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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2015년 히2강(2:5-18) 죽음의 고난을 맛보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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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97회 작성일 15-10-25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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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히브리서 제 2 강
말씀 | 히브리서 2:5-18
요절 | 히브리서 2:9

    죽음의 고난을 맛보신 예수님
“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천사보다 뛰어나십니다. 그는 영광스러운 분이신데 죽음의 고난을 맛보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여 모든 권세와 통치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 성도들은 현재 혹독한 박해 가운데 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신데 왜 그 백성들이 이런 고난 가운데 있어야 할까요? 이런 의문에 대한 답변이 오늘 말씀의 내용입니다. 우리도 내가 죄에서 벗어나 평안을 얻고자 신앙생활을 하는데 때로는 고난이 계속될 때 이를 어떻게 해석하고 고난에 대처해야 할까요?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창조주시오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이런 예수님이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되셨습니다. 그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고 고난을 받으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를 높이셔서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장차 올 세상을 통치하실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현실은 어떠합니까? 만물이 아직 그에게 온전히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자들도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악과 악인들이 강하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재림하여 최종 심판하실 때까지 사탄이 남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죽음의 고난을 받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9절을 보십시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죽음을 맛보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죽고 죽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죽음의 세력을 잡은 사탄에게 종노릇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죽음 이후에 무엇이 있는 줄 모르기 때문에 더 두려워합니다. 천사는 죽지 않는 탁월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천사보다 뛰어난 분이신데 죽으신 것은 우리의 구원자가 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도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고 슬퍼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 본인만 생각한다면 죽음을 맛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는 죄가 없으신 분이시고 영원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신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우리의 죄 값을 치루시기 위해서 우리 대신 죽음을 맛보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여기에 진정한 사랑이 나타나고 은혜가 드러납니다. 천사는 고상하고 신비스럽다고 하지만 고난과 아픔을 알 수 없습니다. 죽음의 고통을 통과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천사는 육신의 한계에 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고난과 죽음을 맛보지 못합니다. 결국 부활의 영광에도 이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를 위해서 고난당하고 죽음까지 맛보신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천사에게서 느낄 수 없는 사랑을 느끼고 맛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죽음에 매어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결국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시고 만물을 복종케 하십니다.

  히브리 크리스천들도 지금 당하는 고난과 죽음의 고통이 힘들지만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그들이 당하는 고난을 예수님도 맛 보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영광에 이르셨다면 그들도 장차 영광에 이르지 않겠습니까? 죽음의 고난을 맛보신 예수님을 통해서 그들도 희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 죽기 살기로 해야 합니다. 기도 생활도 죽기 살기로 해야 합니다. 우리의 본성은 편한 것, 쉬운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기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애를 쓰고 힘을 써야 합니다. 말씀 공부도 죽기 살기로 해야 합니다.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자세로는 말씀 공부를 통해서 은혜와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고난을 사랑하는 자세를 가질 때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또 그런 자세로 일하는 사람에게 무슨 일을 맡길 수 있습니다. 주의 무슨 일을 맡든지 죽기 살기로 할 때 성취할 수 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구원하고자 택하신 성도들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생을 누리게 하는 일을 위해 구원의 창시자 예수 그리스도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자기의 고난을 통해 그 성품상 온전케 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항상 온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완전한 하나님이요 완전한 사람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직분상 온전케 되셨습니다. 그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죄에 대한 완전한 속죄 사역을 담당하셨기 때문에 구세주로서 온전케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모든 인류의 죄의 대가를 치루어 율법을 이루었기 때문에 구원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그가 죽지 않았다면 구원은 미완성으로 남게 됩니다. 그의 죽음이 구원을 완성한 것입니다. 죄는 선행을 하고 거룩한 삶을 산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 해도 그것이 사람의 죄를 제거할 수는 없었습니다. 고난은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고난은 죄에 대한 형벌이었기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죄는 반드시 형벌을 요구하고 형벌은 상실과 고통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심지어 옷까지 벗김을 당했습니다. 그의 영광이 그로부터 탈취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완전히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그들은 무릎을 꿇고 그를 지독히 비꼬며 조롱했습니다. 또한 고통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는 그것을 견뎠습니다. 그의 영혼에는 죽을 지경으로 괴로운 극한 답답함과 입술로는 도저히 형언 할 수 없는 그런 고통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고통이 멸망당할 영혼이 지옥에서 당할 그런 고통과 일치하는 고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그 고난의 잔은 얼마나 쓰디썼는지요! 그러기에 주님조차도 그 고난의 잔 앞에서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잔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마셨습니다. 여러분 당신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면 지옥불은 당신과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유월절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불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저주받은 자들의 그런 고통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내 대신 정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이제 하나님께 버림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내 대신 하나님께 버림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죄로 인한 형벌 때문에 고민하지 마십시오. 형벌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여러분의 죄가 수색된다고 해도 발견되어질 리가 없습니다. 또한 통찰력있는 하나님의 눈으로도 여러분 속에서 단 한점이 결점도 발견되어질 수 없습니다. 율법의 징벌에 관한한 그것은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거듭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행26;18)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구원의 선물이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고난을 통해 온전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고난의 풀무불은 우리가 그것을 달가워하지 않을지라도 그리스도인다운 성품의 자질들을 연단합니다. 고난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고난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바른 자세로 겪을 때 그리스도를 더욱 닮게 됩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천사들은 죄의 대가를 지불하는 고난이 없기 때문에 구원의 창시자로서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철저한 고난의 과정을 거치셨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창시자로서 고난을 거쳐서 온전함이 입증되었다면 우리도 고난 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롬8:17절은 말씀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우리는 고난에 대한 철학을 가져야 합니다. 고난은 저주가 아닙니다. 아담은 고난 없이 에덴동산을 누리는 편안함 때문에 타락하고 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은 훈련 없이 왕의 자리에 앉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말년에 우상숭배와 쾌락에 빠져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도 십자가 없는 번영신학은 교회의 온전함을 병들입니다. 고난 없는 기독교는 교회사 속에서 항상 타락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수록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힘써 감당해야 합니다. 축복은 받는 것보다 감당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구원의 창시자가 되셔서 우리에게 임한 축복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우리를 형제라 부르십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이이신 예수님과 거룩하게 함을 입은 성도들은 다 한 근원인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났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맏형이십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12:50).” 예수님이 자신의 피 값을 주고 사셔서 우리를 하나님께 드리고 우리를 형제로 삼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고 우리도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함으로 깊은 형제애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고난 받는 자들을 주님은 귀하게 여기십니다.

