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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16년 행7강(6:8-7:60) 순교자 스데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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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14회 작성일 16-05-15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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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사도행전 제 7 강
말씀 | 사도행전 6:8-7:60
요절 | 사도행전 7:60

순교자 스데반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오늘 말씀은 스데반의 순교를 다루고 있습니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그가 설교할 때 유대인들의 마음을 찌르고 흔들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를 정확하고 알고 그들의 불신앙을 지적하였습니다. 성전과 율법을 우상과 같이 섬기던 유대인들은 분노하였습니다. 그는 살기등등한 대적자들 앞에서 조금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사랑과 평강이 충만한 가운데 신약 교회의 첫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복음을 증거하려면 순교자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이 시간 스데반의 순교 신앙을 통해서 예수님을 배우고 제자의 길을 따르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스데반은 어떤 사람인가? 8절을 보십시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스데반은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했고 은혜와 권능도 충만했습니다. 그는 집사인데도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습니다. 그가 얼마나 영향력있는 지도자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리더였습니다. 스데반의 이름의 뜻은 ‘면류관’입니다. 그는 예수님과 사도들이 행한 것과 같은 기사와 표적을 행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헬라파 유대인으로서 히브리 사람들과 달리 폭넓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유민들의 회당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자유민이란 로마에 노예로 잡혀갔던 유대인의 후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주로 헬라 지방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스데반은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 지역에서 온 사람들과 더불어 논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데반의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능히 당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사람들을 매수하여 스데반을 공격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하게 하고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켰습니다. 그들은 와서 스데반을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렀습니다. 재판을 하는데 거짓 증인들을 세웠습니다.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라며 송사하였습니다. 그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유대인들은 성전과 율법을 우상과 같이 받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렛 예수가 성전을 헐고 믿음을 주장하면서 율법을 폐한다고 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충동질하였습니다. 사람이 오해를 받으면 마음의 평강을 잃기 쉽습니다. 자신의 진심을 곡해할 때 함께 싸우기 쉽습니다. 

  그러나 공회 앞에서 거짓 고소를 당하고 있는 스데반의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15절을 보십시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스데반은 자기를 모함하는 대적자들에 대한 미움이 전혀 없었습니다. 도리어 그들을 포용하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의 얼굴은 빛이 나고 평안과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진리의 말씀을 증거하는 그에게 하나님께서 평안과 용기로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캠퍼스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고 일대일 말씀 공부를 섬기는 것도 희생하려는 각오가 없이는 어렵습니다. 말씀을 전하기 위해 삶에서 작은 희생을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그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둘째, 율법에 대한 스데반의 변증(7:1-43). 대제사장이 공회에서 스데반을 심문하였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냐?” 성전과 율법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쳐서 우상숭배에 까지 이른 유대인들에게 스데반은 논리적으로 변증을 합니다.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요셉, 모세와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중심으로 일을 하셨습니다. 먼저 스데반은 아브라함에 대해서 증거합니다(1-8).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절대시했습니다. 즉 모세의 율법을 잘 지킬 때 하나님과 바른 관계을 맺고 구원을 얻는다고 믿었습니다. 이에 대해 스데반은 모세 이전에 아브라함이 있었음을 상기시킵니다. 즉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약속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이 메소보다미아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무슨 자격이 있어서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그에게 나타나 고향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실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소원은 자식을 하나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직 자식도 없는 그에게 후손들을 별과 같이 많게 하겠다고 하시며 그의 후손에게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하나님은 그가 신앙생활을 한지 25년 만에 아들 이삭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은 그에게 발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셨습니다. 다만 아브라함의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어 사백 년 동안 괴로움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가 지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를 믿고 할례를 행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약속은 모세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즉, 인류 구속에 대해 아브라함과 먼저 구속의 언약을 맺으시고, 그 구속의 계시를 점차 구체적이고 풍성하게 보여주시기 위해 모세 율법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러한 계시의 점진성을 깨닫지 못하고, 모세의 율법이 하나님의 계시의 전부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은 아브라함의 예를 그의 메시지의 서두에 증거함으로 구원이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처럼, 믿음으로 인간이 의롭게 된다는 것을 유대인들에게 인식시켰습니다.

