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2016년부활2강(고전15:35-58)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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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부활절 특강 2
말씀 | 고린도전서 15:35-58
요절 | 고린도전서 15:49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우리는 지난 주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이를 목격하였던 증인들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또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아봄으로 그의 부활을 반증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이어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면 어떤 몸으로 부활하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장차 입게 될 부활의 몸에 대해서 배우는 가운데 부활의 소망으로 충만해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부활의 소망을 갖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매장을 하기도 하지만 오늘날은 화장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어떤 시신은 항공기 폭발로 인해서 찾을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장애아로 태어나서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여러 경우를 생각할 때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부활의 몸은 어떻게 되는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이런 질문의 배후에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부정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죽은 사람이 부활할 때 입게 될 몸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합니까? 36-38절을 보십시오.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바울은 이런 질문에 대해서 “어리석은 자여”라며 돌직구를 날립니다. 왜냐하면 씨가 뿌려져 죽어야 살아나고 뿌리는 것은 현재의 형체가 아니라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씨가 뿌려져 땅에 묻히면 배젖이 죽는 것이고 배아는 살아서 거기서 싹이 나옵니다. 우리가 죽으면 육체는 썩고 사라지지만 영혼은 위로 올라갑니다. 그 영혼은 불멸이고 그 영혼이 부활할 때 몸을 입게 됩니다. 사람이 뿌리는 것은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지만 하나님은 그 뜻대로 형체를 주십니다. 씨나 알맹이를 보면 가지각색입니다. 작디 작은 겨자씨에서 커다란 망고씨, 검은 콩이나 감씨, 대추씨, 아보가드씨, 이영기씨, 김덕수씨, 노성균씨, 임제임스씨를 보면 볼품이 없습니다. 그것이 심겨져 죽고 다시 살아나는 모습은 새로운 형체입니다. 바울은 우리의 현재 생명을 씨앗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현재 생명을 몸으로 볼 것인가, 씨로 볼 것인가에 따라서 장래 부활의 몸에 대한 생각은 확연히 달라집니다. 우리의 삶을 심는 것으로 볼 것인가, 즐길 것으로 볼 것인가의 견해 차이가 생깁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는데 바울은 죽음을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씨가 땅에 묻히고 죽어야 다시 살아나갑니다. 씨가 죽어야 생명을 만들어나갑니다. 우리는 죽음으로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생명을 그냥 유지해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무조건 오래 산다고 해서 그게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오래 살면서 무엇을 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루 하루를 어떻게 무엇을 위해서 살 것인가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영원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심는 것입니다. 우리가 심은 대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심은 것 이상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가정에서 한 사람이 죽으면 많은 사람이 살아납니다.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살고 자식이 삽니다. 아내가 죽으면 남편이 살고 자식이 삽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죽고자 하면 더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반대로 서로 죽지 않고자 하고 죽이고자 하는 가정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가 살려고 아이를 죽이는 부모들이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이 세상이 왜 이렇게 사나와진 것입니까? 우리 자신을 씨로 보지 않고 몸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몸으로 보니 이것을 더욱 아끼고 가꾸고자 합니다. 몸에 집중하다보니 이 세상이 사나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몸을 씨로 본다면 희생할 수 있습니다. 씨는 당연히 죽어야 합니다. 그러면 후에 영광스러운 형체를 덧입게 됩니다. 꽃씨나 무슨 열매의 씨와 그것이 죽고 얻게 되는 형체를 비교해 보면 상상할 수 없는 형상임을 볼 수 있습니다. 씨는 동그란 알맹이라는 점에서 다 비슷한 모양입니다. 그것이 죽어서 살아나게 되면 온갖 다양한 식물들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하나님이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십니다.
