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15년 요17강(14:1-31) 내가 곧 길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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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요한복음 제 17 강
말씀 | 요한복음 14:1-31
요절 | 요한복음 14:6
내가 곧 길이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께 이르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엄청난 선언을 하셨습니다. 소크라테스, 공자, 석가는 길을 찾는 사람들이었지 그 길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절대적인 선언은 그가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구원자 중의 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이르는 길이 여럿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요 하나님을 아는 그 진리요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이 시간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밝혀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1-6). 1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는 말씀을 듣고 근심했습니다. 근심이란 바다에 폭풍이 치는 것을 말합니다. 바탕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미래가 갑자기 어두워졌습니다. 예수님이 떠나심으로 인해 자신들이 해 온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회의, 이제까지 해 온 것이 근본적으로 흔들려 버렸습니다. 이제 자신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닌가? 보이는 열매도 없습니다. 손에 잡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이룬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우리도 이제까지 살아온 것이 보람이 없다고 생각할 때 힘이 듭니다. 양들이 한 번에 다 떠나 버릴 때, 목자 생활이 허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제자의 길을 가고자 할 때 이런 위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요동치는 상황에서, 헛 살아온 것 같은데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은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배의 닻을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과 행하신 일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개인 신앙이 자라나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갖도록 도우셨습니다. 목자 예수님이 떠나지만 제자들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다면 예수님도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일하고 계심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떠나가신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자신들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온전하심과 그의 섭리를 신뢰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를 구속하셔서 그의 자녀 삼아주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신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되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 아버지께서 우리를 그의 품에 품어주시고 우리의 앞길을 인도해주시고 보호해주시리라는 것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근심의 실체가 무엇입니까? 내 인생과 장래를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는 불신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랑과 섭리와 인도하심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을 때 진정으로 장래에 대한 근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제자 양성에 대한 근심, 가을 학기 복음 역사에 대한 걱정, 건강에 대한 염려, 취직 걱정, 결혼 걱정, 임신 출산 걱정, 자녀 교육에 대한 근심, 자신의 노후에 대한 근심 등등 우리에게는 쉴 새 없이 많은 근심들이 파도처럼 다가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이런 근심들을 주님께 맡겨버리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있는 근심을 아시고 자신이 아버지 집으로 가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말씀하십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아버지 집은 성전을 말하고 거처는 어떤 모임에서 한 사람이 확보한 위치나 기회, 활동 영역을 말합니다. 지금 있는 성전은 대제사장들과 제사장들이 차지하고 있고 제자들이 일할 수 있는 곳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성령을 보내어 주십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신자들 안에 내주하시면서 교회가 형성됩니다. 교회는 율법이나 제사가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이 중심이 되시는 곳입니다. 교회는 제자들이 일을 할 수 있는 영역이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위해서 일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입니다. 제자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먹고 살기 위해서 할 일이 없을지라도 교회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할 곳은 많이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남북이 평화적인 통일을 이루면 취직문제, 교회의 성장과 부흥에 대한 문제, 안보 문제 등등 수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평화로운 남북통일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집은 평화롭고 안정된 삶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을 예비하러 가십니다. 하늘나라의 영원한 아버지 집에 대한 약속과 소망을 주십니다. 그 집은 제자들이 이 땅에서의 거룩한 순례자의 삶을 마칠 때 돌아갈 영원한 아버지의 집입니다. 그 집은 이 땅에서의 비좁은 집과는 달리 넓고 크고 거할 곳이 많은 화려한 집입니다. 그 집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입니다(고후5:1).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하여 그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셨습니다. 가서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오시리라 하셨습니다. 재림의 영광으로 다시 오시리라 하셨습니다. 다시 와서 제자들을 영접하여 예수님 계신 곳에 영원히 함께 있게 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 조금도 근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의 처소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곧 썩고 더러워지고 쇠하여지고 무너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가슴 속에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산 소망을 심어주십니다. 영원한 아버지 집에 대한 소망만이 참된 푯대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산 소망만이 이 세상에서의 근심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십니다(13:1) 예수님이 가시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요, 좁은 길이요, 생명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길, 믿음의 길을 가십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그가 가시는 곳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그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지만 도마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도마는 목적지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데 그 길을 어찌 알겠냐고 되묻습니다. 도마는 지상 메시아 왕국을 꿈꾸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아버지 집으로 가신다고 하실 때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선교사로 다른 곳으로 가신다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동쪽인지, 북쪽인지, 로마인지 스페인인지 목적지를 알아야 그 목적지에 가는 길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하고 물었습니다. 도마를 포함하여 제자들은 자신들이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하는 회의에 빠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인생의 목적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인생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가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바로 조금 전에 아버지 집으로 가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도마는 목적지조차 알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우문현답을 하셨습니다.
