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2016년 말3강(2:17-3:12) 내게로 돌아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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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말라기 제 3 강
말씀 | 말라기 2:17-3:12
요절 | 말라기 3:7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 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 가리이까 하는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신이 가득하여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악한 말, 불신의 말을 하는 그들에게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십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주요 심판의 주로 임하실 것입니다. 저주받은 형편에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자신에게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돌아오는 길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며 그들이 돌아올 때 누리게 될 복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 그와 바른 관계를 맺고 그가 주시는 복을 누리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2:17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 사람이 말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는 것은 알았지만 하나님도 괴롭게 한다고 하니 말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는 것을 듣고 계십니다. 밤에 하는 말은 쥐가 듣고 낮에 하는 말은 새가 듣는다고 하지만 낮에나 밤에나 속삭이는 모든 말까지 하나님은 듣고 계시며 우리의 깊은 생각까지도 알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악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선히 보시며, 또한 그들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그들에게 심판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의인이 번성하고 악인은 망해야 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생각이고 또한 하나님께 기대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 원리가 그대로 실행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세상에 대해 실망하고, 하나님에 대해 회의를 품으며, 탄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같이 하나님께서 그 행위대로 갚지 않으신다는 불만과 탄식은 언제나 있어 왔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건축하고 학개나 스가랴가 주었던 희망이 말라기 때에도 실현되지 않고 그들의 경제적인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의지와 능력에 대해서 심각하게 회의를 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정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악을 행하든 의를 행하든 하나님은 상관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는 발언입니다.
이런 불만에 대해서 하나님은 답변하십니다. 3:1절을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를 보내시어 앞서 가서 길을 준비하게 하십니다. 그 사자가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이 사자가 세례 요한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말라기는 ‘주’가 성전에 오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주는 세상을 다스리시는 여호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또 그들이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성전에 임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 갑자기 성전에 임하십니다. 역사의 문제는 언제든지 지도자의 문제였습니다. 아래로부터의 변화가 근본적인 치유책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시는 지도자가 언제든지 하나님 나라의 관건이었습니다. 그런데 말라기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선지자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사의 무대에 새 지도자로 직접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때까지 없었던 일입니다. 이는 말로 다할 수 없는 하나님의 열심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왕이 행차하시는데 일반적으로 예상하는 것 같이 미리 길을 준비할 사자를 보내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세례요한이 먼저 와서 메시야의 길을 준비했고 주님은 그들의 성전에 갑자기 임하셨습니다. 그들이 사모하던 메시야는 갑자기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고 회개와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복음으로 말미암는 새 언약의 사자로 오셨습니다. 새 언약의 중보자 되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의 죄가 깨끗함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옛 시대는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렇게 초림하시는 사실에 대해서 도무지 예상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재림하시는 사실에 대해서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적인 예상을 깨뜨리시고 항상 임재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에 갑자기 오신 것처럼 마지막 날에도 도적처럼 생각지 않은 때에 오실 것입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우리의 말을 들으시며 일하고 계십니다. 그는 마침내 심판주로서 갑자기 임하실 것입니다. 이 새 지도자의 두려운 임재를 감당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여기서 그가 임하시는 날, 그가 나타나는 때는 여호와의 날 혹은 주의 날로서 심판의 날이요 구원의 날입니다. 백성들의 불순종이 더해감에 따라 이스라엘 역사의 후반기에 활동한 선지자들은 이 날을 심판의 날로 선포했습니다. 새 지도자가 하실 일은 이 시대의 문제였던 제사장과 레위인들 즉 지도자들을 새롭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들을 하나님이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불로 연단한 금과 은과 같이 할 것입니다. 여기에 심판의 요소와 함께 소망의 요소가 섞여 있습니다.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 속에 모든 영적 지도자들이 들어갈 것입니다. 거기서 거역하는 요소는 다 소멸될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로 온전한 지도자들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드릴 것입니다.
