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16년 행14강(15:1-41)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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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사도행전 제 14 강
말씀 | 사도행전 15:1–41
요절 | 사도행전 15:11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오늘 말씀은 예루살렘 총회를 다루고 있습니다. 복음이 땅 끝까지 확장되기 위해서 해결되어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이 교회로 들어올 올 때 율법과 할례를 행해야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이방인 신자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유대인 신자들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 구원이 되는가? 다른 조건이 더해져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는 분명히 정리가 되었지만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선행을 해야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 예수님을 믿어도 변화된 행동이 따라야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혜를 주장하는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을 무색하게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사 복음 신앙 위에 굳게 서게 하시고 또 이를 지키고 전하도록 인도하시길 기도합니다.
안디옥 교회에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과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을 하였습니다. 구원의 조건에 예수님을 믿는 것 외에 할례를 추가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들어온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오랜 율법 전통에 근거해서 생각했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모두 유대인이었고 할례자였습니다. 유대인에게 할례는 언약 백성의 표시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방 신자도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백성이 된다면 당연히 언약의 표시인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이방인 신자들은 혼돈을 느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들과 격렬하게 싸웠습니다. 바울은 구원을 얻는데 할례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았습니다(갈6:15). 할례는 구원 받은 백성의 표시입니다. 구원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이 모든 일들에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에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은 사람은 구원을 갈망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나아오는 사람, 그를 믿는 사람에게 죄사함을 선물로 주십니다. 구원은 죄사함, 하나님의 자녀가 됨, 거듭남,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얻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 된다면 지금까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 헛수고가 됩니다. 복음은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성경대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믿음 외에 율법과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교회가 분열될 수도 있습니다. 형제들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여겼습니다. 모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공식 입장이 필요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을 받은 이방 교회들이 큰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복음 진리 수호와 교회의 일치를 위해 교회의 공식 회의가 필요했습니다.
형제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였습니다. 이때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은 일어나 이방인에게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오랫동안 고생을 해왔는데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주장에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이제까지 율법을 지켜온 자신들이 억울했습니다. 그렇게 쉽게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마치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고 반포하자 한문을 사용해온 일부 학자들은 심하게 반대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한글로 공부하는 사람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세종대왕의 백성들을 향한 사랑이 결국 승리한 것처럼 세계 만민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승리했습니다. 할례와 율법은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유대인들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이는 오실 그리스도의 그림자와 모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 오신 후에도 율법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예수님을 통한 완전한 구원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임을 의미합니다. 바울에 의하면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 할례와 율법 준수를 주장하는 이들은 ‘거짓 형제’입니다(갈2:1-10).
이때 베드로는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 이방인들에게 행하신 일을 증거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유대인들은 자기들은 마음이 깨끗하고 이방인들은 더럽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은 옳고 이방인들은 그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지금 자기 조상들과 자신들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이방인 제자들의 목에 두려고 했습니다. 여기서 멍에는 율법 자체라기보다 율법 준수를 통해 구원을 받으려는 시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 같은 조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고 유대인도 할 수 없는 것인데, 이를 이방 신자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결론을 내립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We believe it is through the grace of our Lord Jesus that we are saved, just as they are.”한글 표현은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인데 반해 영어 표현은 ‘우리도 그들과 동일하게...’