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2015년 히브리서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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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히브리서 서론
말씀 | 히브리서 1-13장
요절 | 히브리서 12:2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마태복음은 왕 되심을, 마가복음은 종 되심, 누가복음은 인자 되심을 말씀합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이 대제사장되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히브리서 서론을 공부하는 가운데 전체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저자 : 히브리서의 저자는 초기에는 바울이 아닌가 생각해 왔는데 루터가 아볼로라고 제안한 이래로 많은 학자들이 지지해 왔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저자가 누구인가는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오리겐의 견해는 오늘날 학자들 사이에서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본문에 기초해서 볼 때 그는 헬라사상과 수사학에 익숙해 있었고, 70인역 구약성경을 잘 알고 활용할 줄 알았고 바울의 동역자 그룹에 속해 있었고, 디모데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13:23) 2세대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2:3). 그리고 구약의 율법, 특히 제사제도에 대해서 예리한 신학적 통찰력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위기에 처한 공동체에 대한 목회적 열정과 충직함을 가진 ‘목회자적 신학자요, 조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 이었습니다. 히브리서에 저자가 기록되어 있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저자의 실수나, 저자가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감춘 것이 아니라 일부러 기록하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저자를 밝히지 않는 것이 히브리서를 읽는데 더 도움이 되어서 독자를 위해서 일부러 누락시켰다는 것입니다. 즉 기독교 초대 사도들에 대해서 인간적인 편견이 있는 히브리 종교지도자들을 고려한 처사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히브리서 기자는 분명 탁월한 통찰력과 식견을 갖춘 분임에 분명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이름을 누락시켰다는 점에서 더욱 위대한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더 드러내 기위해서 자신을 감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2. 연대 : 이 책이 써진 연대는 10:32-34절에 언급된 핍박에 기초해서 49년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박해와 64년 네로 황제의 박해 이전 어느 한 시점으로 봅니다. 한 가지 기준이 되는 중요한 사건은 주후 70년에 일어난 예루살렘 성전 파괴입니다. 만일 본 서신이 예루살렘 파괴 이후에 써졌다면, 유대 제사제도의 한계를 논하는 본 서신의 성격상(참조 8:13) 그 사건에 관련된 언급이 반드시 나타나야 할 텐데 그런 흔적이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다. 더욱이 제사제도와 관련된 언급들의 동사가 현재형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은 그 당시 성전에서 레위기적 제사가 실행되고 있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는 주후 70년보다 이른 시기에 저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3. 수신자 : 수신자는 13:24a “너희의 모든 인도자들과 성도들에게 문안하라”를 볼 때 ‘한 도시의 여러 구역에 흩어져 존재하던 작은 가정 교회들’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예수님께 직접 들었던 자들로부터 전해 들음으로써 믿음에 이른 자들이었습니다(2:3). 그들은 성도들을 섬김으로 형제에 대한 자신들의 사랑을 증명해 보였습니다(6:9,10). 그들은 고난을 잘 견뎌 내었고, 구체적으로 자신들의 재산을 빼앗기는 것까지 기꺼이 감수했습니다(10:32-35).
4. 시대 배경 : 그러나 현재 그들은 이런 영광스런 신앙경력에도 영적으로 둔감한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5:11). 심지어 그들 중 어떤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서 구원의 길에서 떨어져나갈 위기에 봉착해 있었습니다(2:1 ; 3:12,13 ; 4:1,11 ; 6:11 ; 12:15). 그들은 마땅히 선생이 되어야 할 정도의 상당히 긴 신앙경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영적 유아기를 넘어서지 못했거나 아니면 그 상태로 되돌아갔던 것입니다(5:12). 그들이 이와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된 이유는 ‘고난에 대한 두려움’(10:32-34)과 ‘유대교에 대한 미련’(4:14-10:39)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그들은 순교를 당하기까지 고난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히12:4). 하지만 이제는 그들에게 그러한 위협이 점점 현실화되어 가고 있었고, 인내와 헌신이 약화되어 가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10:35,36 ; 12:3 ; 13:13).
