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15년 요18강(15:1-27) 내 안에 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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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요한복음 제 18 강
말씀 | 요한복음 15:1-27
요절 | 요한복음 15:4
내 안에 거하라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오늘 말씀에서는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열매가 풍성한 인생을 살 수 있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배워 풍성한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이십니다. 포도나무는 나무로서는 쓸모가 없습니다. 관상용으로 키우기에는 너무 잘 자랍니다. 포도나무는 오직 그 탐스러운 열매로 인하여 그 가치를 드러냅니다. 가지가 열심히 하기 때문에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가지는 다만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 거기로부터 영양분이 잘 공급되면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습니다. 참포도나무라는 말씀에서 참은 이름과 외모뿐만 아니라 이름에 상응하는 진정한 자질도 갖춘, 모든 면에서 이름이 의미하는 개념과 일치하는 포도나무를 말합니다. 포도나무도 여러 종류가 있음을 암시합니다. 구약에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했습니다(사5:2). 하나님이 뽑아다가 심은 나무였습니다(시80:8-10). 하나님은 그들이 극상품의 좋은 포도 맺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들포도를 맺었습니다. 우상숭배와 포학과 음란 등의 열매만 맺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비록 율법을 가지고 있다고 하나 실제로는 율법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잘못 해석하여 잘못된 전통과 규례를 만들었고 그에 기초해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제사를 드린다고 하지만 그마저도 형식적이었습니다(겔15:1-6, 렘2:21). 그 포도나무는 열매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열매가 아닌 것들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물질이나 쾌락 등은 우리가 수고하여 얻은 열매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참된 열매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쉽게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질보다 명예를 택할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쾌락보다 사랑을 택할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속적인 것보다 거룩한 것, 영원한 것을 구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열매는 영생에 이르는 열매(요4:36)를 말합니다. 영생을 얻은 사람은 말씀을 따라 살면서 참된 행복과 기쁨, 사랑과 정의, 죄사함과 거룩함,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등 신령한 은혜를 경험합니다. 영생을 얻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여 그도 예수님을 믿고 영생에 이르도록 인도합니다.
참포도나무에 열매를 맺도록 나무를 가꾸고 돌보시는 사람은 농부입니다. 여기서 농부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포도나무에서 열매가 많이 맺히도록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참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들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어떤 가지를 말하는 것입니까? 명목상의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유다와 같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지만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지 않고 형식적으로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과실을 맺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다는 3년 반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르며 그를 깊이 알고 믿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가지가 되어 포도열매를 맺을 수 있는 은총의 기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과실을 맺지 아니하였습니다. 영양분만을 축내고 잎만 무성해가면서 과실은 맺지 아니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농부로서 무성한 가지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화려한 잎을 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아버지는 과실을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과실을 맺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아버지는 인내하셨고 또 인내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아버지의 긍휼과 자비와 인내를 멸시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를 제해버리십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제자의 모임에서 어둠 속으로 떠나갔습니다. 그는 스스로 자기가 예수님을 배반했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농부되시는 하나님께서 이를 제해 버리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다와 당시 대제사장들과 제사장들, 많은 유대인들은 말씀을 듣고 표적을 보고서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아 영생의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농부이신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제거해 버리십니다. 예수님의 가지에서 제거한다는 것은 잘라내서 관계를 완전히 단절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의 결국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 영원한 죽음입니다. 이는 영원히 과실을 맺을 수 없는 비극이요 슬픔입니다. 제해버림을 받은 가지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메마르고 불쏘시개밖에는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내하시며 과실을 맺기를 소망하시고 은혜를 베푸실 때 우리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십니다. 농부 되신 하나님께서는 가지가 과실을 맺는다고 해서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더 과실을 맺기를 원하십니다. 과실을 더 풍성히 맺기를 원하십니다.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가지치기를 말합니다. 포도원의 농부는 잔가지를 잘라내기도 하고 껍질을 벗겨주기도 하고 약물을 뿌려서 번데기나 병충해를 제거하기도 합니다. 포도 농사는 가지치기에 달려 있습니다. 포도나무는 가지를 많이 길게 뻗기 때문에 한 두 가지만 남겨두고 가지치기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가지치기를 하십니까? 첫째,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하나님은 좌우에 날선 검과 같은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는 가지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영생의 말씀이 있음을 믿고 다른 사람들이 떠날 때에도 끝까지 예수님을 믿고 남은 제자들과 믿음의 여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또 예수님이 행하신 여러 표적들을 보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영생의 열매를 맺는 자들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런 사람들로 하여금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깨끗하게 하십니다. 즉 그들이 거듭난 이후 말씀을 따라 살게 되면서 맺게 되는 성령의 열매들과 몸의 부활과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도록 깨끗하게 하십니다.
