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주일말씀 성경별메시지 심포지엄 성경 검색
문제지 성경별문제지

요한복음 내가 좋아하는 요한복음 말씀- 김명혁 목사님(강변교회 원로목사님)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20회 작성일 15-06-14 18:36

본문

요3:16

오늘 UBF 동교교회에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 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이 엘리야 목사님과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사실 오늘 제가 여기 오게 된 것은 윤 수산나 선교사님의 주선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모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UBF와 친밀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UBF의 한국 대표였던 진요한 목사님이 한국복음주의협의회의 총무로 일했고, 그 다음에는 UBF의 한국 대표였던 이현정 목사님이 한국복음주의협의회의 총무로 일했고, 지금은 UBF의 총무인 이옥기 목사님이 한국복음주의협의회의 총무로 일하고 있습니다. 내일부터 한 주간 동안 연변 지역을 방문해서 불우한 조선족 학생들을 만나 위로하고 격려하고 돌아오는데 이옥기 목사님과 함께 갑니다. 이전에 이현정 목사님과 함께 연변 지역을 방문한 일도 있었고 이옥기 목사님과 함께 방문한 일도 있었습니다. 2010년 12월 13일에는 UBF 스텝 수양회에 가서 “부흥운동과 선교”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고, 2011년 11월 12일에는 UBF 종로 관악지구 가을 수양회에 가서 “사랑과 선교”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작년 10월에는 이현정 목사님과 여러 선교사님들이 사역하고 있는 남 아프리카 짐바브웨를 방문해서 선교사님들을 위로 격려한 일도 있었습니다.
오늘 여기 처음으로 왔기 때문에 설교를 하기 전에 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하려고 합니다. 제가 지난 5월 12일 오후 경상북도 청송교도소에 가서 수감자들에게 “길선주 도사와 이기풍 깡패를 한국교회의 아버지들로 삼으신 하나님의 은혜”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면서 수감자들을 위로 격려한 일이 있었습니다. 설교를 하기 전에 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그 때 한 이야기를 그대로 인용합니다. “저는 11살 때까지 북한 평양에서 살았습니다. 저는 11살 때 신앙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서 어머니와 아버지와 동생들을 북한 평양에 남겨두고 혼자서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와서 이별의 슬픔과 아픔을 지니고 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으로 부족함이 없는 한 평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감옥에 계시던 저의 아버지 목사님을 찾아가서 제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면서 신앙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서 남쪽으로 가겠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께서는 저를 한참 바라보시다가 그러면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를 너무너무 사랑하시던 어머니도 울면서 그러면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11살 때인 1948년 8월 캄캄한 밤에 어른들 몇 사람들과 함께 38선을 넘다가 인민군들에게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모두 손을 들고 서지 않으면 총을 쏘겠다고 협박을 했습니다. 어른들은 모두 섰지만 저는 설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혼자서 남쪽을 향해서 뛰기 시작했습니다. 40여분 동안 언덕을 넘고 파 밭을 달리고 강을 건너서 남한으로 왔습니다. 남한에 와서 이모님을 만나서 함께 살게 되었지만 어머니와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밤마다 남몰래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그러나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면서 신앙생활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서울 중학교 서울 고등학교 서울 대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 가서 12년 동안 유학생활을 하고 귀국한 다음 지난 40여 년 동안 목사와 교수로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프리카, 방글라데시, 중국, 북한, 필리핀, 아프가니스탄 등 세계 곳곳을 찾아 다니면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기도 폈습니다. 은퇴 후 지난 7년 4개월 동안 주일마다 전국의 작은 교회들을 방문하며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지난 5월 12일 청송교도소에서 한 저 자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내가 좋아하는 요한복음 말씀”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UBF 동교교회가 주일마다 요한복음을 공부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요한복음을 아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중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제일 많이 나오는 복음서가 요한복음입니다. 요한복음은 “믿음”의 중요성을 아주 강조했는데 요한복음에는 “믿음” 이라는 말이 90번이나 나옵니다. 요한복음은 또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중요성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는 요한복음 말씀을 함께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믿음”에 관한 말씀인 요3:16과 요5:24과 요11:25,26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우리 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믿음”을 지니고 “신앙생활”을 바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죄 사함도 구원도 의롭다 함도 영생도 천국도 없다고 가르칩니다. 