마찬가지로 육체에는 여러 가지 모습들이 있습니다. 사람의 육체, 짐승의 육체, 새의 육체, 물고기의 육체가 다 다릅니다. 새는 하늘을 날기에 적합한 육체를 가졌습니다. 그 뼈는 속이 비어 있고 가볍습니다. 물고기는 부레와 지느러미가 있고 몸이 유선형을 하고 있어서 물속에서 자유롭게 얼마든지 오랫동안 헤엄을 치며 돌아다닙니다. 땅에 속한 형체가 있듯이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습니다. 해의 강렬함, 달의 그윽함, 별들의 영롱함이 다릅니다. 이상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논지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비슷한 모습의 씨를 뿌리지만 하나님이 각 종자마다 다양한 형체를 주시듯이, 하늘과 땅에 속한 형체들이 다 다르고 그 영광들이 다르듯이, 하나님은 그처럼 부활의 몸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어떠한 것일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부활의 영광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고유한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게 해주시리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몸은 부활할 때 어떤 몸으로 다시 살게 될까요? 42-44절을 보십시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앞에서는 씨를 뿌린다는 단어를 썼고 여기서는 심는다는 말을 썼습니다. 썩을 것이 죽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죽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산다고 말하지 않고 왜 썩을 것을 심고, 욕된 것으로 심고, 육의 몸으로 심는다고 했을까요? 육체적으로 죽는다는 말도 되지만 선택의 순간에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심는 것입니다. 심는 것은 죽는 것입니다. 심는 것은 드리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씨와 같이 심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현재 삶을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얼마든지 이 세상의 것들을 즐길 자유가 있고 또 그런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이런 것들을 부인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을 하고 죽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죽는 것은 손해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 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슬퍼하거나 힘들어 할 것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매일 죽는 사람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데서 놀랍게 성장합니다. 거룩하고 겸손하고 온유하고 경건하고 영적인 향기를 풍기는 사람들의 삶 이면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죽는 삶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님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얼마나 수고를 많이 했던지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2,3)”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후 1:8-10)”라고 편지하며 자신들을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고 기도 요청을 합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영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날마다 죽고 부활의 능력으로 살 때 존재의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보다는 어떤 존재를 얻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썩지 않을 존재, 영광스러운 몸, 강한 존재, 신령한 몸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몸을 사리고 죽지 않고자 발버둥치기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주와 복음을 위해서 심고 죽을 때 활력이 넘치고 경이에 가득 찬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서서히 망가져 갑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여기저기 고장이 납니다. 결국 우리 몸은 원치 않지만 병이 생기고 죽어서 땅에 묻히고 썩어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부활 때에는 썩지 않을 몸으로 다시 살게 됩니다.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영원한 청춘으로서 영원히 변함없는 천사와 같이 신령한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 때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없습니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는 목자 생활을 하며 내적 훈련을 받지만 여전히 죄의 소욕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나이 60이 다 되어도 아직 철이 들지 않았다는 말도 듣습니다. 이처럼 우리 몸은 욕되고 약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하여 얻게 될 몸은 강하고 영광스럽고 신령합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안식이 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장차 얻게 될 몸은 죽지 않는 몸이요 공간을 뛰어넘는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을 찾아오셨던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처럼 변화될 것입니다.
바울은 영의 몸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생령(living being)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life giving Spirit)이 되었습니다. 아담은 생령으로써 살아 있는 영이요 육의 사람이지만 부활의 몸은 신령한 사람이요 예수님과 같게 될 것입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함으로 생명에서 끊어진 자 즉 죽은 영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아담의 후손으로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습니다.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이 되십니다. 그는 하늘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이 생명을 덧입게 되면 땅에 속한 형상을 벗어버리고 하늘에 속한 형상을 덧입게 됩니다. 48,49절을 보십시오.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우리는 땅의 지체 즉 음란과 부정, 사욕과 악한 정욕, 탐심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그러나 장차 우리는 누구의 형상을 덧입게 됩니까? 예수님 안에서 하늘에 속한 형상 곧 긍휼과 자비,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과 평강, 시와 찬미의 신령한 노래로 충만한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예수님처럼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50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지금 혈과 육의 몸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삶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생을 살려면 혈과 육인 우리 몸은 신령한 몸을 입어야 합니다. 우주에 가서 살려면 현재의 몸으로는 어렵습니다. 우주복을 입어야 합니다. 그냥 올라가면 기압차이 때문에 온 몸이 터져버립니다. 그래서 우주복을 입어야 하는데 이소연씨가 입은 특수복장이 5억원짜리였습니다. 그옷을 입어도 단 2시간 우주탐험을 하고 빨리 우주선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합니다. 우주공간에 올라가도 거기에 맞는 옷을 입듯이 부활의 세계에 들어가려면 거기에 맞는 옷을 주님이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장차 들어갈 하나님 나라는 우주세계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만큼 아름답고 찬란합니다. 그 나라는 영원토록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나라입니다. 우리의 부활체도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변화된 몸만이 하나님 나라에 가서 살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하늘에 속한 형상으로 변화되는 시점이 언제인지 그 비밀을 알려줍니다. 51,52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마지막 나팔이 울려 퍼질 때에 살아 있던 성도들은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될 것입니다. 또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윈스턴 처칠도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갖고 죽었습니다. “나의 장례식 때 두 번 나팔을 불러 달라. 처음 나팔소리는 취침나팔이고, 두 번째 나팔소리는 기상나팔이다.” 그는 자신의 죽음으로 부활에 대한 소망을 사람들에게 심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죽는 것은 단지 취침에 불과하고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일어나게 될 것을 믿은 것입니다.