6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목적지는 아버지입니다. 길이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길을 잘못 선택하면 엉뚱한 곳으로 가고 맙니다. 여기저기 방황하다가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게 됩니다. 여행할 때 바른 길을 선택해야 고생하거나 헤매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십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사람들은 하나님께 이르는 길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 않는가 설을 풉니다. 우리가 가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같다고 할지라도 그곳에 이르는 길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 않는가라고 생각을 합니다. 모든 종교가 결국은 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길에 있어서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종교가 섬기는 신은 다 다릅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섬깁니다. 모든 길에는 도가 있습니다. 술마시는 데도 주도가 있고 검을 쓰는 데는 검도가 있고 장사하는 데는 상도가 있습니다. 하물며 한 번밖에 없는 인생에 길이 없겠습니까? 공자는 조문도이면 석사가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길을 찾는 구도자였습니다. 석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곧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진리이십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그대로 되었고 그대로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우리가 어떻게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알려 주실 뿐 아니라 자신이 친히 진리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그는 생명의 근원이시오 영원한 생명의 수여자이십니다. 오늘날 믿는 사람들 안에서도 복음의 절대성이 약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세속주의, 종교다원주의로 인해서 복음이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른 길일지라도 필경 사망의 길입니다. 또 다수가 가더라도 넓은 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 아닙니다. 디모데전서 2:5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날마다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진리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영적인 싸움을 잘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7-15).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고 말씀하시자 이번에는 빌립이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8).” 빌립의 이 요청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소원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면 잘 믿을 것 같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보지 못하더라도 그 소리라도 들으면 잘 믿을 것 같습니다. 그러한 인간의 욕망이 수많은 우상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그 우상들은 다 헛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참된 모습을 왜곡하고 제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볼 수가 없습니다. 설령 하나님을 보여준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육체는 그 빛 앞에 사그라지고 말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두려워서 중보자를 세워 말씀해 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한 것입니다. 모세도 하나님을 보기를 원했지만 하나님의 영광의 일부만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들에게 자신을 계시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 아버지를 본 것입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는 하나이십니다. 우리는 이를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가 하시는 말씀과 행하신 일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이시면서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고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시고 앉은뱅이를 일어나 걷게 하시고 맹인의 눈을 떠서 보게 하신 것은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는 미친 파도와 바람을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자연계와 인간계와 영계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마침내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죽으신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그가 하신 말씀을 믿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러면서 빌립에게 소망의 말씀을 주십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예수님은 빌립이 그를 믿음으로 그가 이 세상에서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하도록 격려하십니다. 빌립은 오병이어 사건 때에 계산만하다가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빌립이 믿음으로 큰 일을 할 것을 바라보십니다. 그가 믿음이 있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13,1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서 구한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을 믿고 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의지해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할 때 주님이 행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믿음이 자라게 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큰 일을 계획하고 시도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믿음으로 선교를 감당하고 병든 자들을 고치고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해 나간 기록입니다. 사도 행전은 끝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시대에 우리의 사도행전을 써나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구함으로 위대한 역사의 발자취를 남기기를 기도합니다. 가장 큰 일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예수님의 계명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으로 예수님의 양을 먹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양을 먹이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서로를 사랑할 때 자기를 나타내십니다. 우리 가운데 약한 자, 병든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바로 주님께 한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약한 자의 모습, 병든 자의 모습,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나타나십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기 힘든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람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셋째, 다른 보혜사(16-31). 예수님은 자신이 떠나신 후에 다른 보혜사를 제자들에게 보내사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있게 하십니다. 다른 보혜사란 성령 하나님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일을 똑 같이 성령께서는 제자들에게 행하실 것입니다. 