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2016년 성탄 1강(사9:1-7)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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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성탄 1 강
말씀 | 이사야 9:1-7
요절 | 이사야 9:6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2016년 구주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우리에게 죄와 사망 권세의 압제에서 구원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한 아기 예수님을 보내심으로 구원역사를 성취하신 것입니다. 아기는 누구나 다 좋아합니다. 아기는 연약하고 온유합니다. 하나님은 아기의 방식으로 구원 역사를 이루십니다. 그는 우리에게 요구하지 아니하고 자기에게 오는 누구든지 영접합니다. 우리가 한 아기 예수님께 나아가 그가 어떤 분이신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왕궁에서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전하는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네 명의 왕을 섬기면서 이 일을 하였습니다. 그가 전한 이 말씀은 600년 뒤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주님께서 큰 빛으로 우리 가운데 오시고 모든 어두움을 몰아내고 평강으로 다스려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스불론은 갈릴리바다 서쪽 해안가이고 납달리는 갈릴리바다 서북쪽입니다. 이곳은 사사시대 이래로 주변 나라들의 침입으로 항상 시달림을 받아왔으며 이방민족과 접경하고 있기 때문에 이방적 색채가 짙었습니다. 특히 앗수르 군대의 침략(b.c. 733,732)으로 이곳은 초토화되다시피 했습니다. 많은 백성들이 사로잡혀 앗수르로 옮겨졌고 동시에 그곳 사람들이 이 지방으로 이주를 해왔습니다(왕하15:29). 이로 인해 민족동화정책이 시행되고 갈릴리 사람들은 남쪽 유다 백성들에게 멸시를 받았습니다. 우리나라도 강대국들과 접경하여 역사적으로 수없이 침략을 받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병자호란 때는 10만 명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이때 겪은 고통과 멸시를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인조는 1월30일 남한산성의 서문을 나와 현재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삼전도(三田渡)로 향했습니다. 이윽고 그는 높다란 수항단(受降壇) 위에 앉은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의 예를 바쳤습니다. 스불론과 납달리는 그처럼 고통과 멸시를 겪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로 멸시를 당하게 하신 것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기 때문입니다(왕하15:27ㅡ28). 그 악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그들이 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습니까? 그것이 자기에게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자기를 위해서 많은 일을 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동식물을 연구하고 사업도 벌이고 음악과 맛있는 음식과 수많은 은금도 모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고백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다는 탄식이었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위해서 살 때 마음이 어두워지고 어리석어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결과 사람과 해달별과 썩어질 새와 짐승들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섬기게 됩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를 높이고자 할 때 바벨탑을 쌓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낳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불신과 우상숭배로 인해서 심판을 받았습니다.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이방인의 지배를 받을 때 흑암이 옵니다. 우리나라도 일제 강점기에 흑암 가운데 있었습니다. 압제자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우리를 억압하고 수탈하였습니다. 흑암 가운데 행하는 우리에게 기쁨은 없었고 삶이 늪에 빠진 것 같이 빠져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지배를 받지 않고 사람의 지배를 받는 곳에서 어두움이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로 인해서 상처와 아픔, 부당한 대우, 압제와 착취, 스트레스가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위해서 살 때 장래가 어둡습니다.
또한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는 백성들에게도 흑암이 있습니다. 죽음을 무기로 다스리는 땅에 흑암이 있습니다. 죽음의 요소는 허무, 무정, 무자비, 무관심, 절망 등이 있습니다. 죽음이 끝이라는 생각은 인생을 허무하게 만듭니다. 하나님 대신에 돈을 신으로 섬기는 결과가 무엇입니까? 지금 전 세계는 자본주의의 병폐로 인해서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여당과 야당이 사사건건 평행선을 달리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들의 지지기반의 의견을 대변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양극화로 인해서 젊은이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지 못하고 결혼, 취직, 집을 갖는 것 등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여러 모양의 어두움 가운데 있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큰 빛이 비추이게 됩니다.
2절을 보십시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하나님께서는 흑암에 있는 백성들에게 큰 빛을 비추셨습니다. 큰 빛이 비치자 멸시받던 이방의 갈릴리가 영화롭게 되었습니다. 큰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나사렛 동네에서 자라나셨고 거기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그가 전한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갈릴리 어부들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흑암 가운데 행하는 백성에 대한 긍휼이 충만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사람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회개하였습니다. 회개한 그들의 마음에 천국이 임하였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새롭게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 안에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생기자 창성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믿는 자들의 병을 치료하고 귀신들린 자들을 온전하게 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 흑암 가운데 행하던 우리 인생은 큰 빛을 보게 됩니다. 진리의 빛, 구원의 빛, 참되고 영원한 소망의 빛을 보게 됩니다. 사망의 그늘이 물러나고 생명의 빛을 얻게 됩니다.
