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16년 행 9강(9:1-31) 택한 나의 그릇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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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사도행전 9 강
말씀 | 사도행전 9:1-31
요절 | 사도행전 9:15
택한 나의 그릇이라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오늘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부르신 내용입니다. 1-8장은 복음이 사마리아에까지 전해졌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사마리아를 넘어 땅 끝까지 전하고자 하십니다. 복음을 세계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사울을 택하셨습니다. 그를 이방인을 위한 그릇으로 쓰고자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서 한 사람의 영향력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각자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사명인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사울은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습니다. 그는 거의 미친 사람과 같았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였습니다. 당시 대제사장에게는 로마 제국 내의 외국으로 도피한 유대인들을 본국으로 송환할 것을 요구하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 이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심각한 목숨의 위협을 받고 예루살렘을 떠나 다른 성과 나라로 가서 숨을 곳을 찾았습니다. 그 중에는 다메섹으로 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루살렘부터 다메섹 까지는 약 240km였습니다. 하루 40km를 간다고 하면 도보로 6일 거리였습니다. 왜 그는 크리스천들을 핍박하는데 열심이었을까요?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여 말하는” 자로 단정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그리스도인에게 적의를 품은 것은,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나사렛 예수를 메시아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후에 말한 것처럼 십자가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영광과 승리의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추악한 십자가의 처형을 받고 죽은 목수의 아들을 메시아라고 믿고 전도하는 그리스도인은 유대인의 자존심을 몹시 상하게 하고, 전통적인 신앙을 더럽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쟁이들은 철저히 근절해야 한다고 바울은 확신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도를 박멸하여 다른 도시로 확산되는 것을 막고자 원정 핍박까지 나섰습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그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이 대답했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십자가에서 죽은 줄로만 생각했던 예수님이 빛 가운데 나타나셨을 때 그는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영광의 하나님이 찬란한 빛 가운데 그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는 이 빛을 보고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의 이름까지 알고 계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예수님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것도 연속으로 두 번 부르실 때, 그는 큰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알고 계셨구나! 이 예수님은 누구신가?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은 그의 인생을 180도 바꾸어 놓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은 사울에게 가장 충격적인 체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에 대한 긍휼과 사랑이 충만한 음성으로 다가오셨습니다. 그는 사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면서 복음의 원수로 사는 것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드린 용서의 기도는 사울을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십자가의 영광, 부활의 영광을 그는 보았습니다. 사람이 영광의 하나님을 만날 때 그 인생이 변화됩니다. 우리도 누군가의 전도를 통해 예수님을 소개 받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그와 인격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이 때 빛이 있으라 하셨던 그 하나님의 빛을 비추임 받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지금도 전도자들이 전하는 말씀을 통해서 사람을 비추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은혜입니다.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부르심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핍박자요 포행자요 복음의 원수된 자를 부르시고 자신의 자녀요 증인으로 세워주십니다.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를 찾아오시고 구원해 주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할 때 우리는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께서 택하여 쓰실 수 있음을 알고 귀히 대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 그는 얼굴이 화끈거렸을 것입니다. 자신이 이제까지 잡아 가둔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예수님의 형제들이고 예수님이 그들을 자기 자신처럼 아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순간 자신이 저지른 죄의 심각성과 함께 엄청난 판단의 잘못이었다는 두려움이 쓰나미처럼 밀려왔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울에게 구체적인 방향을 주었습니다.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었습니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이제까지 알던 모든 성경 지식이 뒤집혔습니다. 정통 바리새파 교육을 받은 자신의 생각과 주장이 틀렸고 저 무식하기 짝이 없는 사도들의 말도 안 되는 것 같았던 주장들이 옳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흘 동안의 어둠 속에서 그는 비로소 마음이 겸손해지고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육신적으로는 눈이 멀었으나 영적으로는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비쳐오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눈이 멀어 인도할 사람을 구하고 있습니다. 11절을 보면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사울은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일어난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빛으로 찾아오신, 부활하신 예수님이 정녕 구약에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아이신지 확실히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아나니아는 주님께서 사울을 만나라는 명령을 듣고 놀랐습니다.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13,14)” 당시 성도들에게 사울은 죽음의 사자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나니아에게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사울은 예수님께서 택한 그릇입니다. 그릇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담는 것입니다. 그 안에 예수님의 것을 담겠다고 하십니다. 바울은 그릇이 되어 예수님에 관한 모든 것을 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상과 비전, 그의 인격을 담아야 합니다. 사울은 열두 사도들과 달리 예수님과 함께 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행적을 연구하며 그의 사상을 많이 담았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하나님의 의와 은혜에 대해서 많은 비밀을 담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라비아에서 3년, 다소로 물러가서 10년을 초야에 묻혀 말씀을 연구하면서 예수님을 통해 계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바울은 그 안에 유대교의 율법과 바리새인의 전통을 담고 있던 유대교의 그릇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로는 다른 사람들을 구원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그 자신도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그릇으로 택하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담아주십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담길 때 나 자신이 구원을 받습니다. 더 나아가 그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해줌으로써 다른 사람들까지 살릴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그릇으로 택함 받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담을 수 있는 것은 커다란 특권입니다.