  다음으로 스데반은 요셉에 대해서 증거합니다(9-16).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은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습니다. 어찌 형들이 어린 동생을 노예로 이방 땅에 팔 수 있단 말입니까? 요셉은 말도 안 통하는 애굽에서 노예로 살다가 비참하게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형들이 버린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요셉을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시고 애굽의 통치자로 세우셨습니다.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이 들었을 때 총리 요셉이 형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야곱과 온 친족이 애굽으로 내려가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스데반이 아브라함의 생애에 이어 요셉의 생애를 언급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유대인들에게 그 조상들의 행실이 악하며 그들의 시작이 초라했음을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그들의 교만함을 드러내고자 함이었습니다. 실로 이스라엘 민족은 보잘것없는 민족으로(출1:5), 요셉 시대에 애굽에 정착하였고 그 곳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중 큰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그들이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스데반은 요셉을 팔아버린 유대인의 조상들처럼 그 후손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 현재도 계속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냈습니다. 또한 형제들에게 팔린 요셉이 하나님의 보호 아래 모든 환난에서 건짐을 받고 애굽의 통치자가 된 것처럼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의 간교한 음모로 죽으셨으나 다시 살아나사 주요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도 핍박을 받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왕성하게 성장해 나갈 것을 증거했습니다.

  요셉에 대해 증거한 다음 모세에 대해서 증거합니다(17-36).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할 때 애굽의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내버려 살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 때에 모세가 났습니다. 그도 강물에 던져 곧 바로 죽임을 당할 운명이었지만 하나님의 기이하신 섭리로 그는 바로 공주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궁중 교육을 받아 탁월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는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는 나이 사십 세 때 한 애굽 사람을 쳐 죽였습니다. 자기 혈기로 민족을 구원한답시고 사람을 때려죽인 그는 하나님의 겸손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미디안 광야로 쫓겨 가서 낮아지고 썩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는 애굽의 모든 지혜와 지식도, 그 영광도 잊어버릴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살다 사라질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십 년이 되었을 때 하나님이 불꽃의 영광 가운데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를 출애굽의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스데반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은 모세를 지나치게 우상과 같이 존경했습니다. 사람들은 모세에게 은혜를 주시고 그를 쓰신 하나님보다 모세 자신을 숭앙했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모세를 넘어, 모세를 쓰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시고 그를 통하여 많은 이적을 베푸셨지만 모세에게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자주 마음을 돌이켜 모세와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며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유대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잘 지킨다고 생각했는데 스데반은 그들이 우상숭배를 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쓰시는 그리스도와 복음의 증인들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배척하였고  하나님이 쓰시는 교회를 핍박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이탈리아에 가면 성 프란시스가 예수님보다 더 높이 추앙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정말 아이러니 한 것은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했는데 사실은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잘 모릅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얼마나 슬프시게 하는지도 모르면서 자신은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이사무엘 선교사님은 한국이 낳은 위대한 인물입니다. 이 조그만 땅에서 복음으로 세계를 정복하고자 꿈을 꾸고 90개국에 선교사들을 파송했습니다. 그의 믿음과 도전 정신과 개척 정신은 이 백성으로 하여금 울밑에선 봉선화와 같은 운명주의를 극복하게 했습니다. 그는 성경을 깊이 공부하면서 한국에서는 성서한국, 세계 선교라는 비전을, 미국에 선교사로 가서는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가 되라는 말씀을 기초로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눈 앞의 유익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고 비전에 불타도록 만들었습니다. 70년대 한국에서 독일과 미국을 개척하자는 비전을 가지고 일을 했습니다. 1985년 냉전 시대에 러시아에 선교사를 파송하자고 기도 제목을 제시했고 러시아 빵을 먹고 러시아 춤을 추면서 러시아 개척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예수님을 지향했습니다. 예수님을 놓치면 고이사무엘 선교사님을 잘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그는 모든 문제를 성경을 가지고 고민하면서 성경에서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그는 학생 복음 운동을 하는데 있어서 원칙이 없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어찌하든지, 믿음으로 해결을 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예수님을 배운다면 우리는 지금과 같은 어려운 시대에 하나님을 믿고 태산을 옮기는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본질을 찾아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당장 나타나는 열매가 적어도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그 한 사람을 예수님의 제자로 키우는데 힘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번 선교보고대회에서 김아브라함 선교사님을 통해서 이 시대에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씀과 비전을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지도자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비전을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그와 깊이 교제하는 가운데 그가 주시는 비전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성전에 대한 스데반의 변증(44-53). 율법에 대한 변증을 마친 스데반은 성전의 역사를 말하기 시작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그가 본 그 양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조상들은 광야 생활하는 동안은 성막에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그러다가 여호수아와 함께 성막을 가지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렀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 원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이 짓도록 하셨습니다. 이에 솔로몬이 하나님을 위하여 웅장한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전 안에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하늘이 그의 보좌요 땅은 그의 발등상입니다(사66:1,2). 세상의 그 어떠한 것도 하나님을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인간이 만든 성전을 숭배했습니다. 하나님이 성전에만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성전 숭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 금송아지를 섬긴 것과 같은 우상숭배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과 율법을 우상 숭배하듯 섬김에 따라, 외식하였고 신앙생활은 경직화되었습니다. 이런 그들은 성전의 실체 곧, 참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 몸도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여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 신자들의 삶을 통해서 아직 믿음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조금이마나 알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 역사를 증거하면서, 조상적부터 일관된 그들의 죄 문제를 지적합니다. 51-53절을 보십시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목이 곧다’는 것은 남에게, 심지어 하나님께도, 자기 의지를 굽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와 같이 하는 이유는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육신에는 할례를 받았지만 그 심령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영적 의미를 알지 못하고 율법이나 성전에 치중하는 미신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실상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 참 할례를 받지 못한 육체적인 종교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죄문제를 인정하고 회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았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양심에 타격을 받았지만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고, 회개하지 않고자 작정을 했습니다. 55,56절을 보십시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이사야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나서 선지자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그도 말씀을 전하고 순교하였습니다. 스데반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말씀을 전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도록 모세를 세워서 대신 말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제사장도 아니고 열 두 사도도 아니고 집사인데 하나님의 영광과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스데반의 말을 참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하나님이 제한된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보여지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것을 제사장들이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받아들일 수 없으니 스데반을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들이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드린 기도를 생각나게 합니다(눅23:34,46).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스데반은 사도는 아니었지만 사도 이상으로 예수님을 잘 알고, 예수님을 본받은 성자였습니다. 저자는 이 돌로 치는 것을 옆에서 보고 있는 한 사람을 잠시 소개합니다. 그는 돌로 치는 자들의 옷을 맡아 지키고 있는 사울이라 하는 청년이었습니다. 돌에 맞아 죽어가는 순간에도 그들을 위해 기도한 스데반의 기도는 사울의 딱딱한 마음에 금이 가게 하였을 것입니다. 바울은 실로 스데반의 기도의 열매였습니다.