둘째, 환난과 시련이라는 연단을 통해서 가지치기를 하십니다. 우리는 때로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의 여러 가지 역경과 환난과 시련에 처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 편에서 볼 때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는 사랑의 손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깊이 이해하고 그 훈련의 손길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하고 영접하여 순종할 때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했으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했습니다. 이로써 거룩하고 깨끗한 새 생명으로 거듭 났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이미 목욕한 사람들이었습니다(13:10). 에베소서 5장 26절에 보면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죄로 더러운 우리가 깨끗해지고 거듭 나는 것은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성령님은 어떤 신비한 방법으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성령님과 예수님의 말씀은 같이 활동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깨끗해진 제자들은 계속해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첫째,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나가신다고 하니 우리도 예수님을 떠나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떠날 것인지 계속 붙어 있을 것인지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예수님 안에 거하라고 명령하시며 자신도 그들 안에 거하겠다고 하십니다. 거하라는 말은 예수님께 계속 붙어 있으라는 명령입니다. 겉으로 볼 때 열매가 없는 것 같아도 계속 붙어 있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은 떠나서 보이지 않는데 그 안에 거하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는 성령을 통해서 내주하시는 예수님께 대한 반응을 말합니다. 오순절에 성령의 오심과 내주를 통해 예수님께서 친히 오셔서 제자들 안에 내주하십니다. 이는 전적으로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말을 자주 썼습니다. 대표적으로 갈라디아서 2: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지속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시적으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형식적인 관계가 아닌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지속적으로 믿고 사랑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10). 우리가 깨끗하게 목욕한 뒤에도 지속적으로 말씀을 지킴으로 그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거하는 것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하는 것입니다(요일2:6).’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면 예수님도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통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성령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예수님의 말씀 안으로 인도해주십니다. 이로써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완전한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14:20절에 의하면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했습니다. 그 날은 오순절로서 그 이후 예수님과 하나님과 그리고 우리가 서로 상호적으로 거하는 신비적 연합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공동체 안에는 거하지만 예수님 안에는 거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자님의 사랑 안에는 거하지만 예수님과는 관계없는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목자님의 사랑과 섬김 안에 거하면서 예수님 믿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몸만 교회에 왔다 갔다 하지 말고 말씀을 공부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거듭난 자는 계속해서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가치관을 세워야 합니다. 규칙적으로 꾸준히 일대일 말씀공부와 일용할 양식을 먹고 기도생활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면이 말라버리고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4,5). 성숙한 신자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둘째,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해야 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앞에서는 “내가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는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이 동일시됩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은 예수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은 말씀을 믿고 영접하는 것이요 붙잡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그 말씀을 믿고 기도할 때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백지 수표를 주신 것입니다. 백지 수표를 받은 우리는 실제 생활에서 이를 현금으로 바꾸어 쓸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열매는 기도의 응답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그 말씀 안에 거할 때 구할 것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지속적으로 받고 누리려면 말씀 안에 거하는 생활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고 말씀에 순종할 수 있도록 구해야 합니다. 말씀대로 살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은 시험과 유혹이 많은 세상에서 쉽지 않습니다. 특히 결정적인 순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겟세마네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지 않으셨던가요? 말씀대로 사는 것이 어려울 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이 기도를 들어주시기 때문에 말씀대로 사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씀 안에 거하며 말씀대로 살 때 열매를 많이 맺게 됩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등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나중에는 부활의 열매도 맺습니다.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입니다. 열매는 속일 수 없습니다. 