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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2015년 특강(삿17) : 내가 왕이니라(이다니엘선교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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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93회 작성일 15-12-06 20:45

본문

동교 UBF 방문 메시지 (2015년 12월 6일)

내가 왕이니라

말씀 사사기 17:1-13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 17:6)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요한 18:37)

  제가 이엘리야 목자님을 좋아합니다. 그가 체구가 큰 데 비해 아주 겸손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동교 UBF에 와서 메시지 전하는 것은 처음이지만 제가 엘리야 목자님을 좋아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정답게 느껴집니다. 여러분도 저를 그렇게 여겨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군대 갔다 온 분들은 알 것입니다. 만날 휴가 가고 싶은 생각, 자고 또 자도 풀리지 않는 노곤함, 뇌리에 늘 고여 있는 그리움 또는 걱정과 불안…. 그런 게 외국생활에도 있습니다. 이런 외국생활에서 동역자들의 기도가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는 줄 모릅니다. 오늘은 동교 동역자님들의 기도를 부탁하고자 합니다. 또 지난 3년 동안 South Africa에서 한 가지 배운 것이 있어 그것을 증거하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40년의 목자생활에서 은퇴하고 아프리카로 가면서 딱 한 가지 기도제목을 붙들었습니다. 캠퍼스에 올라가 학생 양들을 얻어 그들과 일대일 성경공부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목자생활 중 후반은 캠퍼스에 올라가 학생들을 만나거나 일대일 성경공부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놀기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전도가 ‘하나님 역사의 꽃’이요, 또 신앙생활의 신선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해왔기 때문에, 그것을 하지 못하는 게 늘 마음에 걸렸었습니다.
  아프리카에 간 후 지난 3년 동안 새 학년이 시작되면 캠퍼스에 올라가 학생들을 만났습니다. 작년에는 발목을 다쳤지만, 쌍지팡이를 짚고 다니며 캠퍼스를 심방했습니다. 올해는 나가기 싫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노인이 된 것 같고 기분이 좋지 않아 얼른 일어났습니다. 캠퍼스에 다니니 젊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또 그동안의 죄의식에서 벗어나 해방감이 느껴졌습니다. 환갑 지난 지 오래 된 제 아내는 마치 대학교 2학년 여대생 같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캠퍼스를 다녀도 열매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아프리카 학생들에게 좋은 점이 있기는 합니다. 나이 많은 사람이 말을 건다고 해서, 성경공부 하자 강권해도, 거부감을 갖지 않습니다. 도리어 이야기 나누는 중에 내가 한국에서 40년 동안 목자생활 하다가 은퇴하고 이곳에 왔다, 내 나이가 70이다, 등의 말이 나오면  앉아 있다가도 일어나서 "Sir!"라고 하면서 존대해 주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또 그들에게는 남의 부탁을 절대 거절하지 않는 문화가 있습니다.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참석해 달라는 부탁을 받으면, 하루를 결근하고서라도 그 부탁을 들어줍니다. 하루를 결근해야 하는 것은 결혼식이 하루 종일 걸릴 만큼 길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약속을 하고 지키지 못할지라도 그 자리에서 부탁을 거절하는 법은 없습니다. 심지어 길을 물어도 엉뚱한 곳을 가르쳐주는 경우는 있어도 거절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을 만나 성경공부하자는 약속을 받아내고 이름과 학과, 전화번호 이메일 등이 적힌 카드를 꽤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전화번호나 이메일로는 거의 연락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성경공부가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하지 이게 무슨 짓인가, 기가 막히고 화가 났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싫으면 거절을 하지 왜 거짓말을 하냐?” 하는 게 우리의 문화라면, “거짓말을 했으면 했지 남의 부탁을 어떻게 그 자리에서 거절 하냐?” 하는 게 그들의 문화였습니다. 