3,4절을 보십시오.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봉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 금과 은을 연단할 때 약 1600도의 맹렬하고 뜨거운 불로 연단합니다. 고대에는 옷을 세탁할 때 의복을 바위 위에 놓고 막대기로 두드린 후에 독한 잿물로 빨았습니다. 표백하는 자의 잿물은 새로 짜여진 천의 때를 빨아들이는데 사용되는 강력한 화학적 혼합물입니다. 이것이 남아 있던 점착성 물질들을 분해하면 새로운 천은 빛나고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뜨겁고 맹렬한 불, 잿물을 견디는 것은 힘듭니다. 그러나 그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이런 혹독한 연단을 통하여 깨끗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의 불로 태워 버리지 않고 정결케 하시니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렇게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할 때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여호와께 바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도 옛날처럼 올바른 예물을 드림으로써 여호와께 기쁨이 될 것입니다. 레위 자손은 하나님을 섬기게 될 택함받은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무언가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날 때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고통을 정화의 불길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주기를 열망하십니다. 비록 우리에게는 고통스러운 과정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의 불순물들을 태워 없애고, 녹여 제거하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금과 은과 같이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 내면의 죄와 더러운 불순물들을 제하시고 바르게 하나님을 섬기게 하십니다.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예배와 삶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십니다. 지금 겪고 있는 일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너머에 있는 것을 바라보고 우리의 미래의 모습을 보면서 기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은 훈련하여 깨끗하게 하시만 어떤 자들에게는 심판으로 임하십니다. 5절을 보십시오.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점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은 점치는 자들이요, 간음하는 자들이요, 거짓 맹세하는 자들입니다. 거짓 맹세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자기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웃에 대한 봉사나 헌신이 아니라 즉 사회에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노동자의 임금을 착취하는 일, 사회적 약자인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를 압제하고 억울하게 하는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의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 하면서도 이런 일을 행하는 자들은 껍데기만 하나님의 자녀이지 실제로는 이방인의 자녀인 것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살지만 그들에게 제일 먼저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주님은 심판의 주로서 다시 오십니다. 그를 믿지 않고 악을 행하며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심판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계2:21,22. 9:21. 21:8). 정의의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최종적으로 악을 심판하시고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살아야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 하나님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는 언약을 세우고 이를 지키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또 바벨론에서 이끌어 내신 분이십니다. 그들을 깨끗하게 해서라도 살려내고자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망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망하지 아니한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돌아왔지만 그들의 풍습에 젖어 있습니다. 소망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약속들이 이루어지지 않고 형편이 어려웠습니다. 그들 중에는 신앙적인 회의에 빠져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볼멘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을 소멸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들은 조상들의 날로부터 하나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들을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로 삼고자 끊임없이 훈련하셨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간곡한 말로 요청하십니다. 7절을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 가리라 하였더니”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 가리이까”라고 되묻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떠난 적이 없는데 어떻게 돌아오라는 말입니까? 우리가 무슨 잘못을 그렇게 하고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가라는 말입니까? 이런 식으로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실존을 발견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를 아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떠났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니다. 8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하나님은 그들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은 문제를 지적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했다고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물에 대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물질에 가 있었고 세상에 가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온 나라 백성들이 다 저주를 받았습니다. 레위기27:30에서 하나님은 ‘그 땅의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그 땅은 이스라엘이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 땅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지만 십분의 일만 특별히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해서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오늘날 십일조가 반드시 지켜야 할 율법이냐는 논쟁이 있지만 십일조를 드리도록 하신 하나님의 뜻은 변함없이 유효합니다. 