유대교 출신 기독교인들이 유대교를 떠나 예수님을 믿으면서 무슨 기대를 했을까요? 유대교보다 훨씬 뛰어난 살아있는 예배, 완전한 죄사함, 더 정교한 율법, 하나님의 축복하심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합니까? 이들은 유대교의 박해를 받아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수모를 당했습니다. 예를 들어 히11: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는 말씀을 보면 그들은 현실에서 보고 싶은 것이 많았습니다. 믿음의 결과를 보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눈에 보이는 결과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요한복음 11 장에 보면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히브리 신자들도 믿어서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을 보고 싶었습니다. 요한복음 5 장에서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의 말씀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그런 것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의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믿음에 대해서 회의가 생겼습니다. 과연 믿음이란 무엇인가? 그래서 히브리 저자는 말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살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히브리서 11 장에서 예로 든 믿음의 조상들은 다 보지 못하고 믿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고 할 때, 과연 무엇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히12: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예수님은 믿음의 주요, 인도자요, 완성자이십니다.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하면서 영적인 방향과 목표를 자기 꿈의 성취나 인생 문제 해결이나 외적인 성장에 두기 쉽습니다. 또는 자기 경쟁자를 바라보면서 믿음의 경주를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경주의 목표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당시 신자들은 일반 사회의 기준으로 봤을 때 부끄러웠습니다. 마치 사라가 믿음으로 살았지만 자식이 없어서 부끄러웠듯이, 혹은 엘리사벳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흠이 없이 살았으나 아들이 없어 부끄러움을 당했듯이, 우리 목자들이 양이 없이 부끄러움을 당하듯이 그들도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본 받아 우리도 부끄러움을 개의치 말고 십자가를 참으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당시 그들에게는 말씀 중심의 예배가 의식 중심의 성전제사보다 못해 보였습니다. 믿음의 법도 구약의 율법과 비교해 막연하기만 하고, 자신들이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하는데 화려한 구약의 제사장들보다 초라해 보였습니다. 저자는 이런 그들을 어떻게 돕고 있습니까? 저자는 구약의 대제사장과 비교할 수 없이 더 뛰어나신 대제사장 예수님을 소개하며 흔들리지 말라고 합니다.
5. 주제 및 구성 : 히브리서의 주제는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은 누구신가입니다. 1장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강조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스도는 창조의 대행자이시고,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자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으로서 만물을 붙드시며 모든 천사들의 경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따라서 그 분은 천사보다 뛰어나십니다. 2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천사보다 잠깐 낮아지셔서 성육신하였고 우리와 동일하게 고난과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는 부활하심으로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고 그 결과 우리 구원의 창시자가 되셨습니다. 천사는 천상적 존재로서 인간의 아픔을 공감할 수 없습니다. 반면 인간 제사장은 인간을 공감하지만 완전한 존재가 아니어서 둘 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진정한 중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성과 인성을 지니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완전한 중보자요 대제사장으로써 우리를 진정으로 도우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신성과 인성을 지니신 예수님에 대한 이해는 대제사장적 기독론의 기반을 제공해줍니다. 대제사장적 기독론이란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 되심을 뜻합니다. 히브리서는 기독론이 주된 사상인데, 독특한 대제사장적 기독론이 핵심 주제입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구약성경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대제사장적 기독론을 통해서 예수님의 탁월함을 증거하고자 하였습니다. 히브리서에는 그리스도의 우월성, 그리스도 제사장직의 우월성, 희생제물로서 그리스도의 우월성이라는 세 가지 중요한 중심주제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당시 성도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다시 돌아가려고 했던 유대교에 대해서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을 알려줌으로 성도들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천사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아론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새롭고 산 길 되신 그리스도입니다. 이 진리는 수신자들에게 큰 격려를 주었습니다. 완전한 중보자 예수님은 시험받는 우리들을 이해하고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3:1-5:10은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 예수님의 두 가지 측면을 확장 설명해 나갑니다. 3:1-6절은 ‘신실한’ 4:14-5:10은 ‘자비로운’ 측면을 설명합니다. 특히 5:7-10은 예수님께서 자비로운 대제사장이 되기 위해 얼마나 철저히 기도를 통해서 시험을 이기시고 순종하심으로 완전하게 되셨는지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인간으로서 철저하게 순종을 배우신 예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연약한 우리를 동정하고 돕고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5:10절에 도입된 예수님이 멜기세덱 계열의 대제사장이라는 내용은 7장에서 상세하게 전개되는데 시편 110:4와 창세기 14:18-20절을 활용하여 예수님이 멜기세덱 계열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요, 왕과 제사장직을 공유하신 분이라는 독특한 기독론을 펼칩니다. 예수님이 레위지파가 아니라 유다지파 출신이라는 사실이 모세 율법이 규정한 대제사장 조건의 결격사유가 아니라 더 탁월한 대제사장의 조건으로 부각됩니다(7:13-16). 그러면서 율법의 한계, 레위계열 대제사장의 한계 등을 지적합니다. 히브리서의 기독론의 독특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 독특성은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실 뿐 아니라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신다는 점을 선언하는데서 그 정점에 이릅니다.