  둘째, 마귀를 멸하시며 마귀의 종 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앞에서는 예수님이 우리와 영적인 측면에서 한 형제되어 주심의 축복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인성적인 측면에서 형제되어 주심의 축복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지니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만 없으시고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셔서 죽음의 고통을 맛보심으로 마귀를 멸하시고, 죽기를 무서워하여 사망권세에 시달리는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그 형벌로서 죽게 되었지만 죄 없는 예수님이 내 대신 죽음의 형벌을 치루심으로 믿는 성도들은 사망권세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이제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고전15:54). 야곱이나 모세의 임종 직전의 삶을 보면 그들은 죽기 전에 유언을 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과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를 했습니다. 예수님도 기도를 하시면서 마지막 밤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어가면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잠이라고 말씀하셨고 함께 죽어가던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천사는 혈과 육에 속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이 영광과 감격을 천사들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믿는 우리들을 어떻게 붙들어(help) 주실까요? 우리 안에 성령으로 내주하셔서 도우십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성령을 부어 주셔서 우리와 연합되심으로서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믿음이 독실했던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임종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그는 신하들을 다 방에서 나가게 한 후 남편과 손을 마주잡고 '만세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라는 톱 레이디의 찬송을 열심히 부르더라는 것입니다. 이제 하늘의 소망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그의 찬송소리는 기쁨이 가득했고 떨리기까지 했습니다. 로마의 키케로는 원형경기장에서 사자의 밥으로 그들의 목이 잘리우면서도 찬양하고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고 차라리 그리스도를 위해서 목숨을 내던지는 사람들의 행렬을 보면서, 그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나의 철학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분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과 그들의 죽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저들의 삶과 죽음으로 증거하고 있는 저들의 하나님을 무엇으로 부인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11:2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은 하나의 변화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진정한 의미의 죽음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으로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셋째, 시험받는 자들을 도우십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예수님은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이십니다. 주님은 긍휼과 자비가 충만하십니다. 또 그는 신실하십니다. 그가 시험을 받아보셨기 때문에 시험을 당하는 우리를 능히 도우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먹는 문제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사명보다 먼저 먹고 살아야 하지 않느냐는 사탄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먹는 문제를 해결해 주실 하나님을 믿기보다 자기 힘으로 먹는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먼저 자신의 먹는 문제를 해결하라는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사탄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구하는 것이나 마음에 생각하는 것까지도 채우시고 풍성하게 하십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에게는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먹는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자족할 줄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또한 그는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마귀에게 엎드려 경배함으로 얻으라는 시험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고 그것을 누리기 위해서 쉬운 방법을 쓰라는 시험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말씀을 붙잡고 승리하셨습니다. 또한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져서 사뿐히 내려앉음으로 사람들의 인기를 얻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증명해 보라는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말씀하심으로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그 외에도 십자가를 지지 말라는 베드로의 말을 들었을 때 시험이 되었으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더 생각하는도다 라며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모양의 시험을 받았고 이기셨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을 잘 이해하고 도와주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시험을 받고 있습니까? 물질적인 시험, 주님이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지 의심이 되는 시험, 나의 장래를 주님께 맡겨야 하는지 내가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지로 인해서 고민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양치는 일을 하다가 지쳐서 사명을 내려놓고 싶은 시험에 빠진 분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문제 앞에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죽기 살기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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