구약의 십일조와 비교할만한 의무 규정은 신약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마23:23에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는 말씀에서 십일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함께 드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넘쳐나는 사랑을 가슴에 안고 우리의 돈과 시간과 재능을 그분께 바치면 그에 대한 보상으로 우리는 그 무엇으로도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풍성한 교제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수입과 지출의 균형을 맞출 것인가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일은 주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닫게 만들 뿐이고 주님께 인색하게 드리는 사람으로 만들뿐입니다. 그런 염려를 하는 대신에 하나님께서는 우주의 모든 부를 소유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분을 신뢰하고 자유롭게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분이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가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10절을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하나님께 드려야 할 감사와 헌신이 물질을 드리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온전한 십일조란 자기 나름대로 임의로 조정하지 말고 하나님 편에서 절대적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미리 준비하여 드리는 것, 감사함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아까워하는 마음으로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십일조는 적은 금액이 아니기 때문에 아까운 생각이 들고 가능하면 적게 드리고 싶은 유혹이 듭니다. 그러나 모든 것의 십일조가 온전한 십일조입니다. 무엇보다 마음에서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자원함으로 드릴 때 그것이 온전한 십일조가 됩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고 하십니다. 왜 하나님의 집에 양식이 필요할까요? 양식이 있을 때 레위인과 제사장들이 그것을 얻어 하나님의 일을 섬길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백성들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음으로 인해 레위인들이 먹고살기 위해 성전을 버리고 흩어졌고 하나님의 전은 버려진 상태가 되곤 했습니다(느13:10). 교회 재정이 텅 빈다면 결국 문을 닫게 되며 하나님의 사업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맨 손으로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 그것으로 하나님을 시험해보라고 하십니다. 하늘의 문을 열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시는지를 알아보라는 것입니다. 십일조 생활에 대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물질의 주관자이시며 믿음으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자에게 더 넘치게 부어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11,12절은 복을 부어주심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때 메뚜기를 금하십니다.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십니다. 즉 하나님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때 새 나가는 물질이 줄어들 것입니다. 예를 들면 도둑질을 당하던지, 사기를 당하던지, 질병이 생기던지, 사고를 당하여 갑자기 생각지 못했던 돈이 나가는 일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물질도 하나님이 보호해 주셔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벌어서 내가 쓰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을 하나님께서 지혜와 건강과 능력을 주셔서 돈을 벌고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28:12절은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하나님이 하늘의 창고를 열어서 복을 쏟아 부어주십니다. 헌금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꼬투리가 됩니다.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는 말씀에서 그 양식은 먹이를 뜻합니다. 하나님은 십일조를 통해서 누군가를 먹이고 싶어 하십니다. 레위인과 과부와 고아들, 나그네, 가난한 사람들, 이방인, 짐승들까지도 먹이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십일조는 교회를 운영하는데 사용됩니다. 우리가 주님께 헌신적으로 십일조를 드리고 선교헌금을 드리고 감사헌금을 드렸습니다. 이로 인해 국내 개척과 세계 선교를 이루어왔습니다. 우리가 내는 헌금을 통해서 공동체를 세우는 일을 해왔습니다. 한마디로 십일조를 낸다는 것은 많은 사람을 먹이는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미국 테네시 주에 생명보험회사로 큰 성공을 거둔 윌비 박사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처음에 일리노이 주의 스프링필드라는 작은 마을에서 아주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후에 생명보험회사에 다니면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성공하게 된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사무엘상 1장 20절을 읽어주면서, 그대로 살기를 결심한 덕택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씀은 바로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멸시하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윌비 박사는 이 말씀을 읽고 하나님께 성실하게 신의를 지키기로 하고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첫 번째 약속으로 정했습니다. 그 후로 윌비 박사의 기업은 번창하여 큰 생명보험회사의 사장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귀히 여김 받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은 어떤 큰일을 해서가 아니라 가장 작은 것,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정의를 행하십니다. 악인은 반드시 심판을 받고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는 사람들이 복을 받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이키려면 바른 물질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림으로 그가 하늘 문을 열고 우리의 창고에 넘치도록 축복하시는 은혜를 체험하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경제 상황이 어렵지만 믿음으로 십일조를 드리고 하나님의 복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물질적인 이익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수입과 지출의 균형에 기초해서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의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살리라.
