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16년 행17강(18:1-28)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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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사도행전 제 17 강
말씀 | 사도행전 18:1-28
요절 | 사도행전 18:9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오늘 말씀은 2차 전도여행 중 고린도 사역을 다루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세워지고 성장하는 가운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고린도 시의 음란하고 쾌락적이며 우상과 철학자들이 판을 치는 문화 속에서 바울은 심히 두렵고 떨린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를 위로하시고 말씀에 붙잡히게 하셨습니다. 그는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십자가 외에는 전하지 않고자 결단하였습니다. 고린도에 놀라운 영적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의 아내는 브리스길라였습니다. 그들의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낮에는 자립을 위해 함께 일을 하였고 일이 끝나고 나서는 깊이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그들은 빼어난 성경 선생들이 되었습니다. 특히 브리스길라 사모님이 더욱 영향력이 있고 유명했던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였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바울이 베뢰아에서 복음 전할 때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와서 소동을 일으켰고 바울이 피하면서 실라와 디모데를 남겨 두었습니다(행17:13,14). 실라는 헌금 모금을 위해 빌립보로(빌4:15), 디모데는 데살로니가 교회 상황을 살피기 위해서 그곳으로 보냈습니다(살전3:2). 바울이 아덴에 이르렀을 때 실라와 디모데를 오라고 했습니다(행17:15). 이들이 다시 고린도로 와서 합류했습니다. 특히 실라는 전도사역에 필요한 빌립보 교회의 연보를 가져 왔습니다. 이로써 바울은 천막 만드는 일에 얽매이지 않고 말씀 전파사역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핍박 가운데서 어떻게 믿음을 지키고 있는지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디모데가 가져온 소식을 들어보니 그들 가운에 있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예수님에 대한 소망의 인내로 성장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가 전한 복음이 그들에게 말로만 된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사도 바울과 주님을 본받은 자가 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살전1:3-6). 이때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했습니다. 특히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에 사로잡혔습니다. 고린도전서2:2 절에 보면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에 붙잡혔다’는 것은 그가 말씀에 사로잡힌 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지배당하여 주체할 수 없는 정열과 확신으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전했습니다. 영어 번역은 그가 오로지 말씀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는 말씀을 가지고 영적인 싸움에 집중하였습니다.
고린도라는 도시 전체가 거대한 죄의 분위기에 압도당하고 있었습니다. 고린도는 다신교가 성행했습니다. 아덴이 철학과 예술의 중심지라면 고린도는 무역과 상업의 요충지였습니다. 지중해의 무역권을 장악하고 번영하는 도시였습니다. 도덕적으로는 타락하고 부패한 도시였습니다. 아프로티테 신전에는 1000여명의 여사제들이 있었는데 종교적 의식으로 매음을 행하였습니다. 고린도 사람이라는 말은 ‘성적으로 부도덕한 사람이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고린도 아가씨’는 ‘매춘부’를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9절을 보면 바울은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통감했습니다. 한계를 느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이 고린도 사회에 먹힐 것인가? 유대인들의 반대를 뚫고 나갈 수 있는가? 자신이 전하는 말이나 사역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의 분위기에 편승해서 살아갑니다. 물론 우리도 공기와 같은 이 사회의 문화를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을 지배하는 것이 무엇인가가 문제입니다. 바울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었습니다. 그는 말씀의 도구가 되어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드렸습니다. 아덴에서와 달리 고린도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새롭게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그전까지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과 달리 자신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발견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엄숙하게 묵직하고 힘있게 들려왔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그의 인식이 깊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임재를 깊이 느끼면서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거대한 고린도의 문화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음란과 쾌락의 영으로 가득합니다. 동성애자들의 축제가 지난 6월 11일 서울광장에서 있었습니다. 홍대거리는 젊은이들의 열정이 뿜어져 나옵니다. 거리를 지나다보면 젊은 남녀가 서로 부둥켜안고 입을 맞추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술을 먹고 비틀거리며 다투는 사람들의 모습, 경찰이 가장 많이 출동해야 하는 지역이 바로 이곳 홍대거리입니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가 무엇입니까? 속수무책으로, 방관자적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사도바울처럼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혀 말씀을 담대하게 전할 것인가? 이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말씀을 사랑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말씀이 내 심령 골수를 찔러 쪼개고, 내 영혼을 윤택하게 하여서 내 자신이 말씀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그래야 양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시키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나의 삶과 존재자체가 말씀을 드러내야 합니다. 내 자신이 말씀 덩어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혼자 있으면서 말씀 속에 침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스마트 폰에 붙잡힌 사람들이 아니라 말씀에 붙잡혀서 입만 벌렸다 하면 말씀이 튀어 나와야 하고 앉았다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몰입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를 통해서 이곳에도 말씀 역사가 흥왕하게 일어나고 하나님의 백성들로 채워지게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큰 확신과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전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유대인들은 대적하여 비방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주의에 찌들어 길가와 같은 마음이 되었고 복음을 영접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무조건 반대했습니다. 바울은 옷을 털면서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디도 유스도는 로마 시민인데 유대교에 입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명문가였습니다. 그 집은 회당 옆에 있었습니다. 그가 거기서도 복음을 전하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 형성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보 한 사람으로 인해서 믿는 자들이 많아졌습니다.