요한복음은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죄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생명을 얻는데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믿음이 너무너무 귀중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하고 귀중한 것은 “믿음”입니다. 자기 자신이나 자기 지식이나 자기 경험이나 자기 명예나 자기 재물을 믿지 않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을 지니고 “신앙생활”을 바로 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고 귀중합니다. “믿음”은 사람의 삶과 운명을 바꾸어 놓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부모님과 주일학교 선생님들 때문에 아니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로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4학년과 5학년 때 평양에서 살았고 평양 제5인민학교에 다녔는데 공산당 정부가 일요일 날 교회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학교에 오도록 명령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일요일 날 학교에 가지 않고 교회에 갔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믿고 하나님께 바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교회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월요일마다 학교에서 벌을 받곤 했고 때로는 정학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제일 좋았습니다. 결국 저는 11살 때 부모님과 동생들과 고향을 떠나 38선을 넘어 혼자서 남쪽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주일을 바로 지키며 하나님을 바로 믿기 위해서였습니다. 캄캄한 밤 중에 38선을 넘다가 인민군에서 붙잡혔습니다. 모두 손을 들고 서지 않으면 총을 쏘겠다고 위협을 했습니다. 어른들은 모두 손을 들고 섰습니다. 그러나 저는 설 수가 없었습니다.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면서 하나님을 바로 믿고 하나님께 바로 예배를 드리기 위한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혼자서 남쪽을 향해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캄캄한 밤에 40여분 동안 언덕을 넘고 파 밭을 지나고 목에까지 차는 강을 건너서 무사히 남쪽으로 왔습니다. 그 때 저에게는 무서움이나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믿고 바로 섬기기 위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힘을 다해서 뛰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약간의 스릴까지 느꼈습니다. 그런데 38선을 넘은 그 사건은 저의 삶과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11살 때 하나님을 믿은 저의 믿음은 저의 삶과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믿음”보다 더 귀중한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 중의 괴수인 저를 너무 많이 축복하신 것은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의 망극하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 때문이지만 둘째로는 아버지를 비롯한 순교자들이 흘린 순교의 피 때문이고 셋째로는 제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어릴 때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남쪽을 향해서 달려온 일 때문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제가 월남 한지 2년 후에 순교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은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둘째로 “사랑”에 관한 말씀인 요3:16과 요13:1과 요13:34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예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요한복음은 “사랑”의 근원이 성부 하나님에게 있고 성자 예수님에게 있다고 지적합니다. 성부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신 사랑으로 나타났고, 성자 예수님의 사랑은 죄인들을 끝까지 사랑하셔서 자기 자신을 버리신 사랑으로 나타났다고 지적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6). 요한복음은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15:9,10,12).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던 부도덕한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셔서 그녀를 찾아 수가성 우물가로 가셨습니다. 그녀와 친절한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결국 수가성 여인으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시고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새로운 삶을 살게 하셨고 사마리아 복음화의 선구자로 삼으셨습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요4:28-30).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사랑하시고 죄인들을 주님의 일꾼들로 사용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베다니의 나사로와 마리아와 마르다를 극진히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요11:5).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는데 그것을 보고 유대인들이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요11:36) 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므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셨고 그리고 베다니 마리아로 하여금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그 발을 씻게 하시므로 주님의 죽으실 날을 위하여 준비하게 하셨다고 말씀했습니다.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음이러라”(요12:11).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요12:7). 