주님은 사울뿐 아니라 우리 각자를 자신의 그릇으로 택하셨습니다. 사울처럼 특별한 사람만 하나님의 그릇으로 택함 받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들이 각각 하나님이 택하신 그릇들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한 지체가 되었습니다. 우리 각자는 다 자기 역할이 있습니다. 몸의 각 지체가 역할이 있고, 오케스트라나 합창단과 같이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중요하고 그 역할이 있습니다. 이번 세계 선고보고대회 주제와 같이 우리가 거룩한 나라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아가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주실 때는 동시에 사명도 주십니다. 내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순종하도록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오직 나만이 도울 수 있습니다. 내가 처한 상황은 오직 나에게만 주어진 상황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도라도, 바울 같은 사도라도, 내가 처한 상황에 들어올 수 없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을 도울 수 없습니다. 죽은 사자보다 산 개가 낫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 시대에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시대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맡기셨습니다. 매우 육신적으로 되어가는 이 시대를 볼 때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고 제자로 삼는 것이 참 어려워 보입니다. 그러나 지금 오직 내가 만날 수 있는 사람들, 바로 그들을 위해 하나님은 나를 당신의 그릇으로 택하셨습니다. 이러한 택하심은 내게 임한 특별한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 택하심에는 고난이 따릅니다. 주님은 그가 내 이름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보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지하고 악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려면 많은 고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성도들을 핍박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심하게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심한 고난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그릇이 되어 그리스도의 이름을 소유하고 구원을 얻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고난을 받을 것도 각오해야 합니다. 사울이 임금과 이방인과 이스라엘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려면 얼마나 많은 고난이 있을까요? 그는 질그릇 같은 연약한 사람이었지만 보배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았습니다. 그는 고난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살 소망이 끊어질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고난을 받는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했고 고난을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고 생명을 살리는 역사에 쓰임 받았습니다. 지금도 이런 고난을 받는 선교사님들을 통해서 세계선교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섬기며 살고자 한다면 고난이 따릅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딤후2:3)”,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4:5)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3:12).”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심으로 영적인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강하고 건강하게 빚어가십니다.