행16장에서도 빌립보에서 루디아가 복음을 영접하자 그 집안이 다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감옥에서 간수 한 사람을 전도했는데 그 집이 다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전도에서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돕는 것이 중요합니다. 핍박과 시련이 있지만 결코 복음역사는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람이 반드시 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도 디도 유스도, 그리스보 같은 사람이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도 복음을 전할 때 몇 사람 배척한다고 포기하지 말고 디도 유스도, 그리스보 같은 사람을 만나기까지 줄기차게 전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영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복음에 대해서 이 시대의 그루터기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남은 자들이 반드시 있음을 믿고 복음 전하는 일을 힘써야 합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사도 바울이 말씀에 붙잡혔는데 왜 두려워할까요? 믿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유대인들의 반대는 더욱 격렬해졌습니다. 말씀 역사가 많을수록 핍박과 대적자들이 거칠어집니다. 회당장이 회개하고 돌아오니 유대인들은 위기의식을 크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더욱 악랄하게 비방하고 대적하였습니다. 이때 주께서 친히 환상 중에 나타나 바울을 위로하시고 격려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우리가 두려움으로 침묵하기 쉬울 때 주님께서 말씀으로 힘을 북돋아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에 의지하여 믿음으로 말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힘든 시대 상황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과 말씀만 바라보고 말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해 주십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양들에게, 자녀들에게 말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하나님께서 보호자가 되시고 양들을 예비해 두셨기 때문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소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으로 봐야 합니다. 고린도와 같은 이 지역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람들이 있고 하나님은 복음을 전하는 우리를 지켜 보호해 주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7).” 사도 바울은 복음 전하기가 어려운 고린도에 다른 지역보다 비교적 오래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말씀에 붙잡힌바 되어 복음을 전했고 그를 통해서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고린도에서 최초의 서신서인 데살로니가전후서를 썼습니다. 이를 볼 때 바울은 고린도에 있으면서도 다른 지역의 양떼들을 끊임없이 돌보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어디에 있던지 전 세계를 품고 복음 역사를 섬겼습니다. 그는 얼굴과 얼굴을 보면서 섬기던지, 편지로 섬기던지, 성령의 능력과 충만함을 덧입고 양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끊임없는 기도 생활을 통해서 효과적으로 목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스카이프나 전화나 이메일 등 좋은 통신 수단을 이용해서 양들에게 말씀을 심을 수 있습니다. 또한 이곳에서도 세계 각 곳에 흩어진 선교사님들과 교제하면서 복음 역사를 섬길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 양들에게 가 있을 때 어찌하든지 말씀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을 주장하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돌보는 일에 힘쓰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고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미국 개척 역사를 섬길 때 디프로그래머들의 악랄한 핍박을 받을 때에 그들과 싸우기보다 마가복음 말씀 연구에 집중하고 일대일 성경공부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핍박의 때에 사람과 싸우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씨름했을 때 주옥같은 마가복음 메시지를 힘있게 증거하였습니다. 그 결과 복음의 원수들은 스스로 힘을 잃고 추풍낙엽과 같이 나가떨어졌습니다. 그리고 복음 역사에 큰 진보를 이루었습니다. 우리가 시대가 어려울수록 본질적인 일에 집중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유대들이 바울을 핍박하던 것도 결국 힘을 잃게 됩니다.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고 고소했습니다. 그들은 총독이 새로 부임했을 때 강력하게 고소하면 자기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매우 정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총독 갈리오는 이 문제에 말려들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바울이 입을 열어 변론하고자 할 때에 갈리오는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주는 것이 옳지만 만일 너희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들을 법정에서 쫓아냈습니다.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총독이 바울과 신자들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유대인들의 고소는 맥없이 끝나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였습니다. 