  물론 약속한 학생들과 연락이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관계성이 그렇게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처럼 쌀쌀맞게 거절하든지, 오겠다고 해놓고 오지 않든지, 캠퍼스는 어디나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 선교사는 한국 학생들은 상처를 주고 아프리카 학생들은 허탈하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애쓰는 것을 하나님께서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양들이 있었습니다. 양이 자기 친구를 소개해 주기도 했고, 목자가 떠나버려 홀로 남은 양을 주워서 기르기도 했습니다.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제 발로 성경공부하고 싶다고 찾아와 잘 자라고 있는 양도 있습니다. 우리가 다니던 Language School의 선생님 중 하나는 제 양이 되었습니다. 또 한 자매님 클래스메이트는 가봉에서 유학 왔는데, 그가 남아공 대학에 진학하여 제 아내의 양이 되었습니다. 현재 우리와 시간 지켜 성경공부하고, 소감을 쓰며, 주일모임까지 나오는 사람은 7명입니다. 그곳 대중교통 형편이 좋지 않아 이들을 일일이 데려오고 데려다 주어야 합니다. 또 그들을 건사하는 데도 한국 학생들보다 시간이 많이 드는 것 같습니다. 그들과 영어로 공부해야 하는 점도 아직은 큰 스트레스입니다. 

  그런데 학생들과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고민도 점점 늘어갑니다. 아프리카의 가난과 장래문제, 성적인 문란과 가정 파괴, 그들의 인본주의와 미신, Apartheid 이후에 태어난 신세대들의 욕심과 교만, 이런 많은 문제들을 극복하지 못하고 졸업하면 대부분 역사를 떠나버리는 분위기, 이런 문제들과 부딪치면서 고민도 커지고 영적인 힘이 달립니다. 솔직히 말해 은퇴했으면 그만이지 왜 또 다시 양을 치기 시작해서 이 고생인가 하는 후회도 합니다. 또 아프리카에서 생활비를 마련하고 자녀들 기르느라 고생하면서 또 한편으로 학생 양들을 감당하느라 수고하는 선교사들을 지켜보는 일도 상당히 안타깝습니다.   
  이번 한국으로 오는데 사사기 17:6 말씀이 제 마음에 맴돌았습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 저는 이 말씀을 통해 아프리카를 보고, 아프리카의 기도제목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 말씀은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한국에 필요한 말씀이기도 하고, 현대의 문제이기도 하고, 인간의 보편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는 가운데 우리 모두가 예수님께서 우리의 왕이 되셔서 우리를 다스려주기를 바라는 소원을 새롭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이스라엘의 기복적인 신앙생활
  1절을 보면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어미가 은 천백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게 얼마나 큰돈이냐 하면, 괴력의 소유자 삼손에게서 그 힘의 비밀을 알아내면 블레셋 방백들이 그 대가로 들릴라에게 주기로 한 게 은 천백이었습니다(삿 16:5). 참고서를 보니 당시 노동자들이 10년간 전혀 쓰지 않고 모아야 할 만큼의 큰돈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평균 월급이 250만 원쯤이라고 하니까 3억 원 정도 되는 금액입니다.
  미가의 어미는 이렇게 많은 은을 잃어버리자 저주했습니다. “내 은 훔쳐 간 놈 손모가지 부러져라. 길 가다가 벽돌 날아와 머리에 맞아죽어라.” 이를 갈며 저주하는 어미의 모습을 보고 미가는 무서웠습니다. 금방이라도 자신에게 저주가 임할 것 같았습니다. 그는 훔친 은을 내놓으며 말했습니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주 그만 하세요. 은은 제가 훔쳤습니다.”(2a) 그러자 어미가 당황했습니다. 자기의 저주대로 아들이 저주를 받으면 큰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얼른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며 저주의 기도를 축복의 기도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는 미가가 훔쳐갔다 내놓은 은의 일부를 은장색에게 주어 신상(神像)을 만들게 했습니다. 그 신상을 여호와께 바침으로써 아들에 대한 저주를 풀고자 했습니다.
  아니, 아들이 은을 훔쳤다면 어미는 마땅히 아들을 책망하고 벌을 주어 아들이 죄를 철저히 회개하도록 도와야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어미는 회개보다는 그저 아들의 저주가 풀리고 복 받기만을 바랬습니다. 그 어미나 아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 저주였고,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정의나 진리가 아니라 복이었습니다. 
  물론 신앙생활이 축복이나 저주와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그 보다 더 높은 차원의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진리에 순종하는 자세가 참된 신앙입니다. 비록 고난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따르며, 설령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진리에 순종하는 삶이 올바른 신앙생활입니다. 그리하여 온 세상이 순결한 사랑과 거룩한 진리로 가득 차도록 기도하며 힘쓰는 삶입니다.   
