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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15년 요4강(3:1-21) 거듭남과 하나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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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99회 작성일 15-06-21 14:46

본문

2015년 요한복음 제 4 강
말씀 | 요한복음 3:1-21
요절 | 요한복음 3:3

 거듭남과 하나님 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과 니고데모가 나눈 대화인데 주제는 거듭남과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경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죄와 죽음 문제가 해결된 행복한 삶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중요한 주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니고데모는 어떤 사람입니까? 니고데모는 대표적인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지도자요 선생이요 큰 부자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모든 것을 다 성취한 성공한 사람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행복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종교적으로 바리새인으로서 하나님을 위한 열심을 가지고 어린 시절부터 율법을 배우고 준행했습니다. 그는 72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으로서 이스라엘의 지도자였습니다. 이는 종교와 정치와 입법 행정을 모두 총괄하는 권세가 있는 자리였습니다. 또한 그는 선생입니다.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선생입니다. 그는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는 부자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모든 것을 소유하였지만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 나라가 없었습니다. 그는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밤에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가 밤에 예수님께 나아왔다는 것은 업무가 바빠서 그럴 수 있지만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 였을 것입니다. 그는 밤에라도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함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가 우연히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고 의도적으로 나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추구해온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특별한 지식이나 학문, 철학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돈도 그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나아와 아뢰었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2).” 그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능히 자신이 바라는 것들을 이루실 줄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오기를 소망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니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보니 하나님 나라에서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는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가르치고 준행해보니 하나님의 통치가 있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바리새인의 삶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정치인으로서 율법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가지고 오고자 했는데 잘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니 예수님은 하실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어떤 표적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전혀 새로운 방법 즉 거듭남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거듭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거듭난다는 말은 다시 태어난다,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거듭나야 한다고 하지 않고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니고데모는 많은 일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니고데모의 모든 수고로도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었습니다. 많은 고민을 하고 정치를 잘하고 열심히 뛰고 선한 일을 했다 해도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거듭나는 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말은 유대인 전체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거듭남으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보게 됩니다. 거듭나야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됩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라는 질문에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입니다. 사람은 사람을 낳고 호랑이는 호랑이를 낳듯이 거듭나는 것은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물은 씻는 것입니다. 동시에 물로 세례를 받을 때 물 속에 잠김으로 죽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 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은 죽고 새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까지의 모든 것은 죽어야 합니다. 자기가 죽고 하나님이 왕이 되셔야 합니다. 거듭남은 옛 자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거짓된 자아, 죄악된 자아, 땅의 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육적인 자아의 껍데기를 벗는 것이요, 속 사람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가치관, 세계관, 인생관이 통째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땅에 속한 사람이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이 영에 속한 사람으로 달라집니다.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됩니다. 그런 사람은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고 위의 것을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내 마음 중심에 모시고 살던 것이 자기였는데 나 대신 예수님이 마음의 왕좌에 앉는 것입니다. 또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썩고 더럽고 쇠하는 세상 나라를 내려놓고 하늘에 간직한 기업을 추구하게 됩니다(벧전1:3). 그러므로 거듭남은 새로운 피조물, 즉 새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본질적인 변화요, 혁명적인 변화입니다. 삶의 외적 조건이나 지위, 피상적인 요소가 달라진다고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새롭게 탄생하는 중생이 필요합니다. 이런 모든 일을 성령께서 하십니다. 거듭남은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부어 주시는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로 가능합니다. 성령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실 때 그 사람의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더러운 마음을 정결케 하십니다. 율법을 행할 능력을 공급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실 때 우리는 자기 죄의 심각성을 자각하게 됩니다. 거듭날 때 믿음이 생깁니다. 거듭날 때 삶이 변화됩니다. 거듭남은 순간적이요 단회적인 것이지만 일생 동안 거룩한 사람으로 자라납니다.