그는 에베소에 와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였지만 허락하지 아니하고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떠나 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였습니다. 19절에 보면 바울은 에베소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머물게 하였습니다. 앞으로 에베소를 중심으로 복음 역사를 이루고자 하는 바울의 포석이었습니다. 바울의 3차 전도 여행은 에베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를 볼 때 바울이 에베소로 돌아온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예민하게 찾고 때로는 기다리면서 복음 역사를 섬겼습니다. 우리도 자기 생각과 고정관념을 따르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부지런히 찾고 섬기는 성숙한 종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조용하면서도 실제적으로 사도 바울을 동역하였습니다. 24절을 보면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러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하였습니다.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그가 회당에서 말하는 것을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주었습니다. 아볼로는 복음과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성경에 능통했지만 2%가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이것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가정이 잘 도와주었습니다. 그들은 빼어난 평신도 목자 가정으로서 훌륭한 성경 선생이었습니다. 그들은 고린도와 에베소에서 제자들을 세우는 역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런 기초 위에 고린도와 에베소는 크고 영향력이 있는 교회로 성장하였습니다. 우리도 한 두 사람을 깊이 있는 말씀의 종이요 제자 양성가로 세움으로 개척 역사를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디모데는 에베소에서, 아볼로는 고린도에서 바울의 뒤를 이어 계승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의 고린도 사역은 많은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말씀에 붙잡힌 바 되어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주님은 환상 가운데 나타나셔서 그에게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복음 역사를 섬길 때 어려움이 있지만 주님이 남겨 두신 자들이 있습니다. 내가 말씀에 붙잡힌 바 되고 부지런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면 주님께서 반드시 제자들을 세워주시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가정과 같이 동역하며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바로 가르치는 가운데 생명 구원 역사를 왕성하게 이루길 기도합니다.
말씀 | 사도행전 18:1-28
요절 | 사도행전 18:9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오늘 말씀은 2차 전도여행 중 고린도 사역을 다루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세워지고 성장하는 가운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고린도 시의 음란하고 쾌락적이며 우상과 철학자들이 판을 치는 문화 속에서 바울은 심히 두렵고 떨린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를 위로하시고 말씀에 붙잡히게 하셨습니다. 그는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십자가 외에는 전하지 않고자 결단하였습니다. 고린도에 놀라운 영적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의 아내는 브리스길라였습니다. 그들의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낮에는 자립을 위해 함께 일을 하였고 일이 끝나고 나서는 깊이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그들은 빼어난 성경 선생들이 되었습니다. 특히 브리스길라 사모님이 더욱 영향력이 있고 유명했던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였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바울이 베뢰아에서 복음 전할 때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와서 소동을 일으켰고 바울이 피하면서 실라와 디모데를 남겨 두었습니다(행17:13,14). 실라는 헌금 모금을 위해 빌립보로(빌4:15), 디모데는 데살로니가 교회 상황을 살피기 위해서 그곳으로 보냈습니다(살전3:2). 바울이 아덴에 이르렀을 때 실라와 디모데를 오라고 했습니다(행17:15). 이들이 다시 고린도로 와서 합류했습니다. 특히 실라는 전도사역에 필요한 빌립보 교회의 연보를 가져 왔습니다. 이로써 바울은 천막 만드는 일에 얽매이지 않고 말씀 전파사역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핍박 가운데서 어떻게 믿음을 지키고 있는지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디모데가 가져온 소식을 들어보니 그들 가운에 있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예수님에 대한 소망의 인내로 성장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가 전한 복음이 그들에게 말로만 된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사도 바울과 주님을 본받은 자가 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살전1:3-6). 이때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했습니다. 특히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에 사로잡혔습니다. 고린도전서2:2 절에 보면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에 붙잡혔다’는 것은 그가 말씀에 사로잡힌 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지배당하여 주체할 수 없는 정열과 확신으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전했습니다. 영어 번역은 그가 오로지 말씀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는 말씀을 가지고 영적인 싸움에 집중하였습니다.
