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주일말씀 성경별메시지 심포지엄 성경 검색
문제지 성경별문제지

특강 16년 말1강(1:1-14)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84회 작성일 16-02-22 14:31

본문

2016년 말라기 1 강
말씀 | 말라기 1:1-14
요절 | 말라기 1:6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말라기는 나의 사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B.C.5세기 경 에스라, 느헤미야와 동시대에, 혹은 그들의 개혁 직후에 사역했습니다. 말라기서의 기록 연대는 B.C.538년 바사 왕 고레스가 유대인들에게 포로 생활에서 유대로 돌아가도록 허용한 때로부터 약 100년이 지난 후, B.C.460~430년 사이로 봅니다. 그 때 유대인들은 여전히 페르시아의 영향력 하에 있었습니다. 유대 땅에서는 농작물 수확도 적었고, 메뚜기의 피해도 자주 입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포로 생활에서 돌아왔고 성전도 지었으나 여전히 페르시아의 통치 아래 경제적 곤궁까지 겪게 되자, 그들은 하나님을 불신하며 적대적인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과연 하나님이 자신들을 사랑하시는지 의심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불신한 결과 제사장들도, 백성들도, 제사나 십일조나 제물에 관한 모세의 규례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조강지처와 이혼을 하고 이방인과 혼인을 맺었고 도덕적으로 타락해갔습니다. 이런 백성들을 향해 말라기는 하나님이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계신 것을 깨우쳐주면서 모세의 언약을 잘 지켜야 모세의 언약이 주는 복에 참여할 수 있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라기는 백성들에게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랑하신 것을 상기시키며 여호와를 공경할 것을 촉구합니다.

  말라기는 여호와께서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입니다. 경고는 무겁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호와의 권위를 인정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경고는 사랑과 관심의 표현입니다. 당장 심판하지 않고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고의 말씀을 들을 때 사랑의 책망으로 달게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이는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 연인에 대한 사랑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에 대한 애정을 뜻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잘못을 책망하시기에 앞서 그들을 사랑하신 것부터 상기시킵니다. 여호와의 사랑을 잊어버린 것이 그들의 근본문제임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리면 하나님에 대해 마음이 딱딱해지고 형식적이 되고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함부로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늘 기억하고 붙드는 것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그들을 택하여 자기 소유로 삼으시고 사랑의 줄로 이끄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특별한 사랑을 받아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탈출할 수 있었고 세계에 대하여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범죄한 이후에도 여호와께서는 사랑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사43:4).”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11:8).” 이러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는 마침내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셨고 성전을 건축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말라기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가깝게 체험했던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를 어디에서 찾고 있습니까?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신 희생적인 사랑과 나에게 임한 구원에서 사랑의 증거를 찾아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처럼 사랑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반문합니다.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2b)?”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하고 있습니다. 왜 이처럼 불신하는 것일까요? B.C.538년 고레스 칙령을 따라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지 10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해방은 오지 않았습니다. 성전만 지으면 당장 어떤 일이 일어날 줄로 기대했으나 성전을 지은 지 약 50년이 지났어도 하나님은 그들이 기대한 특별한 일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여전히 이방인 총독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8). 이스라엘은 주위 열강에 비하면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약소국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없고 초라하고 궁핍한 현실이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신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도 물질적인 것, 외적인 것, 잘 나가는 사람과 비교해서 풍요로운 것으로 증거를 삼고자 하면 불만족하게 됩니다.

  이런 비극적인 현실이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이 바벨론에서 막 돌아왔을 때의 열심과 결단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결과입니다. 자신의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생긴 결과를 또 다시 불신의 원인으로 삼는다면 문제가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며 불신을 고집하는 억지를 부리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불순종한 죄악을 회개해야 합니다. 당장 어렵다고 ‘주께서 어떻게 나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자신을 돌아보고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타락의 시작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불신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사랑하시지 않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라고 말하고, 말라기 선지자는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잊고 언약을 어겼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으로 어려움을 겪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느 것이 옳은가요? 많은 신자들이 전자의 경우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문제를 깨닫지 못하고 모든 문제의 책임을 하나님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는 신실하십니다. 문제의 원인은 나에게 있음을 깨닫고 돌이켜야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감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증거가 무엇입니까? 2b절과 3절을 보십시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장자인 에서보다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그에게 산업을 주었습니다. 에서의 산들은 황폐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에게 넘기셨습니다. 지금 에돔과 야곱이 둘 다 바벨론에 망했는데 에돔은 사라졌고 야곱 족속은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에돔은 쌓아도 무너뜨리는데, 야곱은 무너진 것을 쌓을 때 세워주셨습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한 일을 볼 때 영원히 망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남겨두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양심이 깨끗하고 행실이 거룩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닙니다. 어느 면으로 보나 다른 사람과 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실제 모습을 보면 허물이 많고 천박하고 아무런 의도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죄 가운데 버려두시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시고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야말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물질적인 풍요, 승진, 자녀들의 좋은 성적과 명문대 진학, 번성 등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투정을 부립니다. 우리는 내가 받은 사랑에 깊이 감사하고 주님께 적극적으로 영광을 돌려야겠습니다.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삼하 7:18)?” 다윗의 이런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주님과 사랑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제 제사장들을 책망하십니다. 6절을 보십시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백성들이 하나님을 가볍게 생각할 때 제사장이 깨우쳐 주어야 하는데 그가 먼저 멸시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정성없이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더러운 떡을 하나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반문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그들이 더러운 떡을 제단에 드렸다고 지적하십니다.  당시는 제사장들부터 여호와를 멸시하는데 그들의 인도함을 받는 백성들이 여호와를 공경할 수 있을까요? 공경은 단순한 내적 감정이 아니라 분명한 행동을 가져오는 최고의 헌신을 가리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아들은 아버지를 공경하고 종은 주인을 공경합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아버지이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공경하지 않았습니다. 공경은 영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여호와를 공경하는 것은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또한 여호와께서 주인이심에도 불구하고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하는 것은 적절한 존경을 드리고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를 존경하지도, 순종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타락할지라도 제사장들이 깨어 있으면 그 시대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말라기 당시에는 제사장들부터 심하게 타락했습니다. 영적인 지도자부터 타락한 시대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한국 교회의 실상도 이와 비슷합니다. 제사장 역할을 해야 할 유명 목회자들의 추문이 계속 보도되면서 목사에 대한 인식은 심히 부정적이 되었고 교회는 조롱과 비웃음을 사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대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도자의 책임을 중하게 여기십니다. 지도자의 타락은 일반 백성들의 타락보다 훨씬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제물을 받으실 수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눈 먼 희생제물, 저는 것 병든 것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이제 그것을 총독에게 드리면 그가 기뻐하겠습니까? 그를 받아주겠습니까? 하물며 우주만물의 총독이신 하나님께 그런 제물을 드릴 수 있습니까? 그러면서도 그들은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간구합니다. 그들이 이같이 행하였으니 하나님께서 그들 중 하나인들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왜 이런 것을 드렸을까요? 그들을 이해하는 마음으로 생각해 본다면 농사가 안 되고 흉작이니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악한 것이라고 말씀하심을 볼 때 그들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없이 멸시하는 마음으로, 믿음이 없이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십니다.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10). 그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멸시할 때 AD 70년 성전을 파괴시켜 버렸습니다.