말씀 | 말라기 2:17-3:12
요절 | 말라기 3:7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 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 가리이까 하는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신이 가득하여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악한 말, 불신의 말을 하는 그들에게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십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주요 심판의 주로 임하실 것입니다. 저주받은 형편에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자신에게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돌아오는 길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며 그들이 돌아올 때 누리게 될 복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 그와 바른 관계를 맺고 그가 주시는 복을 누리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2:17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 사람이 말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는 것은 알았지만 하나님도 괴롭게 한다고 하니 말의 중요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는 것을 듣고 계십니다. 밤에 하는 말은 쥐가 듣고 낮에 하는 말은 새가 듣는다고 하지만 낮에나 밤에나 속삭이는 모든 말까지 하나님은 듣고 계시며 우리의 깊은 생각까지도 알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악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선히 보시며, 또한 그들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그들에게 심판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의인이 번성하고 악인은 망해야 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생각이고 또한 하나님께 기대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 원리가 그대로 실행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세상에 대해 실망하고, 하나님에 대해 회의를 품으며, 탄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같이 하나님께서 그 행위대로 갚지 않으신다는 불만과 탄식은 언제나 있어 왔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건축하고 학개나 스가랴가 주었던 희망이 말라기 때에도 실현되지 않고 그들의 경제적인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의지와 능력에 대해서 심각하게 회의를 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정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악을 행하든 의를 행하든 하나님은 상관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는 발언입니다.
이런 불만에 대해서 하나님은 답변하십니다. 3:1절을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를 보내시어 앞서 가서 길을 준비하게 하십니다. 그 사자가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이 사자가 세례 요한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말라기는 ‘주’가 성전에 오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주는 세상을 다스리시는 여호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또 그들이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성전에 임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 갑자기 성전에 임하십니다. 역사의 문제는 언제든지 지도자의 문제였습니다. 아래로부터의 변화가 근본적인 치유책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시는 지도자가 언제든지 하나님 나라의 관건이었습니다. 그런데 말라기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선지자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사의 무대에 새 지도자로 직접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때까지 없었던 일입니다. 이는 말로 다할 수 없는 하나님의 열심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왕이 행차하시는데 일반적으로 예상하는 것 같이 미리 길을 준비할 사자를 보내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세례요한이 먼저 와서 메시야의 길을 준비했고 주님은 그들의 성전에 갑자기 임하셨습니다. 그들이 사모하던 메시야는 갑자기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고 회개와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복음으로 말미암는 새 언약의 사자로 오셨습니다. 새 언약의 중보자 되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의 죄가 깨끗함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옛 시대는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렇게 초림하시는 사실에 대해서 도무지 예상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재림하시는 사실에 대해서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적인 예상을 깨뜨리시고 항상 임재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에 갑자기 오신 것처럼 마지막 날에도 도적처럼 생각지 않은 때에 오실 것입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우리의 말을 들으시며 일하고 계십니다. 그는 마침내 심판주로서 갑자기 임하실 것입니다. 이 새 지도자의 두려운 임재를 감당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여기서 그가 임하시는 날, 그가 나타나는 때는 여호와의 날 혹은 주의 날로서 심판의 날이요 구원의 날입니다. 백성들의 불순종이 더해감에 따라 이스라엘 역사의 후반기에 활동한 선지자들은 이 날을 심판의 날로 선포했습니다. 새 지도자가 하실 일은 이 시대의 문제였던 제사장과 레위인들 즉 지도자들을 새롭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들을 하나님이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불로 연단한 금과 은과 같이 할 것입니다. 여기에 심판의 요소와 함께 소망의 요소가 섞여 있습니다.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 속에 모든 영적 지도자들이 들어갈 것입니다. 거기서 거역하는 요소는 다 소멸될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로 온전한 지도자들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드릴 것입니다.
