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16년 행4강(4:1-31)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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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사도행전 제 4 강
말씀 | 사도행전 4:1-31
요절 | 사도행전 4:20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오순절에 성령이 제자들에게 충만히 임하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권세로 일어나 걷고 뛰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삼천 명이 회개하고 신자가 되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강력하게 일어나자 이를 방해하는 핍박의 역사가 따라왔습니다. 사도들은 핍박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배우기를 원합니다. 기독교는 핍박을 받으면서도 계속해서 성장해왔습니다. 사도들은 핍박 앞에서 어떤 방향을 잡았는지 배우기를 원합니다.
사도들이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에게 가르쳤습니다. 사도들이 부활에 관한 말씀을 전하는 것을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은 몹시 싫어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부정했습니다. 그들이 바리새인들과 주도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했는데 그가 부활했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었습니다. 그가 부활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라는 증거입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전할수록 종교지도자들의 죄가 드러나게 되니 그들은 죽을 맛이었습니다. 예수만 처형하면 시국이 조용해질 줄 알았는데 사도들로 인해서 다시 시끄러워지는 것을 그들은 원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전하는 사도들을 단에서 끌어내렸습니다. 그리고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자가 많아 남자만 오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죽은 자의 부활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신자들은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핍박자들이 사도들은 가둘 수 있었지만 말씀은 가둘 수 없었습니다. 말씀은 생명력이 있어 고난 가운데서도 매이지 아니했습니다. 핍박과 방해가 있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 문중이 다 참여하여 사도들을 심문하였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너희가 무슨 자격으로 성전에서 말씀을 증거하는가? 권위의 출처를 묻고 있습니다. 당시 제사장들만이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칠 수 있는 합법적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런 권세가 없는데 성전에서 말씀을 전하자 종교지도자들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공격했습니다. 인간의 권위를 앞세우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허가가 없으면 인정하지 않고 도전이라 여깁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올바로 사용하지 않게 될 때 그들의 특권은 언제든지 옮겨질 수 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한 마디 하였습니다.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전에 그들 앞에서 두려움에 떨던 베드로가 아니었습니다. 최고 권력 기관에서 심문을 받으면 위축되기 쉽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먼저 너희들이 예수님을 죽였다고 분명하게 그들의 죄를 지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음을 말합니다. 그들이 듣기 싫어하는 부활 진리를 분명하게 전했습니다.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앉은뱅이가 건강하게 되었음을 증거합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사도 베드로는 ‘너희 건축자들’을 강조하면서 그들의 죄를 지적합니다. 그들이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구원의 반석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천하 인간에 예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을 구원을 위해 주신 적이 없다고 강조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구원은 이루어집니다. 공회의 이름이 아닙니다. 대형 교회의 이름도 아닙니다. 어떤 종교의 이름도 아닙니다. 어떤 이단교주의 이름도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는 사람이나 조직보다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구원을 위한 유일한 이름입니다. 누구든지 그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습니다(2:21). 오늘날 구원을 줄 것 같이 유혹하는 세력들이 많이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 시대에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가는 길이 다를 뿐이지 목적지는 같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를 죄와 사망 권세에서 구원할 유일한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주이십니다. 우리는 오직 그 이름만을 믿어야 하고, 그 이름만을 전해야 합니다. 구원을 위해 다른 이름을 전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
종교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겼습니다. 성령께서 지혜와 지식의 은사를 주셔서 조리있게 말하도록 도우셨습니다. 두 사람의 논리정연한 말과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할 말이 없자 “공회에서 나가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들은 서로 모여 의논했습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그들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제자들을 다시 불러 경고했습니다.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이들의 경고는 최고 기관의 경고로써 이를 어길 때 어떤 대가를 치를지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이 경고를 빙자해서 위협을 했습니다. 다음에 또 그러면 가만 놔주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의 말은 빈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말대로 나중에 스데반이 순교하고 야고보가 순교하고 교회는 핍박을 받아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위협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의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19,20절을 보십시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사람의 말을 들을 것인가? 하나님의 말을 들을 것인가? 사도들은 위협하는 공회원들에게 도리어 판단을 요구합니다. 너희의 말을 들을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인가? 어떤 것이 옳은가? 당연히 공회원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공회원들의 말은 인간의 말임을 잘 알았습니다. 인간의 말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사람의 말은 그때, 그때 변합니다. 사람의 말은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지켜낼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진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입니다. 진리의 말씀입니다. 사람의 말이 아무리 고상해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사람의 어떤 위협의 말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사도들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말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보고 들은 것이 너무 감동적이어서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말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고백과 같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7-9).” 