빛을 본 주의 나라 백성들이 어떤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농부들은 봄부터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잡초를 뽑아내고 거름을 주면서 농사를 짓습니다. 그러다가 가을에 추수를 하게 되면 모든 고난을 다 잊어버리고 즐거워합니다. 전쟁에 나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싸웁니다. 그 결과 승리하게 되면 탈취물을 얻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탈취물을 나누며 즐거워하게 된 근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무겁게 멘 멍에와 어깨의 채찍과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셨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이 미디안 군대를 통쾌하게 무찌르던 날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죄의 멍에를 꺾어주셨습니다. 우리를 괴롭히고 압제하던 사단의 권세를 꺾어주셨습니다. 우리를 죄와 사단의 권세에서 구원하시고 참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주님 앞에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원수들이 온전히 패망하고 평화의 세상이 이루어짐으로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평화의 세상이 도래하게 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고, 원수 사단은 온전히 멸망당하여 영원한 불못에 던져지고 주님이 다스리시는 평화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모든 축복이 누구로 말미암아 주어집니까?
6절을 보십시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예수님의 통치 방식은 아기적인 요소를 가지고 일하십니다. 아기의 방식은 친근하게, 평화롭게, 무장해제를 하고 다스리십니다. 정룻사모님은 차를 주차해 놨는데 한 초등학생이 달려와서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아무 일이 없음을 알고 그 학생을 차에 태워 원하는 곳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일이 꼬여서 그 부모가 경찰에 신고를 하고 경찰서에 출두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늦둥이 신우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심각했던 신고자가 아이를 보자 마음이 풀리고 쉽게 화해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서로가 아이를 키우는 입장임을 알게 되자 아이를 중심으로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 세상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떠나 힘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폭력에 대항해서, 힘을 길러서 대항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득세를 합니다.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여 후세인이 몰락하였습니다. 그가 죽고 나서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IS를 만들어 다시 테러를 감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프랑스 파리에도 테러를 감행하였습니다. 러시아 민간 항공기에 폭탄을 장착하여 폭파하였습니다. 이런 피의 보복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새로운 통치 방식을 가지고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은 한 아기를 통해서 그 아기를 통한 통치를 이루고자 하십니다. 마태복음 1:21절은 말씀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님의 통치는 검이 아니라 진리로,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으로 이루십니다.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그에게는 많은 이름이 있습니다.
첫째, 기묘자요 모사. 예수님은 기묘자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탄생이 기묘하며, 행하심이 기묘하며, 그 성품이 기묘하며, 진리를 말씀하심이 기묘하며, 그 능력이 기묘하며, 그 죽으심이 기묘하며,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이 기묘하며,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이 기묘합니다. 지금도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 기묘한 일들을 행하십니다. 예수님은 모사이십니다. 모사는 ‘조언자, 권면자’를 의미합니다. 이 땅에 계실 때 예수님은 탁월한 모사이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목마른 사마리아 여자를 도우시는 주님은 놀라운 카운슬러이십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온 온갖 사람들을 다 영접하시고 인격적으로 그들의 고통과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구원해주셨습니다. 카운슬러가 하는 일은 사람들의 온갖 문제들을 들어주고 공감해주고 해결책을 제시하는데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이야말로 위대한 우리 인생들의 카운슬러가 되십니다. 우리 인생의 온갖 문제들을 들고 주님 앞에 나아갈 때 말씀을 통해서 해결함을 받습니다. 사람들에게 있는 온갖 인생의 문제들을 누가 받아주고 이해해주고 해결해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 나아갈 때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의 고통을 받아주시고 치료해주시고 해결해주십니다.
둘째, 전능하신 하나님.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는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요1:14)’,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빌2:6)’,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골1:15)’. 한 아기로 나신 예수님은 단지 위대한 인간이 아니라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그 육체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골2:9).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성난 바람과 파도를 말씀으로 잔잔케 하시고, 죽은지 사흘되어 썩어 냄새나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 천 명의 무리를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은 그는 자기가 뜻하는 것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는 지금도 전능하신 능력으로 이 세상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셋째, 영존하시는 아버지.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는 나를 보호해주시고 지켜주시며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우리가 어릴 때는 전능해보이지만 자라면서 그렇지 못함을 알게 됩니다. 아버지 역시 연약한 인간일 뿐입니다. 역기능적인 아버지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상처받아 병들어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 육신의 아버지는 늙고 병들고, 내가 오히려 돌봐주어야 할 나약한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이별하게 됩니다. 우리 인생은 아버지를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아버지들도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의 영존하시는 아버지가 되십니다.