  이제 새 언약으로, 새 성전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십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이제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 중에서 크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무시해마지 않았던 이방인들이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만한 제물을 드릴 비전을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 유대인들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민의 구주이십니다. 그는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 세상 모든 민족 중에서 그 이름이 크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파되고 구원 받은 성도들이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인종적 차별이 없으십니다. 우리도 만민 구원 역사를 섬기는 사람으로서 인종적인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영접하고 존경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합니다. “여호와의 식탁은 더러워졌고 그 위에 있는 과일 곧 먹을 것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것이 번거롭다고 말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과 병든 것을 가져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드리는 일이 번거롭다고 여겨 간소화시키고, 절대성과 경외심이 없이 드리기 쉽습니다. 주님께 드리는 것, 주님을 섬기는 것이 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섬기는 것이 사실은 특권입니다. 십자가이지만 영광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영광을 벗어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들이 드리는 흠 있는 제물을 하나님께서는 받으실 수 없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짐승 떼 가운데에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속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이방 민족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들은 서원을 할 때도 여호와를 속였습니다. 여호와께 서약하는 것은 강제적인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서약을 했으면 반드시 갚아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받으실 만한 제물을 가져오겠다고 서약해놓고는 짐승 떼 중에 수컷이 있는데도 막상 제사를 드릴 때는 흠 있는 것을 가져왔습니다. 수컷이 아닌 암컷, 또는 앞에서 나온 저는 것, 눈먼 것 등을 가져와 흠 없는 제물인 것처럼 속여서 서원 제물로 드렸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런 자들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은 큰 임금이시요 세계 모든 민족 중에서 두려워하는 분이되십니다.  우리는 크신 여호와 하나님을 진실하게 경외심을 가지고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의 첫 자리에 예수님을 모시고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30대 초반의 처녀 시절 안이숙 여사는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일본천황 신사 앞에서 절하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결국에는 쫓기는 몸이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형무소로 끌려가서 사형을 당할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녀가 피해 다니던 어느 날입니다. ‘내가 앞으로 주님을 위해 죽을 텐데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좀 더 알아야겠어. 예수님에게 확 반해야 내가 예수님을 위해 죽지.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랍고 황홀하고 행복한가를 흠뻑 알아야지 내가 주님을 위해 죽어도 기분 좋게 죽지. 지금 상태로는 좀 어렵겠다. 은혜를 좀 더 받아야 되겠어.’ 이렇게 생각을 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금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분은 체구가 작고 저혈압이 있는 상태에서 3일 작정을 하고 금식을 했는데, 3일째 되는 날은 죽을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온몸이 불덩이가 되고 경련이 일어나고 미칠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금식하고 기도했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를 그녀에게 주셨다고 합니다. 그분의 글을 그대로 읽으면 이렇습니다. “금식이 끝나자 얼마나 놀라운 힘이 나고 믿음이 굳어지고 성경말씀이 더 깊이 깨달아지는 몰랐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나의 소망도 십자가에 대한 나의 감격도 더욱 더 깊어 가고 은혜는 날로 더 충만해지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7일 금식, 10일 금식을 예사로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은혜의 풍성한 자리로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이 예전 같지 않다면 이와 같이 금식을 해서라도 마음을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야겠습니다.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번거롭게 여겼다면 애통히 회개함으로 마음을 새롭게 해야겠습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마음이 상쾌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서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323건 34 페이지
주일메시지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828 사도행전 이엘리야 104 04-24
827 사도행전 이엘리야 117 04-17
826 사도행전 이엘리야 115 04-10
825 특강 이엘리야 77 04-03
824 특강 이엘리야 98 03-27
823 사도행전 이엘리야 109 03-20
822 특강 이엘리야 76 03-13
821 특강 이엘리야 96 03-06
820 특강 이엘리야 76 02-28
열람중 특강 이엘리야 85 02-22
818 히브리서 이엘리야 116 02-14
817 히브리서 이엘리야 117 02-07
816 히브리서 이엘리야 110 01-31
815 히브리서 이엘리야 105 01-24
814 히브리서 이엘리야 124 01-17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