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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15년 요15강(12:1-36)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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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95회 작성일 15-08-16 23:23

본문

2015년 요한복음 제 15 강
말씀 | 요한복음 12:1-36
요절 | 요한복음 12:24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은 이 땅에 한 알의 밀처럼 떨어지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누려야 할 특권과 영광을 비우고 섬기는 종의 삶을 사셨습니다. 마침내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죄인들을 위한 대속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런 삶의 동기는 우리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는 짧은 생애를 이 세상에서 사셨지만 그가 맺은 열매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의 영향력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그의 본을 따르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한 번뿐인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 시간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 한 알의 밀의 비유를 깊이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부은 마리아.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이 베다니에 이르셨습니다. 이곳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입니다. 거기서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다시 살아난 나사로로 인해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 들었고 잔치는 대 성황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음식 솜씨가 일류인 마르다는 요리를 하고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했습니다. 나드는 동인도의 식물에서 채취되는 향료로 매우 비쌌습니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귀한 손님이 방문하였을 때 손님의 머리에 향유를 한 두 방울을 떨어뜨려 최고의 예를 갖추어 환영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향유를 통째로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이 향유의 값은 3천만원 정도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아끼는 것이 없습니다. 마리아는 너무 귀하여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던, 결혼을 위해서 준비해왔던 비싼 향유를 주님의 발에 남김없이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었습니다. 여자에게 긴 머리털은 그녀의 영광입니다. 발은 일반적으로 종들이 씻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가장 귀한 향유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씻음으로 예수님을 가장 높였습니다. 이 극적인 장면은 보통 사람은 흉내를 내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마리아는 왜 이런 방법으로 주님께 대한 사랑을 표현했을까요? 자신의 죄를 사해주신 죄사함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때마다 주님이 오셔서 말씀을 가르쳐 주심으로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서 알게 되고 영생을 누리게 하신 주님의 은혜가 컸습니다. 오빠 나사로를 죽은 지 나흘 되던 날에 살려주신 주님의 은혜는 무엇으로도 보답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참된 사랑을 알게 되었고 부활 소망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죄 사함을 받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부활의 소망을 갖게 되자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한 미련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결혼도 주님께 맡길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주님께 자신의 전 재산과 같은 향유를 아낌없이 주님께 부어드리고 경배를 드렸습니다. 이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께 대한 경배였습니다. 그녀의 아름다운 헌신은 향기가 되어 방 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풀타임 목자로 헌신하는 자매님들의 주님께 대한 사랑은 귀하고 아름답습니다. 이들은 이 세상보다 오직 주님께 소망을 두고 헌신을 합니다. 물질적인 자립을 하면서 양 치는 일과 온갖 섬기는 일들을 감당합니다. 자신의 장래를 꾸리라는 부모님들의 충고와 책망이 때로는 힘을  빠지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헌신하는 이들을 통해서 학생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목자님들, 사모님들의 헌신은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아름답습니다. 직장에서 뼈빠지게 일하고 가정 교회와 양들을 돌보기 위해서 말씀을 준비하고 가르칩니다. 자녀들을 양육하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양들을 자녀와 같이 사랑하며 섬깁니다. 선교사님들은 이방 문화에 적응하면서 어학과 자립과 선교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자신을 온전히 쏟아 붓습니다. 이런 선교사님, 목자님들의 헌신은 복음의 향기가 되어 이 세상에 구원의 소식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헌신하면 사람들은 꼭 그렇게 까지 극성스럽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느냐? 왜 그 많은 시간을 교회를 섬기는데 소비하느냐? 좀 적당히 하라고 충고합니다. 가룟 유다는 그녀의 행동을 비난했습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가룟 유다의 말을 들어보면 가난한 자들에 대한 사랑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자 요한은 그의 욕심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6).” 가룟 유다는 모든 것을 돈을 기준으로 생각했습니다. 그의 눈에 마리아의 헌신은 쓸모없는 낭비로 보였습니다. 그는 마리아의 마음에 있는 감사와 주님께 대한 사랑을 볼 눈이 없었습니다. 그는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물질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예수님을 따랐지만 그의 말씀을 영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얼마나 귀한 분이신 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의 비난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마리아를 변호하셨습니다. 7,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가만두라는 말은 마리아의 헌신이 계속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저 같으면 네 마음을 알았으니 됐다라고 하면서 중지시킬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리아의 헌신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의 마음을 아셨고 기뻐하셨고 감동하셨고 인정하셨습니다. 마리아를 비난하는 자들에게서 그녀를 보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향유를 붓는 마리아의 행위를 자연스럽게 자신의 죽음과 결부시키셨습니다. 엿새 뒤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지만 이를 아무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리아의 헌신을 통해서 자신이 인류의 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죽음의 길을 가실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향유를 깨어서 드렸듯이 예수님은 우리 죄인들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의 피를 아낌없이 쏟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헌신을 구속 역사 속에서 중요한 자신의 장례를 위한 것으로 받아주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돕고 봉사하는 것도 좋지만 인류 구속 역사 속에서 가장 중요한 십자가 복음을 위해서 드리는 삶이 가장 귀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깨뜨려서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여인이 깨뜨려 드린 향유의 가치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여인이 그리스도 자체를 존귀케 하고 영예를 얻은 것처럼 사도 바울도 빌3장에서 그리스도를 얻고자, 예수님 자체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자신의 몸을 관제와 같이 부어드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생을 주와 복음을 위해서 드림으로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따르고는 있지만 온전히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고 깨뜨리지 못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했을 때 그는 결국 예수님을 은 삼십 냥에 팔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더라도 그 마음 깊은 곳에서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가가 결국은 다 드러나게 됩니다.

