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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15년 요13강(10:1-18) 나는 선한 목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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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08회 작성일 15-08-02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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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요한복음 제 13 강 
말씀 | 요한복음 10:1-18
요절 | 요한복음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오늘 말씀에는 아름다운 목자상이 나타납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는 매우 친밀하고 아름답습니다. 목자는 양을 알고 양도 목자를 잘 압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릅니다.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점에서 선한 목자가 되십니까? 우리가 선한 목자 예수님을 배우는 가운데 우리도 하나님께 인정받는 목자로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목자가 되기 이전에 먼저 좋은 양이 되어 그의 음성을 듣고 따름으로 풍성한 생명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본문은 9장에서 날 때부터 소경되었던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이후 예수님이 종교지도자들에게 박해를 받으시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주신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 목자와 강도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지 말씀하십니다. 먼저 양에게 접근하는 방식이 목자와 강도가 다릅니다. 목자는 문을 통해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만 강도는 다른 데로 넘어갑니다. 다른 데란 어디를 말할까요? 담을 넘든지 개구멍을 통해서 들어갑니다. 절도와 강도는 양을 훔쳐서 팔아먹거나 털을 깎고 잡아먹고자 합니다. 그러나 목자는 양을 돌보고 보호하고 꼴을 먹이고자 다가갑니다. 9장을 참고해 볼 때 바리새인들은 소경의 죄를 중심으로 접근하고, 예수님은 하나님이 그를 통해 일을 하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접근했습니다. 강도들은 율법이나 전통으로 접근해서 그를 지배하려고 합니다. 아니면 강도들은 사람의 일을 중심으로 다가갑니다. 다른 신의 이름으로 다가갑니다. 양은 자신에게 접근하는 사람이 문을 통해서 들어오는지, 다른 데로 넘어오는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면 선한 목자는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선한 목자는 양들에게 풍성한 꼴을 먹입니다. 목자가 오면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습니다. 목자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냅니다. 목자는 양의 성격과 특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양도 목자의 음성을 기가 막히게 잘 알아듣습니다. 다른 사람이 목자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접근하면 도망을 갑니다. 목자가 양들의 이름을 부르는 이유는 우리 밖으로 끌어내기 위함입니다. 나가서 풀을 먹이고자 부릅니다. 나가서도 이곳저곳으로 인도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소경을 율법의 세계, 전통의 세계에 가두어 두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의 세계, 진리의 세계로 나가서 자유롭게 살도록 하십니다. 예수님은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율법의 세계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양의 우리 안에는 있는 풀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벌써 베어진 풀입니다. 그러니 신선하지 않습니다. 대개 말라버린 풀입니다. 그러나 밖으로 나가면 신선한 살아 있는 풀을 먹을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으면 안전하기는 하지만 활동에 한계가 있습니다. 운동을 하지 못합니다. 밖에 나가면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밖에서도 예수님의 음성만을 듣고 따르면 생활이 자유롭고 풍성한 꼴과 맑은 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운동을 하면서 건강하게 자랄 수 있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어떻게 인도하십니까? 4,5절을 보십시오.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목자는 양을 돼지 같이 뒤에서 몰지 않습니다. 우리에서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갑니다. 앞서 간다는 것은 본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푸쉬하지 않고 조용히 본을 보입니다. 또 앞장 서서 꼴이 있는 곳으로, 안전한 곳으로 인도합니다. 때로는 꼴을 찾아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기도 합니다. 광야에서 햇볕이 따갑게 내리 쬐이지만 목자는 양들이 쉴 만한 바위 그늘을 잘 알고 인도합니다.

  목자는 양들을 우리 밖으로 내 보내서 개인 신앙이 자라도록 도와야 합니다. 양들이 커갈수록 목자의 영역을 좁혀야 합니다. 그들의 믿음을 주관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성장해 갈수록 동역자로 삼아 함께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에 듣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자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는 시간적 역사적 인물들을 뜻하기 보다는 예수님 앞을 막고 양들이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바리새인들이나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9절을 보면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을 통해서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들어가며 나오며 자유롭게 신선한 생명의 꼴을 얻습니다. 풍성한 삶이 그 안에 있습니다. 양은 배불리 먹고 양들 간에 생긴 긴장이 풀리고 병이 나음 받아야 잠을 제대로 잔다고 합니다. 잘 먹고 잘 쉬면서 양들은 성장합니다. 예수님은 양들이 양적으로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 차고 넘치는 삶을 살도록 하십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2).”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자유가 있고 풍성한 섬김이 있고 넘치는 사랑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자기 한 사람 겨우 살아가는 빈곤한 삶이 아니라 생명이 풍성하여 다른 사람에게 마음껏 나누어 주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의 말씀으로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풍성한 삶 살지 못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즉 우리가 도둑에게 생명을 자꾸 빼앗기며 살기 때문이 아닐까요?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따른다면 주님이 오신 목적처럼 우리 삶에 하늘의 풍성함이 넘쳐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둘째,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십니다. 목자 생활은 아름답지만 쉽지만은 않습니다. 양들을 돌보기 위해서 사랑의 수고와 희생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시고,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그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선한 목자와 삯군의 바로미터는 희생에 있습니다. 선한 목자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주어서 양을 살립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하늘보좌를 버리셨습니다. 인기와 영광을 버리고 생명을 바쳐서 양인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또한 선한 목자는 양들의 생명을 늑탈하는 이리떼와 생명을 바쳐서 싸우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바리새인들의 시험과 핍박을 받으셨습니다. 사탄과 영적인 싸움을 싸우셨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는 선한 목자 예수님을 알고 믿고 따릅니다.   