3,4절을 보십시오.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봉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 금과 은을 연단할 때 약 1600도의 맹렬하고 뜨거운 불로 연단합니다. 고대에는 옷을 세탁할 때 의복을 바위 위에 놓고 막대기로 두드린 후에 독한 잿물로 빨았습니다. 표백하는 자의 잿물은 새로 짜여진 천의 때를 빨아들이는데 사용되는 강력한 화학적 혼합물입니다. 이것이 남아 있던 점착성 물질들을 분해하면 새로운 천은 빛나고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뜨겁고 맹렬한 불, 잿물을 견디는 것은 힘듭니다. 그러나 그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이런 혹독한 연단을 통하여 깨끗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의 불로 태워 버리지 않고 정결케 하시니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렇게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할 때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여호와께 바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도 옛날처럼 올바른 예물을 드림으로써 여호와께 기쁨이 될 것입니다. 레위 자손은 하나님을 섬기게 될 택함받은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무언가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날 때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고통을 정화의 불길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주기를 열망하십니다. 비록 우리에게는 고통스러운 과정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의 불순물들을 태워 없애고, 녹여 제거하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금과 은과 같이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 내면의 죄와 더러운 불순물들을 제하시고 바르게 하나님을 섬기게 하십니다.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예배와 삶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십니다. 지금 겪고 있는 일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너머에 있는 것을 바라보고 우리의 미래의 모습을 보면서 기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은 훈련하여 깨끗하게 하시만 어떤 자들에게는 심판으로 임하십니다. 5절을 보십시오.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점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은 점치는 자들이요, 간음하는 자들이요, 거짓 맹세하는 자들입니다. 거짓 맹세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자기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웃에 대한 봉사나 헌신이 아니라 즉 사회에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노동자의 임금을 착취하는 일, 사회적 약자인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를 압제하고 억울하게 하는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의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 하면서도 이런 일을 행하는 자들은 껍데기만 하나님의 자녀이지 실제로는 이방인의 자녀인 것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살지만 그들에게 제일 먼저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주님은 심판의 주로서 다시 오십니다. 그를 믿지 않고 악을 행하며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심판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계2:21,22. 9:21. 21:8). 정의의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최종적으로 악을 심판하시고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살아야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 하나님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는 언약을 세우고 이를 지키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또 바벨론에서 이끌어 내신 분이십니다. 그들을 깨끗하게 해서라도 살려내고자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망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망하지 아니한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돌아왔지만 그들의 풍습에 젖어 있습니다. 소망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약속들이 이루어지지 않고 형편이 어려웠습니다. 그들 중에는 신앙적인 회의에 빠져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볼멘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을 소멸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들은 조상들의 날로부터 하나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들을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로 삼고자 끊임없이 훈련하셨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간곡한 말로 요청하십니다. 7절을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 가리라 하였더니”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 가리이까”라고 되묻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떠난 적이 없는데 어떻게 돌아오라는 말입니까? 우리가 무슨 잘못을 그렇게 하고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가라는 말입니까? 이런 식으로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실존을 발견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를 아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떠났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니다. 8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하나님은 그들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은 문제를 지적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했다고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물에 대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물질에 가 있었고 세상에 가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온 나라 백성들이 다 저주를 받았습니다. 레위기27:30에서 하나님은 ‘그 땅의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그 땅은 이스라엘이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 땅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지만 십분의 일만 특별히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해서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오늘날 십일조가 반드시 지켜야 할 율법이냐는 논쟁이 있지만 십일조를 드리도록 하신 하나님의 뜻은 변함없이 유효합니다. 