  대제사장들은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보고 예수님뿐만 아니라 나사로까지 죽이고자 모의하였습니다. 대제사장들은 대개 사두개인들이었는데 그들은 부활을 부인했습니다. 나사로의 부활은 부활을 부인하는 그들의 교리 체계를 흔들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종교적 기득권이나 입지도 흔들렸습니다. 그들의 존재 기반을 흔드는 예수님과 나사로의 부활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또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는 것을 보고 시기심이 생겼습니다. 그들의 이런 모의는 매우 악했습니다.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쳤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서 다윗과 같은 나라의 영광을 회복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왕들처럼  백마를 타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기대와 달리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셨습니다. 이는 그가 겸손과 섬김의 왕, 평화의 왕으로 오셨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성경에 기록된 것임과 예언의 성취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하였습니다. 무리가 예수님을 왕으로 맞이함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했습니다.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 까지 그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가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인기를 여세로 몰아 얼마든지 정치적인 왕으로 등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뜻을 섬기셨습니다.

  둘째, 열매를 맺으려면 죽어야 합니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었습니다. 헬라인은 그리이스 사람으로 지식과 지성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예들로서 철학과 과학과 문학에 헬레니즘 문명을 꽃피운 사람들입니다. 사도행전 17:21에 보면 모든 아덴 사람들은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 시간을 쓰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과 사상들을 접하고 아는 일에 정열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이런 헬라인 몇 사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왔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추구하는 철학과 인본주의 지식, 세상의 명예와 성공과 우상들로 참된 만족과 행복을 얻을 수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헬라의 수많은 신들을 섬겨 보았으나, 이 신들이 그들에게 생명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헬라의 다신교 숭배와 철학에서 만족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참된 예배의 대상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들은 동방 박사들이 예배하러 베들레헴까지 찾아온 것처럼 예배하러 예루살렘까지 왔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찾는 구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갈릴리 벳세대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원을 했습니다.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기를 원했습니다. 유월절 축제는 우리의 광복절과 같습니다. 8일간의 화려한 축제 기간에 볼 것들이 많았습니다. 성대한 예배와 성가대와 축하 프로그램들이 많았지만 그들은 이런 것들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멋진 축제를 즐기고 세상 지식과 문화를 즐긴다 해도 결코 구원과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참된 생명, 행복, 빛, 자유는 오직 예수를 보는 데 있습니다. 예수를 볼 때 우리는 진리를 찾아 방황하는 삶을 그치고 평안과 안식을 얻게 됩니다. 예수를 볼 때 참된 예배의 삶을 살게 됩니다. 참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이 말은 진정 모든 인생들이 추구해야 할 절대적인 삶의 방향이 되는 말입니다.