  우리나라에 신자들이 수는 많지만 도덕적인 권위가 없고, 사회에 대해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정의를 세우고 진리를 따르려 하기보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축복을 목적으로 신앙 생활하는 신자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프리토리아에서는 지난 몇 년 동안 학생 때 잘 나오던 형제자매들이 졸업하면 발길을 끊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두 번은 반드시 나타납니다. 한 번은 취직했을 때이고, 또 한 번은 자동차를 샀을 때입니다. 나타나서 자랑을 하고는 다시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기막히고 속상해하는 선교사님들을 볼 때 마음이 아픕니다. South Africa는 다른 아프리카 나라들보다 경제사정이 좋습니다. 대학 나온 사람은 대부분 취직하고, 그러면 그 나라에서는 잘 사는 축에 속합니다. 오래 동안 가난하게 살아온 그들에게는 백인들이나 일부 흑인 권세자들이 누려오던 소위 ‘good life’에 대한 소망은 아주 절실합니다. 이러한 물질적인 소망 앞에서 신앙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를 보면서 저는 우리의 영적인 분위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은 깊은 회개가 없고 참된 축복에 대한 개념이 없이 미신적이고 세속적인 복에만 매달리면, 그런 분위기에서는 인격이 성장하거나 영적인 축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보람이나 사명인의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우리 모임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사랑하고 진실하게 회개하는 사람들이 귀하에 여김을 받고, 자동차 몰고 와서 자랑이나 하려는 자들은 부끄러워 얼씬도 못하는 영적인 분위기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2. 이스라엘의 형식적인 신앙생활
  이제 5절을 보면 미가는 어미가 준 은으로 신상을 만들어 자기 가정에 있는 신당에 두었습니다. 또 에봇과 드라빔 등의 제사 집전용 의상을 만들고, 아들 중 하나를 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 신당(神堂)에, 신상(神像)에, 제사장(祭司長)에, 구색(具色)은 다 갖추었습니다.
  그런데 7절에 한 레위인 청년이 나옵니다.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열 두 족속 중에서 하나님 섬기는 일만 하도록 정해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전국에 걸쳐 자기의 사명을 감당할 지역이 정해졌습니다.
  그런데 9절을 보면 그는 사명의 땅을 떠나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에브라임 산지로 갔고 미가의 집에 이르렀습니다. 미가가 물었습니다. “어디서 왔는가?” 레위 청년이 말했습니다. “저는 유다 베들레헴에 속한 레위인인데 거처할 곳을 찾으러 다니는 길입니다.” 미가는 그 청년을 책망해야 했습니다. “이 사람아, 레위인의 사명이 얼마나 중요한가 말일세. 그런데 사명의 땅을 버리고 어디로 돌아다니는가?”
  그러나 미가는 그저 그가 레위인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여 말했습니다. “자네가 우리 집 제사장이 된다면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을 제공하겠네. 물론 매일 식사도 대접하겠는데.” 레위 청년은 만족했고, 그는 미가 집안의 자가용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미가는 기뻐하며 말했습니다. 13절을 봅시다.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미가는 신상과 신당을 만들고 게다가 라이선스를 가진 정식 제사장을 세웠으니 구색은 다 갖추었고, 그러니 이제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복을 주시시라 믿었습니다. 그는 정규 제사장이 전문적으로 복을 빌어주기 때문에 안심하고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신앙생활이란 그저 자가용 제사장에게 월급과 옷을 마련해 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구색과 형식이 아닙니다. 그런 걸로 말하면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제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마태 23:23)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시금치의 십일조 까지 바치는 형식이 아니라, 정의와 사랑과 믿음 등의 내면적이고 인격적인 요소들입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과의 대화중 어디에서 예배하는 것이 옳으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한 4:23) 하나님은 어느 장소에서 예배를 드리는가 하는 형식보다도,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영으로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께 마음 드려 예배하는 것이요,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예배를 말합니다. 또 시편 51:17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그런데 미가는 하나님께 전혀 마음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마음 아파하거나, 죄 많은 세상에 대한 상한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저 신상과 신당을 만들고 제사장을 세우는 등의 형식만 갖추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으며 복 받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작년에 남산에서 오래 된 학사가정 하나가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선교지에서 그런 소식을 들으니 더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들은 다른 교회에 다닌다는 구색은 갖췄으니까 하나님을 떠난 것은 아니라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the ministry of God)를 떠났습니다. 저는 그들이 하나님이 정해주신 사명의 땅을 떠나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떠다니는 레위인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무겁다며 편한 곳 찾아 떠난 그들이 거기서 마음까지 드려 영의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기까지 진리로 예배드릴 수 있을까, 그것은 의문입니다. 그보다도 우리 자신이 형식과 구색만 갖추고 있는지, 아니면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3.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이스라엘
자,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이 어찌 그리 기복적이고 미신적인 사람들이 되어버렸을까요? 저자는 그 원인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6)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는 것은 그들에게 지도자 또는 지도체계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법이 있었지만 그것을 삶에 적용하도록 가르칠 사람이 없었고, 하나님의 법을 어겼을 때 회개하도록 책망하거나 훈련시킬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일을 감당할 지도자를 양성하는 기관이 없었고, 그 일을 지도하고 지원할 국가의 구심점, 곧 왕이 없었습니다.