보혜사는 보호하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가르치시는 선생이라는 뜻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이전에는 단편적으로 알던 지식들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꿰뚫어 알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지식을 주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나신다고 하자 고아와 같이 버려진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보혜사가 오시면 제자들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일생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보호하시고 돌봐주십니다.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연약함을 감당해 주십니다. 그들에게 능력을 부어 주셔서 하나님을 위해서 선한 일을 하게 하십니다. 그들의 마음을 강하게 담대하게 하여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그들에게 지혜를 주셔서 마땅히 행할 길을 알게 하십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성령이 오시자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우리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로 인해서 되어지는 일입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과 우리가 연합하게 하십니다. 그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고, 그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게 하십니다. 그는 사람을 거듭나 새 사람 되게 하십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그의 계명을 지킬 때 아버지께 사랑을 받고 주님이 자신과 함께 하심을 알게 됩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사랑하면 그의 말을 지킵니다. 그의 말을 지키는 사람과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임재를 잘 느끼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할 힘을 주십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믿는 자에게 평강을 주십니다.
27절을 보십시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이 떠나가신다고 하자 제자들은 근심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그의 평안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의 떠나가심을 기뻐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근심을 바꾸어 기쁨이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있는 걱정을 바꾸어 평강이 넘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힘이 있어 믿는 자에게 그대로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일이 일어나기 전에 말씀하셨지만 일이 일어날 때에 그대로 됨으로 그를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에 알게 하려 하십니다. 당장 그는 패배자 같이 보입니다.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잃는 자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정한 승리자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름으로 세상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잃은 자 같으나 다 얻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는 세상에서 어리석은 자 같으나 가장 지혜로운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신 성령은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순종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하고 큰 일을 믿음으로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생명의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요한복음 14:1-31
요절 | 요한복음 14:6
내가 곧 길이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께 이르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엄청난 선언을 하셨습니다. 소크라테스, 공자, 석가는 길을 찾는 사람들이었지 그 길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절대적인 선언은 그가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구원자 중의 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이르는 길이 여럿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요 하나님을 아는 그 진리요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이 시간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밝혀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1-6). 1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는 말씀을 듣고 근심했습니다. 근심이란 바다에 폭풍이 치는 것을 말합니다. 바탕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미래가 갑자기 어두워졌습니다. 예수님이 떠나심으로 인해 자신들이 해 온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회의, 이제까지 해 온 것이 근본적으로 흔들려 버렸습니다. 이제 자신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닌가? 보이는 열매도 없습니다. 손에 잡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이룬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우리도 이제까지 살아온 것이 보람이 없다고 생각할 때 힘이 듭니다. 양들이 한 번에 다 떠나 버릴 때, 목자 생활이 허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제자의 길을 가고자 할 때 이런 위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요동치는 상황에서, 헛 살아온 것 같은데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은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배의 닻을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과 행하신 일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개인 신앙이 자라나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갖도록 도우셨습니다. 목자 예수님이 떠나지만 제자들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다면 예수님도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일하고 계심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떠나가신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자신들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온전하심과 그의 섭리를 신뢰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를 구속하셔서 그의 자녀 삼아주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신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되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 아버지께서 우리를 그의 품에 품어주시고 우리의 앞길을 인도해주시고 보호해주시리라는 것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근심의 실체가 무엇입니까? 내 인생과 장래를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는 불신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랑과 섭리와 인도하심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을 때 진정으로 장래에 대한 근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제자 양성에 대한 근심, 가을 학기 복음 역사에 대한 걱정, 건강에 대한 염려, 취직 걱정, 결혼 걱정, 임신 출산 걱정, 자녀 교육에 대한 근심, 자신의 노후에 대한 근심 등등 우리에게는 쉴 새 없이 많은 근심들이 파도처럼 다가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이런 근심들을 주님께 맡겨버리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있는 근심을 아시고 자신이 아버지 집으로 가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말씀하십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아버지 집은 성전을 말하고 거처는 어떤 모임에서 한 사람이 확보한 위치나 기회, 활동 영역을 말합니다. 