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주일말씀 성경별메시지 심포지엄 성경 검색
문제지 성경별문제지

요한복음 2015년 요14강(11:1-44)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99회 작성일 15-08-09 14:07

본문

2015 요한복음 제 14 강
말씀 | 요한복음 11:1-44
요절 | 요한복음 11:25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증거합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7대 표적 중에 마지막이요 최고의 표적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자신이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의 예표로 삼으십니다. 우리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고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1-16).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였습니다. 그는 부모님을 잃고 두 자매가 의지하는 그 가정의 기둥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여인으로서 당시 사회에서 유명했던 것 같습니다. 세 사람 중에 그 이름이 먼저 기록된 것을 볼 때 당시 신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두 자매는 오라버니가 병들어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 동네에서 퀵 서비스가 가장 빠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예수님께 이 소식을 전달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이 말씀만 전해도 그들은 예수님께서 두 말 없이 달려올 줄로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마다 이 가정에 들러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식사 대접을 받으시며 아름다운 교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예수님과 이 가정 사이에 깊은 사랑의 관계성이 맺어져 있었습니다(5). 두 자매는 예수님께서 빨리 오셔서 오라버니를 살려 주시기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는 말은 영어 성경을 보면 “This sickness will not end in death.”라고 했습니다. 이 병은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나사로가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 때문에 예수님이 지체하시는 것으로 인해 애간장이 타들어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죽는다고 끝이 아니라니 매우 태평한 말씀 같이 보입니다. 지금 상황을 너무나 모르시는 말씀 같이 들립니다. 그러니 원망과 불평이 나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틀을 더 유하심으로 마리아와 마르다의 요청을 묵살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면 새로운 관점이 생깁니다. 비록 죽음이라 할지라도 이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영광을 나타내실지 기대가 됩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마르다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고자 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때로 받아들이기가 힘듭니다. 병든 부분을 수술할 때 고통이 따르지만 그 결과 건강한 신체를 갖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이 아프지만 잠시 후 그 영혼이 건강해지고 강건해진다면 마땅히 그런 사랑을 해야 합니다. 이는 감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진리에 기초한 사랑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오라버니의 죽음이라는 아픔이 있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 부활신앙을 심기를 원하셨습니다.
 
  문제가 생길 때 우리는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가 생각하며 낙담하기 쉽습니다.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일이면 절망을 합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절망하게 되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자포자기하게 됩니다. 우리는 절망적인 문제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자 하는 믿음의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생각을 한다고 상황이 달라질 것인가 회의하기 쉽지만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행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시각의 차이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수영 선수들이 스타트를 할 때 물을 보는가 자기 배꼽을 보는가에 따라서 입수하는 자세가 전혀 다르게 나옵니다. 물을 보면 100% 배치기를 해서 배가 빨갛게 변합니다. 그러나 자기 배꼽을 바라보고 물 속에 뛰어 들면 소리도 크게 나지 않고 멋있게 입수를 하게 됩니다. 우리가 문제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무슨 문제만 생기면 큰 일 났습니다. 큰 일 났네. 호들갑을 떨면서 근심과 염려에 빠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태평한 자세로 방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둘 다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틀을 더 유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서 무엇을 어떻게 하고자 하시는지 알고자 기도를 하셨을 것입니다. 서두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때를 지나침이 없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일하셨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매달, 매일 끊임없이 크고 작은 문제가 생깁니다. 목자님들이 직장이나 가정이나 교회에서 자신이 맡은 바 일들을 감당하다보면 문제꺼리들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인간관계의 문제, 해결해야 할 돈 문제, 치러야 할 시험, 질병과 죽음 등등 다양한 문제들에 부딪치게 됩니다. 일어난 문제와 해결해야 할 일들만 생각하면 사는 것이 피곤하고 힘듭니다. 그러나 이런 크고 작은 문제들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하시고 어떻게 그의 영광을 보여 주실지 기대하면서 산다면 삶의 태도가 적극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또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이런 문제꺼리들이 있는 것입니다. 죽으면 문제꺼리들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문제들 속에서 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배우고 그 영광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이틀이 지난 후에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놀라면서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두려움을 표현했습니다. 제자들은 돌에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렸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이 계시면 낮인 것이며, 넘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계시기에 제자들은 넘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한 제자들은 안전합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10절에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왜 두려워합니까? 그들의 마음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빛이 없는 사람은 밤에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해가 중천같이 떠 있는 때일지라도 예수님이 없는 그 마음은 어둡습니다. 두려움이 지배합니다. 지금 제자들의 마음이 그랬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없을 때, 두려움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실족하게 됩니다. 반면 내 안에 예수님의 빛이 가득하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밤에 다니지 않고 낮에 다닙니다. 내 안에 빛이 있습니까? 나는 낮에 다니고 있습니까, 아니면 밤에 다니고 있습니까? 우리 안에 빛 되신 예수님이 거하십니다. 하늘에 별이 있고 내 안에 빛이 있습니다. 내 속에서 빛이 나와서 판단하고 분별합니다. 우리는 이 빛을 이성, 판단력, 바른 진리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빛 되신 예수님이 내 안에서 이런 빛을 비추어 주시므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그들 안에 예수님이 없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내 안에서 문제를 풀어 나갈 수 있는 빛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빛되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왜 다시 유대로 가야 하는지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1).” 제자들은 나사로가 잠들었으면 낫겠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밝히 이르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예수님은 거기에 있지 아니한 것을 제자들을 위하여 기뻐하셨습니다. 이는 그들로 믿게 하려 함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나타낼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에게로 가자고 하자 평소에 의심이 많던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나사로를 살리러 가는 것은 좋은데 왜 우리가 죽어야 하는가? 제자들은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걱정 근심 두려움에 빠지면 그 문제에 사로잡혀 본질을 파악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도마의 말은 용기가 있어 보이지만 사실은 속으로 떨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간 것이 우리에게 본이 됩니다.