최권능 목사님도 핍박을 받을 때마다 예수 천당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를 고문하던 경사가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협박해도 자신의 몸에는 예수의 이름이 충만하기 때문에 어디를 때려도 예수의 이름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 속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 차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깨달음이 있을 때 이 말씀을 누군가에게는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깊이 받으면 소감을 써서 나누고 싶어집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말씀을 풍성히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증인의 삶은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위협과 핍박도 그들에게 증인의 삶을 포기하도록 강제할 수 없었습니다. 핍박과 위협의 강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앞에 우리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핍박 앞에서 위축될 것인가? 적당하게 타협할 것인가? 사도들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타협하지도 않았습니다. 더욱 절대적으로 증인의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편에서 옳은 길임을 잘 알았습니다. 이런 그들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행전은 환난과 핍박 앞에서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증인의 삶을 사는 사도들의 기록으로 가득합니다. 우리가 캠퍼스에서 복음을 전할 때 때로 위협과 핍박이 있습니다. 학교 당국이나 총학생회에서 전도를 하면 신고를 하라는 플랭카드도 걸렸습니다. 전도를 하다가 학생과에 끌려간 목자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 무엇도 증인의 삶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작은 핍박과 시련 앞에서 물러서지 말고 줄기차게 전하는 증인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동국대학교 불교학 박사이자 40년간 승려 생활을 한 김진열씨가 최근 학창 시절 믿었던 기독교 신앙을 회복하고 제 2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는 1970년 초 대학입시에 실패했습니다. ‘교회 다니는 내가 왜 대학을 낙방해?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인생은 어디로 가는 것인가.’ 별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1977년 절에 들어갔고 81년 승려가 되었습니다. 그는 92년 불교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 후 9년간 중앙승가대에서 강의했고 불교계에서 촉망받는 학자이고 승려였습니다. 그는 3년전 꿈 속에서 거칠게 생긴 두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와 저승에서 왔다며 가자고 끌고 가려해서 너무 놀라 잠에서 깼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삶을 살다가 어릴 때 읽은 성경 구절이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10).” 그는 40년간 승려 생활을 하고 수행을 했지만 진리는 없고 구원의 길도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 어느 때보다 마음의 평안을 누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다음 달 ‘내치신 부처님, 안아주신 예수님-내게 입 맞추기를 원하니’(더나은생각)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한다고 합니다. 정준기 박사님도 한 때 승려 생활을 했다가 예수님을 믿고 선교사요 교수로서 헌신하셨습니다. 이 분은 자신이 발견한 예수님을 일생 전하였습니다.
관리들은 백성들 때문에 사도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주었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었습니다. 사도들은 놓임을 받고 나서 그 동료들에게 가서 기도 모임을 하였습니다. 먼저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렸습니다. 성도들이 듣고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 높여 기도했습니다.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오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성도들은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가말리엘 교법사는 공회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행 5:38,39).” 세상의 군왕과 관리들이 모여 그리스도를 대적하지만 헛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대적해도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예수님을 죽이고 나서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했다고 좋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도구들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한다고 일을 꾸몄지만, 허사를 경영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되면 때로는 불신 가족들로부터 핍박을 받습니다. 친구들의 핍박도 있습니다. 북한과 모슬렘 지역에서는 국가적인 핍박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허사를 경영하는 것입니다.
핍박을 당할 때 성도들은 그 위협 앞에서 기도에 힘을 썼습니다. 사도들은 성도들과 합심해서 기도했습니다. 위협 앞에서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이 한 일은 기도한 것입니다. 그들은 위협을 없게 해 달라고 구하지 않았습니다. 위협을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위협 앞에서 하나님의 살피심과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또한 박해가 있지만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또 위협과 핍박을 예수님을 전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위협이 아니라 담대히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전도할 때 당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주눅 들지 말고 담대히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기를 기도했습니다. 말씀 역사에 표적과 기사가 함께 하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사도들에게 있어서 표적과 기사는 첫째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말씀 전파를 위해 표적과 기사를 구한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어가는 표적이 있었을 때 사도들은 인기를 즐긴 것이 아니라 말씀을 전했습니다. 말씀 전파를 위해 그와 같은 표적과 기사를 위해 기도한 것입니다. 표적과 기사가 목적이 되면 신앙이 병들게 됩니다. 표적과 기사는 말씀 전파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31절을 보십시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그들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그들의 기도가 끝나자 모인 곳이 진동했습니다. 진동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진동을 통해 기도 응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들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 부분이 사도행전에서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지금까지는 사도들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이제는 모든 성도들이 말씀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증인의 숫자가 놀랍게 늘어났습니다. 성령께서 모든 사람들을 증인으로 세우셔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이로써 말씀 역사를 막으려는 종교지도자들의 위협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진리를 깨달으며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우리가 체험한 은혜를 증거하는 가운데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복음 전도와 일대일 성경 공부가 활발히 이루어지게 도와주시고 소감을 써서 나누는 역사가 불일 듯이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 나누는 가운데 은혜가 더욱 풍성해 지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사도행전 4:1-31
요절 | 사도행전 4:20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오순절에 성령이 제자들에게 충만히 임하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권세로 일어나 걷고 뛰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삼천 명이 회개하고 신자가 되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강력하게 일어나자 이를 방해하는 핍박의 역사가 따라왔습니다. 사도들은 핍박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배우기를 원합니다. 기독교는 핍박을 받으면서도 계속해서 성장해왔습니다. 사도들은 핍박 앞에서 어떤 방향을 잡았는지 배우기를 원합니다.