제자다운 제자는 말씀 안에 거하는 가운데 기도를 통해 반드시 많은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셋째,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합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예수님의 사랑은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회개하고 십자가의 피로 죄사함을 받을 때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사랑은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길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환난과 시련을 통해서 가지치기를 하실 때 거룩한 사랑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기뻐하실까요?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는 기쁨,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 중에 희락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운동하고 텔레비전 보고 뉴스를 보고 얻는 기쁨, 맛있는 음식을 찾아 먹는 기쁨과는 다른 기쁨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고, 그의 말씀 안에 거하고, 그의 사랑 안에 거할 때 누리는 기쁨, 성령 충만함으로 인해 오는 기쁨, 믿음, 사랑, 소망으로 인한 기쁨, 진리를 아는 기쁨, 생명을 얻는 기쁨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할 때 기쁨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 사랑하냐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기까지 합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를 희생적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랑을 할 때 주님은 우리를 그의 친구로 여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친구로 여기셨습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제자들이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택하여 세우셨습니다. 그 목적은 제자들로 하여금 가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들포도를 맺었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풍성히 맺게 되었습니다. 또 저들의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입니다. 여기서 열매는 앞에서 언급된 열매입니다. 그 열매 중에서도 17절을 볼 때 서로 사랑하는 열매를 강조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다른 어떤 열매보다도 사랑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양들의 열매, 사역의 열매, 다 좋지만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세상의 핍박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주인이 미움을 받았으니 종도 미움을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종이 미움을 받는다고 하지만 주인이 받은 미움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박해하였은즉 제자들도 박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박해하는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를 두고 예수님은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에게 보혜사를 보내주십니다. 그는 진리의 성령이십니다. 진리는 막연한 철학적 진리가 아니라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진리입니다(8:32).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을 증언하십니다. 아울러 제자들도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 있었으므로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우리가 내주하시며 인도하시는 성령의 은혜를 덧입고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거하며 서로 사랑하는 일에 힘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요한복음 15:1-27
요절 | 요한복음 15:4
내 안에 거하라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오늘 말씀에서는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열매가 풍성한 인생을 살 수 있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배워 풍성한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이십니다. 포도나무는 나무로서는 쓸모가 없습니다. 관상용으로 키우기에는 너무 잘 자랍니다. 포도나무는 오직 그 탐스러운 열매로 인하여 그 가치를 드러냅니다. 가지가 열심히 하기 때문에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가지는 다만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 거기로부터 영양분이 잘 공급되면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습니다. 참포도나무라는 말씀에서 참은 이름과 외모뿐만 아니라 이름에 상응하는 진정한 자질도 갖춘, 모든 면에서 이름이 의미하는 개념과 일치하는 포도나무를 말합니다. 포도나무도 여러 종류가 있음을 암시합니다. 구약에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했습니다(사5:2). 하나님이 뽑아다가 심은 나무였습니다(시80:8-10). 하나님은 그들이 극상품의 좋은 포도 맺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들포도를 맺었습니다. 우상숭배와 포학과 음란 등의 열매만 맺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비록 율법을 가지고 있다고 하나 실제로는 율법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잘못 해석하여 잘못된 전통과 규례를 만들었고 그에 기초해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제사를 드린다고 하지만 그마저도 형식적이었습니다(겔15:1-6, 렘2:21). 그 포도나무는 열매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열매가 아닌 것들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물질이나 쾌락 등은 우리가 수고하여 얻은 열매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참된 열매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쉽게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질보다 명예를 택할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쾌락보다 사랑을 택할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속적인 것보다 거룩한 것, 영원한 것을 구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열매는 영생에 이르는 열매(요4:36)를 말합니다. 영생을 얻은 사람은 말씀을 따라 살면서 참된 행복과 기쁨, 사랑과 정의, 죄사함과 거룩함,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등 신령한 은혜를 경험합니다. 영생을 얻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여 그도 예수님을 믿고 영생에 이르도록 인도합니다.