  예수님은 왜 죄 문제가 심각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거듭남을 가르치지 않으시고 모범적인 유대인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을 이야기 하실까요? 바리새인들을 비롯해서 정통적인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율법생활을 통해서 당연히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는 신분고하, 남녀노소, 종교적인 의로움과 악함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이 다 거듭남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는 율법의 한계를 드러내시고 십자가 복음을 믿음으로서 거듭나는 성령의 역사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함을 가르치고자 하십니다. 거듭남을 통한 성령의 역사는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벧전1:23절에 보면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받을 때 거듭납니다.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영접하고 만날 때 거듭납니다.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듣고 놀랍게 여기는 니고데모를 위해 예수님은 바람의 비유를 드셨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듯이 영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이 바람을 조종하지 못하고 그 기원과 방향을 알 수 없듯이, 성령의 거듭남도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바람은 자유롭고 예측 불가능하듯이 성령의 역사도 틀이 없고 매이는 것이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도 자유함이 있고 예측할 수 없게 이루어집니다. 언제 어떤 말씀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지 모릅니다. 바람은 힘이 있어 폭풍도 불게하고 시원한 강 바람을 불게 하듯이 성령도 어떤 사람은 강하고 분명하게 변화시키고 어떤 사람은 자기도 알게 모르게 변화시키십니다. 바람은 여러 가지가 있듯이 거듭나는 모습도 다양합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은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급격하게 변화된 사람입니다. 이에 비해 디모데는 어릴 적부터 성경을 공부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변화가 되어 하나님의 역사에 귀히 쓰임 받았습니다. 보통 우리 목자님들은 거듭나기 전과 후가 분명한데 2세들은 태어날 때부터 신앙적인 환경 가운데서 자라나다보니 그 구별이 분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 거듭났는지 아닌지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거듭나지 않았는데 거듭난 것처럼 말하거나 행동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거듭남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판가름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존 뉴톤은 아주 어린 시절 영국의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났는데, 여섯 살 때 고아가 되어 기독교 가정이 아닌 친척집에서 살았습니다. 그곳에서는 기독교가 놀림을 받고 그는 핍박을 받게 되어, 이런 가정 환경에서 탈피하기 위해 그는 바다로 도망쳐 영국 해군의 견습 선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도 떠나 아프리카로 달아났고, 아프리카에서 포르투갈인 노예 상인과 협력하였으나 그의 집에서 매우 잔인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젊은 뉴톤은 이 같은 대접을 피해 해안으로 달아나 구조를 요청하는 불을 피웠고 마침 영국으로 돌아가던 노예선에 발견되어 그 배의 조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자리조차 지킬 수 없었습니다. 항해 중에 그는 럼주를 보관해둔 창고에 몰래 들어가, 그것을 선원들에게 나누어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다 취하게 되었습니다. 인사불성이 된 그는 바다에 빠지게 되었고, 선원 중의 한 사람이 작살로 그를 찔러 건짐으로써 겨우 익사 상태에서 구조되었습니다. 이 일로 그의 넓적다리에는 주먹 크기의 흉터가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뉴톤이 타고 있던 배가 스코틀랜드 근처에서 항해가 거의 끝날 무렵 큰 폭풍을 만나 배는 항로를 벗어나 가라앉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배가 가라앉아 물에 빠져죽고 말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때 그는 어린 아이였을 때 배웠던 말씀들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그 말씀들을 떠올렸을 때 그는 기적적으로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그 후로 그는 영국의 위대한 설교가이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이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 존 뉴톤이 다음의 찬송가를 지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구원은 그것을 받을 만한 공로가 없는 이에게 그러므로 바로 당신과 나에게 주어집니다.
 
  니고데모는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라고 반문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니고데모에게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십니다. 그가 영적으로 죽어 있기 때문에 이런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율법을 엄청나게 더 행하라고 하면 쉽게 이해가 갔을 것입니다. 그는 원인과 결과의 세계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과 그가 살아온 세계는 아주 달랐습니다. 신앙은 원인과 결과만 가지고 따져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초월적인 분이시지만 이 역사 속에서 친히 일하십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문제가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하십니다. 즉 그가 깨닫지 못하는 것만이 아니고 받아들이지 않는 교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만한 니고데모로 인해 절망하지 아니하시고 다른 말씀으로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이 땅의 일을 말하여도 그들이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셨기 때문에 하늘의 일을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자신도 들려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후에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했습니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그러자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았습니다. 이때 모세가 하나님께 중보기도하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처방을 내려주셨습니다.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았습니다. 뱀에 물려 죽어가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의지해서 장대 위에 높이 달린 놋뱀을 쳐다본즉 살았습니다. 이와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합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입니다.

  죄인들의 거듭남을 위해서는 예수님이 반드시 들리셔야 합니다. 거듭남은 십자가 구속 사건과 절대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높이 들려지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고 거듭날 수 있습니다. 거듭남을 위해서 속죄의 역사를 이루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인간이 할 일은 오직 그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습니다. 니고데모는 인간의 공로와 율법준수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유대교 전통과 바리새 전통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십자가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니고데모를 비롯해서 땅의 사람은 아무리 훌륭해도 뱀에 물린 존재입니다. 사탄의 공격을 받아서 온 몸에 죄의 독이 퍼져 있는 상태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독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을 얻는 길은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높이 들리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율법의 산을 바라봅니다. 인간의 노력과 율법 준수를 통해서 의에 이르려고 합니다. 선행을 통해서 의에 이르려고 합니다. 니고데모처럼 성공한 인물, 나름대로 완성된 인품과 교양을 가진 자의 상을 추구합니다. 이런 것들을 바라보고 추구하지만 과연 거기에 구원이 있습니까? 아직 무언가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소망이 있지만 정상의 자리에 올라서 더 이상 추구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 느끼는 공허는 치료할 길이 없습니다. 성공한 다음에 느끼는 공허는 인간이 영적인 존재임과 하나님만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시는 분임을 알게 합니다. 공허하고 절망되십니까? 눈을 들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1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독생자를 세상에 주신 목적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입니다. 세상이 누구입니까? 니고데모를 포함한 이 땅에 모든 죄인들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발하는 쓸모없는 죄인들입니다. 롬1장 후반부에 이 세상 죄인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와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대신에 우상을 섬기고 마음이 어리석고 우준하게 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우리의 죄는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입니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합니다(롬 1:29-32).” 이런 죄인들을 영원히 불타는 지옥의 불구덩이에 던지도록 내버려두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사 구원을 받게 하려 하셨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사람들이 죄악되어서 멸망을 받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미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고 구원자를 보내셨지만 그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구원자에게 나아오지 않을까요?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합니다.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요 자기가 죽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옵니다.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니고데모처럼 율법적 열심, 종교적 경건, 사회적 성공을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높이 들리신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께서 거듭나게 하십니다. 거듭남을 통해서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십자가를 통한 거듭남의 길을 여신 하나님의 사랑을 영접하고 구원의 기쁨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자기 열심과 업적과 노력으로 어떤 경지에 이르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벨탑과 같습니다. 오직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때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를 보는 감격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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