사도들이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에게 가르쳤습니다. 사도들이 부활에 관한 말씀을 전하는 것을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은 몹시 싫어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부정했습니다. 그들이 바리새인들과 주도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했는데 그가 부활했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었습니다. 그가 부활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라는 증거입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전할수록 종교지도자들의 죄가 드러나게 되니 그들은 죽을 맛이었습니다. 예수만 처형하면 시국이 조용해질 줄 알았는데 사도들로 인해서 다시 시끄러워지는 것을 그들은 원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전하는 사도들을 단에서 끌어내렸습니다. 그리고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자가 많아 남자만 오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죽은 자의 부활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을 믿는 신자들은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핍박자들이 사도들은 가둘 수 있었지만 말씀은 가둘 수 없었습니다. 말씀은 생명력이 있어 고난 가운데서도 매이지 아니했습니다. 핍박과 방해가 있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 문중이 다 참여하여 사도들을 심문하였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너희가 무슨 자격으로 성전에서 말씀을 증거하는가? 권위의 출처를 묻고 있습니다. 당시 제사장들만이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칠 수 있는 합법적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런 권세가 없는데 성전에서 말씀을 전하자 종교지도자들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공격했습니다. 인간의 권위를 앞세우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허가가 없으면 인정하지 않고 도전이라 여깁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올바로 사용하지 않게 될 때 그들의 특권은 언제든지 옮겨질 수 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한 마디 하였습니다.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전에 그들 앞에서 두려움에 떨던 베드로가 아니었습니다. 최고 권력 기관에서 심문을 받으면 위축되기 쉽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먼저 너희들이 예수님을 죽였다고 분명하게 그들의 죄를 지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음을 말합니다. 그들이 듣기 싫어하는 부활 진리를 분명하게 전했습니다.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앉은뱅이가 건강하게 되었음을 증거합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사도 베드로는 ‘너희 건축자들’을 강조하면서 그들의 죄를 지적합니다. 그들이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구원의 반석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천하 인간에 예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을 구원을 위해 주신 적이 없다고 강조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구원은 이루어집니다. 공회의 이름이 아닙니다. 대형 교회의 이름도 아닙니다. 어떤 종교의 이름도 아닙니다. 어떤 이단교주의 이름도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는 사람이나 조직보다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구원을 위한 유일한 이름입니다. 누구든지 그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습니다(2:21). 오늘날 구원을 줄 것 같이 유혹하는 세력들이 많이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 시대에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가는 길이 다를 뿐이지 목적지는 같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를 죄와 사망 권세에서 구원할 유일한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주이십니다. 우리는 오직 그 이름만을 믿어야 하고, 그 이름만을 전해야 합니다. 구원을 위해 다른 이름을 전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
종교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겼습니다. 성령께서 지혜와 지식의 은사를 주셔서 조리있게 말하도록 도우셨습니다. 두 사람의 논리정연한 말과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할 말이 없자 “공회에서 나가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들은 서로 모여 의논했습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그들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제자들을 다시 불러 경고했습니다.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이들의 경고는 최고 기관의 경고로써 이를 어길 때 어떤 대가를 치를지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이 경고를 빙자해서 위협을 했습니다. 다음에 또 그러면 가만 놔주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의 말은 빈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말대로 나중에 스데반이 순교하고 야고보가 순교하고 교회는 핍박을 받아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위협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의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19,20절을 보십시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사람의 말을 들을 것인가? 하나님의 말을 들을 것인가? 사도들은 위협하는 공회원들에게 도리어 판단을 요구합니다. 너희의 말을 들을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인가? 어떤 것이 옳은가? 당연히 공회원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공회원들의 말은 인간의 말임을 잘 알았습니다. 인간의 말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사람의 말은 그때, 그때 변합니다. 사람의 말은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지켜낼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진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입니다. 진리의 말씀입니다. 사람의 말이 아무리 고상해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사람의 어떤 위협의 말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사도들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말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보고 들은 것이 너무 감동적이어서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말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고백과 같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7-9).” 최권능 목사님도 핍박을 받을 때마다 예수 천당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를 고문하던 경사가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협박해도 자신의 몸에는 예수의 이름이 충만하기 때문에 어디를 때려도 예수의 이름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 속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 차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깨달음이 있을 때 이 말씀을 누군가에게는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깊이 받으면 소감을 써서 나누고 싶어집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말씀을 풍성히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증인의 삶은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위협과 핍박도 그들에게 증인의 삶을 포기하도록 강제할 수 없었습니다. 