참포도나무에 열매를 맺도록 나무를 가꾸고 돌보시는 사람은 농부입니다. 여기서 농부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포도나무에서 열매가 많이 맺히도록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참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들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어떤 가지를 말하는 것입니까? 명목상의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유다와 같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지만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지 않고 형식적으로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과실을 맺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다는 3년 반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르며 그를 깊이 알고 믿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가지가 되어 포도열매를 맺을 수 있는 은총의 기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과실을 맺지 아니하였습니다. 영양분만을 축내고 잎만 무성해가면서 과실은 맺지 아니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농부로서 무성한 가지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화려한 잎을 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아버지는 과실을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과실을 맺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아버지는 인내하셨고 또 인내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아버지의 긍휼과 자비와 인내를 멸시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를 제해버리십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제자의 모임에서 어둠 속으로 떠나갔습니다. 그는 스스로 자기가 예수님을 배반했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농부되시는 하나님께서 이를 제해 버리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다와 당시 대제사장들과 제사장들, 많은 유대인들은 말씀을 듣고 표적을 보고서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아 영생의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농부이신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제거해 버리십니다. 예수님의 가지에서 제거한다는 것은 잘라내서 관계를 완전히 단절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의 결국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 영원한 죽음입니다. 이는 영원히 과실을 맺을 수 없는 비극이요 슬픔입니다. 제해버림을 받은 가지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메마르고 불쏘시개밖에는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내하시며 과실을 맺기를 소망하시고 은혜를 베푸실 때 우리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십니다. 농부 되신 하나님께서는 가지가 과실을 맺는다고 해서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더 과실을 맺기를 원하십니다. 과실을 더 풍성히 맺기를 원하십니다.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가지치기를 말합니다. 포도원의 농부는 잔가지를 잘라내기도 하고 껍질을 벗겨주기도 하고 약물을 뿌려서 번데기나 병충해를 제거하기도 합니다. 포도 농사는 가지치기에 달려 있습니다. 포도나무는 가지를 많이 길게 뻗기 때문에 한 두 가지만 남겨두고 가지치기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가지치기를 하십니까? 첫째,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하나님은 좌우에 날선 검과 같은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는 가지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영생의 말씀이 있음을 믿고 다른 사람들이 떠날 때에도 끝까지 예수님을 믿고 남은 제자들과 믿음의 여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또 예수님이 행하신 여러 표적들을 보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영생의 열매를 맺는 자들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런 사람들로 하여금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깨끗하게 하십니다. 즉 그들이 거듭난 이후 말씀을 따라 살게 되면서 맺게 되는 성령의 열매들과 몸의 부활과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도록 깨끗하게 하십니다.
둘째, 환난과 시련이라는 연단을 통해서 가지치기를 하십니다. 우리는 때로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의 여러 가지 역경과 환난과 시련에 처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 편에서 볼 때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는 사랑의 손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깊이 이해하고 그 훈련의 손길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하고 영접하여 순종할 때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했으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했습니다. 이로써 거룩하고 깨끗한 새 생명으로 거듭 났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이미 목욕한 사람들이었습니다(13:10). 에베소서 5장 26절에 보면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죄로 더러운 우리가 깨끗해지고 거듭 나는 것은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성령님은 어떤 신비한 방법으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성령님과 예수님의 말씀은 같이 활동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깨끗해진 제자들은 계속해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첫째,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나가신다고 하니 우리도 예수님을 떠나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떠날 것인지 계속 붙어 있을 것인지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예수님 안에 거하라고 명령하시며 자신도 그들 안에 거하겠다고 하십니다. 거하라는 말은 예수님께 계속 붙어 있으라는 명령입니다. 겉으로 볼 때 열매가 없는 것 같아도 계속 붙어 있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은 떠나서 보이지 않는데 그 안에 거하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는 성령을 통해서 내주하시는 예수님께 대한 반응을 말합니다. 오순절에 성령의 오심과 내주를 통해 예수님께서 친히 오셔서 제자들 안에 내주하십니다. 이는 전적으로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말을 자주 썼습니다. 대표적으로 갈라디아서 2: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지속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시적으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형식적인 관계가 아닌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지속적으로 믿고 사랑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10). 우리가 깨끗하게 목욕한 뒤에도 지속적으로 말씀을 지킴으로 그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거하는 것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하는 것입니다(요일2:6).’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면 예수님도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통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성령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예수님의 말씀 안으로 인도해주십니다. 