고린도라는 도시 전체가 거대한 죄의 분위기에 압도당하고 있었습니다. 고린도는 다신교가 성행했습니다. 아덴이 철학과 예술의 중심지라면 고린도는 무역과 상업의 요충지였습니다. 지중해의 무역권을 장악하고 번영하는 도시였습니다. 도덕적으로는 타락하고 부패한 도시였습니다. 아프로티테 신전에는 1000여명의 여사제들이 있었는데 종교적 의식으로 매음을 행하였습니다. 고린도 사람이라는 말은 ‘성적으로 부도덕한 사람이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고린도 아가씨’는 ‘매춘부’를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9절을 보면 바울은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통감했습니다. 한계를 느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이 고린도 사회에 먹힐 것인가? 유대인들의 반대를 뚫고 나갈 수 있는가? 자신이 전하는 말이나 사역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의 분위기에 편승해서 살아갑니다. 물론 우리도 공기와 같은 이 사회의 문화를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을 지배하는 것이 무엇인가가 문제입니다. 바울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었습니다. 그는 말씀의 도구가 되어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드렸습니다. 아덴에서와 달리 고린도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새롭게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그전까지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과 달리 자신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발견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엄숙하게 묵직하고 힘있게 들려왔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그의 인식이 깊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임재를 깊이 느끼면서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거대한 고린도의 문화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음란과 쾌락의 영으로 가득합니다. 동성애자들의 축제가 지난 6월 11일 서울광장에서 있었습니다. 홍대거리는 젊은이들의 열정이 뿜어져 나옵니다. 거리를 지나다보면 젊은 남녀가 서로 부둥켜안고 입을 맞추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술을 먹고 비틀거리며 다투는 사람들의 모습, 경찰이 가장 많이 출동해야 하는 지역이 바로 이곳 홍대거리입니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가 무엇입니까? 속수무책으로, 방관자적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사도바울처럼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혀 말씀을 담대하게 전할 것인가? 이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말씀을 사랑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말씀이 내 심령 골수를 찔러 쪼개고, 내 영혼을 윤택하게 하여서 내 자신이 말씀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그래야 양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시키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나의 삶과 존재자체가 말씀을 드러내야 합니다. 내 자신이 말씀 덩어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혼자 있으면서 말씀 속에 침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스마트 폰에 붙잡힌 사람들이 아니라 말씀에 붙잡혀서 입만 벌렸다 하면 말씀이 튀어 나와야 하고 앉았다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몰입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를 통해서 이곳에도 말씀 역사가 흥왕하게 일어나고 하나님의 백성들로 채워지게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큰 확신과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전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유대인들은 대적하여 비방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주의에 찌들어 길가와 같은 마음이 되었고 복음을 영접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무조건 반대했습니다. 바울은 옷을 털면서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디도 유스도는 로마 시민인데 유대교에 입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명문가였습니다. 그 집은 회당 옆에 있었습니다. 그가 거기서도 복음을 전하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 형성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보 한 사람으로 인해서 믿는 자들이 많아졌습니다.