가나안 전쟁 때만 해도 그들에게 여호수아와 같은 강력한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첫 번째 여리고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아이 성 전투에서는 완전히 참패했고 전의마저 상실했습니다(수 7:5). 그러자 여호수아는 전군을 소집하여 무술을 연습했습니까? 아닙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십계명 곧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있는 언약궤 앞에 엎드려 옷을 찢고 먼지를 뒤집어썼습니다. 해가 넘어가기까지 그렇게 앉아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여리고 전투에서 획득한 전리품을 횡령한 자가 있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호수아는 아간이라는 자를 적발했고, 그를 데리고 아골 골짜기로 갔습니다. 거기서 이스라엘은 아간을 돌로 쳤으며, 그가 훔친 물건을 불살랐습니다. 그런 후에야 그들은 아이를 공격했고 대승을 거둡니다.
그뿐 아니었습니다. 아이 전투에서 승리한 후 여호수아는 율법을 돌에 새겼습니다. 그리고 축복의 말씀이든 저주의 말씀이든 빼놓지 않고 다 읽었습니다.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자들과 아이들과 그들 중에서 있는 외국인들에게까지, 모든 사람들 앞에서 읽었습니다(수 8:34,35). 그들은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전투훈련보다 죄를 적발하고 회개했습니다. 말씀을 낭독하고 그 말씀에 따라 살도록 다짐하게 했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고자 하는 지도자 여호수아가 있었고, 장로들과 백성들이 그를 세웠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모두에게 하나님이 왕이 되실 수 있었고, 그런 이스라엘은 거룩하고 강력한 백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사 시대에는 그런 지도자 곧 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습니다. 성경도 자기 나름대로 해석했고, 부담스런 말씀은 빼버리거나 시대에 맞지 않는 말씀이라 치부해버렸습니다. 말씀을 지키지 않아도 회개하라 말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방인들처럼 기복적인 사고방식과 생활에 젖어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뿐 아니라 사람이 그를 감독할 목자가 없을 때 누구나 이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성경을 공부하면 시간도 많이 들고, 사람들과의 갈등도 생기니까, 혼자 집에서 성경을 공부하겠다 말합니다. 물론 글을 읽을 줄 알고 생각할 줄 알면 혼자 성경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감독자가 없고, 하나님을 왕 삼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 성경을 공부하면, 그는 곧 해괴하고 독선적인 신앙에 빠지기 쉽습니다. 또 성경이나 신앙생활은 사람들 속에서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죄인들 가운데 계십니다. 그들과 미워하고 싸우고, 또는 회개하고 사랑하고, 이런 가운데서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으며, 그럴 때라야 인격이 생기고, 성숙하고 내용 있는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5)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는 게 무엇입니까? 전에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는데, 이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그의 감독을 받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 받기를 싫어하고 그에게 순종하기를 싫어한다면, 그가 설령 구원 받았다고 주장해도 구원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잘 아는 대로 남아공에는 아픈 역사가 있었습니다. 10%의 백인이 90%의 흑인을 지배하고 그들의 낙원을 만들기 위해 흑인들을 가혹하게 차별했습니다. 그 악명 높은 인종격리정책을 'Apartheid'라고 합니다. 정책이 폐지된 해가 1994년입니다. 그리고 그때 이후에 태어난 세대를 ‘Born Free Generation'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말 그대로 뱃속에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입니다. 또 이들은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적극적으로 주장해야 한다, 남이 강요하는 것을 절대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끊임없이 교육 받아 온 세대입니다. 그리하여 제가 보기에 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자유를 만끽하는 사람들 같습니다.