  빌립은 헬라식 이름이었기 때문에 헬라인들이 접근하기가 쉬웠던 것 같습니다. 빌립은 예수님께 직접 나아가 아뢰지 못하고 안드레에게 이 소식을 알렸습니다.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님께 가서 아뢰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말을 들으시고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영광은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는 헬라인들이 추구하는 것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예수님을 뵙고자 하는 헬라인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인자의 영광의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헬라인에게 보여주고자 하시는 그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새로운 지식이나, 사상이나 철학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영광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수치요 고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자가 수치를 당할 때, 고통을 당할 때가 왔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영광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유대인의 진정한 왕이심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수치와 고통으로 보이지만 내용을 보면 영광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 너머에 있는 영광을 보셨습니다. 그것은 죽음과 죄를 정복하고 부활과 영생의 길을 열어 놓는 영원한 영광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헬라인들은 헤아릴 수없이 많은 열매들의 전조였습니다. 그 열매들은 예수님의 죽음으로서만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들 가운데 첫 열매가 맺혀질 것을 보시고 당신의 영광이 가까웠음을 말씀하십니다. 또한 십자가의 죽음은 헬라인들에게 매우 적합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생명의 이상을 자기희생 안에서가 아니라 아름다움, 힘, 자기만족 안에서 구하였습니다. 자기를 죽이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그들 민족에게 가장 결여되었던 가르침이었으며 동시에 가장 필요한 가르침이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사형수에게 내려지는 수치스럽고 비참한 형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질 인류 구속 역사의 완성을 바라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은 자기를 완전히 비우고 무장해제를 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구원 역사를 이루십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중보 사역은 어렵고 힘들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을 재창조하는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는 세상 만민으로부터 찬양과 경배와 영광을 받으셔야 마땅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아무리 시간이 많이 흘러도 한 알 그대로입니다. 이집트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한 알의 밀은 수천년이 지나도 그대로입니다. 사람들이 그 밀을 땅에 심었더니 싹을 틔웠다고 했습니다. 만약 그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었다면 수천년 동안 엄청난 열매를 맺었을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시간이 지난다고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열매를 맺을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처음에는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흙으로 덮여 햇빛과 비를 맞으면 그때 비로소 부드러워지고 부피도 팽창됩니다. 밀알이 땅에 심기울 때 밀알 그것은 죽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묻힌 장소는 부활의 장소로 변합니다. 한 알의 밀이 죽으면 대략 100~120개의 밀알이 맺힌다고 합니다. 이 밀알을 다시 땅에 심으면 이듬해에 1만개의 밀알이 맺힙니다. 이것을 다시 심기를 반복해서 5년이 지나면 일만 7천 가마의 밀알이 열매로 맺힙니다. 이 밀알로 밀밥을 해 먹으면 장정 200명이 34년 동안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를 볼 때 밀알 하나가 가진 잠재력과 가능성은 참으로 놀라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알의 밀이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이렇게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은 고통과 희생을 의미합니다. 누구도 희생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희생과 죽음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 밀알의 진리는 바로 예수님의 생애에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알로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하늘나라의 황태자로서 존귀와 영광과 섬김을 받던 자리에서 목수 요셉의 집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일생 헌신과 희생과 섬김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갈릴리에 묻혀서 사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이로서 많은 죄인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보존하는 길이 무엇입니까? 25,26절을 보십시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자기 생명을 미워한다는 것은 자기애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최대의 원수는 바로 자기 사랑입니다. 우리는 매순간 자기와의 싸움을 해야 합니다. 자기 부인을 해야 합니다. 감정과 정욕이 죽어야 거룩함의 열매가 맺힙니다. 자존심이 죽어야 겸손의 열매가 맺힙니다. 고난을 받고자 하고 희생하고자 하여야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생명이 역사하기 시작할 것이고, 많은 방황하는 영혼들이 생명의 열매로 맺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한 알의 밀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어떠했습니까? 27절을 보십시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죽음 앞에서 예수님은 괴로우셨습니다. 희생과 죽음을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죄로 물들고 죄로 인하여 그 마음이 어두워져 있습니다. 마음이 굳어 죄의 결과인 사망의 비참한 진상을 깊이 느끼지 못하고 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죄한 분으로 죽음의 진면목을 깊이 느끼고 심히 고통스러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오셨음을 아셨습니다. 그는 아는 것으로 멈추지 않았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 자신을 온전히 버리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기도란 무엇인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참된 기도란 나의 연약함을 진실하게 아뢰는 것이며, 이 연약함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십자가를 질 힘을 주시도록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육의 소원을 정복하고 순종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기도를 받으시고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음을 아셨습니다.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고 그가 십자가에 높이 들리심으로 모든 사람을 그에게로 이끄십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고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셨습니다.

  한 알의 밀과 같은 우리 각 사람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생명력과 수많은 열매를 맺을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죽어야 합니다. 죽는 것은 아픔이 따릅니다.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죄의 소욕을 죽이는 아픔이 있습니다. 이기심과 음란과 거짓과 속임과 교만 등 죄를 죽이는 것은 말씀을 공부하고 순종함으로 이루어집니다. 말씀을 따라 살 것인가 죄의 소원을 따라 살 것인가 그 결과는 성령의 열매를 맺든지 쭉정이 같은 인생이 되는 것을 나타납니다. 나 한 사람이 속이 찬 열매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부인과 영적 투쟁에 따르는 남 모르는 아픔이 따릅니다. 목자가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제자로 양육하고 그 생명이 다시 다른 생명을 낳기 까지는 자존심을 죽이고, 사랑의 수고를 하며, 희생하는 아픔이 따릅니다. 한 사람을 얻어 제자로 키우는 과정은 자기가 죽는 과정이 반드시 뒤따릅니다. 제자 양성의 열매는 생명을 희생한 결과이기 때문에 귀한 것입니다. 생명이 생명을 낳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이 있기에 우리는 자신있게 죽을 수 있습니다. 위대한 진리는 생명은 죽음을 통해서 오고 영광은 겸손을 통해서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자기가 죽을 때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믿음과 소망을 굳게 붙잡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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