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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2016년 부활특강1(고전15:1-34)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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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97회 작성일 16-03-27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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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부활절 특강 1
말씀 | 고린도전서 15:1-34
요절 | 고린도전서 15:22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얻으리라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예수님이 죽음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가 부활하신 증거는 빈 무덤, 증인들, 세마포와 현존하는 교회입니다. 20세기 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는 “예수의 부활은 증거를 아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증언하고 있는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세계적인 변증학자인 알리스터 맥스레스는 “부활의 근본적 기능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확증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하고 그의 가르침에 권위를 부여하며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우리에게 줍니다. 오늘 말씀은 특히 부활의 증인들에 대해서 살펴보고 부활이 없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질문함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우리 각자의 마음에 부활 신앙을 새롭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이미 복음을 받고 또 그 가운데 서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성도들에게 복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왜 이미 알고 있는 복음을 상기시키는 것일까요? 그들이 헛되이 믿지 않고 복음을 굳게 지키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운동을 잘하려면 반복해서 훈련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비결도 반복해서 학습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복음 신앙도 반복해서 들어야 견고해집니다. 바울은 그들이 헛되이 믿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헛되이 믿는다’는 말은 ‘목적 없이 믿는다’는 뜻입니다. 헛되이 믿는다는 것은 내용의 깊이를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형식적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는다고 하는데 부활신앙이 없이 이 세상이 전부인 사람들은 믿음에 힘이 없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부활이 없다는 여러 가지 주장들이 나와서 성도들의 믿음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들은 성도들의 몸의 부활을 부정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울이 전해준 복음과 다릅니다. 그런 주장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지키지 않는 것이요 헛되이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성도들도 다시 살게 됩니다. 현재는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고 나중엔 영원한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전해준 복음을 제대로 믿는 것이요 이런 믿음이 있어야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구원 받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난파된 배에서는 구출되었으나 아직은 항구에 닿지 못하고 구명보트에 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들로 시끄러웠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바울은 유명한 사랑에 대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사랑하라고 주장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음을 알고 부활에 대해서 다시 전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다 라고 생각하는 믿음은 죽음 앞에서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가지 상처와 죄 가운데서 고통하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복음을 다시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복음 신앙이 없거나 약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과거의 상처에 매여 있거나 죄 가운데서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면 복음이 무엇입니까? 3,4절을 보십시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목적은 우리 죄를 위함입니다. 죄 때문에 야기된 비참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바로 나의 죄 때문에, 바로 당신의 죄 때문에, 바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 때문에 받아야 할 형벌이 치러졌습니다. 여러분이 자신과 다른 사람의 죄로 인해서 받은 상처가 얼마나 큽니까? 그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채찍에 맞으셨고,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그의 죽음은 나의 죄를 위해서 대신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내가 미워하는 형제의 죄를 위해서도 죽으셨습니다. 이로 인해 나와 형제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어 버리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될 뿐만 아니라 나와 하나님이 화목하게 되도록 하려 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부인할 수 없는 실제 사건, 역사적인 사실임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죽으셨고 실제로 무덤 속에 장사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장사되실 때 우리의 옛 사람도 함께 장사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과거에 매여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다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 분의 죽음이 대속의 죽음이라는 사실이 확실하게 드러났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그 분 안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날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일들은 모두 성경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성경대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과 예수님이 성경에 예언된 바로 그 그리스도이심을 확증해줍니다. 이상이 바울이 전해주었던 복음의 핵심 내용입니다. 이 중에서 지금 바울이 강조하고 싶어 하는 부분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성도들 중에 죽은 자의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이 있습니까? 5-8절을 보십시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사실을 더 분명하게 뒷받침하기 위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사실을 언급합니다. 먼저 그리스도께서는 게바에게 보이셨습니다(눅24:34). 그 후 모든 사도에게 보이셨고(눅24:36-43), 그 후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 번에 보았다는 것은 그의 부활이 환영이 아님을 증거합니다. 오백여 형제는 아마도 그리스도께서 지상 명령을 내리시던 자리에 있던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들 대다수는 바울이 고린도서를 쓸 당시 살아있었습니다. 따라서 고린도 성도들은 단지 기록으로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증인들로부터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에게 보이셨습니다. 그 후에 열두 사도뿐 아니라 바나바, 실라 같은 사도들까지 포함해서 맨 나중에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바울 자신에게도 보이셨습니다(행9:1). 바울은 자신이 교회를 핍박하였기 때문에 소망 없던 자라고, 자격이 없는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에게도 보이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과거의 행적으로 보면 바울은 사도는커녕 구원을 받을 수도 없는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죄인 중의 괴수였습니다. 그러나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요 사도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베푸신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강조합니다. 이는 무익한 종의 자세로써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많이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죄인으로서 자기 발견이 깊은 사람이 은혜를 깊이 누리고 또 더 많이 헌신하게 됩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고 신앙생활의 연륜이 깊어갈수록 자신의 죄인 됨을 깊이 깨닫고 겸손하게 됩니다. 죄가 많은 내게 주의 은혜가 흘러넘칩니다.