  이들은 또 BEE(Black Economy Empowered) 정책의 특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BEE는 그동안 Apartheid로 인해 심화되었던 흑백간의 경제 불균형을 완화하기 위해 흑인들에게 경제적인 우선권을 주는 정책입니다. 이 정책의 핵심은 일자리를 주는 우선순위에 있습니다. 1)흑인여성 2)흑인남성 3)백인여성 4)백인남성 5)아시아인의 순서로 일자리에 우선권이 있습니다. 승진하는 데에도 이 원칙이 적용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남아공에서는 흑인 여성이 제일 성공하기 쉬운 셈입니다. 이것이 남아공 자매님들이 아주 교만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일자리나 승진뿐만 아니라 각 대학은 정해진 비율 이상의 흑인 학생을 등록시켜야 합니다. 이 인센티브로 대학에 들어왔지만 공부를 감당할 만한 학력이 없어 낙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일단 졸업하면 취직 때문에 한국 학생들만큼은 고생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 선교사님들이 남아공을 개척한 게 1993년입니다. Apartheid가 해체된 바로 전 해입니다. 그러니까 남아프리카 UBF는 Born Free Generation의 역사와 같습니다. 그런데 현재 남아공에 남아 있는 아프리카 목자 가정은 네 가정입니다. 이 중에는 백인인 Andries와 그 동생인 Christiaan 목자의 가정이 있는데, 이들의 동역자는 한국의 애니 선교사와 사라 선교사입니다. 또 Theo 목자가 있지만 그는 주일모임에 빠지는 때가 많고, 그 사모님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남아프리카 목자 가정은 한 가정 Abiah와 Mpho 목자 가정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Born Free Generation 이전의 세대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냉정하게 말하면, Born Free Generation 중에서는 아직은 온전히 선 사람이 없습니다.
남아프리카 학생들에게는 왕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유와 혜택 가운데 자라면서 끊임없이 자신이 왕이어야 한다고 교육받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목자의 말에도 전혀 무게를 두지 않습니다. 교회 분위기가 너무 인간적이고 남녀관계가 가벼운 것 같아 주의라도 주려하면 “선교사가 권위적이다.” “아프리카를 모르고 한국식을 강요한다.” “한국 사람들은 놀 줄 모르고 여유가 없다.”는 등으로 수군거리고 분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이들 가운데서 지난 3년 동은 적잖은 문화충격을 경험했습니다. 한번은 거의 하루 종일 Bible Center에 붙어살면서 성경공부나 복음역사에 헌신적이던 자매님이 갑자기 임신했다 고백하더니 배가 불러왔습니다. 한 리더급 자매님은 왜 주일 날 오지 못했는가 하고 물으니 토요일 날 클럽에서 날 새고 춤추느라 오지 못했다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어떤 자매님은 남자와 잤다는 말을 하는데, 회개하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율법이 없고 자유로운가, 또는 얼마나 솔직하고 쿨한가를 자랑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다른 자매님들이 배부른 자매님을 축하하고 그를 위해 Baby Shower 하겠다고 법석 떠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를 해산하여 친정에 맡기고 학교에 다니면서 우리 모임에 나오는 자매님들이 몇 명 더 있어 왔고 지금도 몇 사람 있습니다.
이를 보면서 저는 그들이 잘 못된 건지, 제가 진짜 자유를 모르는 건 지 헷갈렸습니다. 또 그들의 문화를 어디까지 받아들이며, 그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어떻게 제자들을 양성해야 할지, 실은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몸이 불어나고 해산을 하면서 더 이상 성경을 공부하거나 역사를 섬기며 훈련 받는 할 수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그런 경우 대개 남자들이 도망가 버리기 때문에 어린 나이부터 혼자 아기를 키워야 하는 등,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시달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중간시험이나 학기말 시험이 끝나면 학생들은 그 날로 고향으로 내려갑니다. 단 하루도 지체하지 않습니다. 물론 여건이 좋지 않습니다. 도시에 머물면 숙소에 드는 비용이 너무 비싼 데다, 그 비용을 감당할만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장막에 거하는 형제들도 그리하는 것을 보면 여건의 문제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간섭할 수 없는 자유와 권리라는 의식이 아주 강합니다. 그래서 방학 중 훈련은 생각하기가 어렵고, 그저 이들을 잘 달래서 기말시험이 끝나고 일주일 정도 소감 훈련하는 게 고작입니다.