로 들립니다. 표면적으로 이방인 구원 문제를 다루는 것 같지만 동시에 유대인의 구원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결국 이방인에게 할례와 율법을 구원의 조건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복음에 할례나 율법 행위를 첨가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유대인 신자들의 구원관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안에는 베드로의 체험과 사역으로도 어쩔 수 없는 뿌리 깊은 유대주의 구원관 즉 할례와 율법 전통을 구원의 조건으로 여기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방 선교를 통해 이방인들이 돌아오면서 하나님이 예루살렘 교회의 문제를 드러내신 뜻도 있습니다. 베드로가 오래 참고 있다가 예루살렘 교회의 이 문제를 돕고자 하였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은혜를 통한 선물이지, 할례나 율법 전통이 구원에 도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내가 하나님 자녀 된 것이 오직 은혜의 선물이라 여기며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뭘 더 잘 해야 하지 않는가? 사역적인 부분에서 내가 잘 못하고 있어서 하나님이 축복하지 않는다는 정죄감이 있지는 않은가요? 구원이 오직 예수님의 은혜라는 말씀은 나의 행위에 기초하지 않고 예수님을 의지해 구원의 선물을 풍성히 누리는 신앙생활을 해야 함을 뜻합니다. 사역은 그 은혜에 감사해 드리는 순종과 헌신이지, 그것이 하나님께 나가는 통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면 내가 뭘 잘 했는가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은혜를 찬양할 것입니다. 이 땅에서도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찬양하는 생활이 구원 받은 신자의 삶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야 자신뿐만 아니라 동역자와 양들에게 율법의 짐을 지우지 않고 구원의 은혜를 잘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것이 무거운 짐이 되지 않고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에게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는가 요구하게 되면 판단하고 정죄로 나아가기 쉽습니다. 요구를 받는 편에서는 부담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부담은 반발로 나타납니다. 일부러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자기 절망으로 나타납니다. 절망을 통해서 예수님께 나아가면 좋지만 자포자기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괴테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를 타락시킨다. 그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통해 보면 그를 발전시킨다.” 이는 사람에게 무엇이 되도록 요구하라는 것이 아니라 애정을 가지고 성장 가능성을 찾아 격려하라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인입니다. 신앙 경륜이 오래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에게 기대를 하되 너무 큰 기대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낮추어 생각하면 형제에게 요구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감사가 됩니다. 우리에게 요구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기초해서 내 자유의지를 가지고 행할 때 하나님의 온전함에 이르기까지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가지고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요구하면 악감만 생기고 온전함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왜 이런 율법적인 생각과 행동주의가 이 시대에 만연하게 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값싼 은혜를 강조하는 것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생각합니다. 믿는 사람들이 이기적이고 세속적일 때 주님께 대한 열정을 가진 사람들은 행동을 강조하게 됩니다. 우리가 값싼 은혜를 강조하다 보면 기독교 윤리가 사라지게 됩니다. 주님께 대한 헌신이 사라지고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이 만연하게 됩니다. 일이 잘못되어 가도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헌신하지 않고, 자기 책임을 다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이에 실망한 사람들이 남을 비판하면서 율법적인 행동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받은 은혜를 값싸게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믿음 좋은 행동들이 형제를 실족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혼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에 대한 사랑과 배려에서 자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숙한 예수님의 제자로 자라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들의 말이 마치자 예루살렘 총회의 의장이었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종합하고 결론을 내립니다.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그는 그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 즉 베드로를 통해 이방인 고넬료가 하나님께 돌아오고 바나바와 바울을 통해 이방인들이 돌아오고 있는 것이 아모스 9장 11,12절 예언과 일치한다고 밝힙니다. 그에 따르면 다윗의 무너진 장막이 회복되는 아모스의 예언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회복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건입니다. 이 시대에 이방 세계가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다윗 언약의 성취입니다. 하나님의 왕권이 온 세상에 회복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 그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자고 제안합니다. 동시에 이방인들은 유대인 신자들을 괴롭게 하지 않기 위해서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다고 이방 문화를 즐길 때 유대인 신자들이 괴로움을 겪게 됩니다. 자유하지만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유를 제한하고 자발적으로 종이 되는 것이 성숙한 제자의 자세입니다.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가 하나 되기 위해 서로 노력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 안에서 사랑으로 덕을 세워야 합니다. 이를 통해서 개성과 성장 배경이 다른 우리가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룰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를 안디옥 교회에 보냈습니다.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예루살렘 총회에서 의결한 사항을 전달하였습니다. 