8-10장은 이미 7:27절에서 소개된 그리스도의 사역, 희생 제사 주제를 발전시켜 나갑니다. 참 대제사장 예수님이 섬기시는 장막은 지상의 장막이 아니라 하늘장막입니다. 그분의 직분과 사역은 옛 언약을 대체하는 새 언약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분의 제사는 옛 희생제사보다 탁월한데, 그 우월성은 존재론적으로, 도덕적으로 완전하신 대제사장 자신이 단번에 영원한 희생제물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9,10장은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의 단회성과 영원한 효용성을 부각합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구약의 희생 제사를 다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이라는 통찰은 히브리서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히브리서만큼 특색 있고 구체적으로 묘사한 곳은 없습니다.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른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에 대한 설명은 히브리서 저자의 탁월한 독창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대속죄일의 예식과 예수님의 희생과 죽음을 연관시켜 예수님이 그리스도 되심을 전개 시키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초대교회 당시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라는 단순한 복음 선포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당시 초대교회가 전했던 복음이 모든 상황을 다 고려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전에 제기되지 않은 문제들이 발생되었는데 히브리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대답을 그들의 상황에 맞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히브리서에 나온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의 특징들은 수신자들이 접해 있는 특별한 역사적 정황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재발견하라”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탁월하시고 완전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재발견’에 기초해서 유대교의 유혹에 흔들리지 말고 확고하게 믿음의 길을 걸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11-13장은 결론적인 권면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되는 믿음과 인내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11장은 구약의 성도들의 믿음의 승리를 이야기하는데, 이는 우리를 기죽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옛 언약의 백성이 잘했다면 우리는 새 언약의 중보자를 받을 자들로 더 잘 할 수 있다는 격려입니다. 12장은 소망장입니다. 고난 속에 있는 히브리서 성도들이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음의 경주를 잘 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1-13절은 주께서 주시는 징계를 말하고, 14-29절은 하나님의 도성인 축제의 모임, 흔들리지 아니하는 나라를 소망하며 살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13장은 사랑장이라고 합니다. 이제 새 언약의 백성으로 찬송의 제사, 오직 선을 행함과 나누어 주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리자고 권면합니다.
히브리서는 ‘영적 피곤’이라는 목회적 문제를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수신 공동체는 대부분 영적으로 소진되었습니다. 전도와 선교도 힘들고, 예배에도 싫증이 났고, 여러 가지 기독교 교육프로그램에도 싫증이 났습니다. 그 사회에서 특이한 것 때문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힘들기만 하고, 영적 투쟁에 싫증났고 기도생활을 지속하는 데 싫증났고 심지어 예수님에게도 싫증났습니다. 교회행사나 지도자에게도 시큰둥하고 따라서 교회에 모이는 인원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공동체를 떠나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6. 배울 점 : 이런 상황에 대한 히브리서 기자의 해결책은 무엇이었습니까? 개선된 커뮤니케이션, 갈등 관리, 좀 더 활기찬 예배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의의’에 대해서 길고 복잡하게 설명했습니다. 영적 소진의 문제에 직면하여, 그는 아주 용감하고 무모하리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과 의미에 대해서 복잡한 신앙 용어로” 설교했습니다. 히브리서 수신자들의 상태와 유사한 개인과 공동체 현실에서 우리는 히브리서 저자의 해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 해법이란 “예수님을 재발견하라”란 한마디 모토에 담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예수님이 얼마나 탁월하고 귀한 분인지, 완전한 분인지를 알 때 매너리즘, 유혹, 두려움 등 모든 개인과 공동체의 문제가 해결되고 방향이 잡힙니다. 예수님에게 집중하고 예수님을 더 정확하고 완전하게 아는 것이 모든 문제의 해법입니다.