핍박과 위협의 강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앞에 우리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핍박 앞에서 위축될 것인가? 적당하게 타협할 것인가? 사도들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타협하지도 않았습니다. 더욱 절대적으로 증인의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편에서 옳은 길임을 잘 알았습니다. 이런 그들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행전은 환난과 핍박 앞에서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증인의 삶을 사는 사도들의 기록으로 가득합니다. 우리가 캠퍼스에서 복음을 전할 때 때로 위협과 핍박이 있습니다. 학교 당국이나 총학생회에서 전도를 하면 신고를 하라는 플랭카드도 걸렸습니다. 전도를 하다가 학생과에 끌려간 목자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 무엇도 증인의 삶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작은 핍박과 시련 앞에서 물러서지 말고 줄기차게 전하는 증인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동국대학교 불교학 박사이자 40년간 승려 생활을 한 김진열씨가 최근 학창 시절 믿었던 기독교 신앙을 회복하고 제 2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는 1970년 초 대학입시에 실패했습니다. ‘교회 다니는 내가 왜 대학을 낙방해?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인생은 어디로 가는 것인가.’ 별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1977년 절에 들어갔고 81년 승려가 되었습니다. 그는 92년 불교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 후 9년간 중앙승가대에서 강의했고 불교계에서 촉망받는 학자이고 승려였습니다. 그는 3년전 꿈 속에서 거칠게 생긴 두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와 저승에서 왔다며 가자고 끌고 가려해서 너무 놀라 잠에서 깼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삶을 살다가 어릴 때 읽은 성경 구절이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10).” 그는 40년간 승려 생활을 하고 수행을 했지만 진리는 없고 구원의 길도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 어느 때보다 마음의 평안을 누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다음 달 ‘내치신 부처님, 안아주신 예수님-내게 입 맞추기를 원하니’(더나은생각)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한다고 합니다. 정준기 박사님도 한 때 승려 생활을 했다가 예수님을 믿고 선교사요 교수로서 헌신하셨습니다. 이 분은 자신이 발견한 예수님을 일생 전하였습니다.
관리들은 백성들 때문에 사도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주었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었습니다. 사도들은 놓임을 받고 나서 그 동료들에게 가서 기도 모임을 하였습니다. 먼저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렸습니다. 성도들이 듣고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 높여 기도했습니다.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오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성도들은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가말리엘 교법사는 공회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행 5:38,39).” 세상의 군왕과 관리들이 모여 그리스도를 대적하지만 헛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대적해도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예수님을 죽이고 나서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했다고 좋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도구들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한다고 일을 꾸몄지만, 허사를 경영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되면 때로는 불신 가족들로부터 핍박을 받습니다. 친구들의 핍박도 있습니다. 북한과 모슬렘 지역에서는 국가적인 핍박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허사를 경영하는 것입니다.
핍박을 당할 때 성도들은 그 위협 앞에서 기도에 힘을 썼습니다. 사도들은 성도들과 합심해서 기도했습니다. 위협 앞에서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이 한 일은 기도한 것입니다. 그들은 위협을 없게 해 달라고 구하지 않았습니다. 위협을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위협 앞에서 하나님의 살피심과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또한 박해가 있지만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또 위협과 핍박을 예수님을 전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위협이 아니라 담대히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전도할 때 당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주눅 들지 말고 담대히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기를 기도했습니다. 말씀 역사에 표적과 기사가 함께 하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사도들에게 있어서 표적과 기사는 첫째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말씀 전파를 위해 표적과 기사를 구한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어가는 표적이 있었을 때 사도들은 인기를 즐긴 것이 아니라 말씀을 전했습니다. 말씀 전파를 위해 그와 같은 표적과 기사를 위해 기도한 것입니다. 표적과 기사가 목적이 되면 신앙이 병들게 됩니다. 표적과 기사는 말씀 전파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31절을 보십시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그들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그들의 기도가 끝나자 모인 곳이 진동했습니다. 진동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진동을 통해 기도 응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들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 부분이 사도행전에서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지금까지는 사도들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이제는 모든 성도들이 말씀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증인의 숫자가 놀랍게 늘어났습니다. 성령께서 모든 사람들을 증인으로 세우셔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이로써 말씀 역사를 막으려는 종교지도자들의 위협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진리를 깨달으며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우리가 체험한 은혜를 증거하는 가운데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복음 전도와 일대일 성경 공부가 활발히 이루어지게 도와주시고 소감을 써서 나누는 역사가 불일 듯이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 나누는 가운데 은혜가 더욱 풍성해 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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