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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15년 요24강(21:1-25)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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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19회 작성일 15-10-04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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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요한복음 제 24 강 
말씀 | 요한복음 21:1-25
요절 | 요한복음 21:15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미 두 번 만나셨습니다. 그는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신 사명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이전까지 제자들은 방향을 잡지 못했습니다. 현실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문제를 잘 아셨습니다. 먼저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고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양을 맡은 사람들은 그 무엇보다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양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 시간 우리가 주님과 사랑의 관계성을 새롭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고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그들이 사함을 받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는 권세를 위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어떻게 할 줄을 몰랐습니다. 또 도마의 감격적인 신앙 고백이 있었습니다.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심이니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현실 문제가 있었습니다. 배가 고팠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도마와 나다나엘과 야고보와 요한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하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습니다. 먹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 제자들은 사명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장래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났다가 가버리셨는데 모든 것이 막막했습니다.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있긴 있는 것 같은데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과거에 하던 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 날 밤에 그물을 내렸다 올렸다를 반복했지만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일을 하긴 하는데 신바람이 나지 않았습니다. 날이 새어 갈 때에 예수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은 예수님이신 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날 샜다는 말이 있습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실패하고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을 때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실패 가운데 있는 직장에도 찾아오십니다. 학업에 실패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학생들에게도 찾아오십니다. 양을 치다가 실패하여 더 이상 양을 칠 것 같지 않은 목자에게도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죄를 지은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가야 할 것 같은데 그들은 과거로 돌아갔고 예수님이 먼저 찾아오십니다. 죄 지은 자를 정죄하고 손을 봐주어야 할 것 같은데 도리어 용서하고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실패한 그들을 예수님은 어떻게 도우십니까? 

  예수님은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이는 너희에게 먹을 수 있는 고기가 있느냐? 한마디로 ‘너희가 먹을 게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들은 힘없이 “없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찾으러 갔는데 먹을 게 없었습니다. 먹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사도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먹는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면 먹는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고 방향을 주셨습니다.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었습니다.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었지만 그들의 팔에는 힘이 들어갔습니다. 잡은 물고기로 인해 제자들의 마음이 푸근해졌습니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니 마음에 여유가 생겼습니다. 힘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해보고 싶은 의욕이 생겼습니다. 과거에 그들은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피라미 한 마리 잡지 못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의 배에 오르시고 말씀을 전하신 후에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려 두 배 가득 고기를 잡고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렸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예수님은 그에게 “무서워 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말씀하시며 그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처음 그가 예수님을 따르던 때를 기억나게 하십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이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라”고 귀 뜸을 해 주었습니다. 그는 베드로보다 발이 빨랐지만 눈치도 빨랐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렸습니다. 오늘날로 하면 정장을 하고 넥타이를 매고 바다로 다이빙을 하여 헤엄을 쳐 주님께 나아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의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경외심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여전히 행동이 앞서는 사람입니다. 100여 미터를 헤엄을 쳐 육지에 올라온 그의 모습은 물에 젖은 생쥐와 같았습니다. 새벽에 추웠을 그를 예수님은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먹을 것도 준비해주셨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있는 사랑은 더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육지에 올라온 제자들은 어떤 광경을 보았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집 나간 탕자를 맞이하여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였던 아버지와 같이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성대한 아침 식사를 준비하셨습니다. 밤새도록 일을 한 제자들의 입맛을 돋우는 생선숯불구이와 떡이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사정을 아시고 먹을 것을 미리 준비해 두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머니와 같이 정성스럽게 맛있는 아침상을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였습니다. 물고기가 그렇게 많았지만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초청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광스럽게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을 통해서 제자들은 마음이 녹았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또는 부인하고 떠난 마음의 상처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용서한다’는 등의 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함께 먹고 마시며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연약하여 죄에 넘어지고 주님을 슬프시게 합니다. 자신을 자학하며 정죄하고 누워 있기를 잘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먼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부르셨습니다. 반석이라는 뜻의 베드로, 게바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기 전의 이름, 시몬으로 그를 부르셨습니다. 시몬은 그가 변화되기 전의 이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는 첫 사랑을 생각나게 하고 그 사랑을 회복하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지금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입니다. 과거에 그는 예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주를 버릴지라도 자신은 죽을지언정 주님을 따르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세 번씩 부인하고 물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그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사랑은 현재형이어야 합니다. 사랑은 지금이 중요합니다.