구약의 십일조와 비교할만한 의무 규정은 신약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마23:23에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는 말씀에서 십일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함께 드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넘쳐나는 사랑을 가슴에 안고 우리의 돈과 시간과 재능을 그분께 바치면 그에 대한 보상으로 우리는 그 무엇으로도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풍성한 교제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수입과 지출의 균형을 맞출 것인가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일은 주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닫게 만들 뿐이고 주님께 인색하게 드리는 사람으로 만들뿐입니다. 그런 염려를 하는 대신에 하나님께서는 우주의 모든 부를 소유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분을 신뢰하고 자유롭게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분이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가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10절을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하나님께 드려야 할 감사와 헌신이 물질을 드리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온전한 십일조란 자기 나름대로 임의로 조정하지 말고 하나님 편에서 절대적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미리 준비하여 드리는 것, 감사함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아까워하는 마음으로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십일조는 적은 금액이 아니기 때문에 아까운 생각이 들고 가능하면 적게 드리고 싶은 유혹이 듭니다. 그러나 모든 것의 십일조가 온전한 십일조입니다. 무엇보다 마음에서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자원함으로 드릴 때 그것이 온전한 십일조가 됩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고 하십니다. 왜 하나님의 집에 양식이 필요할까요? 양식이 있을 때 레위인과 제사장들이 그것을 얻어 하나님의 일을 섬길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백성들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음으로 인해 레위인들이 먹고살기 위해 성전을 버리고 흩어졌고 하나님의 전은 버려진 상태가 되곤 했습니다(느13:10). 교회 재정이 텅 빈다면 결국 문을 닫게 되며 하나님의 사업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맨 손으로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 그것으로 하나님을 시험해보라고 하십니다. 하늘의 문을 열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시는지를 알아보라는 것입니다. 십일조 생활에 대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물질의 주관자이시며 믿음으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자에게 더 넘치게 부어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11,12절은 복을 부어주심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때 메뚜기를 금하십니다.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십니다. 즉 하나님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때 새 나가는 물질이 줄어들 것입니다. 예를 들면 도둑질을 당하던지, 사기를 당하던지, 질병이 생기던지, 사고를 당하여 갑자기 생각지 못했던 돈이 나가는 일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물질도 하나님이 보호해 주셔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벌어서 내가 쓰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을 하나님께서 지혜와 건강과 능력을 주셔서 돈을 벌고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28:12절은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하나님이 하늘의 창고를 열어서 복을 쏟아 부어주십니다. 헌금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꼬투리가 됩니다.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는 말씀에서 그 양식은 먹이를 뜻합니다. 하나님은 십일조를 통해서 누군가를 먹이고 싶어 하십니다. 레위인과 과부와 고아들, 나그네, 가난한 사람들, 이방인, 짐승들까지도 먹이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십일조는 교회를 운영하는데 사용됩니다. 우리가 주님께 헌신적으로 십일조를 드리고 선교헌금을 드리고 감사헌금을 드렸습니다. 이로 인해 국내 개척과 세계 선교를 이루어왔습니다. 우리가 내는 헌금을 통해서 공동체를 세우는 일을 해왔습니다. 한마디로 십일조를 낸다는 것은 많은 사람을 먹이는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미국 테네시 주에 생명보험회사로 큰 성공을 거둔 윌비 박사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처음에 일리노이 주의 스프링필드라는 작은 마을에서 아주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후에 생명보험회사에 다니면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성공하게 된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사무엘상 1장 20절을 읽어주면서, 그대로 살기를 결심한 덕택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씀은 바로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멸시하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윌비 박사는 이 말씀을 읽고 하나님께 성실하게 신의를 지키기로 하고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첫 번째 약속으로 정했습니다. 그 후로 윌비 박사의 기업은 번창하여 큰 생명보험회사의 사장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귀히 여김 받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은 어떤 큰일을 해서가 아니라 가장 작은 것,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정의를 행하십니다. 악인은 반드시 심판을 받고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는 사람들이 복을 받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이키려면 바른 물질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림으로 그가 하늘 문을 열고 우리의 창고에 넘치도록 축복하시는 은혜를 체험하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경제 상황이 어렵지만 믿음으로 십일조를 드리고 하나님의 복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물질적인 이익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수입과 지출의 균형에 기초해서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의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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