그들이 안디옥 교회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였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메시지가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방인 신자들에게 요구된 네 가지 금지 사항은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이 교제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유다와 실라는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얼마 있다가 평안히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 유하며 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했습니다.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이때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했지만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마가 요한의 동행 문제로 두 사도가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섰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사도의 행동을 누가 옳다 그르다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바나바는 위로자라는 이름처럼 한번 실패한 사람을 다시 끌어 안아주는 은사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치열한 영적 싸움 현장에서 힘을 빼는 사람을 데리고 가지 않는 것이 ‘옳다(wise)’고 보았습니다. 바울이 요구하는 마음으로 인해서 마가와 바나바는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요구하는 마음은 형제를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함께 동역을 하려면 서로 자기를 부인하고 참아야 합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이미 죽었습니다. 바울의 열정과 강한 성격은 더 성숙해져야 했습니다. 후에 바울은 마가를 영접합니다. 마가가 복음서 저자가 될 뿐 아니라 바울에게 유익한 동역자가 된 것을 볼 때(딤후4:11) 한 사람을 끝까지 세우고자 한 바나바의 섬김이 헛되지 않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바울이 자기 발견을 하고 겸손해지면서 과거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한가지로 일하는 것이 공동체를 세우는데 중요합니다. 한 마음이 되고 한 가지 방향과 목표가 있을 때 일을 성취하고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획일적으로 일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으로 깊이 대화를 나누고 조정을 해야 합니다. 그래도 조정이 안 되면 참아야 합니다. 우리는 두 사도가 갈등을 했다는 것에서 위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함께 일을 하다 보면 종종 갈등을 합니다. 이런 갈등을 통해서 자기를 발견하고 성장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남녀노소, 배운 자, 못 배운 자, 빈부, 인종, 국가를 초월하여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탐탁치 않게 여기는 사람도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나만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형제도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인간의 행동이나 율법을 믿음에 더하는 것은 저주를 받을 일입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복음 진리를 굳게 붙잡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사도행전 15:1–41
요절 | 사도행전 15:11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오늘 말씀은 예루살렘 총회를 다루고 있습니다. 복음이 땅 끝까지 확장되기 위해서 해결되어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이 교회로 들어올 올 때 율법과 할례를 행해야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이방인 신자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유대인 신자들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 구원이 되는가? 다른 조건이 더해져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는 분명히 정리가 되었지만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선행을 해야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 예수님을 믿어도 변화된 행동이 따라야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혜를 주장하는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을 무색하게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사 복음 신앙 위에 굳게 서게 하시고 또 이를 지키고 전하도록 인도하시길 기도합니다.
안디옥 교회에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과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을 하였습니다. 구원의 조건에 예수님을 믿는 것 외에 할례를 추가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들어온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오랜 율법 전통에 근거해서 생각했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모두 유대인이었고 할례자였습니다. 유대인에게 할례는 언약 백성의 표시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방 신자도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백성이 된다면 당연히 언약의 표시인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이방인 신자들은 혼돈을 느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들과 격렬하게 싸웠습니다. 바울은 구원을 얻는데 할례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았습니다(갈6:15). 할례는 구원 받은 백성의 표시입니다. 구원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이 모든 일들에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에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은 사람은 구원을 갈망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나아오는 사람, 그를 믿는 사람에게 죄사함을 선물로 주십니다. 구원은 죄사함, 하나님의 자녀가 됨, 거듭남,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얻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 된다면 지금까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 헛수고가 됩니다. 복음은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성경대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믿음 외에 율법과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교회가 분열될 수도 있습니다. 형제들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여겼습니다. 모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공식 입장이 필요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을 받은 이방 교회들이 큰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복음 진리 수호와 교회의 일치를 위해 교회의 공식 회의가 필요했습니다.