  지난 달 30일 오후 2시 한 충렬 목사가 지인의 전화를 받고 북한 혜산시와 접한 중국 지린성 창바이현(장백조선족자치현) 장백교회를 나섰다가 행방불명 되었습니다. 이날 오후 8시께 장백시 변두리 야산에서 그는 시신으로 발견돼 중국 공안이 수사에 나섰습니다. 한 목사의 뒷머리는 함몰됐고 목에는 예리한 칼자국 등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현지 주민은 한 목사가 남성 2명과 다투는 모습을 봤고 이후 문제의 남성들은 북쪽으로 넘어갔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중국에서 탈북자를 도우며 선교활동을 해 온 조선족 한충렬 목사(49)가 뜻하지 않게 순교를 한 것입니다. 그는 지난 1993년 장백시에 장백교회를 설립한 이래 탈북자를 도우면서 북한 선교와 구호활동을 벌여왔습니다. 현재는 600여명의 장백교회 교인들을 섬기면서 북한 선교에 헌신하였습니다. 전해지는 소식에 의하면 많은 주의 종들이 북한 선교를 위해서 헌신하다가 이런 식으로 순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북한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헌신하는 종들이 있음을 알고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우리는 주와 복음을 위해서 어떤 희생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매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가 죽는 아픔을 겪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순교는 못하더라도 매일 매일 자기를 부인하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스데반은 최초로 기독교를 논리적으로 변증한 빼어난 성경 선생이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그의 진술은 바울 신학의 선구적인 사상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심장을 소유한 신자였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를 돌로 치는 원수들을 사랑한 거룩한 순교자였습니다. 우리가 스데반과 같이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 빼어난 성경 선생으로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깊이 배워 스데반과 같이 원수도 사랑하는 사람이요, 이 시대 지성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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