넷째, 평강의 왕.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십니다. 초장에서 목자가 양을 인도할 때 몽둥이와 협박으로 하지 않고 평화롭게 인도하듯이, 엄마가 아장 아장 걷는 귀여운 아기의 손을 잡고 평화롭게 이끌어주듯이,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과 평강으로 다스리시며 인도해주십니다. 평강의 왕 예수님은 우리 마음에 평강을 주십니다. 죄와 사탄의 세력이 나의 마음을 지배할 때 우리 마음은 어둡고 불안하고 죄책감에 시달리고 두렵습니다. 평강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고 모실 때 우리 마음은 평강을 누립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평안을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요14:21).’ 예수님이 주시는 죄사함과 믿음과 소망으로 인하여 모든 죄책감, 두려움, 불안, 어둠의 세력들이 사라지고 나의 마음은 평강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어깨에 정사를 메었다는 말은 ‘통치권이 그의 어깨에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아기는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 분의 실체는 왕 중의 왕으로서 세상의 통치권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의 통치권은 갈수록 어떻게 됩니까? 7절을 보십시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세상 왕의 통치권은 길어야 몇 십 년도 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통치는 영원무궁합니다. 세상 모든 통치들은 다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그 나라는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십니다. 세상의 나라는 정의롭지 못합니다. 자신이나 자기가 속한 당의 유익을 따라 권모술수가 난무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나라만이 정의와 공의에 기초하여 서 있으며, 영원토록 그것으로 주님의 나라를 보존하실 것입니다.
또한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십니다. 불의가 가득하고 죄악이 번성하는 세상의 현실을 볼 때 주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붙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은 요원해보이고, 주님의 나라는 정체되던지 쇠퇴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열심이 마침내 이를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믿음을 갖고 그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헌신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오,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이신 주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그의 거룩하심을 본받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이사야 9:1-7
요절 | 이사야 9:6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2016년 구주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우리에게 죄와 사망 권세의 압제에서 구원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한 아기 예수님을 보내심으로 구원역사를 성취하신 것입니다. 아기는 누구나 다 좋아합니다. 아기는 연약하고 온유합니다. 하나님은 아기의 방식으로 구원 역사를 이루십니다. 그는 우리에게 요구하지 아니하고 자기에게 오는 누구든지 영접합니다. 우리가 한 아기 예수님께 나아가 그가 어떤 분이신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왕궁에서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전하는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네 명의 왕을 섬기면서 이 일을 하였습니다. 그가 전한 이 말씀은 600년 뒤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주님께서 큰 빛으로 우리 가운데 오시고 모든 어두움을 몰아내고 평강으로 다스려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스불론은 갈릴리바다 서쪽 해안가이고 납달리는 갈릴리바다 서북쪽입니다. 이곳은 사사시대 이래로 주변 나라들의 침입으로 항상 시달림을 받아왔으며 이방민족과 접경하고 있기 때문에 이방적 색채가 짙었습니다. 특히 앗수르 군대의 침략(b.c. 733,732)으로 이곳은 초토화되다시피 했습니다. 많은 백성들이 사로잡혀 앗수르로 옮겨졌고 동시에 그곳 사람들이 이 지방으로 이주를 해왔습니다(왕하15:29). 이로 인해 민족동화정책이 시행되고 갈릴리 사람들은 남쪽 유다 백성들에게 멸시를 받았습니다. 우리나라도 강대국들과 접경하여 역사적으로 수없이 침략을 받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병자호란 때는 10만 명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이때 겪은 고통과 멸시를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인조는 1월30일 남한산성의 서문을 나와 현재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삼전도(三田渡)로 향했습니다. 이윽고 그는 높다란 수항단(受降壇) 위에 앉은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의 예를 바쳤습니다. 스불론과 납달리는 그처럼 고통과 멸시를 겪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로 멸시를 당하게 하신 것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기 때문입니다(왕하15:27ㅡ28). 그 악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그들이 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습니까? 그것이 자기에게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자기를 위해서 많은 일을 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동식물을 연구하고 사업도 벌이고 음악과 맛있는 음식과 수많은 은금도 모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고백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다는 탄식이었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위해서 살 때 마음이 어두워지고 어리석어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결과 사람과 해달별과 썩어질 새와 짐승들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섬기게 됩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를 높이고자 할 때 바벨탑을 쌓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낳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불신과 우상숭배로 인해서 심판을 받았습니다.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이방인의 지배를 받을 때 흑암이 옵니다. 우리나라도 일제 강점기에 흑암 가운데 있었습니다. 압제자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우리를 억압하고 수탈하였습니다. 흑암 가운데 행하는 우리에게 기쁨은 없었고 삶이 늪에 빠진 것 같이 빠져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지배를 받지 않고 사람의 지배를 받는 곳에서 어두움이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로 인해서 상처와 아픔, 부당한 대우, 압제와 착취, 스트레스가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위해서 살 때 장래가 어둡습니다.