지금 있는 성전은 대제사장들과 제사장들이 차지하고 있고 제자들이 일할 수 있는 곳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성령을 보내어 주십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신자들 안에 내주하시면서 교회가 형성됩니다. 교회는 율법이나 제사가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이 중심이 되시는 곳입니다. 교회는 제자들이 일을 할 수 있는 영역이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위해서 일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입니다. 제자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먹고 살기 위해서 할 일이 없을지라도 교회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할 곳은 많이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남북이 평화적인 통일을 이루면 취직문제, 교회의 성장과 부흥에 대한 문제, 안보 문제 등등 수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평화로운 남북통일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집은 평화롭고 안정된 삶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을 예비하러 가십니다. 하늘나라의 영원한 아버지 집에 대한 약속과 소망을 주십니다. 그 집은 제자들이 이 땅에서의 거룩한 순례자의 삶을 마칠 때 돌아갈 영원한 아버지의 집입니다. 그 집은 이 땅에서의 비좁은 집과는 달리 넓고 크고 거할 곳이 많은 화려한 집입니다. 그 집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입니다(고후5:1).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하여 그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셨습니다. 가서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오시리라 하셨습니다. 재림의 영광으로 다시 오시리라 하셨습니다. 다시 와서 제자들을 영접하여 예수님 계신 곳에 영원히 함께 있게 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 조금도 근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의 처소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곧 썩고 더러워지고 쇠하여지고 무너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가슴 속에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산 소망을 심어주십니다. 영원한 아버지 집에 대한 소망만이 참된 푯대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산 소망만이 이 세상에서의 근심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십니다(13:1) 예수님이 가시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요, 좁은 길이요, 생명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길, 믿음의 길을 가십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그가 가시는 곳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그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지만 도마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도마는 목적지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데 그 길을 어찌 알겠냐고 되묻습니다. 도마는 지상 메시아 왕국을 꿈꾸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아버지 집으로 가신다고 하실 때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선교사로 다른 곳으로 가신다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동쪽인지, 북쪽인지, 로마인지 스페인인지 목적지를 알아야 그 목적지에 가는 길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하고 물었습니다. 도마를 포함하여 제자들은 자신들이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하는 회의에 빠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인생의 목적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인생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가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바로 조금 전에 아버지 집으로 가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도마는 목적지조차 알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우문현답을 하셨습니다.
6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목적지는 아버지입니다. 길이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길을 잘못 선택하면 엉뚱한 곳으로 가고 맙니다. 여기저기 방황하다가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게 됩니다. 여행할 때 바른 길을 선택해야 고생하거나 헤매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십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사람들은 하나님께 이르는 길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 않는가 설을 풉니다. 우리가 가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같다고 할지라도 그곳에 이르는 길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 않는가라고 생각을 합니다. 모든 종교가 결국은 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길에 있어서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종교가 섬기는 신은 다 다릅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섬깁니다. 모든 길에는 도가 있습니다. 술마시는 데도 주도가 있고 검을 쓰는 데는 검도가 있고 장사하는 데는 상도가 있습니다. 하물며 한 번밖에 없는 인생에 길이 없겠습니까? 공자는 조문도이면 석사가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길을 찾는 구도자였습니다. 석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곧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진리이십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그대로 되었고 그대로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우리가 어떻게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알려 주실 뿐 아니라 자신이 친히 진리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그는 생명의 근원이시오 영원한 생명의 수여자이십니다. 오늘날 믿는 사람들 안에서도 복음의 절대성이 약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세속주의, 종교다원주의로 인해서 복음이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른 길일지라도 필경 사망의 길입니다. 또 다수가 가더라도 넓은 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 아닙니다. 디모데전서 2:5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날마다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진리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영적인 싸움을 잘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7-15).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고 말씀하시자 이번에는 빌립이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8).” 빌립의 이 요청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소원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면 잘 믿을 것 같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보지 못하더라도 그 소리라도 들으면 잘 믿을 것 같습니다. 그러한 인간의 욕망이 수많은 우상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그 우상들은 다 헛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참된 모습을 왜곡하고 제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볼 수가 없습니다. 설령 하나님을 보여준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육체는 그 빛 앞에 사그라지고 말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두려워서 중보자를 세워 말씀해 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한 것입니다. 