바울은 53절에서 부활의 몸을 입게 될 이 영광스러운 소망에 대한 확신을 말씀합니다.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일은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의 이 약하고 욕된 썩을 몸은 반드시 강하고 영광스러운 신령한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소망입니까? 이 소망을 가슴 깊이 간직한다면 정말 이 세상의 삶은 보잘 것 없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장차 변화될 이 영광스런 부활을 확신하고 소망합시다. 54,55절을 보십시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그 때에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사야25:8절은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괴물과 같습니다. 그 어떤 대단한 인생이라 할지라도 죽음의 권세 앞에서는 벌벌 떱니다.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비참하게 그 권세 앞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모든 인생들이 결국은 죽음에 삼킨바가 됩니다. 그러나 부활의 그날에는 사망이 부활의 승리에 삼킨바가 될 것입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희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은 늘 인생들 위에 승리자였습니다. 폭군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그날 우리는 쓰러진 원수를 발로 밟고 승리를 외치듯이 그렇게 승리를 외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망의 쏘는 것에 찔려 두려움 허무에 빠져 신음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부활의 믿음과 소망이 충만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사망의 권세에 지배당하지 않습니다. 부활의 영광스러운 소망과 확신 가운데 사망 권세를 향해 바울처럼 승리를 외칠 수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55-58).”
이 부활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첫째,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부활이 없다는 자들의 말에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소망과 쾌락을 따라 사는 자들에게 속지 말아야 합니다. 도리어 부활의 믿음과 소망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둘째,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수고는 헛될 것입니다. 한번 뿐인 인생과 젊음인데 이렇게 희생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기에, 부활의 영원한 미래가 있기에 우리 수고는 헛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헛되지만 주님 안에서 우리의 수고만이 헛되지 않습니다. 이 부활신앙을 가지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됩시다.
말씀 | 고린도전서 15:35-58
요절 | 고린도전서 15:49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우리는 지난 주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이를 목격하였던 증인들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또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아봄으로 그의 부활을 반증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이어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면 어떤 몸으로 부활하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장차 입게 될 부활의 몸에 대해서 배우는 가운데 부활의 소망으로 충만해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부활의 소망을 갖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매장을 하기도 하지만 오늘날은 화장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어떤 시신은 항공기 폭발로 인해서 찾을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장애아로 태어나서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여러 경우를 생각할 때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부활의 몸은 어떻게 되는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이런 질문의 배후에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부정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죽은 사람이 부활할 때 입게 될 몸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합니까? 36-38절을 보십시오.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바울은 이런 질문에 대해서 “어리석은 자여”라며 돌직구를 날립니다. 왜냐하면 씨가 뿌려져 죽어야 살아나고 뿌리는 것은 현재의 형체가 아니라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씨가 뿌려져 땅에 묻히면 배젖이 죽는 것이고 배아는 살아서 거기서 싹이 나옵니다. 우리가 죽으면 육체는 썩고 사라지지만 영혼은 위로 올라갑니다. 그 영혼은 불멸이고 그 영혼이 부활할 때 몸을 입게 됩니다. 사람이 뿌리는 것은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지만 하나님은 그 뜻대로 형체를 주십니다. 씨나 알맹이를 보면 가지각색입니다. 작디 작은 겨자씨에서 커다란 망고씨, 검은 콩이나 감씨, 대추씨, 아보가드씨, 이영기씨, 김덕수씨, 노성균씨, 임제임스씨를 보면 볼품이 없습니다. 그것이 심겨져 죽고 다시 살아나는 모습은 새로운 형체입니다. 바울은 우리의 현재 생명을 씨앗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현재 생명을 몸으로 볼 것인가, 씨로 볼 것인가에 따라서 장래 부활의 몸에 대한 생각은 확연히 달라집니다. 우리의 삶을 심는 것으로 볼 것인가, 즐길 것으로 볼 것인가의 견해 차이가 생깁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는데 바울은 죽음을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씨가 땅에 묻히고 죽어야 다시 살아나갑니다. 씨가 죽어야 생명을 만들어나갑니다. 우리는 죽음으로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생명을 그냥 유지해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무조건 오래 산다고 해서 그게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오래 살면서 무엇을 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루 하루를 어떻게 무엇을 위해서 살 것인가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영원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심는 것입니다. 우리가 심은 대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심은 것 이상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가정에서 한 사람이 죽으면 많은 사람이 살아납니다.