처음에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뜨거운 감격과 기쁨이 넘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 연륜이 쌓이는데 성장이 없고, 자신들의 믿음으로 인해서 유대공동체와의 단절이 생기고 사회적 소외, 경제적인 궁핍까지 겹쳤습니다. 이로 인한 실제적인 아픔과 고통이 컸습니다. 게다가 ‘기독교가 별 것인가’, ‘뭔가 경건하고 거룩한 의식도 없다’ 이런 가운데 옛날의 제사 제도가 그리워졌습니다. 예수님으로는 뭔가 부족한 것 같고, 예수님을 믿어도 되고, 유대교로 돌아가도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종교다원주의적인 생각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 되심에 대한 믿음도 약화되었습니다. 믿음이 약해지자 고난은 더 커 보이고 옛날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이 강렬했습니다. 더구나 유대교는 로마와의 정치적인 타협을 통해서 어느 정도 핍박으로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을 믿는 것의 탁월성과 가치를 탄탄한 건축학적 논리와 신선하고 독창적인 전개로 예수님을 재발견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난과 유혹의 의미를 가르치며 그 고난과 유혹을 잘 극복한 믿음의 선진들과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잘 감당하도록 도왔습니다.
우리가 히브리서 공부를 통해서 그 무엇보다 탁월하시고 완전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해서 재발견하고 예수님께 매료됨으로서 모든 유혹과 고난과 매너리즘을 이기고 확신과 감동과 열정이 넘치는 가운데 믿음의 길을 달려가는 개인,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말씀 | 히브리서 1-13장
요절 | 히브리서 12:2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마태복음은 왕 되심을, 마가복음은 종 되심, 누가복음은 인자 되심을 말씀합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이 대제사장되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히브리서 서론을 공부하는 가운데 전체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저자 : 히브리서의 저자는 초기에는 바울이 아닌가 생각해 왔는데 루터가 아볼로라고 제안한 이래로 많은 학자들이 지지해 왔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저자가 누구인가는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오리겐의 견해는 오늘날 학자들 사이에서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본문에 기초해서 볼 때 그는 헬라사상과 수사학에 익숙해 있었고, 70인역 구약성경을 잘 알고 활용할 줄 알았고 바울의 동역자 그룹에 속해 있었고, 디모데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13:23) 2세대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2:3). 그리고 구약의 율법, 특히 제사제도에 대해서 예리한 신학적 통찰력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위기에 처한 공동체에 대한 목회적 열정과 충직함을 가진 ‘목회자적 신학자요, 조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 이었습니다. 히브리서에 저자가 기록되어 있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저자의 실수나, 저자가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감춘 것이 아니라 일부러 기록하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저자를 밝히지 않는 것이 히브리서를 읽는데 더 도움이 되어서 독자를 위해서 일부러 누락시켰다는 것입니다. 즉 기독교 초대 사도들에 대해서 인간적인 편견이 있는 히브리 종교지도자들을 고려한 처사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히브리서 기자는 분명 탁월한 통찰력과 식견을 갖춘 분임에 분명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이름을 누락시켰다는 점에서 더욱 위대한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더 드러내 기위해서 자신을 감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2. 연대 : 이 책이 써진 연대는 10:32-34절에 언급된 핍박에 기초해서 49년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박해와 64년 네로 황제의 박해 이전 어느 한 시점으로 봅니다. 한 가지 기준이 되는 중요한 사건은 주후 70년에 일어난 예루살렘 성전 파괴입니다. 만일 본 서신이 예루살렘 파괴 이후에 써졌다면, 유대 제사제도의 한계를 논하는 본 서신의 성격상(참조 8:13) 그 사건에 관련된 언급이 반드시 나타나야 할 텐데 그런 흔적이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다. 더욱이 제사제도와 관련된 언급들의 동사가 현재형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은 그 당시 성전에서 레위기적 제사가 실행되고 있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는 주후 70년보다 이른 시기에 저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3. 수신자 : 수신자는 13:24a “너희의 모든 인도자들과 성도들에게 문안하라”를 볼 때 ‘한 도시의 여러 구역에 흩어져 존재하던 작은 가정 교회들’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예수님께 직접 들었던 자들로부터 전해 들음으로써 믿음에 이른 자들이었습니다(2:3). 그들은 성도들을 섬김으로 형제에 대한 자신들의 사랑을 증명해 보였습니다(6:9,10). 그들은 고난을 잘 견뎌 내었고, 구체적으로 자신들의 재산을 빼앗기는 것까지 기꺼이 감수했습니다(10:32-35).