또한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는 백성들에게도 흑암이 있습니다. 죽음을 무기로 다스리는 땅에 흑암이 있습니다. 죽음의 요소는 허무, 무정, 무자비, 무관심, 절망 등이 있습니다. 죽음이 끝이라는 생각은 인생을 허무하게 만듭니다. 하나님 대신에 돈을 신으로 섬기는 결과가 무엇입니까? 지금 전 세계는 자본주의의 병폐로 인해서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여당과 야당이 사사건건 평행선을 달리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들의 지지기반의 의견을 대변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양극화로 인해서 젊은이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지 못하고 결혼, 취직, 집을 갖는 것 등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여러 모양의 어두움 가운데 있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큰 빛이 비추이게 됩니다.
2절을 보십시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하나님께서는 흑암에 있는 백성들에게 큰 빛을 비추셨습니다. 큰 빛이 비치자 멸시받던 이방의 갈릴리가 영화롭게 되었습니다. 큰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나사렛 동네에서 자라나셨고 거기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그가 전한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갈릴리 어부들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흑암 가운데 행하는 백성에 대한 긍휼이 충만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사람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회개하였습니다. 회개한 그들의 마음에 천국이 임하였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새롭게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 안에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생기자 창성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믿는 자들의 병을 치료하고 귀신들린 자들을 온전하게 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 흑암 가운데 행하던 우리 인생은 큰 빛을 보게 됩니다. 진리의 빛, 구원의 빛, 참되고 영원한 소망의 빛을 보게 됩니다. 사망의 그늘이 물러나고 생명의 빛을 얻게 됩니다.
빛을 본 주의 나라 백성들이 어떤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농부들은 봄부터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잡초를 뽑아내고 거름을 주면서 농사를 짓습니다. 그러다가 가을에 추수를 하게 되면 모든 고난을 다 잊어버리고 즐거워합니다. 전쟁에 나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싸웁니다. 그 결과 승리하게 되면 탈취물을 얻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탈취물을 나누며 즐거워하게 된 근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무겁게 멘 멍에와 어깨의 채찍과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셨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이 미디안 군대를 통쾌하게 무찌르던 날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죄의 멍에를 꺾어주셨습니다. 우리를 괴롭히고 압제하던 사단의 권세를 꺾어주셨습니다. 우리를 죄와 사단의 권세에서 구원하시고 참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주님 앞에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원수들이 온전히 패망하고 평화의 세상이 이루어짐으로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평화의 세상이 도래하게 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고, 원수 사단은 온전히 멸망당하여 영원한 불못에 던져지고 주님이 다스리시는 평화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모든 축복이 누구로 말미암아 주어집니까?
6절을 보십시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예수님의 통치 방식은 아기적인 요소를 가지고 일하십니다. 아기의 방식은 친근하게, 평화롭게, 무장해제를 하고 다스리십니다. 정룻사모님은 차를 주차해 놨는데 한 초등학생이 달려와서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아무 일이 없음을 알고 그 학생을 차에 태워 원하는 곳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일이 꼬여서 그 부모가 경찰에 신고를 하고 경찰서에 출두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늦둥이 신우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심각했던 신고자가 아이를 보자 마음이 풀리고 쉽게 화해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서로가 아이를 키우는 입장임을 알게 되자 아이를 중심으로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 세상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떠나 힘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폭력에 대항해서, 힘을 길러서 대항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득세를 합니다.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여 후세인이 몰락하였습니다. 그가 죽고 나서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IS를 만들어 다시 테러를 감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프랑스 파리에도 테러를 감행하였습니다. 러시아 민간 항공기에 폭탄을 장착하여 폭파하였습니다. 이런 피의 보복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새로운 통치 방식을 가지고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은 한 아기를 통해서 그 아기를 통한 통치를 이루고자 하십니다. 마태복음 1:21절은 말씀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님의 통치는 검이 아니라 진리로,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으로 이루십니다.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그에게는 많은 이름이 있습니다.