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살고 자식이 삽니다. 아내가 죽으면 남편이 살고 자식이 삽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죽고자 하면 더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반대로 서로 죽지 않고자 하고 죽이고자 하는 가정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가 살려고 아이를 죽이는 부모들이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이 세상이 왜 이렇게 사나와진 것입니까? 우리 자신을 씨로 보지 않고 몸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몸으로 보니 이것을 더욱 아끼고 가꾸고자 합니다. 몸에 집중하다보니 이 세상이 사나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몸을 씨로 본다면 희생할 수 있습니다. 씨는 당연히 죽어야 합니다. 그러면 후에 영광스러운 형체를 덧입게 됩니다. 꽃씨나 무슨 열매의 씨와 그것이 죽고 얻게 되는 형체를 비교해 보면 상상할 수 없는 형상임을 볼 수 있습니다. 씨는 동그란 알맹이라는 점에서 다 비슷한 모양입니다. 그것이 죽어서 살아나게 되면 온갖 다양한 식물들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하나님이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십니다.
마찬가지로 육체에는 여러 가지 모습들이 있습니다. 사람의 육체, 짐승의 육체, 새의 육체, 물고기의 육체가 다 다릅니다. 새는 하늘을 날기에 적합한 육체를 가졌습니다. 그 뼈는 속이 비어 있고 가볍습니다. 물고기는 부레와 지느러미가 있고 몸이 유선형을 하고 있어서 물속에서 자유롭게 얼마든지 오랫동안 헤엄을 치며 돌아다닙니다. 땅에 속한 형체가 있듯이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습니다. 해의 강렬함, 달의 그윽함, 별들의 영롱함이 다릅니다. 이상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논지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비슷한 모습의 씨를 뿌리지만 하나님이 각 종자마다 다양한 형체를 주시듯이, 하늘과 땅에 속한 형체들이 다 다르고 그 영광들이 다르듯이, 하나님은 그처럼 부활의 몸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어떠한 것일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부활의 영광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고유한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게 해주시리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몸은 부활할 때 어떤 몸으로 다시 살게 될까요? 42-44절을 보십시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앞에서는 씨를 뿌린다는 단어를 썼고 여기서는 심는다는 말을 썼습니다. 썩을 것이 죽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죽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산다고 말하지 않고 왜 썩을 것을 심고, 욕된 것으로 심고, 육의 몸으로 심는다고 했을까요? 육체적으로 죽는다는 말도 되지만 선택의 순간에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심는 것입니다. 심는 것은 죽는 것입니다. 심는 것은 드리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씨와 같이 심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현재 삶을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얼마든지 이 세상의 것들을 즐길 자유가 있고 또 그런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이런 것들을 부인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을 하고 죽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죽는 것은 손해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 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슬퍼하거나 힘들어 할 것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매일 죽는 사람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데서 놀랍게 성장합니다. 거룩하고 겸손하고 온유하고 경건하고 영적인 향기를 풍기는 사람들의 삶 이면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죽는 삶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님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얼마나 수고를 많이 했던지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2,3)”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후 1:8-10)”라고 편지하며 자신들을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고 기도 요청을 합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영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날마다 죽고 부활의 능력으로 살 때 존재의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보다는 어떤 존재를 얻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썩지 않을 존재, 영광스러운 몸, 강한 존재, 신령한 몸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몸을 사리고 죽지 않고자 발버둥치기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주와 복음을 위해서 심고 죽을 때 활력이 넘치고 경이에 가득 찬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서서히 망가져 갑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여기저기 고장이 납니다. 결국 우리 몸은 원치 않지만 병이 생기고 죽어서 땅에 묻히고 썩어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부활 때에는 썩지 않을 몸으로 다시 살게 됩니다.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영원한 청춘으로서 영원히 변함없는 천사와 같이 신령한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 때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없습니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는 목자 생활을 하며 내적 훈련을 받지만 여전히 죄의 소욕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나이 60이 다 되어도 아직 철이 들지 않았다는 말도 듣습니다. 이처럼 우리 몸은 욕되고 약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하여 얻게 될 몸은 강하고 영광스럽고 신령합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안식이 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장차 얻게 될 몸은 죽지 않는 몸이요 공간을 뛰어넘는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을 찾아오셨던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처럼 변화될 것입니다.