형제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였습니다. 이때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은 일어나 이방인에게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오랫동안 고생을 해왔는데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주장에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이제까지 율법을 지켜온 자신들이 억울했습니다. 그렇게 쉽게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마치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고 반포하자 한문을 사용해온 일부 학자들은 심하게 반대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한글로 공부하는 사람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세종대왕의 백성들을 향한 사랑이 결국 승리한 것처럼 세계 만민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승리했습니다. 할례와 율법은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유대인들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이는 오실 그리스도의 그림자와 모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 오신 후에도 율법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예수님을 통한 완전한 구원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임을 의미합니다. 바울에 의하면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 할례와 율법 준수를 주장하는 이들은 ‘거짓 형제’입니다(갈2:1-10).
이때 베드로는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 이방인들에게 행하신 일을 증거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유대인들은 자기들은 마음이 깨끗하고 이방인들은 더럽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은 옳고 이방인들은 그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지금 자기 조상들과 자신들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이방인 제자들의 목에 두려고 했습니다. 여기서 멍에는 율법 자체라기보다 율법 준수를 통해 구원을 받으려는 시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 같은 조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고 유대인도 할 수 없는 것인데, 이를 이방 신자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결론을 내립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We believe it is through the grace of our Lord Jesus that we are saved, just as they are.”한글 표현은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인데 반해 영어 표현은 ‘우리도 그들과 동일하게...’로 들립니다. 표면적으로 이방인 구원 문제를 다루는 것 같지만 동시에 유대인의 구원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결국 이방인에게 할례와 율법을 구원의 조건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복음에 할례나 율법 행위를 첨가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유대인 신자들의 구원관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안에는 베드로의 체험과 사역으로도 어쩔 수 없는 뿌리 깊은 유대주의 구원관 즉 할례와 율법 전통을 구원의 조건으로 여기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방 선교를 통해 이방인들이 돌아오면서 하나님이 예루살렘 교회의 문제를 드러내신 뜻도 있습니다. 베드로가 오래 참고 있다가 예루살렘 교회의 이 문제를 돕고자 하였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은혜를 통한 선물이지, 할례나 율법 전통이 구원에 도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내가 하나님 자녀 된 것이 오직 은혜의 선물이라 여기며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뭘 더 잘 해야 하지 않는가? 사역적인 부분에서 내가 잘 못하고 있어서 하나님이 축복하지 않는다는 정죄감이 있지는 않은가요? 구원이 오직 예수님의 은혜라는 말씀은 나의 행위에 기초하지 않고 예수님을 의지해 구원의 선물을 풍성히 누리는 신앙생활을 해야 함을 뜻합니다. 사역은 그 은혜에 감사해 드리는 순종과 헌신이지, 그것이 하나님께 나가는 통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면 내가 뭘 잘 했는가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은혜를 찬양할 것입니다. 이 땅에서도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찬양하는 생활이 구원 받은 신자의 삶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야 자신뿐만 아니라 동역자와 양들에게 율법의 짐을 지우지 않고 구원의 은혜를 잘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것이 무거운 짐이 되지 않고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에게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는가 요구하게 되면 판단하고 정죄로 나아가기 쉽습니다. 요구를 받는 편에서는 부담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부담은 반발로 나타납니다. 일부러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자기 절망으로 나타납니다. 절망을 통해서 예수님께 나아가면 좋지만 자포자기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괴테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를 타락시킨다. 그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통해 보면 그를 발전시킨다.” 이는 사람에게 무엇이 되도록 요구하라는 것이 아니라 애정을 가지고 성장 가능성을 찾아 격려하라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인입니다. 신앙 경륜이 오래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에게 기대를 하되 너무 큰 기대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낮추어 생각하면 형제에게 요구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감사가 됩니다. 우리에게 요구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기초해서 내 자유의지를 가지고 행할 때 하나님의 온전함에 이르기까지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가지고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요구하면 악감만 생기고 온전함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왜 이런 율법적인 생각과 행동주의가 이 시대에 만연하게 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값싼 은혜를 강조하는 것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생각합니다. 