4. 시대 배경 : 그러나 현재 그들은 이런 영광스런 신앙경력에도 영적으로 둔감한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5:11). 심지어 그들 중 어떤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서 구원의 길에서 떨어져나갈 위기에 봉착해 있었습니다(2:1 ; 3:12,13 ; 4:1,11 ; 6:11 ; 12:15). 그들은 마땅히 선생이 되어야 할 정도의 상당히 긴 신앙경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영적 유아기를 넘어서지 못했거나 아니면 그 상태로 되돌아갔던 것입니다(5:12). 그들이 이와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된 이유는 ‘고난에 대한 두려움’(10:32-34)과 ‘유대교에 대한 미련’(4:14-10:39)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그들은 순교를 당하기까지 고난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히12:4). 하지만 이제는 그들에게 그러한 위협이 점점 현실화되어 가고 있었고, 인내와 헌신이 약화되어 가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10:35,36 ; 12:3 ; 13:13).
유대교 출신 기독교인들이 유대교를 떠나 예수님을 믿으면서 무슨 기대를 했을까요? 유대교보다 훨씬 뛰어난 살아있는 예배, 완전한 죄사함, 더 정교한 율법, 하나님의 축복하심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합니까? 이들은 유대교의 박해를 받아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수모를 당했습니다. 예를 들어 히11: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는 말씀을 보면 그들은 현실에서 보고 싶은 것이 많았습니다. 믿음의 결과를 보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눈에 보이는 결과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요한복음 11 장에 보면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히브리 신자들도 믿어서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을 보고 싶었습니다. 요한복음 5 장에서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의 말씀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그런 것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의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믿음에 대해서 회의가 생겼습니다. 과연 믿음이란 무엇인가? 그래서 히브리 저자는 말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살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히브리서 11 장에서 예로 든 믿음의 조상들은 다 보지 못하고 믿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고 할 때, 과연 무엇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히12: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예수님은 믿음의 주요, 인도자요, 완성자이십니다.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하면서 영적인 방향과 목표를 자기 꿈의 성취나 인생 문제 해결이나 외적인 성장에 두기 쉽습니다. 또는 자기 경쟁자를 바라보면서 믿음의 경주를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경주의 목표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당시 신자들은 일반 사회의 기준으로 봤을 때 부끄러웠습니다. 마치 사라가 믿음으로 살았지만 자식이 없어서 부끄러웠듯이, 혹은 엘리사벳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흠이 없이 살았으나 아들이 없어 부끄러움을 당했듯이, 우리 목자들이 양이 없이 부끄러움을 당하듯이 그들도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본 받아 우리도 부끄러움을 개의치 말고 십자가를 참으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당시 그들에게는 말씀 중심의 예배가 의식 중심의 성전제사보다 못해 보였습니다. 믿음의 법도 구약의 율법과 비교해 막연하기만 하고, 자신들이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하는데 화려한 구약의 제사장들보다 초라해 보였습니다. 저자는 이런 그들을 어떻게 돕고 있습니까? 저자는 구약의 대제사장과 비교할 수 없이 더 뛰어나신 대제사장 예수님을 소개하며 흔들리지 말라고 합니다.