  둘째,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17-38). 예수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었습니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오라버니의 죽음으로 너무 상심한 나머지 움직일 기력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원망의 말을 쏟아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식사하실 때는 빨리 빨리 오시더니 내 오라버니가 죽어간다는 소식을 전했는데도 어찌 함흥차사이셨습니까? 너무 섭섭하고 야속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님은 이런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살리겠다는 것인데 마르다는 까마득한 미래에 일어날 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과거와 미래 속에 있을 뿐 현재와는 상관이 없는 듯이 보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고 말하면서 현재 부딪치는 문제들을 간과해버리고 해결은 미래의 일로 치부해 버린다면 믿음은 아무 힘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믿음은 공허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믿음이 꼭 현실 문제 해결에 관계된 것만은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도 우리의 믿음에 속한 것입니다. 또 어떤 유익이 있어야만 믿음이 정당화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우리의 현재 삶과 깊이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물으심으로 지금 믿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마르다는 부활이 마지막 날에 있을 것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지금 내가 바로 부활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부활이 마지막 날에 있을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시간을 초월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지금 영생을 사는 것입니다. 지금 부활의 생명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영생은 우리가 죽은 다음에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부활의 새 삶을 얻게 됩니다(고전15:22). 5:24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 안에는 죽음이 없습니다. 종말 때에 있을 부활이 현재 와 있습니다. 물론 믿는 사람도 생물학적인 죽음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생물학적인 죽음이 우리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죽지 않는다는 말씀은 바로 내 안에 영생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더라도 마지막 날 일어납니다. 지금 믿는 사람들에게 이 일은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것이 이미 우리 안에 시작되었고 주님은 이미 우리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마르다는 고백했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힘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찾아가서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고 전했습니다. 마리아는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사람은 인격적인 초대 앞에 마음이 움직이고 힘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우울한 마리아를 그냥 집에 앉아 있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마리아가 움직이도록 도우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원망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시는 모습이 성경에 세 번 나옵니다. 이 장면과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그들이 당할 심판을 생각하시며 우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며 우셨습니다. 여기서 우시는 모습은 사망 권세 아래 흐느끼는 영혼들을 볼 때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죽음의 고통과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의 모습에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히4:15)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이 죽음으로 인해 당하는 고통과 슬픔을 아십니다. 내가 겪는 아픔과 슬픔을 아시며 불쌍히 여겨 주십니다. 사실 사람의 슬픔은 누구와도 나누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누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가장 잘 아십니다.