예수님께서는 배신자 베드로와 여섯 제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주님과 부활의 주님을 배신하고 디베랴 바다가로 가서 고기 잡던 배신자 베드로와 여섯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불순종한 배신자들을 책망하시는 대신 부드러운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요21:5). 결국 배신자 베드로와 여섯 제자들로 하여금 회개와 순종과 믿음의 길로 걸어가게 하셨고, 사랑과 목양과 섬김의 길로 걸어가게 하셨고, 고난과 순교와 영광의 길로 걸어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상하신 분이십니다. 여러 종류의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사랑하시고 죄인들을 주님의 일꾼들로 사용하시는 이상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부드러운 사랑의 음성에 배신자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겠습니다. “주님을 믿고 사랑합니다.” “주님의 양들을 먹이면서 섬기겠습니다.” “고난과 죽음의 길로 영광의 길로 걸어가겠습니다.” 제자들이 스스로 그런 말들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부드러운 음성이 저들로 하여금 그런 회개와 순종과 믿음과 사랑과 목양과 순교의 고백들과 행동들을 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이와 같은 사랑의 이야기를 기록한 사람은 사도 요한 뿐이었습니다. 수가성 여인에 대한 사랑의 이야기와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에 대한 사랑의 이야기와 배신자들에 대한 사랑의 이야기를 기록한 사람은 사도 요한 뿐이었습니다. 사실 사도 요한 자신이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사도 요한은 입을 열면 사랑만 고백했고 사랑만 권면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7-11). 사랑보다 귀중하고 보배로운 것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비판적이고 배타적이고 위선적이고 게으르고 나태한 죄인 중의 괴수이지만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를 한 없이 받고 살아오면서 아프리카로, 방글라데시로, 북한으로, 연변 지역으로, 필리핀으로, 아프가니스탄 등지로 찾아 다니면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게 되었고 다음과 같은 사랑의 고백을 하게도 되었습니다. “사랑하고 싶어라. 나는 요사이 주님을 생각하면 가슴에 눈물이 흐른다. 한 평생 나를 향하신 주님의 생각과 사랑이 어찌 그리 크고 어찌 그리 많은지! 실로 모래알보다 더 많은 주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이 나의 가슴에 눈물을 자아낸다. 사랑하고 싶어라.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의 맘 나의 몸 나의 정성 다 쏟아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는 요사이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에 눈물이 흐른다. 어린이들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너무너무 귀엽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너무너무 예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이 세상 곳곳에 흩어져 사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날 때도 비슷한 느낌을 가진다. 저들의 얼굴과 마음과 영혼 속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심어놓으신 고귀한 인성과 신성의 흔적을 보기 때문이다. 저들을 모두 사랑하고 싶어라. 모슬렘도 공산주의자도 상관이 없다. 저들은 모슬렘이나 공산주의 라는 불행한 유산에 쌓여있는 가련한 영혼들일 따름이다. 사랑하고 싶어라.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어라. 나의 맘 나의 몸 나의 정성 다 쏟아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어라. (2007년 1월 3일 아침 교회로 운전하며 오는 차 속에서 쓴 글)” 요한복음은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셋째로 천국 “소망”에 관한 말씀인 요14:2,3과 요17:11과 요20:17을 읽겠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2,3).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17:11).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요20:17). 사실 예수님께서는 자주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시곤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요11:4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17:1). 우리 신자들에게 있어서 자주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사는 것이 너무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세상과 땅을 너무 자주 바라보면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삶이 세속화되어 타락하고 만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면서 그리고 예수님을 극진하게 사랑하면서 살던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다음부터 눈을 들어 하늘만 바라보면서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본 사도 요한의 고백의 말씀들을 찾아봅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계4: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계5:1).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계6: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계7:9,10).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시 동안쯤 고요하더니”(계8:1).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계9:1). “내가 또 보니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 오는데”(계10:1).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계11:19).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계12: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계14:1).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계15:1). “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계16:1).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계17:1).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계18:1).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계19:1).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계20:1,2).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21:1).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계22:1,2). 사도 바울도 항상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국소망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5:8).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빍1:23,24). 