  고린도 성도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의 삶에 집착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생명을 연장하고 풍요롭게 하고자 애를 씁니다. 우리도 매우 현실적인 것들을 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있는 것인가요? 이 세상에서의 삶이 다 인 것처럼 생각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요? 이런 삶의 뿌리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어떤 결과가 있게 되는지 설명하면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반증합니다.

  먼저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입니다. 또 우리의 믿음도 헛것입니다. 또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거짓 증인으로 발견될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는 부활 사건에 있습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믿고 죽은 자들도 망하였을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일 것입니다.
 
  사람이 죽음에 직면할 때 본질을 추구하게 됩니다.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될 때 버킷리스트를 만들어 실행하고자 합니다. 죽는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정말 중요한 일들에 자신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한 선교사는 암에 걸려서 이제까지의 삶을 돌아보니 가난에 매여 살아온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죽음 앞에서 가난이 진정한 문제가 아님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남은 시간 아이들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께 더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깨닫고 삶이 새로워졌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부활을 다루고 있는데 사실은 죽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바울은 부활을 확신했기 때문에 주와 복음을 위해서 날마다 죽는 삶을 살았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0-24).” 지금 내게 주어진 생명을 바라보기보다 죽음 이후의 삶을 바라볼 때 힘있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모든 소유를 다 놓고 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 놓고 가는 것보다 가서 누릴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 세상에 매이지 않고 주님께 헌신할 수 있습니다.   

  1910년 3월 26일 즉 어제 안중근의사가 사형을 당했습니다. 안중근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사형을 기다리던 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네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이 편지에는 조마리아 여사의 부활신앙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한 영웅의 죽음 뒤에는 부활신앙을 가진 위대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면 성도들의 부활도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당시 고린도 성도들 중에서는 몸은 죽음을 통해서 영원히 사라지고 영만 계속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반드시 몸이 다시 살아납니다. 그 확실한 근거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입니다. 정말로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오직 이 세상의 삶뿐인데, 이 세상에 잠시 사는 동안 있지도 않은 부활을 믿기 위해 가난과 핍박과 죽음 등 숱한 고난을 받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불쌍한 사람 아닙니까? 그러나 앞서 언급된 모든 부정적인 가정들과 달리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가장 복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잠자는 자들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2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우리는 앞에서 염려스러운 다양한 시나리오를 가정했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헛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더 이상 죄 가운데 있지 않고 죄사함의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차례대로 부활할 것입니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이는 로마서에 나오는 대표 원리와 같습니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였는데 그가 죄를 지음으로 모든 사람이 죄를 짓고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제 2의 아담으로서 인류의 대표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그 안에서 삶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 삶은 영원한 삶입니다. 풍성한 삶입니다. 제대로 된 삶입니다. 기쁨이 충만한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생명과 자유를 얻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이후 이 땅에서도 영원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죽음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통로입니다. 우리가 죽은 이후에도 삶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루라도 빨리 거기서 살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 나라의 삶을 맛본 사람들은 이 땅으로 돌아오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이 다인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나그네가 여관에 잠깐 들렀다가 가는 삶과 같습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첫 열매인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것처럼 다음에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를 구주로 믿는 성도들이 부활할 것입니다. 그 후에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반대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 권세 즉 반기독교적인 종교들, 정권들, 문화들을 멸하시고 그리스도께서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치게 될 것입니다. 이때 만유의 회복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믿는 바울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3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죽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활의 능력과 권세를 덧입을 수 있었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그도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며 살았을 것입니다. 33,34절을 보십시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매여 살기 때문에 우리도 속기 쉽습니다. 사람들은 돈을 벌 수 없는데 돈을 많이 번다고 속입니다. 가짜인데 진짜라고 속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라고 속입니다. 죽음은 멀리 있고 죽음은 끝이라고 속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진리를 아는 사람들은 속지 말아야 합니다. 도리어 정신 차리고 깨어 의를 행해야 합니다.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듯이 이제는 죽은 자들을 다시 살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요 부활의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7살 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은 우리 가정을 가난하고 의지할 것이 없게 만들었습니다. 홀로 되신 어머니가 세 자녀를 키우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죽음은 제 마음에 허무한 생각을 가져왔습니다. 나의 삶은 죽음으로 끝난다고 생각하니 젊은 시절에 실컷 쾌락을 즐기다가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허무한 생각을 잊기 위해서 미친 듯이 공부하였지만 공허함을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대학에 들어와서 복음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진화론과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 앞에 믿음이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창조론을 공부하고 부활에 대한 증거들을 살피는 가운데 믿음이 굳어졌습니다. 더 이상 나의 삶은 허무하지 않고 살아계신 예수님이 내 안에 충만한 생명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기쁨이 샘솟듯이 솟아났습니다. 삶의 의미가 생겼습니다. 이날까지 저를 부활의 증인으로 살도록 축복하셨습니다. 제가 내 안에 사시는 주님을 믿고 날마다 죽고 날마다 부활의 능력을 덧입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일과 제자 양성하는 일, 세계 선교를 섬기는 일에 더욱 충성하여 이 복음을 세상에 가득 채우기를 기도합니다. 날마다 믿음으로 죽고 생명을 살리는 일, 사랑하는 일,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일을 감당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제게 주신 놀라운 은혜를 인하여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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