믿는 사람들이 이기적이고 세속적일 때 주님께 대한 열정을 가진 사람들은 행동을 강조하게 됩니다. 우리가 값싼 은혜를 강조하다 보면 기독교 윤리가 사라지게 됩니다. 주님께 대한 헌신이 사라지고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이 만연하게 됩니다. 일이 잘못되어 가도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헌신하지 않고, 자기 책임을 다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이에 실망한 사람들이 남을 비판하면서 율법적인 행동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받은 은혜를 값싸게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믿음 좋은 행동들이 형제를 실족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혼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에 대한 사랑과 배려에서 자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숙한 예수님의 제자로 자라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들의 말이 마치자 예루살렘 총회의 의장이었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종합하고 결론을 내립니다.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그는 그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 즉 베드로를 통해 이방인 고넬료가 하나님께 돌아오고 바나바와 바울을 통해 이방인들이 돌아오고 있는 것이 아모스 9장 11,12절 예언과 일치한다고 밝힙니다. 그에 따르면 다윗의 무너진 장막이 회복되는 아모스의 예언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회복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건입니다. 이 시대에 이방 세계가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다윗 언약의 성취입니다. 하나님의 왕권이 온 세상에 회복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 그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자고 제안합니다. 동시에 이방인들은 유대인 신자들을 괴롭게 하지 않기 위해서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다고 이방 문화를 즐길 때 유대인 신자들이 괴로움을 겪게 됩니다. 자유하지만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유를 제한하고 자발적으로 종이 되는 것이 성숙한 제자의 자세입니다.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가 하나 되기 위해 서로 노력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 안에서 사랑으로 덕을 세워야 합니다. 이를 통해서 개성과 성장 배경이 다른 우리가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룰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를 안디옥 교회에 보냈습니다.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예루살렘 총회에서 의결한 사항을 전달하였습니다. 그들이 안디옥 교회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였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메시지가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방인 신자들에게 요구된 네 가지 금지 사항은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이 교제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유다와 실라는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얼마 있다가 평안히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 유하며 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했습니다.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이때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했지만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마가 요한의 동행 문제로 두 사도가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섰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사도의 행동을 누가 옳다 그르다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바나바는 위로자라는 이름처럼 한번 실패한 사람을 다시 끌어 안아주는 은사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치열한 영적 싸움 현장에서 힘을 빼는 사람을 데리고 가지 않는 것이 ‘옳다(wise)’고 보았습니다. 바울이 요구하는 마음으로 인해서 마가와 바나바는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요구하는 마음은 형제를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함께 동역을 하려면 서로 자기를 부인하고 참아야 합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이미 죽었습니다. 바울의 열정과 강한 성격은 더 성숙해져야 했습니다. 후에 바울은 마가를 영접합니다. 마가가 복음서 저자가 될 뿐 아니라 바울에게 유익한 동역자가 된 것을 볼 때(딤후4:11) 한 사람을 끝까지 세우고자 한 바나바의 섬김이 헛되지 않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바울이 자기 발견을 하고 겸손해지면서 과거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한가지로 일하는 것이 공동체를 세우는데 중요합니다. 한 마음이 되고 한 가지 방향과 목표가 있을 때 일을 성취하고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획일적으로 일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으로 깊이 대화를 나누고 조정을 해야 합니다. 그래도 조정이 안 되면 참아야 합니다. 우리는 두 사도가 갈등을 했다는 것에서 위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함께 일을 하다 보면 종종 갈등을 합니다. 이런 갈등을 통해서 자기를 발견하고 성장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남녀노소, 배운 자, 못 배운 자, 빈부, 인종, 국가를 초월하여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탐탁치 않게 여기는 사람도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나만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형제도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인간의 행동이나 율법을 믿음에 더하는 것은 저주를 받을 일입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복음 진리를 굳게 붙잡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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