  반면에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게 됩니다.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목자는 백성의 지도자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못된 목자가 많았습니다. 몰각한 목자가 있었습니다. 이사야 56:11절은 말씀합니다.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이든지 자기 이만 도모하며” 그들은 자기만 먹이는 목자들입니다. 그들의 이런 이기심으로 인하여 양들은 흩어집니다. 관심이 양들에게 가 있기보다 자신의 행복에 있기 때문에 양들을 방치하는 것입니다. 양들에게 말씀의 꼴을 먹이지 않습니다. 양들이 꼴을 먹든지 말든지 관심이 없습니다. 양들에게 꼴을 먹여도 말라버린 풀을 주거나 알아서 먹도록 합니다. 양은 눈이 좋지 않아서 풀이 있는 곳을 잘 보지 못합니다. 그러니 양들이 비실비실 힘이 없습니다. 병들게 됩니다. 이런 목자들에게는 심판이 뒤따를 것입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목자가 양을 알되 목숨을 버릴 정도로 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목자는 양의 문제를 알 뿐만 아니라 양이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목자는 양의 연약함과 죄를 알기 때문에 희생적으로 섬깁니다. 예수님은 흠이 없고 빌라도가 아무 죄도 찾지 못할 정도로 깨끗했지만 십자가에 죽기까지 양들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나를 향한 그의 뜨거운 사랑 때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고 하나 되고자 하시는 사랑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영접할 때 예수님과 하나 되고 사랑의 관계가 깊어집니다. 주님과 나의 관계는 이해관계가 아닙니다. 사랑과 신뢰의 관계입니다. 부부사이처럼 언약으로 맺어진 관계요, 부모와 자식의 관계처럼 생명으로 맺어져서 깊이 신뢰하고 따릅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고 상호적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아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압니다. 주님의 사랑과 능력을 알고 믿습니다. 또 일생 동안 주님을 알아 갑니다. 스스로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님께 나아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목자가 양을 알고 양도 목자를 안다는 것은 체험적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친밀한 사랑의 관계성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같은 목자가 되는 것을 매우 아름답고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벽에 걸려 있는 양을 안고 있는 목자 예수님의 모습을 목자의 이미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아름다운 이미지 뒤에 있는 목자의 희생에 대해서 간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의 목적이 양을 돌보는데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의 인생의 목적은 자신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만족이나 자기 성취나 인격 완성이 아니었습니다. 전적으로 그의 양들을 돌보는 것이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목숨을 양들을 위해서 버리기 까지 양들을 사랑하고 섬깁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목자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4-6).” 예수님께서 자기 목숨을 버린다는 뜻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많은 사람을 살리실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양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자기 것을 조금도 꾸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순수하게 양들을 돌보셨습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은 양을 치기 위해서 시간과 물질과 자존심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말구유에 태어나셨고 일생 동안 죄인들의 친구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양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팔아먹고 배반하는 양들을 위해서도 기꺼이 죽으셨습니다.

  셋째, 선한 목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온전히 순종합니다. 예수님은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까지 인도하고자 하십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고 역사가 진행되면서 복음을 전해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만민의 구주이십니다. 우리나라에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목자장 되신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버리시는데 그것은 다시 얻기 위함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십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은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하십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하나님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성부와 성자의 깊은 사랑이 흐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목숨을 누가 빼앗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누구에게 빼앗김이 아니라 자발적 순종입니다. 이는 아버지께 받은 계명에 대한 순종입니다. 예수님은 목숨을 버리고 다시 얻으십니다. 그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은 슬픔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보다 더한 사랑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한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요 영광입니다. 우리가 이번 여름 수양회에서 배웠듯이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요, 생수의 강이시요, 세상의 빛이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사랑 때문에 우리도 주님을 생명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결론적으로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들을 알고 양들에게 풍성한 꼴을 먹이십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살리기 자기 목숨까지도 희생하십니다. 양과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자기 생명을 희생해 하늘 생명을 풍성히 주십니다. 선한 목자는 하나님의 좋은 양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절대 순종합니다. 나에게 이런 본이 되는 목자가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이 세상에는 우리의 생명을 빼앗고자 하는 도둑들, 강도들, 삯꾼들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험한 세상에서 나의 인도자요, 보호자요, 공급자가 되어 주십니다. 자신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살리시는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의 이 사랑을 영접하고 그를 따를 때 생명이 풍성해 지며,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더 나아가 세상을 살리는 작은 목자들로 성장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선한 목자 예수님을 일생 배워가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선한 목자가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인해서 주님이 주시는 생명을 누리지 못한다면 이는 영적인 교만입니다. 우리는 목자 이전에 그의 좋은 양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목자로서 부족한 자신을 깊이 회개합니다. 생명의 꼴을 공급하고 희생하는 데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 선한 목자의 음성을 주의해서 듣고 따르는 가운데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선한 목자를 보내어 주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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