사실 한국교회의 아버지 길선주 목사님께서는 계시록을 만 독하고 암송하면서 하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사셨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서로 만나면 “마라나타” 즉 “주님께서 다시 오십니다” 라고 인사하면서 하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이성봉 목사님도 손양원 목사님도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사셨습니다. 저는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죄인 중의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하늘을 바라보고 천국을 사모하면서 살게 되었는데 제가 천국을 바라보면서 “주님 앞에 섰을 때의 나의 모습” 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주님 앞에 섰을 때의 나의 모습. 저는 얼마 전에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내가 앞으로 아버지 집으로 올라가서 주님 앞에 섰을 때 나의 모습이 어떠할까? 기뻐 뛰는 모습일까? 소리 지르며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모습일까?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소리 없이 흐느끼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그런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죄송하고 부끄럽고 고마워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우는 그런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평생 사는 동안 주님 위해서 산다고 떠들었지만 사실은 불순종과 정욕과 위선과 교만으로 가득했던 것을 되돌아 보면서 얼굴도 들 수 없고 입도 열수 없어서 그저 고개를 떨구고 흐느껴 우는 그런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나를 주님의 입에서 토해 내지 않으시고 한 평생 붙드시며 사용하셨을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무 부끄럽고 너무 죄송하고 너무 고마워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흐느껴 우는 그런 모습이 주님 앞에 섰을 때의 나의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치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죄인인 한 여인이 눈물을 쏟으면서 그 눈물로 주님의 발을 적셨듯이 나도 그런 모습을 지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또 하나의 나의 모습을 그려 보았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 그리고 길선주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이성봉 목사님 김치선 목사님 박윤선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 등 신앙의 선배들 앞에 무릎을 끓고 감사와 존경과 사랑을 표시하고 또 표시하는 나의 모습을 그려 보았습니다. 내가 지옥의 형벌에 떨어지지 않고 아버지 집으로 올라오게 된 것은 첫째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과 자비와 은혜와 사랑 때문이지만 둘째는 신앙의 선배들이 나의 몸과 영혼에 심어준 회개와 믿음과 눈물과 사랑의 씨앗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또 하나의 나의 모습을 그려 보았습니다. 나를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도 아름답게 사랑하시던 어머니를 붙잡고 뜨거운 사랑의 눈물을 흘리는 그런 모습입니다. “손이라도 한번 꽉 쥐어보고 싶다”고 말씀하시던 어머니에게 두 손과 두 팔과 온 몸을 안겨드리면서 뜨거운 사랑의 눈물을 흘리는 그런 모습입니다. 그리고 옆에서 빙그레 웃으시면서 나를 바라보시는 나의 아버지 품에 힘껏 안겨드리는 모습입니다. 믿음의 길 충성의 길 순교의 길을 몸으로 보여주신 나의 아버지 품에 힘껏 안겨서 사랑과 존경과 고마움을 속삭여 드리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내가 너무나 슬프고도 아프게 사랑하던 어린 아들 철원이를 품에 안고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고 속삭이는 모습입니다. 저는 또 하나의 나의 모습을 그려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과 친족들과 성도들을 만나서 너무너무 반가워하는 행복한 나의 모습입니다. 나의 부족한 전도와 목회와 선교를 통해 주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섬기게 된 수 많은 성도들! 부족한 나에게 눈물과 기도와 사랑을 쏟아 바친 수 많은 성도들! 강변의 성도들을 비롯한 지구 곳 곳에 흩어져 살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하늘 집으로 올라와서 다시 만나게 된 수 많은 성도들을 만나서 너무너무 반가워 하는 행복한 나의 모습을 그려 보았습니다. 저는 너무너무 부끄러워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다가 너무너무 반갑고 너무너무 고마워서 소리 내어 웃으면서 행복해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토록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긍휼과 자비와 지혜와 권능과 위대하심을 무릎을 꿇고 두 손 높이 들어 찬양하고 또 찬양하고 또 찬양할 것입니다. (2008년 8월 31일 밤).”
지금까지 “내가 좋아하는 요한복음 말씀”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요한복음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중요성을 어느 책보다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는데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요한복음 말씀들을 함께 찾아보았습니다. 한 가지 말씀을 추가하면 요한복음은 근심 걱정 불평 불만하지 말고 “평안”과 “기쁨”과 “담대함”을 지니고 즐겁고 행복하고 멋지게 살라는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저는 이런 말씀을 너무 좋아하면서 근심 걱정 두려움 불평 불만을 다 내어 던지고 “평안”과 “기쁨”과 “담대함”을 지니고 즐겁고 행복하고 멋지게 한 평생을 살아오고 있습니다. 이제 그런 말씀 몇 곳은 인용하면서 설교를 마무리 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15:11).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요한복음 말씀을 자주 읽으면서 주님의 음성을 자주 들으면서 순수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마음과 몸에 지니고 그리고 근심 걱정 두려움 불평 불만 대신 “평안”과 “기쁨”과 “담대함”을 마음과 몸에 지니고 즐겁고 행복하고 멋지게 살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323건 36 페이지
주일메시지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798 요한복음 이엘리야 118 09-27
797 요한복음 이엘리야 105 09-20
796 요한복음 이엘리야 99 09-13
795 요한복음 이엘리야 127 09-06
794 요한복음 이엘리야 103 08-30
793 요한복음 이엘리야 93 08-23
792 요한복음 이엘리야 95 08-16
791 요한복음 이엘리야 99 08-09
790 요한복음 이엘리야 109 08-02
789 요한복음 임요한(종수) 82 07-19
788 요한복음 이엘리야 98 07-12
787 요한복음 이엘리야 93 07-05
786 요한복음 이엘리야 105 06-28
785 요한복음 이엘리야 99 06-21
열람중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21 06-14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