  유대인들이 이를 보고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말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비꼬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이런 죄악으로 인해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셨습니다. 이는 영적인 분노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있는 그들의 죄와 예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 의미를 두지 않는 그들에 대해서 분노하셨습니다. 오지 않은 예수님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제기하지만 오신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그들의 태도는 이율배반적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넘어설 수 있는 분이신데 그들은 예수님을 무시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셋째, 나사로야 나오라(39-44). 예수님은 무덤 앞에까지 가셨습니다. 그리고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방금 전에 믿는다고 신앙 고백을 했던 마르다가 말했습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마르다의 말은 죽은 사람을 가지고 어쩌자는 것입니까? 시체가 썩어서 냄새가 나는데 죽은 자에 대한 예의나 지켜주세요 라는 말로 들립니다.  마르다는 현실 앞에 불신이 들어왔습니다. 사실 이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는 믿음이 생기다가도 냄새를 맡으면 믿음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죽음의 냄새를 맡으면서도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이요, 죽음의 냄새 속에서 생명의 향기를 맡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불신의 말에 동의하시기보다 강하게 책망하십니다. 4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우리는 불신을 회개하고 주님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내 마음에 있는 불신의 돌을 옮겨 놓아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실 때 때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들이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셨습니다. 죽은 자를 부르신 것입니다. 죽은 자라 할지라도 그의 음성을 들으면 살아납니다. 주님은 생명의 주관자이십니다. 사람의 살고 죽는 것이 그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세 있는 명령에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는 이 예수님의 음성은 우리를 또한 부르시는 소리입니다. 우리도 겉으로는 멀쩡히 살아있지만 스스로 무덤을 만들고 들어앉아 있을 때가 많습니다. 큰 돌로 입구를 딱 막고 아무도 들어오지 마! 하며 살 때가 많습니다. 무덤은 다른 게 아닙니다. 힘든 현실문제 앞에 한숨만 쉬며 사는 것이 무덤에 사는 것입니다. 꿈을 잃어버리고 현실의 작은 문제로 고통하며 사는 것이 무덤에 사는 것입니다. 먹고사는 것에만 집착하여 사는 것이 무덤에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맡기신 양들을 향한 사랑은 잊고 나만을 위해 사는 이기적 삶이 바로 무덤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덤에서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죽어서 냄새가 나고 남에게 슬픔만 안겨줄 뿐입니다.

  본래 우리는 어떤 존재들입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존재들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쓴 편지요, 복음의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며 사는 존재들입니다. 꿈이 있고 자신감과 열정이 넘치는 생명력이 있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존재로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에 저희가 무덤에 갇혀 썩어가길 원치 않으십니다. 죽음이 주는 두려움 속에서 살수는 없습니다. 당당히 빛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며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 어떤 세상풍파에서도 결코 주눅 들지 말고 꿈을 향하여 힘차게 전진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도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어떤 절망의 무덤, 불신의 무덤 속에 있습니까? 내 이름을 부르며 그 절망의 무덤에서 나오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엘리야야 나오라.” 학생 제자 양성에 대한 한계의식 속에서 나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우리는 봄 학기 부활 신앙을 덧입고 바이블 까페를 믿음으로 이루었습니다. 여름 수양회에 몇 명의 학생들이 참석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수양회 이후 학생들 가운데 일어난 말씀 역사를 인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이들의 마음에 영적인 소원을 불러 일으켜 주시고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가을 학기에도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믿고 우리가 살며 생명을 살리는 일에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첨부파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323건 36 페이지
주일메시지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798 요한복음 이엘리야 118 09-27
797 요한복음 이엘리야 106 09-20
796 요한복음 이엘리야 99 09-13
795 요한복음 이엘리야 127 09-06
794 요한복음 이엘리야 104 08-30
793 요한복음 이엘리야 93 08-23
792 요한복음 이엘리야 96 08-16
열람중 요한복음 이엘리야 100 08-09
790 요한복음 이엘리야 109 08-02
789 요한복음 임요한(종수) 82 07-19
788 요한복음 이엘리야 98 07-12
787 요한복음 이엘리야 93 07-05
786 요한복음 이엘리야 105 06-28
785 요한복음 이엘리야 100 06-21
784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21 06-14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