이로써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완전한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14:20절에 의하면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했습니다. 그 날은 오순절로서 그 이후 예수님과 하나님과 그리고 우리가 서로 상호적으로 거하는 신비적 연합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공동체 안에는 거하지만 예수님 안에는 거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자님의 사랑 안에는 거하지만 예수님과는 관계없는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목자님의 사랑과 섬김 안에 거하면서 예수님 믿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몸만 교회에 왔다 갔다 하지 말고 말씀을 공부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거듭난 자는 계속해서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가치관을 세워야 합니다. 규칙적으로 꾸준히 일대일 말씀공부와 일용할 양식을 먹고 기도생활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면이 말라버리고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4,5). 성숙한 신자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둘째,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해야 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앞에서는 “내가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는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이 동일시됩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은 예수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은 말씀을 믿고 영접하는 것이요 붙잡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그 말씀을 믿고 기도할 때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백지 수표를 주신 것입니다. 백지 수표를 받은 우리는 실제 생활에서 이를 현금으로 바꾸어 쓸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열매는 기도의 응답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그 말씀 안에 거할 때 구할 것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지속적으로 받고 누리려면 말씀 안에 거하는 생활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고 말씀에 순종할 수 있도록 구해야 합니다. 말씀대로 살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은 시험과 유혹이 많은 세상에서 쉽지 않습니다. 특히 결정적인 순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겟세마네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지 않으셨던가요? 말씀대로 사는 것이 어려울 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이 기도를 들어주시기 때문에 말씀대로 사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씀 안에 거하며 말씀대로 살 때 열매를 많이 맺게 됩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등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나중에는 부활의 열매도 맺습니다.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입니다. 열매는 속일 수 없습니다. 제자다운 제자는 말씀 안에 거하는 가운데 기도를 통해 반드시 많은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셋째,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합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예수님의 사랑은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회개하고 십자가의 피로 죄사함을 받을 때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사랑은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길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환난과 시련을 통해서 가지치기를 하실 때 거룩한 사랑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기뻐하실까요?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는 기쁨,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 중에 희락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운동하고 텔레비전 보고 뉴스를 보고 얻는 기쁨, 맛있는 음식을 찾아 먹는 기쁨과는 다른 기쁨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고, 그의 말씀 안에 거하고, 그의 사랑 안에 거할 때 누리는 기쁨, 성령 충만함으로 인해 오는 기쁨, 믿음, 사랑, 소망으로 인한 기쁨, 진리를 아는 기쁨, 생명을 얻는 기쁨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할 때 기쁨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 사랑하냐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기까지 합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를 희생적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랑을 할 때 주님은 우리를 그의 친구로 여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친구로 여기셨습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제자들이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택하여 세우셨습니다. 그 목적은 제자들로 하여금 가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들포도를 맺었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풍성히 맺게 되었습니다. 또 저들의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입니다. 여기서 열매는 앞에서 언급된 열매입니다. 그 열매 중에서도 17절을 볼 때 서로 사랑하는 열매를 강조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다른 어떤 열매보다도 사랑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양들의 열매, 사역의 열매, 다 좋지만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세상의 핍박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주인이 미움을 받았으니 종도 미움을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종이 미움을 받는다고 하지만 주인이 받은 미움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박해하였은즉 제자들도 박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박해하는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를 두고 예수님은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에게 보혜사를 보내주십니다. 그는 진리의 성령이십니다. 진리는 막연한 철학적 진리가 아니라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진리입니다(8:32).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을 증언하십니다. 아울러 제자들도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 있었으므로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우리가 내주하시며 인도하시는 성령의 은혜를 덧입고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거하며 서로 사랑하는 일에 힘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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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회 다운로드 | DATE : 2015-09-06 22: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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