아나니아는 주의 말씀에 순종 하여 사울이 있는 집으로 갔습니다.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였습니다.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아나니아가 “형제 사울아”하고 불렀을 때 사울은 큰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사울 자신은 성도들을 원수처럼 대했는데 자신을 찾아온 성도 아나니아는 자신을 형제라고 불러주는 것 아닙니까? 아나니아는 그가 앞으로 받을 고난을 생각하면서 긍휼히 여겼습니다. 아나니아가 안수하고 기도하자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고 강건해졌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을 있었습니다. 그는 다메섹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사울이 즉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들이 다 놀랐습니다. 그리고 한 마디씩 했습니다.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그들의 의심은 당연해보입니다. 그럴수록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여러 날이 지나자 사울을 죽이고자 공모하였습니다.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졌습니다.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렸습니다. 이후에 그는 아라비아로 가서 삼 년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갈1:16-18) 왜 사울에게 3년 동안 아라비아에 머무는 기간이 필요했던 것일까요? 회심 직후 즉시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는 사울에게 왜 3년이라는 시간을 갖게 하신 것일까요? 무엇보다 사울 자신이 예수님을 더 알 필요가 있었습니다. 자신이 배운 율법과 예수님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아야 했습니다. 그는 열두 사도들처럼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좀 더 깊이 알고 싶었습니다. 모세가 40년간 광야 훈련을 받은 것처럼 사울도 전 세계를 향해 복음을 전파하기 전에 충분한 준비 기간을 가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였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연락이나 교제가 없다가 갑자기 나타났기 때문에 더욱 의심하기 쉬웠을 것입니다. 혹시 무슨 또 다른 악한 꿍꿍이가 있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닌지 충분히 의심할 만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였습니다.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냈습니다. 결국 사울은 다소에서 6년 이상 머물렀습니다. 그는 9-10년 정도를 혼자 지내면서 말씀을 연구하고 예수님으로 자신을 채우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그 준비기간에도 복음을 전했다고 학자들은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배운 만큼 주님을 전하되 주님을 알고자 하는 소원으로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 파송된 이후에 사울을 찾아 다소에 갔습니다. 그를 안디옥 교회에 데리고 가서 1년 동안 둘이 함께 성도들을 가르쳤습니다(행11:25,26). 바나바는 편견과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성령께서 사울에게 역사하신 일을 잘 분별하고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주님의 뜻이 나타나도록 도왔습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의 회심을 도와준 사람이었다면 바나바는 예루살렘 사도들과 교제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 사마리아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가장 극렬하게 성도들을 핍박하던 사울마저 회심하여 복음 전파자가 되자 교회는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수가 더 많아졌습니다. 시련을 인내하며 주를 섬길 때 성령께서 성도들 각 사람을 위로하심으로 교회가 성장하였습니다. 이제 교회는 땅 끝까지 나아가 예수님의 증인이 될 준비가 되고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한 사람 사울을 택하심으로 복음을 세계화시킬 준비를 이루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그릇으로써 보배되신 예수님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더 깊이 알고 그의 말씀과 사상을 담아서 전하는 그릇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전하고자 할 때 고난이 있습니다. 그 고난을 감당하면서 끝까지 전도자로서의 사명에 충성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사도행전 9:1-31
요절 | 사도행전 9:15
택한 나의 그릇이라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오늘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부르신 내용입니다. 1-8장은 복음이 사마리아에까지 전해졌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사마리아를 넘어 땅 끝까지 전하고자 하십니다. 복음을 세계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사울을 택하셨습니다. 그를 이방인을 위한 그릇으로 쓰고자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서 한 사람의 영향력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각자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사명인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사울은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습니다. 그는 거의 미친 사람과 같았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였습니다. 당시 대제사장에게는 로마 제국 내의 외국으로 도피한 유대인들을 본국으로 송환할 것을 요구하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 이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심각한 목숨의 위협을 받고 예루살렘을 떠나 다른 성과 나라로 가서 숨을 곳을 찾았습니다. 그 중에는 다메섹으로 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루살렘부터 다메섹 까지는 약 240km였습니다. 하루 40km를 간다고 하면 도보로 6일 거리였습니다. 왜 그는 크리스천들을 핍박하는데 열심이었을까요?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여 말하는” 자로 단정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그리스도인에게 적의를 품은 것은,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나사렛 예수를 메시아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후에 말한 것처럼 십자가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영광과 승리의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추악한 십자가의 처형을 받고 죽은 목수의 아들을 메시아라고 믿고 전도하는 그리스도인은 유대인의 자존심을 몹시 상하게 하고, 전통적인 신앙을 더럽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쟁이들은 철저히 근절해야 한다고 바울은 확신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도를 박멸하여 다른 도시로 확산되는 것을 막고자 원정 핍박까지 나섰습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그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이 대답했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십자가에서 죽은 줄로만 생각했던 예수님이 빛 가운데 나타나셨을 때 그는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영광의 하나님이 찬란한 빛 가운데 그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는 이 빛을 보고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의 이름까지 알고 계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예수님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것도 연속으로 두 번 부르실 때, 그는 큰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알고 계셨구나! 이 예수님은 누구신가?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은 그의 인생을 180도 바꾸어 놓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은 사울에게 가장 충격적인 체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에 대한 긍휼과 사랑이 충만한 음성으로 다가오셨습니다. 그는 사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면서 복음의 원수로 사는 것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드린 용서의 기도는 사울을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십자가의 영광, 부활의 영광을 그는 보았습니다. 