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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15년 감사절 특강(누가 17:11-19)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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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79회 작성일 15-11-22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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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감사절 특강
말씀 | 누가복음 17:11-19
요절 | 누가복음 17:17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올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 만큼 감사는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감사하는 법을 배우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셨습니다. 이때 한 마을에 들어가셨는데 나병 환자 열 명이 예수님을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간구했습니다. “예수 선생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병에 걸리면 피부가 비늘이 덮인 것 같이 됩니다. 나병은 라틴어로 ‘비늘’(Lepra)에서 나온 영어 ‘Leprosy’라고 불립니다. 1873년 노르웨이의 의학자 ‘Gerhard Armauer Hansen’이 병원균을 발견하여 오늘날 ‘한센’병이라고 불립니다. 이 병은 피부접촉으로 전염이 되고, 예수님 당시 불치의 병이므로 나환자들은 철저히 격리되어 마을 밖에서 살아야했습니다. 성전 출입은 물론이고 정상적인 사회생활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과도 생이별을 해야 했습니다. 요즘은 우리나라에서 나병 환자를 보기 어렵지만,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동네마다 나환자들이 몰려다니며 구걸을 했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산 속 움막에 사는 나환자가 마을에 내려와 아이들 간을 빼먹는다는 소문이 떠돌아서 나환자는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이 울다가도 나환자가 온다고 하면 울음을 뚝 그쳤습니다. 우리나라에 '한하운'이라는 나환자 시인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1920년에 태어난 분으로 중국 북경대를 졸업한 인텔리였습니다. 공무원으로 일하다 나병이 발병하여 사직하고, 1975년에 작고하실 때까지 나환자 시인으로 사신 분입니다. 이 분의 대표적인 작품이 소록도에 가면서 지은 ‘전라도길’이라는 시입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소록도 포구/낯선 친구 만나면/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절름거리며 가는 길/신을 벗으면...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나병에 걸린 이후 그들은 절망과 눈물, 어두움으로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괴로움과 운명주의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 마을에 들어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절망 중에 희망의 빛이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귀신을 내쫓고 여러 모양의 병자들, 나병 환자들을 고치셨다는 소문이 그들 사이에 쫙 퍼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멀리 서서 예수님께 탄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의 모습에서 안타까움과 슬픔이 묻어나옵니다.

  보통 유대인은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함께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나병이라는 고통 앞에 민족주의나 지역감정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낮아질 대로 낮아져서 어떤 차별도 의미가 없었습니다. 동변상련은 민족적 감정까지 초월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들은 예수님께 오직 긍휼을 구했습니다. 그들의 말 속에는 너무나 많은 상처와 고통과 슬픔들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나 된 듯 자기 의를 내세우는 기도보다 긍휼을 구하는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바리새인의 기도보다 세리의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나병 환자가 제사장들에게 자기 몸을 보일 때는 두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는 나병인지 아닌지 확진을 받기 위해서, 둘째는 병이 나았음을 확인하고 사회에 복귀하기 위하여 제사장에게 그들의 몸을 보여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병이 나은 것을 전제로 제사장에게 그들의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열왕기하 5장에 보면 아람이라는 나라에 군대장관 나아만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크고 존귀한 자로 큰 용사였습니다. 그가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와 도움을 구했을 때, 엘리사는 그에게 다만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담그라고 하인을 통해 말했습니다. 이는 나아만에게 심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엘리사가 나와서 안수를 해 주든지, 아니면 깨끗한 물로 씻으라고 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낯짝도 비추지 않았습니다. 또 요단강 물은 자기 나라에 있는 강보다 작고 더러웠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가 부하들의 말을 듣고 자존심과 자기 생각을 버리고 엘리사의 말에 순종했을 때 나음을 입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들은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할 때 우리의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가운데 기적을 체험하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만 믿고 가다가 깨끗이 나음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길을 가다가 몸에 이상을 느껴 쳐다보다가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몸에서 흘러내리던 고름이 그치고 딱정이가 떨어지고 썩었던 피부가 어린 아이와 같은 살로 회복되는 것을 목도하였습니다. 그들의 떨어져나갔던 신체의 일부는 회복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광경에 그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고 하나님께 감사하였을 것입니다. 나병의 그 깊고 깊은 어둠에서 빠져 나오는 역사적 순간이었습니다. 그들은 인생의 가장 깊은 어두움과 슬픔과 절망을 해결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새로운 삶을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일생 일대 이런 은혜의 순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5,16절을 보십시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이 사마리아 사람은 먼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를 표하였습니다. 그가 바로 돌아와서 예수님께 감사를 표한 것을 볼 때 그들이 나음을 받은 것은 가다가 바로 된 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른 곳으로 떠나시기 전에 그는 예수님께 나아와 그의 발 아래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무엇을 드렸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에게 가진 것이 없었지만 마음과 온 몸으로 주님께 감사를 표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돌아오지 않은 아홉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17,1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은 은혜를 받았음에도 감사하러 돌아오지 않은 아홉에 대해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아홉 명은 왜 돌아오지 않았을까요?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는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였을까요? 만약 그들이 정말 순종하기 위해서 돌아오지 않았다면 예수님께서 저런 말씀은 안 하셨을 것입니다.