5. 주제 및 구성 : 히브리서의 주제는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은 누구신가입니다. 1장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강조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스도는 창조의 대행자이시고,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자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으로서 만물을 붙드시며 모든 천사들의 경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따라서 그 분은 천사보다 뛰어나십니다. 2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천사보다 잠깐 낮아지셔서 성육신하였고 우리와 동일하게 고난과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는 부활하심으로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고 그 결과 우리 구원의 창시자가 되셨습니다. 천사는 천상적 존재로서 인간의 아픔을 공감할 수 없습니다. 반면 인간 제사장은 인간을 공감하지만 완전한 존재가 아니어서 둘 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진정한 중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성과 인성을 지니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완전한 중보자요 대제사장으로써 우리를 진정으로 도우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신성과 인성을 지니신 예수님에 대한 이해는 대제사장적 기독론의 기반을 제공해줍니다. 대제사장적 기독론이란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 되심을 뜻합니다. 히브리서는 기독론이 주된 사상인데, 독특한 대제사장적 기독론이 핵심 주제입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구약성경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대제사장적 기독론을 통해서 예수님의 탁월함을 증거하고자 하였습니다. 히브리서에는 그리스도의 우월성, 그리스도 제사장직의 우월성, 희생제물로서 그리스도의 우월성이라는 세 가지 중요한 중심주제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당시 성도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다시 돌아가려고 했던 유대교에 대해서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을 알려줌으로 성도들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천사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아론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 새롭고 산 길 되신 그리스도입니다. 이 진리는 수신자들에게 큰 격려를 주었습니다. 완전한 중보자 예수님은 시험받는 우리들을 이해하고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3:1-5:10은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 예수님의 두 가지 측면을 확장 설명해 나갑니다. 3:1-6절은 ‘신실한’ 4:14-5:10은 ‘자비로운’ 측면을 설명합니다. 특히 5:7-10은 예수님께서 자비로운 대제사장이 되기 위해 얼마나 철저히 기도를 통해서 시험을 이기시고 순종하심으로 완전하게 되셨는지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인간으로서 철저하게 순종을 배우신 예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연약한 우리를 동정하고 돕고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5:10절에 도입된 예수님이 멜기세덱 계열의 대제사장이라는 내용은 7장에서 상세하게 전개되는데 시편 110:4와 창세기 14:18-20절을 활용하여 예수님이 멜기세덱 계열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요, 왕과 제사장직을 공유하신 분이라는 독특한 기독론을 펼칩니다. 예수님이 레위지파가 아니라 유다지파 출신이라는 사실이 모세 율법이 규정한 대제사장 조건의 결격사유가 아니라 더 탁월한 대제사장의 조건으로 부각됩니다(7:13-16). 그러면서 율법의 한계, 레위계열 대제사장의 한계 등을 지적합니다. 히브리서의 기독론의 독특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 독특성은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실 뿐 아니라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신다는 점을 선언하는데서 그 정점에 이릅니다.
8-10장은 이미 7:27절에서 소개된 그리스도의 사역, 희생 제사 주제를 발전시켜 나갑니다. 참 대제사장 예수님이 섬기시는 장막은 지상의 장막이 아니라 하늘장막입니다. 그분의 직분과 사역은 옛 언약을 대체하는 새 언약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분의 제사는 옛 희생제사보다 탁월한데, 그 우월성은 존재론적으로, 도덕적으로 완전하신 대제사장 자신이 단번에 영원한 희생제물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9,10장은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의 단회성과 영원한 효용성을 부각합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구약의 희생 제사를 다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이라는 통찰은 히브리서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히브리서만큼 특색 있고 구체적으로 묘사한 곳은 없습니다.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른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에 대한 설명은 히브리서 저자의 탁월한 독창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대속죄일의 예식과 예수님의 희생과 죽음을 연관시켜 예수님이 그리스도 되심을 전개 시키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초대교회 당시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라는 단순한 복음 선포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당시 초대교회가 전했던 복음이 모든 상황을 다 고려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전에 제기되지 않은 문제들이 발생되었는데 히브리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대답을 그들의 상황에 맞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히브리서에 나온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의 특징들은 수신자들이 접해 있는 특별한 역사적 정황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재발견하라”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탁월하시고 완전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재발견’에 기초해서 유대교의 유혹에 흔들리지 말고 확고하게 믿음의 길을 걸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11-13장은 결론적인 권면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되는 믿음과 인내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11장은 구약의 성도들의 믿음의 승리를 이야기하는데, 이는 우리를 기죽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옛 언약의 백성이 잘했다면 우리는 새 언약의 중보자를 받을 자들로 더 잘 할 수 있다는 격려입니다. 12장은 소망장입니다. 고난 속에 있는 히브리서 성도들이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음의 경주를 잘 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1-13절은 주께서 주시는 징계를 말하고, 14-29절은 하나님의 도성인 축제의 모임, 흔들리지 아니하는 나라를 소망하며 살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13장은 사랑장이라고 합니다. 이제 새 언약의 백성으로 찬송의 제사, 오직 선을 행함과 나누어 주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리자고 권면합니다.