  이 사람들은 이것들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이 세상에 속한 것들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부와 명예보다 자기의 꿈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지난 날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한다며 따랐지만 사실 자기의 꿈을 사랑했습니다. 지상 메시아 왕국, 그곳에서 최고의 자리에 앉을 꿈을 사랑했습니다. 그 결과 주님을 부인하고 통곡하며 자책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이것들 속에는 베드로 자신도 포함됩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사랑했습니다. 그가 한 모든 행동은 자기 사랑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런 시몬을 용서하셨습니다. 그에게 복음신앙을 다시 회복해 주고자 하십니다. 그를 위로하고 용기를 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를 다시 복권시켜주고 싶어하십니다. 그래서 다시 마음껏 주님의 일을 하도록 도우십니다. 그가 일생 주님의 사랑을 알아가도록 도와주십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기의 양을 맡기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에게는 자신이 떠난 이후 누구에게 남은 양들을 맡길 것인가가 중요했습니다. 말씀을 파는 능력도 중요하고 경영 능력도 중요하고 가르치는 은사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할 때 양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양을 돌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역을 누구에게 맡길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충성스런 일꾼에게 맡기라고 했습니다. 사랑할 때 충성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맡겨야 합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사랑할 때 양들을 먹이고 보호하고 이들의 성장을 위해서 충성을 다해 일할 수 있습니다.   
 
  네가 나를 이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전 같으면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 한 목숨 다 바쳐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도 아시잖아요’라고 확신에 차서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를 경험한 그는 이제 겸손해졌습니다. 자신에 대한 확신, 과신이 깨어졌습니다. 주님이 자신보다 자신을 더 잘 아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겸손하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사랑을 고백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내 양을 먹이라”고 강조하여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는 자에게 그 양을 맡기십니다. 우리는 목자라고 하면서 양을 치고 있는데 과연 예수님을 사랑해서 양을 치는지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게 베푸신 죄사함의 은혜, 구원의 은혜, 나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은혜, 훈련하시는 은혜를 기억할 때 그 사랑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의 말씀을 듣고 실천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의 어린 양을 먹여야 합니다. 그의 양을 치라는 것은 나에 대한 예수님의 부탁이요, 명령입니다.

  내가 먹이는 양은 내 양이 아니라 ‘예수님의 양’ 입니다. 목자는 양을 내 양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양을 내 양으로 생각함으로 인해 소유의식, 인간적인 집착에 빠져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양이 결혼을 하여 떠나가면 빈집 증후군이 생겨서 정신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양을 예수님의 양으로 생각하고 그가 성숙하면 보내야 합니다. 우리는 양은 예수님이 맡기신 예수님의 양임을 깊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목자는 어린 양이 자립적인 신앙인이 될 때까지 돕는 일을 할 뿐입니다. 그가 성숙하게 되면 동역자로 생각해야 합니다. 언제까지나 목자 노릇을 하며 위에서 군림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목자는 양을 사랑하여 진리의 말씀을 먹이고, 그가 열매를 맺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목자는 양을 진리의 길로 인도하며 예수님을 따르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질문도, 세 번째 질문도 같았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내 양을 치라.” 예수님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을 때 베드로는 근심했습니다. 질문을 받은 베드로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동안 그렇게 열심히 쫓아다니던 주님을 정말로 사랑했는가? 변화 산에 올라가 주님의 영광을 볼 때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고 여기서 살자”고 했을 때 사랑은 없었습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아니라”고 했을 때도 사랑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열심이 있었을 뿐입니다.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한 것이 사랑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명예가 걸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죽게 되었다”며 고민하고 슬퍼하며 기도하실 때에도 사랑했다면 코를 골며 자지 않고 곁에서 같이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제 돌아보니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잡혀가실 때 멀찍이 따라가면서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갔지만 그것도 일의 결국에 대해 궁금했을 뿐 사랑은 아니었습니다. 사랑했다면 모든 사람 앞에서 맹세하고 부인하면서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했겠습니까?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던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통곡하던 때도 사랑의 눈물은 아니었습니다. 후회와 수치의 눈물이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주님께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라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왜 그랬을까? 사랑입니까? 아니었습니다. 이제 보니 그것은 자신의 출세와 성공을 위해서 였습니다.