  열 명중 돌아온 사람은 한 사람이었습니다. 단 한 사람뿐임을 예수님도 강조하십니다. 확률로 10%입니다. 이는 무엇을 보여 줍니까? 은혜 받는 사람은 많아도 감사하는 사람은 적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쉽게 보이는데, 실제로 하기는 어렵습니다. 사람은 호의를 당연히 여기고, 배은망덕하기 쉽습니다. 구약 성경에 요셉이 애굽에 팔려가서 노예 생활을 하고 또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왕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주었는데 그대로 되었습니다. 요셉이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이야기했지만 술 맡은 관원장은 복직의 기쁨에 감사를 잊어버렸습니다. 이런 경우가 우리의 현실 속에 많이 있습니다.

  아홉 명의 병 나은 사람들은 먼저 제사장에게 가서 자기 몸을 보이고 사회로 복귀하여 자기 가족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렸을 것입니다. 그들 생각에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안수를 해 주신 것도 아니고 말씀만 하셨기 때문에 자기들을 위해서 해 준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은 유대인으로서 평소에 말씀을 보고 기도를 열심히 했기 때문에 이런 축복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들이 볼 때 열 명이 다 나음을 받았기 때문에 이를 당연하게 여길 수 있었습니다. 두 세 사람만 나음을 받았다면 자신들이 특별한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열 명이 다 나음을 받았으니 다 그런가보다 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서 나병은 죄를 상징합니다. 죄로 인해서 사람이 추하고 더럽게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동물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집니다. 죄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잃어버리고 불평하고 원망하게 합니다. 죄는 선한 양심이 불로 지진 것 같이 감각이 없어지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고난의 종으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이 말씀대로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죄 사함과 질병 치유와 영원한 행복을 위해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그 몸으로 담당하시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각자의 다양하고 깊은 죄 문제, 인생 문제로 인해서 나병환자들처럼 힘든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죄의식, 불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허무함으로 고통하며 어두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 죄 사함을 받고 내면의 평강과 자유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성장하여 가정을 이루고 자녀들을 낳고 사명을 감당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잊어버리고 어느 덧 마음이 교만해지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 마음이 부유해져서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던 것처럼 착각하고 살기 쉽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육신의 소욕대로, 내 욕심을 따라  살면서 감사를 잊어버리고 불평과 불만 속에 빠져 살기 쉽습니다. 

  그들이 정말 하나님께 감사를 했다면 예수님은 왜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을까요? 그들은 너무 감격한 나머지 나음 받은 것에 빠져버렸습니다. 축복에 빠져서 축복을 주신 분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빨리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고 가족에게 돌아가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생각만이 가득했습니다. 가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한 후 감사는 나중에 돌아와 해도 된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즉시 감사하지 않을 때 감격은 식어버립니다. 새로운 삶에 빠져 감사할 기회와 시간도 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은혜를 받으면 즉시 감사를 하는 것입니다. 감사를 뒤로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은혜의 감격도 식고 감사의 마음도 식습니다. 어떤 사람이 감사한  일이 있어서 감사 헌금을 하고자 했습니다. 즉시 하지 않고 시간이 지났을 때 하고자 하니 아까운 마음이 듭니다. 감사를 하긴 해도 의무감에 의해 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은혜 받은 즉시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는 미룰 것이 아닙니다. 

  왜 예수님은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실까요? 정말로 그들이 제사장에게 가서 자기 몸을 보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면 왜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셨을까요? 예수님이 볼 때 그들이 형식적으로 제사장에게 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신앙에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부패했고 형식적이었습니다. 이제 새 성전 되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하고 참된 중보자가 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성전을 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자신이 삼일 만에 다시 일으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새롭고 산 길을 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아홉 사람은 감사했지만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잘 모르고 예수님께 대한 감사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돌아온 한 사람 이방인을 통해서 유대인들이 부끄럽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무시했고 그들이 타락했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와 또 이곳에서 사마리아 사람의 감사하는 자세를 예수님이 칭찬하고 있습니다. 왜 누가는 이렇게 감사한 한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인 것을 강조해 기록을 해 놓았을까요? 이는 선민의식, 특권 의식에만 사로 잡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바르지 않았던 유대인들을 꼬집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장차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어 그들이 오히려 유대인보다 모범을 보일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돌아와 감사를 한 그에게 어떤 축복을 주셨습니까? 19절을 보십시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그는 나병에서 깨끗함을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구원은 영혼의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감사할 때 주님께서는 더 큰 은혜를 주셨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50:23).” 우리 인생 목적은 일생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시편에는 감사라는 말씀이 75번이나 나옵니다. 시편 기자는 축복의 때에만 감사한 것이 아니라 고난의 때에도 감사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18절은 말씀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우리가 이 말씀에 순종해서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감사하는 사람들로 성장해야 되겠습니다. 감사하지 않는 것은 영적 교만이요, 영적인 적신호입니다. 교만해지면 감사가 없어집니다. 감사가 식을 때부터 신앙에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사람과의 관계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그런데 감사하는 생활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투쟁의 결과입니다. 감사하는 생활은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감사는 연습되어야 합니다. 성숙한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감사를 힘써 표현할 때 주님과 맺은 사랑의 관계가 발전됩니다. 감사하는 생활 태도는 인간관계를 풍성하게 만듭니다. 감사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또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됩니다. 우리 각자의 감사하는 생활은 이 공동체를 더욱 밝고 건강하게 만들어갈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통해 받은 은혜를 돌아보며 감사하고, 지난 일 년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시다. 감사한 것을 찾으면 미루지 말고 즉시 감사합시다. 우리에게 귀한 말씀을 주시고 감사의 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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