사람이 영광의 하나님을 만날 때 그 인생이 변화됩니다. 우리도 누군가의 전도를 통해 예수님을 소개 받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그와 인격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이 때 빛이 있으라 하셨던 그 하나님의 빛을 비추임 받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지금도 전도자들이 전하는 말씀을 통해서 사람을 비추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은혜입니다.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부르심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핍박자요 포행자요 복음의 원수된 자를 부르시고 자신의 자녀요 증인으로 세워주십니다.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를 찾아오시고 구원해 주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할 때 우리는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께서 택하여 쓰실 수 있음을 알고 귀히 대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 그는 얼굴이 화끈거렸을 것입니다. 자신이 이제까지 잡아 가둔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예수님의 형제들이고 예수님이 그들을 자기 자신처럼 아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순간 자신이 저지른 죄의 심각성과 함께 엄청난 판단의 잘못이었다는 두려움이 쓰나미처럼 밀려왔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울에게 구체적인 방향을 주었습니다.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었습니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이제까지 알던 모든 성경 지식이 뒤집혔습니다. 정통 바리새파 교육을 받은 자신의 생각과 주장이 틀렸고 저 무식하기 짝이 없는 사도들의 말도 안 되는 것 같았던 주장들이 옳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흘 동안의 어둠 속에서 그는 비로소 마음이 겸손해지고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육신적으로는 눈이 멀었으나 영적으로는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비쳐오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눈이 멀어 인도할 사람을 구하고 있습니다. 11절을 보면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사울은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일어난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빛으로 찾아오신, 부활하신 예수님이 정녕 구약에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아이신지 확실히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아나니아는 주님께서 사울을 만나라는 명령을 듣고 놀랐습니다.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13,14)” 당시 성도들에게 사울은 죽음의 사자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나니아에게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사울은 예수님께서 택한 그릇입니다. 그릇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담는 것입니다. 그 안에 예수님의 것을 담겠다고 하십니다. 바울은 그릇이 되어 예수님에 관한 모든 것을 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상과 비전, 그의 인격을 담아야 합니다. 사울은 열두 사도들과 달리 예수님과 함께 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행적을 연구하며 그의 사상을 많이 담았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하나님의 의와 은혜에 대해서 많은 비밀을 담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라비아에서 3년, 다소로 물러가서 10년을 초야에 묻혀 말씀을 연구하면서 예수님을 통해 계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바울은 그 안에 유대교의 율법과 바리새인의 전통을 담고 있던 유대교의 그릇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로는 다른 사람들을 구원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그 자신도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그릇으로 택하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담아주십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담길 때 나 자신이 구원을 받습니다. 더 나아가 그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해줌으로써 다른 사람들까지 살릴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그릇으로 택함 받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담을 수 있는 것은 커다란 특권입니다.
주님은 사울뿐 아니라 우리 각자를 자신의 그릇으로 택하셨습니다. 사울처럼 특별한 사람만 하나님의 그릇으로 택함 받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들이 각각 하나님이 택하신 그릇들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한 지체가 되었습니다. 우리 각자는 다 자기 역할이 있습니다. 몸의 각 지체가 역할이 있고, 오케스트라나 합창단과 같이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중요하고 그 역할이 있습니다. 이번 세계 선고보고대회 주제와 같이 우리가 거룩한 나라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아가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주실 때는 동시에 사명도 주십니다. 내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순종하도록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오직 나만이 도울 수 있습니다. 내가 처한 상황은 오직 나에게만 주어진 상황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도라도, 바울 같은 사도라도, 내가 처한 상황에 들어올 수 없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을 도울 수 없습니다. 죽은 사자보다 산 개가 낫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 시대에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시대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맡기셨습니다. 매우 육신적으로 되어가는 이 시대를 볼 때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고 제자로 삼는 것이 참 어려워 보입니다. 그러나 지금 오직 내가 만날 수 있는 사람들, 바로 그들을 위해 하나님은 나를 당신의 그릇으로 택하셨습니다. 이러한 택하심은 내게 임한 특별한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 택하심에는 고난이 따릅니다. 주님은 그가 내 이름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보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지하고 악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려면 많은 고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성도들을 핍박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심하게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심한 고난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그릇이 되어 그리스도의 이름을 소유하고 구원을 얻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고난을 받을 것도 각오해야 합니다. 사울이 임금과 이방인과 이스라엘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려면 얼마나 많은 고난이 있을까요? 그는 질그릇 같은 연약한 사람이었지만 보배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았습니다. 그는 고난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살 소망이 끊어질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고난을 받는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했고 고난을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고 생명을 살리는 역사에 쓰임 받았습니다. 지금도 이런 고난을 받는 선교사님들을 통해서 세계선교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섬기며 살고자 한다면 고난이 따릅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딤후2:3)”,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4:5)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3:12).”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심으로 영적인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강하고 건강하게 빚어가십니다.