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릴 때는 무엇이었습니까? 의분이었습니다. 부활의 소식을 듣고 달려갈 때는 놀라서 그랬습니다. 이렇게 지난 날들이 영화필름처럼 돌아갔습니다. 여기까지 생각한 베드로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근심하면서 고백합니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세 번씩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은 것은 그의 사랑을 의심해서 물은 것이 아닙니다. 세 번 물은 것은 그가 세 번 부인한 것을 생각나게 하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사랑 고백을 듣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가페(모든 것을 주는 사랑, 외아들까지 주는 그런 사랑)로 물으시고 베드로는 끝까지 필레오(친구 사이의 사랑)로 대답합니다. 그는 자기 사랑의 한계를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네가 나를 친구 정도로 좋아하니? 그래 안다. 그래도 좋다. 그래도 나는 너를 믿는다. 내 양을 치라. 오늘날 이 땅에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설령 스스로는 그런 사랑을 한다고 믿어도 사실은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살을 찢으시고 죽으신 주님을 일생 동안 사랑하겠다고 맹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주님은 그것까지도 아십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우리는 여전히 결점 투성이입니다. 그래도 주님은 우리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까? 거짓말입니다. 제가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이 저를 사랑한 것에 비하면 홍대 운동장의 한 알의 모래만큼도 못할 것입니다. 때때로 주님께서 저를 사랑한 것에 비해 저의 자기 사랑을 생각하면 회개의 눈물이 흐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제게 사명을 맡기시고 일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앞으로 남은 양들을 먹이는 일이 크고 중요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양들을 맡기기 위해서 베드로를 목자로 키우셨습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좋아하는 것입니다. 희생하는 것입니다. 주는 것입니다. 헌신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말 속에는 많은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말씀을 가르쳐 준 것, 먹을 것을 준 것, 섬겨 준 것, 대화하고 교제하며 경청해 주는 것, 인생의 고민을 함께 나누는 것 등 다 사랑에 기초해서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사랑은 서로를 잘 아는 관계입니다. 예수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물음은 네가 나를 잘 알고 내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알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제자에서 친구로, 친구에서 동역자로, 수직적인 관계에서 수평적인 관계로 그를 대우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그의 양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목자로서 양을 치다보면 예수님의 마음을 많이 배우게 됩니다. 이는 마치 부모가 되어 봐야 자식에 대한 부모의 마음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머니의 마음을 다 알 수 있습니까? 잘 모릅니다. 한 명의 자녀를 양육하기 위한 부모의 해산의 수고를 목자는 양을 치면서 조금씩 조금씩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일대일 관계성을 맺고 말씀을 공부합니다. 일대일 목자는 선생이라기보다는 어머니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산 양들을 돌볼 목자를 찾습니다. 우리가 양을 치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장래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는 젊어서는 스스로 원하는 대로 다녔습니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는 말씀은 베드로의 죽음에 대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처형되었습니다. 그는 순교할 때 자청하여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서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자신은 예수님과 같이 똑바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자격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목자의 삶이란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의 삶은 주의 사랑에 매여 주님의 양을 돌보는 사명에 붙잡힌 삶입니다. 군인은 자기 생활에 매이는 자가 없습니다. 이는 그를 군인으로 모집한 국가에 충성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목자도 자유하지만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사명 중심의 매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는 어떻게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목자로 산다고 해도 각자 자기가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살지 말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목자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저렇게 사는데 나만 이 고생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회의하며 손해의식을 느끼고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각자 주님이 나를 부르신 길이 있고 그 길로 주님을 따라가면 됩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이 희생하고 사랑을 적게 받은 사람은 적게 희생합니다. 또 직분도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평신도 목자로, 어떤 사람은 선교사로, 어떤 사람은 스탭 목자로 제 각기 갈 길이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주님이 주신 길을 따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먹고 사는 문제로 시달리는 제자들, 허물 많은 제자들을 찾아오시고 떡과 생선 구이로, 숯불 같은 뜨거운 사랑으로 섬겨주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고 양을 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배우는 마음으로 일생 양을 먹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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