모세도 하나님을 보기를 원했지만 하나님의 영광의 일부만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들에게 자신을 계시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 아버지를 본 것입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는 하나이십니다. 우리는 이를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가 하시는 말씀과 행하신 일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이시면서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고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시고 앉은뱅이를 일어나 걷게 하시고 맹인의 눈을 떠서 보게 하신 것은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는 미친 파도와 바람을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자연계와 인간계와 영계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마침내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죽으신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그가 하신 말씀을 믿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러면서 빌립에게 소망의 말씀을 주십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예수님은 빌립이 그를 믿음으로 그가 이 세상에서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하도록 격려하십니다. 빌립은 오병이어 사건 때에 계산만하다가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빌립이 믿음으로 큰 일을 할 것을 바라보십니다. 그가 믿음이 있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13,1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서 구한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을 믿고 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의지해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할 때 주님이 행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믿음이 자라게 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큰 일을 계획하고 시도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믿음으로 선교를 감당하고 병든 자들을 고치고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해 나간 기록입니다. 사도 행전은 끝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시대에 우리의 사도행전을 써나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구함으로 위대한 역사의 발자취를 남기기를 기도합니다. 가장 큰 일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예수님의 계명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으로 예수님의 양을 먹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양을 먹이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서로를 사랑할 때 자기를 나타내십니다. 우리 가운데 약한 자, 병든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바로 주님께 한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약한 자의 모습, 병든 자의 모습,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나타나십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기 힘든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람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셋째, 다른 보혜사(16-31). 예수님은 자신이 떠나신 후에 다른 보혜사를 제자들에게 보내사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있게 하십니다. 다른 보혜사란 성령 하나님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일을 똑 같이 성령께서는 제자들에게 행하실 것입니다. 보혜사는 보호하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가르치시는 선생이라는 뜻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이전에는 단편적으로 알던 지식들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꿰뚫어 알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지식을 주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나신다고 하자 고아와 같이 버려진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보혜사가 오시면 제자들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일생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보호하시고 돌봐주십니다.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연약함을 감당해 주십니다. 그들에게 능력을 부어 주셔서 하나님을 위해서 선한 일을 하게 하십니다. 그들의 마음을 강하게 담대하게 하여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그들에게 지혜를 주셔서 마땅히 행할 길을 알게 하십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성령이 오시자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우리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로 인해서 되어지는 일입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과 우리가 연합하게 하십니다. 그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고, 그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게 하십니다. 그는 사람을 거듭나 새 사람 되게 하십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그의 계명을 지킬 때 아버지께 사랑을 받고 주님이 자신과 함께 하심을 알게 됩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사랑하면 그의 말을 지킵니다. 그의 말을 지키는 사람과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임재를 잘 느끼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할 힘을 주십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믿는 자에게 평강을 주십니다.
27절을 보십시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이 떠나가신다고 하자 제자들은 근심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그의 평안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의 떠나가심을 기뻐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근심을 바꾸어 기쁨이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있는 걱정을 바꾸어 평강이 넘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힘이 있어 믿는 자에게 그대로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일이 일어나기 전에 말씀하셨지만 일이 일어날 때에 그대로 됨으로 그를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에 알게 하려 하십니다. 당장 그는 패배자 같이 보입니다.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잃는 자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정한 승리자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름으로 세상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잃은 자 같으나 다 얻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는 세상에서 어리석은 자 같으나 가장 지혜로운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신 성령은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순종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하고 큰 일을 믿음으로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생명의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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