아나니아는 주의 말씀에 순종 하여 사울이 있는 집으로 갔습니다.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였습니다.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아나니아가 “형제 사울아”하고 불렀을 때 사울은 큰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사울 자신은 성도들을 원수처럼 대했는데 자신을 찾아온 성도 아나니아는 자신을 형제라고 불러주는 것 아닙니까? 아나니아는 그가 앞으로 받을 고난을 생각하면서 긍휼히 여겼습니다. 아나니아가 안수하고 기도하자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고 강건해졌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을 있었습니다. 그는 다메섹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사울이 즉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들이 다 놀랐습니다. 그리고 한 마디씩 했습니다.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그들의 의심은 당연해보입니다. 그럴수록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여러 날이 지나자 사울을 죽이고자 공모하였습니다.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졌습니다.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렸습니다. 이후에 그는 아라비아로 가서 삼 년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갈1:16-18) 왜 사울에게 3년 동안 아라비아에 머무는 기간이 필요했던 것일까요? 회심 직후 즉시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는 사울에게 왜 3년이라는 시간을 갖게 하신 것일까요? 무엇보다 사울 자신이 예수님을 더 알 필요가 있었습니다. 자신이 배운 율법과 예수님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아야 했습니다. 그는 열두 사도들처럼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좀 더 깊이 알고 싶었습니다. 모세가 40년간 광야 훈련을 받은 것처럼 사울도 전 세계를 향해 복음을 전파하기 전에 충분한 준비 기간을 가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였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연락이나 교제가 없다가 갑자기 나타났기 때문에 더욱 의심하기 쉬웠을 것입니다. 혹시 무슨 또 다른 악한 꿍꿍이가 있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닌지 충분히 의심할 만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였습니다.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냈습니다. 결국 사울은 다소에서 6년 이상 머물렀습니다. 그는 9-10년 정도를 혼자 지내면서 말씀을 연구하고 예수님으로 자신을 채우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그 준비기간에도 복음을 전했다고 학자들은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배운 만큼 주님을 전하되 주님을 알고자 하는 소원으로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 파송된 이후에 사울을 찾아 다소에 갔습니다. 그를 안디옥 교회에 데리고 가서 1년 동안 둘이 함께 성도들을 가르쳤습니다(행11:25,26). 바나바는 편견과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성령께서 사울에게 역사하신 일을 잘 분별하고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주님의 뜻이 나타나도록 도왔습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의 회심을 도와준 사람이었다면 바나바는 예루살렘 사도들과 교제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 사마리아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가장 극렬하게 성도들을 핍박하던 사울마저 회심하여 복음 전파자가 되자 교회는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수가 더 많아졌습니다. 시련을 인내하며 주를 섬길 때 성령께서 성도들 각 사람을 위로하심으로 교회가 성장하였습니다. 이제 교회는 땅 끝까지 나아가 예수님의 증인이 될 준비가 되고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한 사람 사울을 택하심으로 복음을 세계화시킬 준비를 이루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그릇으로써 보배되신 예수님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더 깊이 알고 그의 말씀과 사상을 담아서 전하는 그릇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전하고자 할 때 고난이 있습니다. 그 고난을 감당하면서 끝까지 전도자로서의 사명에 충성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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