바울은 영의 몸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생령(living being)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life giving Spirit)이 되었습니다. 아담은 생령으로써 살아 있는 영이요 육의 사람이지만 부활의 몸은 신령한 사람이요 예수님과 같게 될 것입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함으로 생명에서 끊어진 자 즉 죽은 영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아담의 후손으로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습니다.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이 되십니다. 그는 하늘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이 생명을 덧입게 되면 땅에 속한 형상을 벗어버리고 하늘에 속한 형상을 덧입게 됩니다. 48,49절을 보십시오.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우리는 땅의 지체 즉 음란과 부정, 사욕과 악한 정욕, 탐심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그러나 장차 우리는 누구의 형상을 덧입게 됩니까? 예수님 안에서 하늘에 속한 형상 곧 긍휼과 자비,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과 평강, 시와 찬미의 신령한 노래로 충만한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예수님처럼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50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지금 혈과 육의 몸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삶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생을 살려면 혈과 육인 우리 몸은 신령한 몸을 입어야 합니다. 우주에 가서 살려면 현재의 몸으로는 어렵습니다. 우주복을 입어야 합니다. 그냥 올라가면 기압차이 때문에 온 몸이 터져버립니다. 그래서 우주복을 입어야 하는데 이소연씨가 입은 특수복장이 5억원짜리였습니다. 그옷을 입어도 단 2시간 우주탐험을 하고 빨리 우주선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합니다. 우주공간에 올라가도 거기에 맞는 옷을 입듯이 부활의 세계에 들어가려면 거기에 맞는 옷을 주님이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장차 들어갈 하나님 나라는 우주세계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만큼 아름답고 찬란합니다. 그 나라는 영원토록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나라입니다. 우리의 부활체도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변화된 몸만이 하나님 나라에 가서 살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하늘에 속한 형상으로 변화되는 시점이 언제인지 그 비밀을 알려줍니다. 51,52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마지막 나팔이 울려 퍼질 때에 살아 있던 성도들은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될 것입니다. 또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윈스턴 처칠도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갖고 죽었습니다. “나의 장례식 때 두 번 나팔을 불러 달라. 처음 나팔소리는 취침나팔이고, 두 번째 나팔소리는 기상나팔이다.” 그는 자신의 죽음으로 부활에 대한 소망을 사람들에게 심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죽는 것은 단지 취침에 불과하고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일어나게 될 것을 믿은 것입니다.
바울은 53절에서 부활의 몸을 입게 될 이 영광스러운 소망에 대한 확신을 말씀합니다.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일은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의 이 약하고 욕된 썩을 몸은 반드시 강하고 영광스러운 신령한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소망입니까? 이 소망을 가슴 깊이 간직한다면 정말 이 세상의 삶은 보잘 것 없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장차 변화될 이 영광스런 부활을 확신하고 소망합시다. 54,55절을 보십시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그 때에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사야25:8절은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괴물과 같습니다. 그 어떤 대단한 인생이라 할지라도 죽음의 권세 앞에서는 벌벌 떱니다.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비참하게 그 권세 앞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모든 인생들이 결국은 죽음에 삼킨바가 됩니다. 그러나 부활의 그날에는 사망이 부활의 승리에 삼킨바가 될 것입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희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은 늘 인생들 위에 승리자였습니다. 폭군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그날 우리는 쓰러진 원수를 발로 밟고 승리를 외치듯이 그렇게 승리를 외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망의 쏘는 것에 찔려 두려움 허무에 빠져 신음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부활의 믿음과 소망이 충만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사망의 권세에 지배당하지 않습니다. 부활의 영광스러운 소망과 확신 가운데 사망 권세를 향해 바울처럼 승리를 외칠 수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55-58).”
이 부활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첫째,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부활이 없다는 자들의 말에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소망과 쾌락을 따라 사는 자들에게 속지 말아야 합니다. 도리어 부활의 믿음과 소망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둘째,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수고는 헛될 것입니다. 한번 뿐인 인생과 젊음인데 이렇게 희생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기에, 부활의 영원한 미래가 있기에 우리 수고는 헛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헛되지만 주님 안에서 우리의 수고만이 헛되지 않습니다. 이 부활신앙을 가지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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