저는 처음에 우리 선교사님들이 양들을 너무 두려워하지 않나 싶었습니다. 제가 학생들 훈련시키기가 그렇게 어렵냐고 물을라치면 선교사님들은 그저 웃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저도 이제 그 웃음의 의미를 압니다. 저도 이제는 그들이 무섭습니다. 조금이라도 강요하는 기미가 보이면 아예 이방인이나 야만인 또는 못된 선교사 취급하는 태도가 무섭고, 또 “Yes, Shepherd, Yes Shepherd" 하고 그렇게 사근사근하게 말면서도 아무런 갈등도 없이 순종하지 않는 그들이 두렵습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너무 분명하게 도우려하면 우리 모임에 오려는 학생들이나 남아있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을 것이며, 우리는 정말 문을 닫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한국에 오는 동안 자꾸 이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 하나님을 왕 삼지 않는 신앙생활에는 결코 구원이 없습니다. 형식적인 구색만 갖추고 신앙생활 잘한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고, 이기심과 탐심만 늘어갈 뿐, 인격의 성장도 없고, 진정한 행복도 없습니다. 결국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다가 삶을 망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프리카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에 관한 진리입니다.
이들은 그 수가 아무리 많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도 쓸모가 없고, 아프리카를 구할 지도자가 될 수도 없습니다. 도리어 아프리카를 더욱 아프리카 되게 할 뿐입니다. 저는 저와 우리 선교사님들이 분명한 방향을 잡도록 기도제목을 잡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삼을 자들만 남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모두 떠나도 좋습니다. 아프리카에 그들이 갈 교회는 얼마든지 많고, 우리가 그런 교회 하나를 더하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프리토리아에는 얼마 동안 졸업하고 남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지만, 그 대신 아주 순수하고 튼실하게 자라는 학생 양들이 십여 명 있습니다. 이들이 Born Free Generation을 본받지 않고 하나님을 왕 삼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어려움 가운데서도 변함없이 왕 되신 우리 주님을 섬기며 늘 새롭게 의욕을 불태우는 우리 선교사님들을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맺는 말
  아프리카에서 복음역사를 도우면서 제가 한 가지 배운 것은 사람에게 반드시 왕이요 목자이신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짐승에게는 왕이나 목자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짐승은 본능대로 살면 됩니다. 짐승들은 본능적으로 자기가 먹을 수 있는 양이 얼마인가를 알며, 본능에 따라 절대로 자기가 먹을 이상의 분량은 먹지 않습니다.
  요하네스버그 인근에 Lion Park가 있습니다. 동물들을 야생 그대로 볼 수 있는 Safari Park입니다. 거기에 기린에게 직접 먹이를 주며 기린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후에 거기 가면 재미가 없습니다. 오전에 사람들이 먹이를 많이 주어서 더 이상 먹으려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아무리 턱밑에 먹을 것을 들이밀어도 그 긴 목을 휙- 돌려버립니다. 아이들이 몹시 서운해 합니다. 덕분에 기린이나 짐승들은 위병이 나거나 변비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필요 이상으로 많이 먹습니다. 맛있다고 계속해서 먹고, 스트레스가 쌓인다고 퍼먹고, 남이 먹을까봐 미리 먹어두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짐승보다 훨씬 더 많은 병에 시달립니다.

  사람에게는 본능뿐 아니라 자기 생각이 있고, 자기 의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짐승보다 차원 높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에게는 짐승에게 없는 욕심과 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만 생각하고, 자기 나름대로 행하면 죄와 욕심 때문에 반드시 파멸에 이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왕이 필요하고 목자가 필요합니다.
  이사야는 인간을 구원하러 오실 그리스도를 예언하면서 그 분은 인간들의 왕이 되실 것이라 말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그 왕이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재판하던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요한 18:37)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 되실 때 우리는 죄와 욕심의 지배에서 벗어나 진리에 속할 수 있으며, 진리에 속한 자는 자연히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야 말로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왕 삼는다? 이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사탄의 말에 미혹되어 자신이 하나님이 되고자 하고, 자신이 왕이 되고자 안달하는 인간이 어떻게 예수님을 왕 삼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왕 삼고 예수님의 다스리심을 받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성령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도록 버려두지 마시고, 우리의 왕이 되셔서 우리를 다스리고 감독해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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