히브리서는 ‘영적 피곤’이라는 목회적 문제를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수신 공동체는 대부분 영적으로 소진되었습니다. 전도와 선교도 힘들고, 예배에도 싫증이 났고, 여러 가지 기독교 교육프로그램에도 싫증이 났습니다. 그 사회에서 특이한 것 때문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힘들기만 하고, 영적 투쟁에 싫증났고 기도생활을 지속하는 데 싫증났고 심지어 예수님에게도 싫증났습니다. 교회행사나 지도자에게도 시큰둥하고 따라서 교회에 모이는 인원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공동체를 떠나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6. 배울 점 : 이런 상황에 대한 히브리서 기자의 해결책은 무엇이었습니까? 개선된 커뮤니케이션, 갈등 관리, 좀 더 활기찬 예배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의의’에 대해서 길고 복잡하게 설명했습니다. 영적 소진의 문제에 직면하여, 그는 아주 용감하고 무모하리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과 의미에 대해서 복잡한 신앙 용어로” 설교했습니다. 히브리서 수신자들의 상태와 유사한 개인과 공동체 현실에서 우리는 히브리서 저자의 해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 해법이란 “예수님을 재발견하라”란 한마디 모토에 담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예수님이 얼마나 탁월하고 귀한 분인지, 완전한 분인지를 알 때 매너리즘, 유혹, 두려움 등 모든 개인과 공동체의 문제가 해결되고 방향이 잡힙니다. 예수님에게 집중하고 예수님을 더 정확하고 완전하게 아는 것이 모든 문제의 해법입니다.
처음에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뜨거운 감격과 기쁨이 넘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 연륜이 쌓이는데 성장이 없고, 자신들의 믿음으로 인해서 유대공동체와의 단절이 생기고 사회적 소외, 경제적인 궁핍까지 겹쳤습니다. 이로 인한 실제적인 아픔과 고통이 컸습니다. 게다가 ‘기독교가 별 것인가’, ‘뭔가 경건하고 거룩한 의식도 없다’ 이런 가운데 옛날의 제사 제도가 그리워졌습니다. 예수님으로는 뭔가 부족한 것 같고, 예수님을 믿어도 되고, 유대교로 돌아가도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종교다원주의적인 생각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 되심에 대한 믿음도 약화되었습니다. 믿음이 약해지자 고난은 더 커 보이고 옛날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이 강렬했습니다. 더구나 유대교는 로마와의 정치적인 타협을 통해서 어느 정도 핍박으로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을 믿는 것의 탁월성과 가치를 탄탄한 건축학적 논리와 신선하고 독창적인 전개로 예수님을 재발견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난과 유혹의 의미를 가르치며 그 고난과 유혹을 잘 극복한 믿음의 선진들과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잘 감당하도록 도왔습니다.
우리가 히브리서 공부를 통해서 그 무엇보다 탁월하시고 완전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해서 재발견하고 예수님께 매료됨으로서 모든 유혹과 고난과 매너리즘을 이기고 확신과 감동과 열정이 넘치는 가운데 믿음의 길을 달려가는 개인,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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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회 다운로드 | DATE : 2015-10-11 14:3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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