첫째, 기묘자요 모사. 예수님은 기묘자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탄생이 기묘하며, 행하심이 기묘하며, 그 성품이 기묘하며, 진리를 말씀하심이 기묘하며, 그 능력이 기묘하며, 그 죽으심이 기묘하며,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이 기묘하며,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이 기묘합니다. 지금도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 기묘한 일들을 행하십니다. 예수님은 모사이십니다. 모사는 ‘조언자, 권면자’를 의미합니다. 이 땅에 계실 때 예수님은 탁월한 모사이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목마른 사마리아 여자를 도우시는 주님은 놀라운 카운슬러이십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온 온갖 사람들을 다 영접하시고 인격적으로 그들의 고통과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구원해주셨습니다. 카운슬러가 하는 일은 사람들의 온갖 문제들을 들어주고 공감해주고 해결책을 제시하는데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이야말로 위대한 우리 인생들의 카운슬러가 되십니다. 우리 인생의 온갖 문제들을 들고 주님 앞에 나아갈 때 말씀을 통해서 해결함을 받습니다. 사람들에게 있는 온갖 인생의 문제들을 누가 받아주고 이해해주고 해결해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 나아갈 때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의 고통을 받아주시고 치료해주시고 해결해주십니다.
둘째, 전능하신 하나님.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는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요1:14)’,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빌2:6)’,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골1:15)’. 한 아기로 나신 예수님은 단지 위대한 인간이 아니라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그 육체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골2:9).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성난 바람과 파도를 말씀으로 잔잔케 하시고, 죽은지 사흘되어 썩어 냄새나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 천 명의 무리를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은 그는 자기가 뜻하는 것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는 지금도 전능하신 능력으로 이 세상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셋째, 영존하시는 아버지.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는 나를 보호해주시고 지켜주시며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우리가 어릴 때는 전능해보이지만 자라면서 그렇지 못함을 알게 됩니다. 아버지 역시 연약한 인간일 뿐입니다. 역기능적인 아버지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상처받아 병들어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 육신의 아버지는 늙고 병들고, 내가 오히려 돌봐주어야 할 나약한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이별하게 됩니다. 우리 인생은 아버지를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아버지들도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의 영존하시는 아버지가 되십니다.
넷째, 평강의 왕.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십니다. 초장에서 목자가 양을 인도할 때 몽둥이와 협박으로 하지 않고 평화롭게 인도하듯이, 엄마가 아장 아장 걷는 귀여운 아기의 손을 잡고 평화롭게 이끌어주듯이,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과 평강으로 다스리시며 인도해주십니다. 평강의 왕 예수님은 우리 마음에 평강을 주십니다. 죄와 사탄의 세력이 나의 마음을 지배할 때 우리 마음은 어둡고 불안하고 죄책감에 시달리고 두렵습니다. 평강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고 모실 때 우리 마음은 평강을 누립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평안을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요14:21).’ 예수님이 주시는 죄사함과 믿음과 소망으로 인하여 모든 죄책감, 두려움, 불안, 어둠의 세력들이 사라지고 나의 마음은 평강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어깨에 정사를 메었다는 말은 ‘통치권이 그의 어깨에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아기는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 분의 실체는 왕 중의 왕으로서 세상의 통치권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의 통치권은 갈수록 어떻게 됩니까? 7절을 보십시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세상 왕의 통치권은 길어야 몇 십 년도 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통치는 영원무궁합니다. 세상 모든 통치들은 다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그 나라는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십니다. 세상의 나라는 정의롭지 못합니다. 자신이나 자기가 속한 당의 유익을 따라 권모술수가 난무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나라만이 정의와 공의에 기초하여 서 있으며, 영원토록 그것으로 주님의 나라를 보존하실 것입니다.
또한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십니다. 불의가 가득하고 죄악이 번성하는 세상의 현실을 볼 때 주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붙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은 요원해보이고, 주님의 나라는 정체되던지 쇠퇴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열심이 마침내 이를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믿음을 갖고 그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헌신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오,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이신 주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그의 거룩하심을 본받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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