행16장에서도 빌립보에서 루디아가 복음을 영접하자 그 집안이 다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감옥에서 간수 한 사람을 전도했는데 그 집이 다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전도에서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돕는 것이 중요합니다. 핍박과 시련이 있지만 결코 복음역사는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람이 반드시 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도 디도 유스도, 그리스보 같은 사람이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도 복음을 전할 때 몇 사람 배척한다고 포기하지 말고 디도 유스도, 그리스보 같은 사람을 만나기까지 줄기차게 전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영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복음에 대해서 이 시대의 그루터기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남은 자들이 반드시 있음을 믿고 복음 전하는 일을 힘써야 합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사도 바울이 말씀에 붙잡혔는데 왜 두려워할까요? 믿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유대인들의 반대는 더욱 격렬해졌습니다. 말씀 역사가 많을수록 핍박과 대적자들이 거칠어집니다. 회당장이 회개하고 돌아오니 유대인들은 위기의식을 크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더욱 악랄하게 비방하고 대적하였습니다. 이때 주께서 친히 환상 중에 나타나 바울을 위로하시고 격려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우리가 두려움으로 침묵하기 쉬울 때 주님께서 말씀으로 힘을 북돋아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에 의지하여 믿음으로 말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힘든 시대 상황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과 말씀만 바라보고 말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해 주십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양들에게, 자녀들에게 말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하나님께서 보호자가 되시고 양들을 예비해 두셨기 때문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소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으로 봐야 합니다. 고린도와 같은 이 지역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람들이 있고 하나님은 복음을 전하는 우리를 지켜 보호해 주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7).” 사도 바울은 복음 전하기가 어려운 고린도에 다른 지역보다 비교적 오래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말씀에 붙잡힌바 되어 복음을 전했고 그를 통해서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고린도에서 최초의 서신서인 데살로니가전후서를 썼습니다. 이를 볼 때 바울은 고린도에 있으면서도 다른 지역의 양떼들을 끊임없이 돌보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어디에 있던지 전 세계를 품고 복음 역사를 섬겼습니다. 그는 얼굴과 얼굴을 보면서 섬기던지, 편지로 섬기던지, 성령의 능력과 충만함을 덧입고 양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끊임없는 기도 생활을 통해서 효과적으로 목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스카이프나 전화나 이메일 등 좋은 통신 수단을 이용해서 양들에게 말씀을 심을 수 있습니다. 또한 이곳에서도 세계 각 곳에 흩어진 선교사님들과 교제하면서 복음 역사를 섬길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 양들에게 가 있을 때 어찌하든지 말씀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을 주장하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돌보는 일에 힘쓰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고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미국 개척 역사를 섬길 때 디프로그래머들의 악랄한 핍박을 받을 때에 그들과 싸우기보다 마가복음 말씀 연구에 집중하고 일대일 성경공부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핍박의 때에 사람과 싸우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씨름했을 때 주옥같은 마가복음 메시지를 힘있게 증거하였습니다. 그 결과 복음의 원수들은 스스로 힘을 잃고 추풍낙엽과 같이 나가떨어졌습니다. 그리고 복음 역사에 큰 진보를 이루었습니다. 우리가 시대가 어려울수록 본질적인 일에 집중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유대들이 바울을 핍박하던 것도 결국 힘을 잃게 됩니다.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고 고소했습니다. 그들은 총독이 새로 부임했을 때 강력하게 고소하면 자기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매우 정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총독 갈리오는 이 문제에 말려들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바울이 입을 열어 변론하고자 할 때에 갈리오는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주는 것이 옳지만 만일 너희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들을 법정에서 쫓아냈습니다.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총독이 바울과 신자들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유대인들의 고소는 맥없이 끝나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였습니다. 그는 에베소에 와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였지만 허락하지 아니하고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떠나 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였습니다. 19절에 보면 바울은 에베소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머물게 하였습니다. 앞으로 에베소를 중심으로 복음 역사를 이루고자 하는 바울의 포석이었습니다. 바울의 3차 전도 여행은 에베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를 볼 때 바울이 에베소로 돌아온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예민하게 찾고 때로는 기다리면서 복음 역사를 섬겼습니다. 우리도 자기 생각과 고정관념을 따르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부지런히 찾고 섬기는 성숙한 종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조용하면서도 실제적으로 사도 바울을 동역하였습니다. 24절을 보면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러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하였습니다.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그가 회당에서 말하는 것을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주었습니다. 아볼로는 복음과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성경에 능통했지만 2%가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이것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가정이 잘 도와주었습니다. 그들은 빼어난 평신도 목자 가정으로서 훌륭한 성경 선생이었습니다. 그들은 고린도와 에베소에서 제자들을 세우는 역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런 기초 위에 고린도와 에베소는 크고 영향력이 있는 교회로 성장하였습니다. 우리도 한 두 사람을 깊이 있는 말씀의 종이요 제자 양성가로 세움으로 개척 역사를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디모데는 에베소에서, 아볼로는 고린도에서 바울의 뒤를 이어 계승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의 고린도 사역은 많은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말씀에 붙잡힌 바 되어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주님은 환상 가운데 나타나셔서 그에게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복음 역사를 섬길 때 어려움이 있지만 주님이 남겨 두신 자들이 있습니다. 내가 말씀에 붙잡힌 바 되고 부지런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면 주님께서 반드시 제자들을 세워주시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가정과 같이 동역하며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바로 가르치는 가운데 생명 구원 역사를 왕성하게 이루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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