계신 것인가?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이때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의 시체 뉘였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아있었습니다. 천사들이 말했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마리아가 대답합니다.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13).” 마리아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그를 어디 두었는지 알지 못하겠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면서도 알지 못한 사건을 우리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두 제자가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하였습니다.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그들이 언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까? 15,1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자신이 옮길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찾는 예수님은 죽으신 분이었습니다. 자신이 가져가고 옮길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가 찾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도 마리아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이 살아 있다고 생각합니까? 죽어 있다고 생각합니까? 예수님이 일하시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예수님과 상관없이 사람이 모든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마르다와 마리아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그가 살아날 것을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아니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믿음이 이론적일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나의 현실 문제와 부활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이 생각하며 행동합니다.
예수님이 죽었는데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 마리아가 슬퍼하는 이유입니까?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예수님이 가버리셨다는 것이 슬픔의 원인입니다. 1세기 말에 예수님이 어디 계시는가 논쟁이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1세기 성도들은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계시지도 않고, 그렇다고 살아계셔서 그의 통치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늘에 가버리셨는가? 아니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여전히 이 세상에서 일하고 계시는가? 예수님이 인간인가, 신인가의 논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오셨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는 어려울 때 예수님의 부재로 인해서 고통을 겪습니다. 예수님이 어디 계시는가? 우리는 세월호 사건이 일어날 때 예수님은 어디 계셨는가? 저먼윙스 여객기가 알프스 산에 추락할 때 주님은 어디 계셨는가? 인간이 겪는 비극과 그로 인한 슬픔, 인간의 한계 속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의 존재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고난 받는 사람들이 겪는 아픔과 슬픔을 생각할 때 우리는 무어라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에게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사람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다 죽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의 순간에 주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죽음은 대부분 예기치 못한 때에 도적과 같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주님은 함께 슬퍼하고 안타까워하고 계십니다. 동시에 그는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십니다. 죽음은 잠입니다. 죽음은 새로운 나라에 들어가는 통로입니다. 죽음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격한 슬픔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지금은 울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때입니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에게는 미래가 열렸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열렸습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생겼습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에 우리도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슬피 울며 예수님을 찾는 마리아를 위해서 예수님이 그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마리아야!” 이 말을 듣자 마리아가 돌이켜 “랍오니여, 선생님”하고 부르며 예수님이 살아나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공관복음서와 같이 부활에 대한 성경 말씀을 인용 하지 않았지만 생생한 증거를 통해서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가져오고 가져 갈 수 있는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찾아내야 하는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예수님께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녀를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바로 막달라 마리아 뒤에 계셨습니다. 그녀가 울고 있을 때에도 예수님은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가 고통 받고 있을 때, 절망하고 있을 때 주님은 항상 함께 하십니다. 다만 우리가 주님을 보지 못할 뿐입니다. 자기 슬픔이 크면 아무것도 볼 수가 없습니다. 자기 생각이 많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열 명의 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도마에게도 찾아가셨습니다. 핍박자 사울에게도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에 나에게도 찾아오십니다.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을 기억함으로 위로를 받습니다. 죽었는데 그는 자기 안에 살아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의 평소의 말과 행동이 현재 자신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의 말과 행동이 현재의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과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사람들을 찾아오심으로 영향을 끼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주권자로서 주도적으로 우리를 이끄시며 일을 해 나가십니다.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미래가 열립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자기 이름을 부를 때 돌이켜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보려면 돌이켜야 합니다. 무덤이나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는 현실만 봄으로 문제 속에 함몰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돌이켜 말씀을 볼 때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역사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성령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며 필요를 공급하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마리아는 예수님을 붙들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셨기 때문에 붙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올라가신 다음에 붙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붙드는 것은 곧 아버지를 붙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아버지를 붙들도록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을 붙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으면 어떻게 붙들겠습니까?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다른 보혜사로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성령님은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을 붙드는 것은 곧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을 붙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육신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지만 그가 보내신 성령님은 이 역사 속에서 우리와 함께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정신없이 살다보면 예수님을 놓치고 살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기억함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살펴봄으로, 소감을 쓰고 기도하면서 예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증거하였습니다. 마리아는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 할 때 기쁨이 충만하고 확신이 넘쳤을 것입니다. 슬픈 마리아는 가고 행복한 해피 마리아가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그의 증인이 됩니다.
한편 제자들은 예수님이 살아나셨음을 어떻게 믿게 되었습니까?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습니다. 제자들은 외부와 자신들을 차단시켰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두려웠습니다. 그들은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폐증 환자와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두려움으로 자기 세계 속에 갇혀 있는 사람에게도 찾아오십니다. 슬픔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도 찾아가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친히 찾아가십니다. 우리는 때로 내가 내 발로 주님을 찾아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먼저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나의 마음을 열어주시고 영적인 소원을 주셨기 때문에 주님께 나아올 수 있던 것입니다. 때로는 목자님들의 전도를 통해서 찾아오십니다. 주님은 여러 모양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주님은 당신을 어떻게 찾아오셨습니까?
제자들이 모인 곳의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님은 오셔서 가운데 서서 이르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신비하게도 우리와 다른 차원의 삶을 살고 계십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살지만 부활하신 주님은 물리적인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아니하십니다. 그는 어디든지 계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닫힌 문을 지나 제자들 가운데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강은 구원받은 자가 누릴 수 있는 완전한 평화입니다. 이는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된 자들이 누리는 평화입니다. 세상이 주는 것은 일시적이고 조건적이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강을 받은 우리는 환난 가운데서도 깊은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습니다.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고 그들을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로 부르심을 받고 죄사함과 영생을 얻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하고 산 증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성령을 받을 때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영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성령의 능력과 부어주시는 사랑을 받아서 세상에 나아가야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명인은 절제의 영을 받아서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세상에 나아가서 해야 할 일은 죄 사함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는 죄가 사하여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의 죄는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파괴하고 하나님께 반역하고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죄는 불법입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 됩니다. 죄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나 죄사함을 받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됩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를 드려 속죄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우리는 죄사함을 받습니다.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으로 서게 됩니다. 죄사함을 받아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그와 교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살아나신 것을 믿을 때 죄사함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이 기쁘고 복된 소식을 세상에 나아가 전하라고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일을 감당해야 할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은 구원 역사의 기초를 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 중 의심이 많은 도마는 아직도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24,25절을 보십시오.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도마는 실증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의심하였지만 확실한 증거를 구하고 있습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혀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제자들에게 인사를 하셨습니다. “샬롬!”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리고 예수님은 도마에게 이르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예수님은 도마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도마를 사랑하셨습니다. 의심이 많은 그를 깊이 이해하시고 부활의 증거를 확실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이때 도마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나의 주님이시요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 예수님은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바로 우리를 위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우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우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위엄을 갖추고 화려하게 오지 않으셨습니다. 아주 조용하고 일상적인 방법으로 오셨습니다.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동산지기인 줄로 알았습니다. 엠마오 상의 제자들은 평범한 나그네로 알았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25리를 함께 갔습니다. 도마는 의심했습니다. 제자들 중에는 보면서도 의심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우리 곁에서 어떤 사람을 통해서 초라하고 남루한 차림으로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제자들은 거짓말을 위해 평생 고난과 죽음까지 감수할 수 있단 말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믿음은 장차 나타날 그의 영광에 동참하기 위해서 고난도 기꺼이 동참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복음을 전하는 것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복음 역사 가운데도, 해외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님들과 함께 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심을 인하여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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